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통의 미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추상표현주의에 직접 영향을 끼친 것들로 실존주의·선불교·초현실주의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지성을 추구하던 유럽과 미국 예술가들을 고뇌하게 만들었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으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한한 자유를 맛보게 해주었다.
선불교는 불확실한 세계를 불확실한 마음으로 대응하게 했는데
존 케이지와 마크 토비가 특히 선불교에서 우연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사람은 창작을 우연한 발생으로 보았다.
초현실주의와 관련해서는 뉴욕으로 피신한 시인이면서 초현실주의의 교황으로 칭송을 받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순수 정신적 자동주의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자동주의automatism란 무의식의 상태에서 혹은 의도 없이 행위하는 것으로 비이성적·비미학적·비도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전적으로 무의식에 의존하는 순수 자동주의는 예술의 허무주의 다다dada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데
다다이스트들이 우연을 즐겼으므로 대부분의 다다이스트들이 1차 세계대전 후 초현실주의자들로 변신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브르통의 미학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그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막스의 유물론에 근거한 것이다.
브르통은 융의 관심사인 신화와 고대의 상징들에는 무관심했다.
뉴욕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브르통의 자동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융의 이론도 수용하여 신화와 고대 심볼을 주제로 삼기도 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의 주요 아방가르드들의 무브먼트였던 초현실주의는 대전 후 미국과 유럽의 미술을 점차 통합시켰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히틀러의 모던 아트 말살정책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때문이었다.
뉴욕으로 피신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브르통 외에도 앙드레 마송·막스 에른스트·이브 탕기·쿠르트 셀리그만·일레노 캐링턴·살바도르 달리·마타·호앙 미로 등이었다.
미로의 시적 추상화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만들었는데
이 점을 뉴요커들이 특히 좋아했다.

Sur란 super란 뜻으로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극사실주의super-realism로 번역되어야 한다.
초현실주의가 혹시 현실주의를 능가하거나 초월한다는 뜻으로 이해될까 봐서 극사실주의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바인데
이는 사실주의의 한계를 인식의 세계를 넘어서 잠재의식의 세계에까지로 확장한다는 뜻이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잠재의식에서 의지와 상관 없이 발산되는 꿈과 환영의 세계를 실재 세계와 다름 없이 취급했다.
그들은 현상 세계보다는 개인의 심리 또는 직관의 세계에 머물면서 실재 세계를 조소하거나 실재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미리 사고함이 없는 우연 혹은 자연발생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무제한의 창조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으며,
근본적 인식의 세계를 뿌리채 뒤흔드는 그들의 미학과 작품들은 미국인과 유럽인 모두에게 더 없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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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추럴 추상에는 특정한 양식이 있을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중 그리고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무브먼트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알베르토 자코메티·장 뒤비페 그리고 북유럽의 코브라CoBrA 예술가들의 구상이 그 하나이며,
또 하나는 비구상으로 제스추럴 추상gestural abstraction이었다.
구상과 비구상의 차이를 말하라면 구상은 눈으로 본 대상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시키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남겨서 관람자로 하여금 무엇을 과장하고 왜곡시켰는지 알게 하는 방법이고
이와 달리 비구상은 대상의 형태를 완전히 말소하는 가운데 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내면의 느낌과 생각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스추럴 Gestural’이란 말은 몸짓이란 뜻으로 의사표시로서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에 ‘제스추럴 추상’을 ‘추상표현주의’란 말로 바꾸어서 사용할 수도 있다.
앞장에서 언급한 모더니티의 특징이랄 수 있는 추상과 표현을 한꺼번에 나타내는 미적 기류가 대전 후 미국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제스추럴 추상에는 특정한 양식이 있을 수 없었는데
추상과 표현은 양식화될 수 있는 성격들이 아니라 경향이나 운동으로밖에는 표출되어지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모던 철학의 통로를 개설했다면 회화에서의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추상과 표현이 포스트모던의 통로를 개설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모던 이후’라는 말이 적당할 것이다.
보통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를 모던 이후라고 하는데
제스추럴 추상이 모던의 막을 내리고 모던 이후의 시대를 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스추럴 추상은 창작의 동기를 외부세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내면의 갖가지 요소들에서도 가지고 왔으므로 창작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웠다.
제스추럴 추상은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물감을 흘리거나 뿌리는 추상 타쉬즘tachism, 서정적 추상lyrical abstraction, 앵포르멜informel 등으로 나타났는데
평론가들이 분류한 것들로 한 마디로 추상과 표현의 비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예술가들의 느낌·생각·매체·작업과정이 개성적이며 능동적으로 나타난 데 있다.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을 보고 겪은 예술가들은 인간의 이성이 마비되거나 비인간적으로 치닫는 데 환멸을 느꼈으며 자연히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내면 세계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자신들의 개성을 찾아 드러내는 데서 자신들의 실존을 인정받기 원했다.
개성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데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건 물론 개인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새로운 휴매니즘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했다.
세상을 불합리하다고 본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관점을 많은 지성인들이 받아들였으며,
지성적 예술가들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진실하고 감정적인 방법으로 확실한 것들을 규정하기 위해서 낭만적인 방법으로 탐색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는 불가지한 세계에 대한 일종의 모험이었으며, 발견이었고,
동시에 위험을 감수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제스추럴 추상은 모호한 세계에 대한 탐험이었으므로 자연히 개인적인 혹은 개성적인 스타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불완전함의 미학을 제스추어를 통해 관람자와 컴뮤니케잇하는 것이었다.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감이 작품의 완전도를 이루는 데 필요 충분 요인이 되었다.
예술가의 작품을 하나의 미술품으로 규정하는 데 있어 관람자가 한 역할을 맡는다는 의미에서 보면 관람자도 간접적으로 창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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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에서  
 
로코코는 네오클래시시즘의 새날이 밝아오기 전까지 존속했는데

 
바로크Baroque를 르네상스Renaissance의 마지막 국면으로 그리고 로코코Rococo는 바로크의 끝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의 견해이다.
로코코를 한 마디로 말하면 환상적 혹은 공상적 이야기라 할 수 있고 꿈만 같은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바로크가 커다란 스케일로 극적인 장면들을 주제로 삼았다면
로코코의 무대는 좀더 작은 규모에 개인적이며 친밀한 세계를 연출했다.
로코코는 좀더 낙천적이며 심약하게 나타났으며, 기발한 사고와 과거에 대한 동경, 그리고 현세계를 잠시 떠나 황홀감을 맛보게 하는 세계를 환기시켰다.
무엇보다도 로코코는 사랑의 세계를 구상하면서 예술에 있어서 인간의 감정을 폭넓게 다뤘으며 처음으로 가족을 중요한 주제로 다룬 점이 특기할만 하다.

로코코는 네오클래시시즘의 새날이 밝아오기 전까지 존속했는데
보통 루이 15세의 재위기간인 1715-74년을 로코코의 시기로 본다.
시기적으로 르네상스의 최후가 된다.
고대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에 이른 서양 미술은 로코코를 마지막으로 르네상스를 닫고 새로운 역사적 국면을 맞았다.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무엇이 역사에 근대의 국면을 맞이하게 했는가?
증기기관차의 발명으로 상징되는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슬로건 아래서의 정치적 혁명이 새 역사의 아침을 밝혔는데
근대는 바로 '혁명의 시대 the Age of Revolution'였다.
이런 혁명으로 역사의 행보는 더욱 빨라졌으며 1880년대와 90년대에는 과학, 수학, 공학,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려 '기계문명의 시대 the Machine Age'의 발판을 마련했다.
디젤, 터빈기관차, 전기모터, 타이어, 자동차, 전구, 축음기, 라디오, 상자카메라 이런 모든 것들이 1900년 이전에 발명되었고 비행기는 그후 얼마 안 되어 발명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근대화가 가속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근대라는 넓은 의미의 시대적 개념보다는 '동시대 contemporary'라는 시기적으로 좀더 구체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다.

근대modern의 의미는 중세 초기 모데르누스modernus란 말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것 that which is present' 혹은 '우리 시대의 of our time'라는 뜻이며
좀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새로운 new or novel'이란 뜻이다.
어원적으로 근대는 라틴어 모도modo에서 왔고 이는 '바로 지금 just now'이란 의미이다.
모더니즘이란 말로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개념이 명료하게 확립된 건 19세기에 들어서였으며 과학과 물질의 발달과 더불어 계몽주의에서 비롯했는데
계몽주의의 바탕에는 이성과 자유에 대한 중산층의 신념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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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코로와 사진술 
 

'코로와 사진술'의 내용을 <창해ABC북>에서 옮김니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유명한 코로에 관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와 사진술에 관한 내용이 있어 전합니다.

코로는 사진예술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해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사진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사진에 심취했던 콩스탕 뒤티외, 알프레드 로보, 샤를 드자바리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새로운 인쇄술에 익숙한 그들을 통해 사진이 기록을 위한 예술적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로는 유리판화에 사진을 활용했는데 대가들이 표현한 사진술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기록적인 효과를 창출해냈다.
즉 사진이 회화의 준비단계에 개입된 것인데 그가 죽을 때까지 아틀리에에 보관되어 있던 퐁텐블로 숲을 담은 수백 장의 사진을 고려해볼 때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위치 조절에 대한 기술이다.
신고전주의 교육을 받을 때 위치 조절에 대해 배우긴 했지만 사진술의 과학적인 정확성 때문에 코로는 사진을 가까이 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대상의 형태에 가해지는 빛의 효과에 대한 엄격한 습작이다.

코로는 풍경화를 그릴 때 각각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장면을 연속적으로 그렸으며 빛의 효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표현했습니다.
그를 인상주의 화가들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풍경화에서의 다양성으로 말하면 모네보다 더 많은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원근법과 빛의 효과를 위해 그가 사진술을 이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워 올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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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술 자체는 예술이라고 할 수 없지만 
 

시인 샤를 보들레르와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사진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진술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한 19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1837년에 찍은 정물사진이 공식 사진이 발표되기 2년 전이었음을 감안하고 시대에 대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보들레르는 <1859년 살롱전>에서 사진이 현실의 무미건조한 복사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사진술을 무가치하게 평가했다.
반면 들라크루아는 이런 이유 때문에 사진술에 호감을 나타냈다.
들라크루아는 일광사진술협회Societe heliographique가 창설되기 한 해 전,
즉 1850년에 사진술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사진술 자체는 예술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예술가의 보조수단으로서 "육안의 착오를 교정"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이는 3차원적 부피, 빛의 점감 효과, 흐릿한 윤곽선 등을 2차원의 공간 속에 옮겨놓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술 덕택에 르네상스 이후 사용되어온 오브제에 대한 전사(베끼기) 방법들이 더욱 완벽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상의 목적으로 들라크루아는 1847년부터 사진술을 이용했다.
1853년과 1856년 사이 그는 모델을 대신해서 사진을 사용했다.
그는 1855년 10월 5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열정적으로 그리고 조금도 싫증을 느끼지 않고 이 남성 누드사진을 감상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인간의 육체, 이야말로 정녕 기막힌 시라 할 수 있다.
이 사진들은 내게 인체를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삼류 작가들이 지어낸 것보다도 인체에 대해 훨씬 많은 점을 말해준다.

앙리 제르네르의 말에 의하면 들라크루아에게 사진은 단순히 자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강도의 명암이 만날 때 윤곽선이 드러나는" 훌륭한 데생으로서의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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