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그림을 최초로 그린 사람은 
 

프랑스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9-77)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이는 양식이라기보다 주제의 혁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낭만주의 풍경화가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1796-1875)의 그림에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사실주의의 가능성이 나타났다.

코로는 1825년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때 받은 영향이 그의 평생에 걸친 회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때 스케치한 것을 토대로 자신의 느낌을 풍경화를 통해 그려냈다.
그래서 꿈만 같은 장면이면서도 그때의 장면을 상기시킬 만큼 실재처럼 보인다.
코로는 결코 극적으로 과장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눈으로 본 사실을 재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듯한 자연을 꾸밈없이 묘사한 데서 사실주의의 기미가 엿보인다.
이 점을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화가들이 받아들였고 19세기 후반 거의 모든 풍경화가들이 받아들였다.

사실주의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그림을 최초로 그린 사람은 쿠르베였다.
그는 일상장면을 기념비적으로 그렸는데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가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시민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영웅주의를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큰 사건을 일으킨 사람만이 영웅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심에서 영웅적인 점을 발견해냈다.
이는 보들레르가 말한 모더니즘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자신의 별채를 따로 지어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카달로그 서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더이상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
생동감 있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라고 적었다.

이런 내용의 글은 아방가르드 정신의 선언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미술사에 남겼다.

그는 카달로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830년대 사람들에게 '낭만적'이란 타이틀이 붙여진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내게 '사실주의자'란 타이틀이 붙여졌다. ... 나는 고대와 현대 미술을 어떠한 독단적 개념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채 배웠다.
나는 고대 미술을 모방하지도 않고 현대 미술을 배끼지도 않으며 ... 지식을 통해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 되었다.
화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이 본 것들,
즉 살아 있는 미술을 창조하는 것으로 시대의 풍습, 아이디어, 관점을 기록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밀레와는 달리 쿠르베는 예술가의 감성을 그림에서 삭제했으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재현했다.
그는 회화의 목적이 더이상 이야기를 전하거나 성서의 내용 또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교육적인 목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시적인 환경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임을 주장했다.
아름다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나 전설에서 찾을 필요가 없으며,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 가운데 있는 것이며, 머리 속에서 관념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 앞에 전개되는 대상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의미했다.

사실주의는 쿠르베에게 '인도주의 미술Humanitarian Art'이었고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의미했다.
쿠르베는 17세기 이래 가장 비감상주의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였으며 1850년과 60년 사이에는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1860년대 후반부터는 바다를 좀더 과격하게 표현했으므로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표현주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사실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에 의해 주제가 다양해졌는데
이국적 장면, 즐거움을 제공하는 일화, 모험적인 풍경이나 편안함을 제공하는 풍경,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정물 등이었다.
이런 주제들은 사실에 입각한 것들로 사실 그 이상의 논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누드에서 많은 사실주의 그림이 쏟아져나왔다.
누드의 경우 고전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대중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려는 의도와 더불어서 전통을 쉽게 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과격한 화가들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는 누드를 그렸는데
물속의 누드나 물가의 누드를 그리면서 <일광욕하는 사람들 Bathers>이란 제목을 주로 사용했다.
낭만주의 이후 누드가 부쩍 화가들의 선호하는 주제가 된 것은 대중이 육체적 욕망을 일으키는 누드를 보기 원했기 때문에 기인하기도 했다.

쿠르베의 <일광욕하는 사람들>이 1853년 살롱전을 통해 소개된 후 사람들이 경악해 했는데
10년 후 마네가 <올랭피아 Olympia>를 그려 더욱 놀라게 했다.
마네는 창녀의 누드를 현대의 비너스의 모습으로 파리 시민들에게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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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과 비례는 르네상스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드로잉은 한 마디로 대상을 명확하게 관찰한 후 원근법으로 정리하는 예술이다.
달리 말하면 대상의 부분들을 실질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먕확하게 각 부분들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원근법이란 말은 '앞을 바라본다'는 뜻의 라틴어 프로스펙투스prospectus에서 온 말이다.
소위 말하는 직선 원근법linear perspective은 미켈란젤로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예술가들에 의해서 이미 완성되었다.
직선 원근법은 삼차원의 공간에 나타난 선이나 형태의 시각적 변화를 재현할 수 있게 해준다.
르네상스식 원근법은 대체로 서양인에게 공간의 사물을 투시하는 가장 적합했던 방법으로 평행선을 관찰자의 눈높이인 수평선의 소실점vanishing point으로 모이게 하고, 보는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형태를 점차 작게 그리는 것이다.

사실주의 회화는 이런 규칙을 반드시 따라야 했다.
이런 지각 시스템을 뒤러Alberecht Durer(1471-1528)가 말년에 시각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동판화 <여인의 투시도를 그리는 제도사>에서 시점을 수직선과 낮추게 하기 위해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세워진 격자 철망을 통해 투시하게 한다.

화가는 모델의 시각적 영상을 원근법으로 축소해서 볼 수 있는 시점에서 그 모델을 바라보게 된다.
모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중심축선이 화가의 시선과 일치하는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인 인물의 머리와 어깨는 실제 크기에 비해 작게 나타나고, 가까이 있는 무릎과 다리 부분은 보다 크게 나타난다.
뒤러의 제도사 앞 테이블 위에는 격자 철망과 동일한 크기의 격자가 표시된 종이가 놓여 있다.
화가는 철망을 통해 명확한 각도, 굴곡, 선의 길이 등을 수직, 수평선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지각한 바를 종이에 그린다.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그리면 원근법에 의한 모델의 단축된 형태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비례, 형태, 크기 등은 화가가 알고 있는 실제 인체의 비례, 형태, 크기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지각된 그대로, 즉 사실과 다른 비례로 그릴 경우에만 실제와 같아진다.

뒤러의 시스템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입체적 공간의 환영을 어떻게 평면에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즉 어떻게 가시적인 세계로 재창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었다.
사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은 복잡한 수학 시스템으로 전개되었는데 뒤러가 이 간단한 방법을 창안함으로써 르네상스 이후의 화가들로 하여금 대상의 실제 모습에 시각적 변형과 사실주의 화법에 대한 그들의 정신적인 반발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직선 원근법에서는 고정된 시점을 요구하지만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머리를 확고부동하게 고정시키고 작업할까?
엄격하게 원근법의 규칙 내에서만 그릴 경우 아주 메마르고 굳어버린 그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이 눈앞에 어른거려 (예술가의) 심의력을 속박했다는 흔적을 보이는 일이 없어 그것이 자연인 것처럼 보이는 한에 있어 예술이다"는 칸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기술은 창작의 수단일 뿐 화가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투명한 정신으로 작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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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드로잉은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해야 한다 
 

인체 드로잉 테크네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해야 한다.
인체를 사랑하는 행위 그 자체가 존엄성의 추구인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를 특징지우는 개념으로 철학적 배경은 인간의 영혼이 미beauty와 자연의 일치에 매개적인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이런 개념을 고취시켜 르네상스를 인본주의로 꽃피운 사람이 피치노Marsilius Ficinus(1433-99)이다.
'플라토닉 러브 amor Platonicus'란 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한데 조화시킨 장본인이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인간이 미와 자연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인체 드로잉에 전념했다.
오늘날 르네상스 대가들과 같은 훌륭한 드로잉이 미술에서 거의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드로잉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익혀지는 것이며 미와 자연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창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명상과 맑은 정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화가들은 이런 노력을 기피하기 때문에 훌륭한 드로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진 모범적인 예술가가 있었다.
회화와 조각 그리고 드로잉 모두에서 르네상스를 대표할 만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이다.
그의 작품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예술적으로 얼마나 놀랍게 받아들여졌든지 오늘날에도 믿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보게 되면 "오, 미켈란젤로!"라고 감탄한다.
그가 타계하고 60년이 지난 후 그의 편지 495통이 발견되었는데 편지에 쓴 많은 시에서 그가 또한 시인이었음이 알려졌다.

당대 그를 대적할 만한 사람으로는 연장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었다.
외적인 사실주의 묘사에 있어서는 해부학에 근거한 레오나르도의 완벽한 드로잉이 뛰어나지만, 내적으로 투명한 정신과 미적인 면에서 두 사람을 비교한다면 그는 미켈란젤로의 발끝에도 못미친다.
레오나르도 자신도 시인의 영혼을 가진 미켈란젤로에 대해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단테에 관해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그 옆을 지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친구들에게 미켈란젤로가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단테를 잘 아는 사람이 저기 걸어가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빈정거렸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을 하고 그냥 지나쳤다.
상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며 명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에만 정진했다.

그의 정신의 일면을 알게 해주는 시를 하나 소개한다.
그는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자신을 성 바르톨로메우스St. Bartholomeu에 의해 성난 구세주 발 아래 지옥으로 던져지는 죄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렇게 번역해보았다.

나의 허물을 당신의 순결한 귀로 듣지 마소서
Hear no my fault with thy chaste ear,
나를 향해 당신의 의로운 팔을 들지 마소서
nor raise toward me thy righteous arm
주여, 최후의 순간에 당신의 관대한 팔을 나를 향해 내미소서
Lord, in the hours stretch toward me thy forgiving arms

<최후의 심판>은 분명 미켈란젤로 자신의 영혼을 위한 관심을 나타낸 작품이었다.
우리는 미켈란젤로 이후 영혼을 위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낸 작품을 더이상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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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Futurism

미래주의는 이탈리아인의 정신과 지성의 침체를 타파하고 W. W. 마틴이 『미래주의 미술과 이론 1909~1915 Futurist Art and Theory 1909~1915』에서 말한 대로 “정치적인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웠던 19세기 중반 이래로 이탈리아 국민들이 끈기 있게 기다려 온 문화적 부흥”을 일으키려는 일련의 시도에서 절정을 이룬 것이다.
이처럼 미래주의는 기존의 확립된 체제에 대한 공격과 이탈리아를 유럽 문화 발전의 주류 속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독창적인 개혁안을 추구했다.
미래주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운동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들과 달랐다.
또한 미래주의는 전적으로 시각예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진정한 미학적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미래주의는 처음에 문학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회화, 조각, 건축, 연극, 음악,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 분야까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미래주의는 그 호전적인 민족주의 및 과도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래주의 운동의 선동자이며 지도자였던 인물은 시인이자 선전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 이탈리아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1876~1944)이다.
그의 첫 번째 미래주의 선언은 1909년 2월 20일 파리의 일간지 『르 피가로 Le Figaro』에 실렸으며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퍼졌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이 선언문은 매우 선동적인 언조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 운동의 탄생을 알렸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이 선언문의 전반적인 어조 “아름다움은 오직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보초니와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래주의자들의 운동과 변화에 대한 열정은 베르그송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진보적인 지식인층에서는 베르그송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이 선언문은 문화와 정치에서의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와의 단절, “교수, 고고학자, 관광 안내자, 골동품 상인과 같은 이탈리아의 부패한 암적인 종양”으로부터 이탈리아의 해방을 요구했다.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젊은이들에게 마리네티가 속도 및 기계 기술로 상징화했던 현대의 역동성에 몰두하기를 요구했다.

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1882~1916),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1871~1958), 카를로 카르라Carlo Carra(1881~1966),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1885~1947),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1883~1966)가 서명한 화가들의 첫 번째 선언문은 1910년 2월 11일에 쓰여진 것으로 3월 8일 토리노에 있는 키아렐라 극장에서 보초니에 의해 낭독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젊은 화가들에게 초점을 둔 이 선언문은 “무모하고 심지어 파괴적이기까지 한” 독창성 자체를 높이 샀으며, 젊은 예술가들에게 “모든 형태의 모방을 경멸할 것”을 권고했다.
이 선언문은 화가들에게 “동시대의 삶 속의 구체적인 기적”에서 영감을 찾아낼 것을 촉구하면서 마리네티 선언문의 일반론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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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주의Dadaism

다다는 마래주의, 입체주의, 또는 신조형주의처럼 새로운 양식이나 기법이 아니라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1896~1963)의 말처럼 새로운 ‘정신의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다의 시작과 끝을 정확하게 지적하기란 어렵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16년 뉴욕과 취리히에서 다다 운동이 구체적으로 처음 나타났다는 것이 미술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다 운동의 성격과 표현 양태는 그것이 발생한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다다는 전쟁의 야만성에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전쟁을 가능하게 만든 전통적인 사회 가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난 젊은 시인, 작가, 예술가, 음악가들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우상을 타파하며, 혁명적인 것을 추구했다.
또한 과격하고 도발적인 미래주의 기법을 과장했으며 이를 통해 기존 사회의 기준과 규범을 맹렬히 공격했고, 그들이 보기에 자살 직전에 놓인 문화를 냉소와 풍자로 비웃었다.
다다주의자들은 예술의 전통을 공격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아방가르드 경향까지도 그 대상이 되었으며, 반예술의 풍자적인 테러디를 통해 예술 개념 자체를 타도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선동적인 소란으로 인해 다다 운동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비합리성을 숭배한다는 점은 다다 운동을 다른 사조와 동등한 위치에서 다루는 것을 그만큼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이후 미술사에서 다다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은 혼란과 딜렘마에 빠졌다.

다다의 허무주의적인 분규 뒤에 감추어진 긍정적 목적을 명백히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다 운동이 한창일 때에는 긍정적인 목적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냉정히 돌아볼 때 다다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들의 격렬한 운동에는 부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취리히 다다 그룹의 일원으로 화가이며 영화 제작자 한스 리히터는 1964년 『다다. 예술과 반예술 Dada. Art and Anti-Art』에 적었다.
“다다는 다른 양식들처럼 단일화된 형식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다는 새로운 예술 윤리를 지녔으며 이것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표현 수단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수단은 국가에 따라, 개별 예술가의 기질과 능력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새로운 윤리는 때로는 긍정적인 형태를 때로는 부정적인 형태를 취했으며, 어떤 때는 예술로 어떤 때는 예술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때로는 상당히 도덕적인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철저하게 비도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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