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바사리는 1550년에 <미술가 열전> 초판을 출간했는데

15세기와 16세기 미술에 대한 철학적 정의는 플라톤주의와 네오플라톤주의를 따른 것이다.
피치노의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저술에 대한 주석이 규범이 되었다.
묵상을 통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의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다는 피치노의 주장은 플라톤이 가까스로 인정한 광기의 경우라 하겠다.
이런 영혼을 가진 사람은 예술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피치노가 주장하는 바였다.

바사리는 1550년에 <미술가 열전> 초판을 출간했는데, 미술가들의 전기를 포괄적으로 수집한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을 그가 처음 출간한 것이다.
그는 플라톤의 예술은 실재에 대한 모방의 모방이라는 모방론을 받아들였고, 플리니우스와 더불어 개화, 몰락, 재출발이라는 세 가지 시대의 학설을 미술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이 학설을 적용하여 그는 고대 미술을 하나의 정점으로 보고 암흑 속의 중세를 몰락으로 이에 대비시켰다.
그런데 중세가 14세기의 예술부흥으로 말미암아 다시 극복되었다.
초판에서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고대가 극복되었다는 논리를 폈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의 순수이성의 의식에 몰입될 수 있었던 사람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는데, 미켈란젤로가 그중 한 사람이다.
프란체스코 베르니는 적었다.
"나는 그의 몇 작품을 본 적이 있지만,
배운 바는 없더라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의 저작에서 그것들 전부를 읽었다는 점이다."

바로크의 아버지, 미켈란젤로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1300~1600)는 이탈리아어 리나쉬타Rinascita의 번역으로 재탄생rebirth 혹은 새로운 탄생의 뜻으로 이 말은 순수미술에서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약진을 특징지운 말이었다.
역사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미켈란젤로에게 있었다면서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3년재위)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1505~45)을 호화스럽게 장식하게 하려고 면죄부의 판매를 지나치게 늘였기 때문에 루터와 그 외의 사람들이 교회를 둘로 분리시켰다고 보았다.

미켈란젤로는 바로크의 아버지로도 불리우는데, 그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화에서 나타난 비틀리고 긴장한 인물들의 모습에서 바로크를 예고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의 종교개혁 그리고 바로크와 관련해서 언급하는 것은 미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에게는 엄청난 영예이다.
바로크Baroque에 대한 어원이 몇 가지 있다.
영어 바로크Baroco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경우 16세기 반학문주의 학자들이 중세 논리학자들의 삼단논법을 가소롭다고 빈정거린 데서 비롯하고, 이탈리아어 바로키오Barocchio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경우 떳떳치 못한 돈관리에서 비롯하며, 포르투칼어 바로코Barocco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경우 16세기부터 제멋대로 생긴 진주를 그렇게 부른 데서 비롯한다.
이처럼 바로크는 갖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18세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낯설고 기괴한 것들을 가리켜 이 말을 사용했다.
18세기 프랑스와 독일 작가들이 바로크적 감각이라고 말할 때는 으례 나쁜 감각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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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건축 이해하기


이탈리아 건축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눠서 이해할 수 있다.

1. 기원전 1세기로부터 4세기까지 약 사백 년 동안에 걸친 로마제국 시기의 건축양식으로 주로 그리스의 고전 양식을 모방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를 속국으로 삼은 로마는 자연히 그리스 양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마의 많은 건축물이 그리스인의 손으로 건립되었다.
이 양식은 로마인에게 규범이 되었지만 그리스의 도시국가라는 것이 오늘 날 조그만 도시나 커다란 마을보다 규모가 작았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게 되었으므로 양식의 문제를 보완해야 할 필요가 생겼으며 보다 큰 규모로 나타났다.
집들도 대규모로 지어야 했고, 시장도 커야 했으며, 대중이 모여서 즐기는 목욕탕이나 경기장의 규모도 매우 커야 했다.
건축가와 공학가들의 역할이 중요했고 그들은 도시화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건축물을 설계하고 완공해야 했다.
로마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기원전 27년) 로마는 황제의 도시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아우구스투는 말했다.
“나는 벽돌로 된 도시 로마를 발견했고 이를 대리석의 도시로 만들었다.”
많은 건축물이 대리석으로 건립되어 아름다웠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시기에 건립된 건축물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79년 베수비우스Vesuvius 산의 분화로 용암으로 덮였던 폼페이가 발굴되자 당시 로마제국의 건축 양식과 규모가 드러났다.
극장, 바실리카, 사원, 분수, 성소, 교량, 목욕탕, 고기시장 등의 규모와 개인 저택의 경우 아무 많은 방이 있었다.
로마제국 시대 건물의 특징은 아치형 문이다.

그리스 양식의 특징은 건물이 수직과 수평에 근거하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한계가 있었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의 최대 간격이 5미터에서 6미터 사이였다.
기둥이 무게를 지탱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2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 도시에서는 그리스 양식의 작은 건물이 문제가 없었지만 도시가 매우 확대된 후에는 건물이 높아져야 했고 커져야 했으므로 양식의 문제를 보완해야 했다.
그래서 해결한 것이 그리스인의 기둥에 둥근 아치를 올려놓음으로써 더욱 더 높은 건물을 건립할 수 있었다.
  

로마인은 다섯 종류의 기둥을 사용했는데, 셋은 그리스 양식으로 도리안Doric, 아이오니안Ionic, 코린티안Corinthian 양식이고 나머지 둘은 로마인의 양식으로 토스카니안Tuscan과 혼성Composite이다.
코스카니안 양식은 도리안 양식을 좀더 단순화시킨 것이고 혼성은 코린티안 양식을 좀더 화려하게 한 것이다.
로마인은 단층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때 맨 아래층은 도리안 기둥을, 이층은 아이오니안 기둥을, 그 윗층에는 코린티안 기둥을 사용했다.
문과 창문은 직사각형으로 했으며 틀을 각기 다른 양식으로 장식했다.
문의 경우 인체의 크기에 맞게 했고 문 양쪽에는 기둥을 세우고 문 위를 청동으로 격자 창살문을 만들어 장식했다.
건축 재료로는 벽돌, 타일, 시멘트, 콘크리트, 쇠를 사용했다.
로마인은 일찍이 기원전 2세기에 콘크리트를 발전시켜 매우 단단하게 사용했으며 이 재료는 다루기 쉽고 경제적이라서 이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외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콘크리트에 돌, 플래스터, 치장 벽토stucco, 대리석 등을 붙여 사용했다.
19세기에 스틸이 재료로 사용되기 전까지만 해도 로마인은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둥근 천장이나 지붕을 제작했는데 지름이 50미터 이상되는 커다란 지붕도 제작했다.

2.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은 19세기에 생긴 말로 11~12세기의 건축물을 가리켜서 사용되었고 이 말의 뜻은 ‘로마인 양식’이다.
로마제국이 붕괴된 후 소위 말하는 어두운 시기 중세가 오래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건축에서는 조금밖에 진전이 없었다.
11세기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이상을 고대 로마 건축물에서 찾았으며 여기에 새로운 양식을 보탰는데 그들은 기독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현존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요새화한 성이 일부 있고 대부분은 교회이다.
이 양식의 특징은 문, 창문, 아케이드, 둥근 천장에서 발견되는 둥근 아치rounded arch이다.
이전에는 교회의 천장이 나무였는데, 촛불과 횃불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화재의 위험이 있어 불이 나는 일이 잦았다.
해서 천장을 돌로 제작하게 되었고 11세기에 와서는 돌을 주로 사용했다.
무거운 돌 천장을 올려놓게 되니 자연히 내부의 벽을 튼튼하게 해서 천장의 중량을 떠받칠 수 있도록 했다.
부축벽(혹은 버팀벽buttress)을 벽에 부착해 누르는 힘을 떠받치게 했다.
문은 깊게 만들면서 양쪽 기둥이 움푹 들어가게 했고 두 기둥 위에 반원형의 아치를 만들어 장식했다.
문 바로 위에는 수평으로 대들보를 놓았다.
대들보와 아치 사이 반원면을 팀파눔tympanum이라 하고 여기에 장식하는데, 성서적 주제를 장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의 깊이를 두터운 벽으로 하면서 6미터가 더 되게 하기도 했다.
문은 쇠나 청동으로 제작했다.
이에 비하면 창문은 비교적 작고 가늘었다.
창문이 크게 보이는 이유는 기둥과 아치 그리고 여기에 장식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3. 르네상스 양식은 15~16세기에 생겨난 양식으로 15세기 피렌체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에까지도 알려졌다.
르네상스는 고전 특히 그리스에 관한 관심으로 촉발된 지성적 운동으로 그리스 문화에 관해 알지 못하면 지성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건축에 있어서의 르네상스 양식은 로마제국 시대의 건축 이론과 실상을 아는 데서 출발했다.
15세기 초 열 권에 달하는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저서가 발견되었는데, 건축가이면서 공학가인 그는 황제 아우구스투스 하에 활동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황제에게 바쳤다.
그의 저서는 로마 건축의 다양한 양식에 관해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었으며 정확한 비례와 지침들에 관해 적어놓았다.
많은 르네상스 건축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이탈리아 여러 도시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고대 로마 건축을 베우기 위해 로마로 왔는데, 대부분의 고대 로마 건축물은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건축적 드로잉이 있었으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르네상스 건축은 고대 로마 건축을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천 년 이상 오래된 건축 양식은 르네상스인들에게 적합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트루비우스가 언급한 세부 사항들이 참조되었으며 그것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맞게 조절되고 적용되었다.
가장 두드러지게 전수된 것이 로마 아치, 둥근 천장, 박공gable, 그리고 다섯 종류의 기둥이었다.

르네상스 건축을 두 시기로 나누면 15세기의 초기 르네상스와 16세기 성기 르네상스이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로마제국 양식이 건물의 장식에서 주로 나타났으며 성기 르네상스에서는 장식뿐 아니라 건물의 구조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르네상스 건축은 주로 고전적 모습을 띠었고 반타원형 지붕을 사용했다.
가장 특기할 만한 건축물로는 시청, 야외 저택, 교회 등이었다.

중세의 성은 요새로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었지만 르네상스 궁전은 이와는 달리 거주지이면서 놀이를 할 수 있게 건립되었다.
그리고 저장실과 사무실을 갖추었으며 성벽 파괴용 무기나 활잡이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둑의 침입이나 성난 폭도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아래층 창문을 작게 만들고 격자로 된 쇠창살을 부착했다.
쇠창살은 대게 로마 모티프로 제작되었다.
이 층 이상의 창문들은 훨씬 크고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건물 아래층 외관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돌을 건목 다듬어 돌벽을 확장했고 일부 궁전은 외관 전체를 돌로 쌓았지만 더러는 모퉁이 끝부분만 돌을 건목 다듬고 나머지는 시멘트로 벽을 만들었다.
많은 초기 르네상스 창문들은 돌을 건목 다듬고 하나의 기둥으로 창문을 둘로 나눴다.
나중에는 직사각형으로 달라졌으며 가장자리를 틀로 위를 박공으로 장식했다.
또 다른 창문의 유형으로는 직사각형에 양쪽 가장자리에 기둥을 만들어 벽에 붙이고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수평부entablature 위를 반타원형 박공으로 장식했다.
문은 양쪽 기둥 위에 수평부로 하고 박공의 장식을 그 위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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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오일물감 이야기

레오나르도는 알레소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도 갔다.
그는 발도비네티의 풍경화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마 물감 비법에 더욱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발도비네티의 작업장에는 아궁이가 있었고 그는 계란 노른자위와 송진을 섞어 만들어 유역의 효과를 냈는데, 이것을 사용해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되면 유화처럼 신선하고 밝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회화사에 혁명과도 같은 오일물감이 피렌체에 소개된 것은 폴랑드르 화가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1441년에 사망)에 의해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사리에 의하면 플랑드르 대가들의 그림이 1530년대에 나폴리와 우르비노에 소개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화면이 매끈하고 빛났으며 색상과 투명한 효과는 전통적인 방법의 채색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런 북유럽 화가들의 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시실리 사람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가 비법에 대한 실험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한 끝에 플랑드르로 가서 반 아이크로부터 방법을 알아냈다고 한다.
안토넬로는 베네치아에 안주한 후 친구들에게 이 비법을 가르쳤으며 도메니코 베네치아노가 이를 배워 피렌체의 작업장에서 소개했다.
베네치아노가 산타 마리아 누오바의 앱스(반원형 부분)들의 삼분의 일에 그림을 그릴 때 나머지 삼분의 이에 발도비네티와 안드레아 델 카스타그노Andrea del Castagno가 그렸다.
발도비네티와 카스타그노는 도메니코로부터 비법을 배우기를 원했지만 가르쳐주지 않자 카스타그노가 도메니코에게 다정한 척 대하면서 매일 밤 그와 함께 어울리면서 루트를 연주하고 예쁜 여자들에게 세레나데를 들려주는 등 노력을 다 하자 도메니코가 오일에 관해 조금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카스타그노는 비법을 완전히 안 후에는 쇠몽둥이로 도메니코를 살해했다.
그는 살인을 숨겼으므로 아무도 누가 도메니코를 죽였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카스타그노가 죽기 전에 이 사실을 고백했다.
바시리는 카스타그노가 자신이 범인임을 고백한 시기에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을 예수를 배반한 유다모습으로 그렸다고 적었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꾸며진 것이다.
안토넬로가 처음 베네치아로 간 것은 도메니코가 죽은 지 14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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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


브르통이 뒤샹을 방문하여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이라면서 전시회를 디자인하는 일과 자문을 부탁해왔다.
뒤샹은 선뜻 그러마고 대답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수차례에 걸쳐 그룹전을 개최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림과 오브제들이 초현실주의적인 환경에서 보여질 수 있는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기를 원했다.
윌덴스타인이 넓은 화랑을 제공하며 브르통에게 원하는 대로 전시회를 개최할 것을 허락했다.
뒤샹은 만 레이, 에른스트, 마송, 쿠르트 셀리그만, 그리고 오스카 도밍케즈와 함께 화랑을 장식했다.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는 1938년 1월 17일에 열렸다.

사람들은 화랑 안으로 들어와서는 전시장 입구에 놓인 달리의 작품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그것은 <비오는 택시>로서 달리가 가져다놓은 프랑스 구식 택시였다.
운전자석에는 돔발상어의 머리를 한 마네킹이 있고 뒷좌석에는 금발을 한 미친 듯한 마네킹이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꽃상추와 양상추 사이에 앉아 있다.
택시 안에는 파이프를 통해 물이 뿌려졌는데 약 2백 개의 달팽이들이 빗속에서 기어다니고 있었다.
화랑 안에 마련된 초현실주의자의 거리에는 양쪽으로 나란히 20개의 여자 마네킹이 서 있는데 각 마네킹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마네킹은 새장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검정 벨벳 띠로 입을 가렸는데 앙드레 마송의 솜씨였다.
볼에 눈물이 흐르고 속에 감춘 파이프를 통해 머리에 비누거품이 나오게 한 것은 만 레이의 작품이었으며, 유리 뱃속에 금붕어가 왔다 갔다 하는 마네킹은 레오 마에가 제작한 것이었다.
뒤샹의 마네킹은 남자 모자를 쓰고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맺으며 재킷을 입었는데,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서는 붉은 전구가 반짝거렸고, 허리 아래는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벽에는 파란 에나멜로 파리의 거리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더러는 실제의 이름들이지만 대부분 가상의 것들이었다.

뒤샹은 화랑을 환상적인 초현실주의자들의 동굴로 만들었다.
그는 천장에 1,200개의 석탄주머니를 매달았는데 실제 석탄이 아니라 신문지를 구겨 넣어 석탄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었다.
뒤샹은 원래 우산으로 장식하려고 했는데 그 많은 우산을 한꺼번에 구할 수 없어 석탄주머니를 사용했다.
전시장 바닥에는 낙엽들이 양탄자처럼 깔렸으며, 반짝이는 연못에는 수련과 갈매기들이 있었다.
화랑의 네 방 가운데 하나에는 호화스러운 침대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구운 커피콩들이 화랑 내부를 브라질의 향기처럼 가득 채웠다.
첫날 밤 하나밖에 없는 등이 석탄주머니 사이로 켜졌는데 아주 어두웠다.
뒤샹은 원래 전기장치를 해서 사람이 그림 앞에 섰을 때 자동적으로 불이 켜지도록 하려고 했지만 기술부족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시회에는 14개국에서 참가한 60여 명의 작품들로 가득 찼다.
그 가운데 특별히 메레 오펜하임의 <털로 씌운 컵, 접시, 스푼>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뒤샹은 다섯 점을 출품했는데 로세로부터 빌린 <아홉 개의 능금 주물들>, <회전하는 반구형>, 만 레이로부터 빌린 재생한 <병걸이>와 <약국>, 그리고 레디 메이드 <창문>이었다.
전시회는 첫날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뒤샹은 화랑을 빠져나갔다.
미술사학자 마르셀 장의 말로는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에 화랑 입구에 그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뒤샹은 마지막 점검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가서 메리와 함께 런던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선생님은 1938년 파리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는데 그동안의 선생님 태도와 상반된 행위가 아니었습니까?

뒤샹: 난 팀 또는 그룹에 속했고, 그들을 도왔네.
두 번 정도였지.

카반느: 1938년이 처음이었습니까?

뒤샹: 그렇소.
윌덴스타인 화랑에서였지.

카반느: 선생님과 같은 독자적인 사람이 어떻게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징병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까?

뒤샹: 징병은 아니었어.
나를 그들에게 빌려준 것이었지.
그들은 나를 매우 좋아했네.
브르통이 나를 매우 좋아했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였지.
내가 그들에게 준 반초현실주의적인 개념들이 그들에게 많은 자신감을 주었는데, 늘 초현실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네.
1938년에 개최된 전시회는 매우 유쾌했어.
난 중앙 통로를 동굴로 만들고 천장에 1,200개의 석탄주머니를 쇠살대에 걸었는데, 쇠살대에는 전류가 흐르기 때문에 보험회사측이 반대했지만 우리는 거기에 걸었다네.
나중에서야 보험회사측이 허락했지.
그런데 석탄주머니는 빈 것이었어.

카반느: 석탄이 전혀 없었습니까?

뒤샹: 석탄가루는 있었지.
신문지로 채웠으니까.

카반느: 선생님은 전시회에 회전하는 문을 발명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뒤샹: 돌아가는 문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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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의 동향


뒤샹이 체스에 몰두한 시기 파리의 미술계는 여전히 브르통이 이끄는 초현실주의 일색이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유럽이 전통적인 도덕에서만 파산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라 예술, 문화, 과학, 철학, 그리고 정치에서까지도 파산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그들의 행위는 광적이었고, 어린아이들처럼 무책임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처럼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다.
그들의 첫 전시회는 1925년에 피에르 화랑에서 열렸는데,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아르프, 데 키리코, 에른스트, 클레, 만 레이, 마송, 미로, 피카소, 그리고 피에르 로이였다.
이브 탕기가 이들 그룹에 가세한 것은 전시회가 끝난 후였으며, 르네 마그리트가 그해 늦게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했고, 24세의 살바도르 달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위한 첫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작성했는데, 전시회에 대한 소감을 그는 “통탄할 만한 임기응변”이라면서 초현실주의의 목적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행위를 크게 둘로 나누면 자동주의와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추구하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꿈에 관해 프로이트의 의견을 직접 청취했는데 프로이트는 “단지 수집만 한 꿈들은 아무것도 시사하는 바가 없으며, 그런 것을 묘사한 그림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런지 나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경고했다.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이 배제된 정신분석적인 그림들이 대부분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추구한 점이었으므로 그들의 그림에는 일정한 경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에른스트가 그린 <오이디푸스 왕>은 프로이트가 쓴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정신분석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칼 마르크스의 정신에서의 혁명도 지지했다.
공산주의에 관심이 많은 그는 근본적인 인생의 변화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정의를 찾는 데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사고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에 협력하자고 권유했는데, 그는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독선으로 정당화하려고 꾀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예술가들과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동조한 아라공 같은 예술가들 모두 브르통의 오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브르통은 자신에게 반역하는 예술가들을 그룹에서 추방하면서 1929년에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선언문에서 “진실과 가리워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겠다고 선언했다.
이쯤 되면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정치운동을 미술로 이루려는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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