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츠의 얼버무림 
 
독특한 공통 속성들을 통해 예술작품을 규정하는 것이 바이츠의 '일련의 유사논증 family resemblance argument'이다.
이 논증은 인지되는 성분들noticing strands에 의존한다.
그러나 바이츠는 이 논증에서 공통 특징들에 대한 관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따라서 바이츠의 '열린 개념논증'과 '일련의 유사논증'은 1950년대 엄청난 이론으로 알려졌지만 오늘날에는 그 위상이 많이 약화되었다.

바이츠의 '열린 개념논증'에 나나탄 주요 문제는 그가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는 데 있어 요구되는 필요충분조건들을 세밀하게 언급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서 전통 예술론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 후 자신이 말한 팽창의 영속적 가능성으로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하는 분명한 개념으로서의 예술의 실천에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바이츠는 작품에 대한 닫힌 개념은 시대를 넘어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의 실천에 대한 열린 개념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음을 논했다.

그러나 바이츠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작품에 대한 닫힌 개념이 예술의 실천에 대한 추정되는 열린 개념과 어째서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명료하게 말하지 못했다.
더욱이 예술에 대한 두 개념을 따로 취급하는 이런 논증에서의 그의 실패는 그로 하여금 논증을 하는 가운데서 얼버무리는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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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츠의 말은 '유일한 공통 속성들'을 통해서 

 
윌리엄 켄닉이 지적한 대로 우리는 일반적인 상황 안에서 예술이 아
닌 것과 예술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술을 정의할 수 있다는 이론을 취할 때만 예술이 아닌 것과 예술을 가려낼 수 있다.
우리가 취하는 이론이 설명적 가치를 지녔다면 예술이 아닌 것들에서 예술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론은 일단 가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런이론이 설명을 해주더라도 그것이 가장 훌륭한 설명인지 아니면 더 나은 설명이 혹은 더 나은 이론이 있을 수 있는지 우리는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켄닉은 바이츠가 비트겐슈타인의 '게임'의 분석에 대해 암시로 비판했듯이 모든 개념이 예술의 정의의 지배를 받는 건 아니라고 지적했다.
만약
모든 개념이 예술의 정의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면 그 정의는 어째서 명료하게 표현되지 못하는 것일까!
만약
예술의 정의가 모든 사람이 납득이 되게 명확하게 설명되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신뢰할 수 있는 가정이 될 수가 없다.

바이츠는 말한다.

우리가 예술작품으로 알려진 것들을 보고 또 본다면 우리는 그 작품들에서 공통적 속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로지 유사한 성분들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술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나 잠재적인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유사한 성분들의 장점들에서 예술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알아보고 묘사하며 또한 설명하는 걸 말한다.

바이츠의 말은 '유일한 공통 속성들 uniquely common properties'을 통해서 어떤 것이 예술작품인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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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츠 논증의 극명한 논리적 모순은 다음과 같다
 

바이츠가 논증하려고 한 것은 예술은 최소한의 원리에 있어 혁명적 변화에 늘 열려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술이 반드시 늘 팽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일부 예술적 전통은 변화보다는 균형에 가치를 둘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고전주의 화가는 혁신보다는 기존의 것에 대한 접근법, 전통적 패러다임에 더욱 가치를 둘 것이다.
실제에 있어 혁신은 어떤 전통 안에서는 단념이 된다.
예술은 예술로 간주되기 위해 독창적이 되어야 하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실천, 혹은 실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반드시 변화, 팽창, 혹은 진기함을 수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에 관해 바이츠는 논증하기를
조건들이 혁신의 폭에 한계를 정할 것이기 때문에 예술의 상태를 결정하기 위한 일련의 필요조건들에 이르는 시도는 변화, 팽창, 혹은 진기함의 영속성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처럼 예술의 실천에 대한 개념과는 모순이 된다.

바이츠 논증의 극명한 논리적 모순은 다음과 같다.
1. 예술은 팽창될 수 있다.
Art can be expansive.

2. 그러므로 예술은 반드시 변화, 팽창, 그리고 진기함의 영속적 가능성을 위해 열려 있어야 한다.
Therefore, art must be open to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change, expansion, and novelty.

3. 어떤 것이 예술이라면 반드시 변화, 팽창, 그리고 진기함의 영속적 가능성을 위해 열려 있어야 한다.
If something is art, then it must be open to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change, expansion, and novelty.

4. 어떤 것이 변화, 팽창, 그리고 진기함의 영속적 가능성에 열려 있다면 그것은 정의될 수 없다.
If something is open to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change,
expansion, and novelty, then it cannot be defined.

5. 예술이 정의될 수 있다면,
Suppose that art can be defined,

6. 그러므로 예술은 변화, 팽창, 그리고 진기함의 영속적 가능성에 열려 있지 않을 것이다.
Therefore, art is not open to the permanent possibility of
change, expansion, and novelty.

7.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이 아닌 것이다.
Therefore, art is not art.

더욱이 여기서 모순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5번은 오류로 보인다.
예술이 정의될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예술 개념에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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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바이츠Morris Weitz
 
모리스 바이츠Morris Weitz의 견해를 따를 것 같으면,
20세기 초 예술론은 그 자신의 것을 포함해 본질적으로 예술을 정의하는 데 있다.
그가 말하는 정의란 예술작품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공동 충분한, 즉 예술을 정의하는 필요조건이 필요하는 것이다.
바이츠에 의하면 클라이브 벨이 예술을 의미심장한 형상으로 식별할 때
또는 수잔느 랭거Susanne K. Langer가 예술작품은 느낌의 형상이라고 주장할 때 두 사람은 분류상의 의미로서의 어떤 작품이라도 조건들에 대한 진정한 정의가 요구됨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이츠는 예술의 진정한 정의를 성공적으로 만들기란 불가능하다는 논조를 폈다.

내게는 그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두 주요 논증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들이 '열린 개념논증 open concept argument'과 '일련의 유사논증 family resemblance argument'이다.

'열린 개념논증'과 관련해서 바이츠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예술' 자체는 열린 개념이다. 새 조건들(혹은 사례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의심의 여지없이 계속 생겨날 것이다.
새로운 예술 형태들, 새로운 운동들이 부상되고 이런 것들은 개념이 반드시 확대되어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는 일부 전문평론가들에게 결정을 요구하게 된다.
미학자들은 조건들을 내세우겠지만 개념의 올바른 적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들은 결코 될 수 없다.
새 사례들이 늘 파악되거나 예술가들에 의해서 창조되거나
혹은 낡은 것들을 확대하거나 폐쇄하거나
혹은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내는 사람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조차 가능하므로
'예술'에서 적용 조건들은 결코 남김 없이 열거될 수는 없다.

내가 논하고자 하는 점은
예술의 포용력이 크고 모험적 특징, 변화들과 색다른 창조를 늘 제시하는 점이 속성들을 규정하는 어떤 경향도 보증하는 걸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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