<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황제 나폴레옹이 미술에서 신고전주의를 가장 좋아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뿐 아니라 유럽을 대표할 만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를 말할 때면 우리는 신고전주의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신고전주의는 하나의 양식이었다.
1750년에 시작되어 1830년까지 유럽에 널리 유행된 신고전주의는 당대의 미술에 만족하지 못한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양식으로, 고대의 미술 특히 그리스의 미술을 창조적 규범으로 삼아 새롭게 미술을 시작하려 했던 일련의 예술가들의 노력에 의한 성과물이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들을 재활시키려고 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회화, 조각, 건축뿐 아니라 도자기, 가구, 택스타일에서도 두드러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이 양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1830년 이후에는 확고한 주류 양식으로 미술사에 자리매김하였다.
유럽의 집, 교회, 뮤지엄, 은행, 상점들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다지아니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서면 의자, 침대, 주전자, 버클, 램프, 의상, 심지어는 헤어스타일까지도 그리스 양식이어서 고전 일색이었다.

황제 나폴레옹이 미술에서 신고전주의를 가장 좋아했던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고전주의의 특징은 단순한 형태와 색을 추구하면서 복잡한 구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꾸밈이 없고 기하적인 이 시기의 작품들에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거추장스러운 양식들인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의도적인 배제도 내재되어 있었다.

신고전주의는 이탈리아로의 대여행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는 고대 그리스의 걸작들을 모방한 미술품들이 많았고 고대 유물들이 발견되자 고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더욱 더 활발해졌다.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고대 로마의 유물을 수집했고 그를 이은 클레멘트 12세는 1734년 고대 유물을 일반인들도 관람할 수 있도록 유럽에 처음으로 뮤지엄을 건립했다.
고고학자들이 1738년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작업을 폈으며 10년 후에는 폼페이에서 발굴잡업을 했다.

프랑스인 수도원장 베르나르 드 몽포콩이 1719년에 출간한 로마 미술에 관한 책 <형태로 설명되고 재현된 고대>는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훌륭한 자료가 되었다.
이후 고대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고대에 관한 서적들을 출간했고 고대의 문화들을 삽화로 재현해냈다.
이런 출간물과 삽화들은 과거 번성했던 문화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었지만 삽화를 보고 이탈리아를 여행한 사람들은 부서지고 낡은 유물들을 보고 실망하기도 했다. 이렇듯 유럽 전체가 고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을 때 다비드가 화가로 활약했다.
그리고 그는 신고전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8살에 왕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유럽에 명성이 자자한 조제프-마리 비엥으로부터 수학했다.
아직 파리 화단에는 로코코 양식이 건재할 때였는데 비엥은 그림을 아름답게 꾸미는 로코코 양식보다는 그리스 미술에 매료되어 거전을 주제로 그리고 있었다.

다비드는 비엥을 통해 신고전주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다비드는 1774년 로마대상을 수상했고 2년 후 비엥과 함께 이탈리아로 갔다.
다비드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고대에 관해 탐닉했으며 새로운 고전주의 재활에 앞장을 선 영국 화가 개빈 해밀턴을 만났다.
1780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는 신고전주의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는데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개념은 그의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최초의 미술평론가 드니 디드로는 다비드를 가리켜 '신푸생주의자'라고 불렀다.
영국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는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또 보려고 살롱전이 열린 전시장을 무려 18차례나 방문한 후 그의 작품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극찬하면서 그 완벽함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에 견주었다.
레이놀즈는 다비드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이래 최고의 화가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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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원근법aerial perspective

대기원근법aerial perspective(혹은 atmpspheric perspective)은 레오나르도 다 빈친가 창안해낸 용어이다.
원근법이란 용어는 이보다 좀 더 일찍부터 존재했고, 선의 조합으로 깊이감을 표현하거나 먼 곳에 있어 작게 보이는 등의 회화적 공간을 나타내는 기법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외와는 달리 색조의 변화를 사용하여 원근의 차이에 따라 변화하는 대기의 색 효과를 표현하는 방법을 완성하고 대기원근법이라고 명명했다.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연기처럼 여러 색 영역 사이의 명암을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미묘하게 처리하는 기법을 스푸마토sfumato라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조르조네에 의해 창출되었다.

현대 과학의 연구를 통해 빛이 대기 중의 먼지나 수증기를 통과할 때 산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밝혀졌다.
산란의 정도는 빛의 파장에 따라 다르다. 푸른색에 가까운 단파장 쪽의 빛이 가장 많은 산란을 일으키고, 붉은색 장파장 쪽의 빛은 산란이 조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이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멀리 있는 어두운 물체는 푸른색의 베일 뒤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멀리 있는 밝은 물체는 가까이에 있을 때보다도 더 붉게 보인다.
이것은 눈에 도달한 빛에서 푸른색의 일부가 소실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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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대에서 16세기 말 사이 지배적이었던 매너리즘


고전주의가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데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제적 주도권의 상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황청 권위의 동요, 프랑스와 스페인의 침략, 독일 황제 카알 5세의 로마 약탈(1527년) 등의 사태로 이탈리아에서는 고전주의의 장점인 조화와 안정이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이런 분위기는 곧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고전주의의 긴장 없는 균형의 공식은 더이상 적합한 것이 못되었다.

매너리즘은 고전주의의 단순한 규칙과 조화를 해체하고 고전주의의 초인격적 규범성을 좀더 주관적이고 암시적인 특징들로 대체시키려는 노력이었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의 이런 경향을 한편으로는 종교적 체험의 심화와 내면화이자 인생을 파악하는 새로운 정신적 세계의 비젼으로 보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의식적, 의도적으로 변형시키고 때로는 괴상하고 난해한 데 심취하는 주지주의로 보았으며, 또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섬세하고 고상한 것으로 해석해서 생각하는 이를테면 까다로운 식도락가와 같은 향락적 취향으로서 결과적으로는 고전주의적 형식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적 해결은 고전주의에 의존하며 자연의 체험보다는 문화적 체험에서 비롯했는데, 표현방식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전대 미술에 그 기초를 두었으며 전대 미술에 대한 의존도는 과거 어떤 중요한 미술 경향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매너리즘이 고전주의 미술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세심하게 모방한 것을 하우저는 그들이 느낀 고전주의 모델로부터의 내면적 간격에 대한 과잉보상으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하우저는 매너리즘을 최초의 근대적 미술 양식, 즉 문화적 문제와 직결되며 전통과 혁신의 관계를 이론적, 합리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파악한 최초 미술 양식의 방향으로 보았다.
그는 매너리즘의 고전주의적 미술 모방이 다가오는 혼돈으로부터의 도피이며, 매너리즘의 형식에 나타나는 지나친 주관적, 신경질적인 긴장을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 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으로 보았다.

매너리즘은 1520년대에서 16세기 말 사이의 지배적인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 양식만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고 이 시대의 초기와 말기에는 바로크적인 경향과 혼합되었다.
매너리즘과 바로크적인 경향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이미 뒤섞여 있었다.
바로크의 격정적 표현의지와 매너리즘의 주지주의적, 초현실주의적 성격이 대립하며 경쟁을 벌인 것이다.
이 두 양식은 고전주의 이후 16세기 수십 년 동안 동시에 생겼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을 당시 정신주의적 예술 방향과 육감적 예술 방향의 갈등의 한 표현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며 바로크는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바탕 위에서 이와 같은 갈등의 잠정적인 해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학적 입장에서 미술사를 조명한 하우저는 두 양식의 대립을 발전적 대립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대립으로 보았다.
그는 매너리즘은 정신귀족적이며 본질적으로 전유럽적인 교양계층의 예술 양식으로 보고 초기 바로크를 좀더 민중적이고 감정을 더욱 더 중요시하며 나아가서는 좀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정신적 경향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는 성숙한 바로크가 보다 더 섬세하고 보다 더 배타적이던 매너리즘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을 반종교개혁운동에 따라 교회의 선전이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카톨릭이 다시 민중적인 종교가 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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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이 출현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매너리즘Mannerism이다.
매너리즘은 예술과 자연의 일치라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미술사에 있어서 최초로 예술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였으며 자연주의, 즉 '소박한 독단주의'에 반하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이라고 하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말할 때의 뜻으로 개념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순수미술 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을 말한다.
고전기 이후의 미술을 몰락현상으로 보고 매너리즘에 의한 미술품 제작을 거장의 양식을 노예적으로 모방하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런 사고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반니 피에트로 벨로리의 저서 안니발레 카라치의 전기에서였다.
바사리가 사용한 '마니에라 maniera'란 말은 예술적 특성, 즉 역사적, 개인적 혹은 기술적으로 규정된 표현방식으로 넓은 의미로 '양식 style(stil)'이었다.
그가 '그란 마니에라 gran' maniera'라고 했을 때는 위대한 혹은 장대한 양식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당시 통용되던 마니에라가 없다는 말은 양식이 결여되었음을 유감스럽게 표현한 말이 된다.
마니에라란 개념을 가시적이며 진부하고 일련의 공식에 도입시킬 수 있는 성격의 양식이라는 관념과 처음 결부시킨 사람은 이탈리아 화가이며 미술학자 그리고 골동품 연구가 카를로 말라시아와 17세기 고전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매너리즘을 고전주의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으로 보았다.

성기 르네상스의 기간이 짧았던 것은 매너리즘의 성행 때문이었다.
성기 르네상스는 언덕에 오르자마자 하강해야 했는데,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의 작품에서도 고전주의를 와해시키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에서는 안정과 지속의 양식이었던 고전주의가 왜 르네상스에서는 단순한 '과도기적 단계'로 나타났는가?
이에 대해 하우저는 말한다.

"그 이유는 아마 친퀜첸토의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표현을 얻었던 균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견고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이상이자 허구였고 르네상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본질적으로 동적인 시대, 어떠한 해결책에도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한 근대의 자본주의적 정신과 변증법적인 복잡한 근대의 자연과학적 세계상을 정리, 극복하려는 르네상스의 노력은 후대의 노력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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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과 부를 누리게 된 예술가들


작품을 주문한 사람과 예술가의 관계가 때로는 시간제 보수를 지급받는 임금제 노사관계로 전락한 경우도 있다.
1485년에 체결된 한 계약서를 보면 기를란다요는 작품에 사용되는 물감 비용까지 명시했다.
1487년에 리피가 체결한 한 계약서에는 재료비를 자신이 부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계약을 1498년 미켈란젤로도 맺었는데, 15세기 말에나 와서야 예술가들은 시간제 임금제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다.
이것 역시 미켈란젤로를 통해 뚜렷이 부각된다.
콰트로첸토(15세기)에서는 계약을 체결할 때 발주자가 예술가에게 계약의 완수를 보증하는 보증인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미켈란젤로에 이르러서는 이런 보증은 형식이 되었다.
예술가의 의무도 엄격하게 세밀히 쓰지 않게 되었다.
1524년의 계약서를 보면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는 성인의 이미지만 아니라는 조건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기로 했으며, 동일한 수집가는 1531년 미켈란젤로와 계약을 맺으면서 그림이든 조각이든 한 점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들이 받은 보수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콰트로첸토 후반 피렌체 사람들은 벽화에 많은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조반니 토르나부오니는 1485년 기를란다요와 계약을 맺으면서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가족예배당벽화를 위해 1,100굴덴을 지불하기로 했다.
리피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벽화를 그려주는 댓가로 2천 금 두카트를 받았는데, 이는 2천 굴덴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천장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은 무려 3천 두카트였다.
콰트로첸토 말기에 이르면 예술가들이 돈을 모으게 되는데, 리피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으며, 페루지노는 집을 몇 채 갖고 있었고, 베네데토 다 마야노는 대저택을 소유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모로의 궁정화가로 총애를 받으며 2천 두카트의 여봉을 받았고, 그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모델로 삼았던 냉혹하고 유능한 참주 체자레 보르지아의 수석 전쟁기술자로 대접을 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왕의 총애하는 화가이자 측근으로 매년 3만5천 프랑을 받았다.
친퀘첸토(16세기)의 두 거장 라파엘로와 티치아노는 거액의 수입을 올려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을 뿐 수입은 많았으며 상 피에트로 성당을 장식한 댓가를 받기를 거절했을 때는 이미 큰 재산을 모은 후였다.
예술가들의 수입이 증가한 것은 물가가 오른 데도 그 영향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콰트로첸토 말부터 친퀘첸토 초까지 로마 교황청이 미술시장의 전면에 나서 피렌체의 미술 수요와 경합을 벌였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때 거주지를 아예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겼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친퀘첸토 초부터였다.
이때부터 유명한 예술가들은 후원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귀족계급과 같은 위치를 마련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라파엘로는 대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로마에 궁전을 갖고 있었으며, 군주와 추기경들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교제했고, 당시 유명한 귀족이며 미술애호가 아고스티노 치지의 친구였으며, 그의 아내는 비비에나 추기경의 질녀였다.
티치아노는 라파엘로보다 더욱 더 출세한 화가였다.
황제 카알 5세는 그를 라테라노 궁정의 공작에 임명하고 자기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세습귀족의 권한과 같은 일련의 특권을 부여했다.
왕후와 귀족들은 다투어 그로부터 초상화를 얻고자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티치아노가 그림을 그려줄 때마다 값비싼 선물을 주었고 그의 딸 라비니아가 결혼할 때는 막대한 지참금까지 주었다. 앙리 3세는 노령에 접어든 이 거장을 몸소 방문했으며 티치아노가 1576년 페스트에 걸려 죽었을 때 페스트로 죽은 사람은 절대로 성당에 매장해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엄격한 관례를 깨고 최대한의 예를 갖춰 프라리 성당에 시신을 안장했다.
미켈란젤로는 과거에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명성에 도달했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위대성은 너무나 자명해서 공적 명예나 칭호, 표창 따위는 아예 사절했다.
그는 군주와 교황들과의 교제를 하찮게 여겼는데, 자신이 그들의 반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태도였다.
그는 공작도, 추밀원의 고문관도, 교황청의 감독관도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신과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는 귀족 출신의 젊은이들을 제자로 두기를 선호했으며 그림은 "손으로 colla mano"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col cervello" 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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