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만져보는 앤디 워홀의 생애와 작품 세계!

『앤디 워홀 타임캡슐』은 피츠버그의 워홀 미술관에 소장된 워홀의 ‘타임캡슐’에서 그대로 복제한 20가지가 넘는 자료를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구성한 책으로, 앤디 워홀의 생애와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그의 감수성과 독특함에 공감하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워홀의 관심뿐만 아니라 창작에 관한 풍요로운 정보를 소개하며 그의 삶을 추적한다. 대공황시기 피츠버그에서 보낸 워홀의 어린 시절부터 1950년대 뉴욕으로 건너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하기까지, 그리고 악명 높은 팝아티스트, 언더그라운드 영화제작자, 저술가, 출판인, 수집가, 한 시대의 기록자로서 진정한 하나의 아이콘이 된 워홀의 성공 과정과 진면목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저자소개

저자 : 매트 위비컨
저자 제랄린 헉슬리GERALYN HUXLEY는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 워홀 미술관의 영화와 비디오 부문 큐레이터. 세 권의 책과 많은 글을 썼으며, 정기적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워홀의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 강연하고 있다

저자 : 제랄린 헉슬리
저자 매트 위비컨MATT WRBICAN은 앤디 워홀 미술관의 문서보관 담당자로서 워홀에 관한 전시회를 스무 차례 이상 기획했다. 최근에는 방대한 워홀 의 개인적 자료를 감독하고 있으며, 세계 전역에서 열리는 여러 워홀 전시회의 책임을 맡고 있다. 다섯 권의 책과 수많은 저널과 신문 기사를 썼다.

역자 : 김광우
역자 김광우는 뉴욕시립대와 포담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미술과 미술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일찍부터 뉴욕 미술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대가와 친구 시리즈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을 출간했다. 서양미술과 예술철학에 관한 많은 저서와 번역서가 있다.

목차

1928~1949
병약한 아이 앤드류 워홀라 8
앤디의 고향 피츠버그 10
비잔틴 가톨릭 신앙 속에서 자라다 12
할리우드에 대한 사랑을 작품으로 만들다 16
창의적인 어미니 줄리아 워홀라 20
대학 시절에 개발한 워홀의 기법 23

1950~1959
1950년대의 뉴욕 28
뉴욕으로 가다 31
남다른 감각과 노력으로 상업 예술가로 성공하다 35
서쪽으로 간 세계 일주 38
댄스를 사랑한 워홀 40
트루먼 카포티와의 우정 44

1960~1969
짧지만 빛나는 순간 1960년대 48
팝아트에 도전하다 52
워홀의 팝아트와 초기의 아이콘들 57
죽음을 다루다 60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영화 62
새로운 기술에 탐닉하다 64
워홀의 비디오아트 66
워홀이 만든 책들 68
1960년대 워홀과 함께 한 아름다운 소년 소녀들 70
우홀과 벨벳 언더그라운드 72
그녀는 왜 앤디 워홀을 쏘았는가 74
유행의 선두주자 프레드 휴즈와 제드 존슨 76

1970~1979
글래머와 방종의 시대 1970년대 80
1970년대의 소년과 소녀들 82
《인터뷰》를 창간하다 84
밤의 유흥 86
워홀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88
워홀과 여장 90
로큰롤을 위하여 93
미술과 패션의 융합 96

1980~1987
레이건고 에이즈의 시대 1980 102
전 세계 유명 인사의 초상화 105
자화상 108
다시 시작한 여행 110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찾아서 112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현한 전시와 설치 114
젊은이들의 멘토가 된 워홀 116
갑작스런 죽음, 그 이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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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신간’ 코너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출간하기 전에 글과 도판을 올립니다.

네티즌들의 답글과 공감은 출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목은 ‘그림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입니다.

우선 목차를 올립니다.



 

 

그림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목차

서문: 미술에서 길을 찾다



1. 정치와 미술: 프랑스 혁명과 프로파간다 회화

재정파탄과 혁명의 불길

바스티유 함락과 인권 선언문

테니스코트의 선서

정치에 입문한 화가

마라의 죽음

심장은 순수한데 오직 머리가 잘못되었다

그림 한 점을 5년 동안 전시하여 큰돈을 벌다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나폴레옹

허구의 영웅화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



2. 모방에서 창작으로

인기화가의 작품 모사

티치아노를 뛰어넘은 벨라스케스

벨라스케스의 선조 티치아노와 조르조네

비너스의 역사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와 시녀들

기마인물화와 전신인물화



3. 일그러진 시대에 일그러진 자화상과 상징주의 회화

우리의 자화상

다양성을 표현한 상징주의 회화

반 고흐의 카페와 고갱의 카페

고갱의 의자와 반 고흐의 의자

자신의 귓불을 자르다

창작과 발작



4. 생의 프리즈: 삶, 사랑, 죽음의 시

크리스티아니아 보헴과 에드바르트 뭉크

뭉크 스캔들

베를린의 보헤미안들

질투, 마돈나, 흡혈귀, 사춘기

지독한 고독과 폐쇄적인 생활

절규

생명의 춤

정신과 치료를 받다

뭉크의 전성기과 고독한 삶



5. 20세기의 성과: 추상 회화

화가가 되기 위해 뮌헨으로 가다

가브리엘 뮌터와 사랑에 빠지다

추상의 과정

‘즉흥’ 연작

‘구성’ 연작

‘인상’ 연작

청기사를 결성하다

완전추상에 도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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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니즘


윌러비 샤프는 1967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에서 열린 ‘광선, 움직임, 공간’ 전시회 도록에서 처음으로 루미니즘Luminism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루미아Lumia란 용어는 토머스 윌프리드(1889~1968)가 20세기 전반기에 자신의 광선 구조물을 설명하며 이미 사용한 적이 있었다. 덴마크계 미국 실험예술가 윌프리드는 덴마크, 런던, 소르본 대학에서 음악과 미술을 공부한 뒤 1916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광선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빛의 패턴을 음악작품의 울림이나 해석으로 여기지 않고 빛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미술 매체로 생각한 최초의 예술가였다. 1905년부터 백열등과 담배상자 안에 집어넣은 채색된 유리조각들을 이용하여 광선 구조물을 실험했다. 1919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건과 이들을 연결시키는 색깔 있는 연동장치로 이루어진 5개의 건반과 6개의 주된 영사기 및 여러 개의 보조투광기로 구성된 장치를 가지고 최초의 ‘클러빌럭스 Clavilux’를 제작했다. 이것은 회전하며 조절되는 거울들과 채색된 유리 슬라이드들을 통해 빛의 흐름이 스크린 위에 투사되도록 조종되고, 스크린 위에는 미묘하고 복잡한 색채의 변화와 혼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928년에는 자동으로 조작되는 클러빌럭스를 처음 제작했다. 계속해서 이런 종류의 작품을 20개 이상 제작했으며, 시카고의 셔먼 호텔에 있는 64m 길이의 <움직이는 벽>(1929)과 1964년 뉴욕 모마 강당 라운지에 설치된 <루미아 조곡 Op. 158> 등 빛을 이용한 많은 다른 구조물을 제작했다. 1930년 빛을 미술의 영역에서 사용하기 위한 과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라이트 아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윌프리드는 1948년 12월 <미학과 미술 비평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더욱 위대한 리얼리티, 조화로운 의식, 인간의 본질과 위대한 공통분모 사이의 균형, 즉 보편적이고 리드미컬한 흐름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새로운 미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경에 생긴 ‘색채 오르간’ 개념은 다색 광선이 음악에 맞춰 움직이거나 음악은 없더라도 음악을 연상시키는 구성을 보여주는 것을 말하며, 예수회 신부이자 수학자인 루이 베르트랑 카스텔(1688~1757)이 1734년에 처음으로 색채 오르간인 <클레브생 오퀼레르>를 연주했다. 다색 광선의 움직이는 형태와 음악을 조화롭게 일치시키거나 둘 사이의 연관성을 연상시키려는 시도는 러시아 작곡가 스크리아빈과 러시아 추상화가 바라노프-로시네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알렉산데르 스크리아빈(1872~1915)은 1915년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열린 <프로메테우스> 공연에서 음악과 광선이 어우러진 환경을 구축했으며, 블라디미르 바라노프-로시네(1888~1942)는 <색채 피아노>를 제작했다. 그는 <색채 피아노> 위에서 시각적 연주를 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회화를 수학한 바라노프-로시네는 1910~16년 파리에 머물면서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입체주의에 이르는 현대 미술을 섭렵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추상화와 추상 구성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No. 1>(1913)은 뉴욕 모마에서 소개한 것으로 다색의 목판과 잘게 부순 계란껍질 및 판지로 제작한 것이다. 그는 193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비구상적인 색채 구성으로 음악적인 소리와 같이 공명하는 비구상 미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표현적 추상을 이끌어냈던 19세기 말의 주요 미술 개념 중 하나였으며 이런 경향은 쿠프카의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보헤미아 동부의 오포치노 태생 구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세크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는 소년 시절 그 지방에서 강신술사자로 알려져 비밀 종파를 이끈 마구제조인 밑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이때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 나타나자 강신술과 비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후에는 신지학에도 관심을 쏟았고, 특히 신지학에 대한 관심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다. 1888년 야로메르에 있는 미술실업학교에서 알로이스 스투드니치카Alois Studnicka(1842~1927)의 지도로 미술 수업을 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프라하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체코의 나자렛 화파의 추종자였던 스투드니치카의 영향으로 쿠프카는 장식미술과 추상미술의 표현력 있는 색채와 체코 화가 요세프 마네스Josef Manes(1820~71)와 미쿨라시 알레시Mikulas Ales(1852~1913)에 대해 평생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쿠프카는 프라하에서도 역시 나자렛 화파의 종교 화가인 프란티세크 세크벤스Frantisek Sequens(1836~96)에게 지도받으며 정신적 상징주의 미술을 주창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더욱 공고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쿠프카는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모든 추상적인 것들을 묘사할 수 있는 수단을 추구하고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를 창조하기로 하고 스스로를 ‘색채 교향악가’라고 했다.

쿠프카는 움직임의 묘사와 에티엔-쥘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래프chronophotograph 기법,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비재현적인 추상 형태로 움직임을 암시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09년 음악의 법칙에 따른 움직임과 연속운동을 묘사한 파스텔화와 소묘 연작을 내놓았다. 그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음악에서 유추한 미술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라슬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Nagy(1895~1946)는 1920년대에 ‘광선 조절기’를 제작하면서 ‘프로그램이 입력된 광선 로봇’으로 묘사되어 온 광선 전시 기계를 만들어 영화 <광선 전시, 검정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1925~30)의 제작에 사용했다. 헝가리계 미국 화가이며 조각가 모홀리-나기는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1918년 부다페스트에서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모임인 오늘이라는 의미의 마MA 그룹의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 빈으로 갔고 그곳에서 말레비치, 리시츠키, 가보의 영향을 받았다. 1923~28년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하며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실험영화, 연극, 산업디자인, 사진, 타이포그래피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1928년 그로피우스와 함께 바우하우스를 그만두었으며, 그후 몇 년 동안 베를린에서 주로 무대디자인과 실험영화를 제작했다. 1935년 런던으로 가서 <서클> 선언문으로 대표되는 구성주의 그룹에 합류하여 광선회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런던에서 공간 조절기Space Modulators로 명명한 구조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37년 시카고로 활동무대를 옮겨 뉴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고, 조지 케페시와 함께 디자인 인스티튜트를 설립했다.

모홀리-나기는 구성주의 화파에서 가장 실험정신이 강하고 다재다능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미술에 광선, 움직임, 사진, 영화, 플라스틱 재료 등을 사용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소위 순수미술은 전체 환경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구성주의 원리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21년 한스 리히터(1888~1976)는 V. 에겔링과 함께 광선을 투사하여 자신의 첫 번째 추상영화인 <리듬 21>을 제작했다. 베를린 태생 독일 화가 리히터는 1917년 취리히로 가서 취리히 다다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때부터 추상 작품을 제작했지만 표현주의적 성격을 띤 목판화와 리놀륨 판화도 계속해서 제작했다. 1918년 스웨덴 추상화가 에겔링을 만나 오랫동안 교류하며 함께 음악의 리듬과 대위법에 바탕을 둔 추상적 ‘두루마리’ 소묘를 제작했다. 1920년에 신조형주의와 구성주의를 접한 후 1921년부터 추상영화 발전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말년에는 검정색, 흰색, 회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커다란 캔버스에 리드미컬한 움직임의 효과를 실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선투사기는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레 파르크, 리폴드, 게르하르트 폰 그레베니츠, 페테르스, 비아시 등은 광선을 투사하기 위해 회전하거나 곡면을 지닌 거울과 반사기, 편광, 렌즈와 프리즘을 이용한 굴절 조절, 막힌 부조 표면 등을 이용한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아르헨티나 실험예술가 훌리오 레 파르크Julio Le Parc(1928~)는 1958년 파리로 건너가 잠시 빅토르 바자렐리 밑에서 작업한 후 시각예술연구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는 옵 아트, 키네틱 아트, 광선을 이용한 미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예술가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과학적 원칙에 따라 작업했으며, 작품에 대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고, 시각예술연구회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제작을 선호했다. 그는 관람자의 주관적인 반응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자극에 따라 발생하는 객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지각 반응을 찾았다. 1960년경에는 색채와 광선에 관심을 갖게 되어 프리즘과 입방체를 사용하여 모빌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했는데, 이런 재료를 선택한 것은 투명성과 반사광 면에서 계산된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재료가 각기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부조도 제작했고, 여러 재료의 다양한 표면 질감을 이용하여 반사광을 얻었다.

미국 조각가 리처드 리폴드Richard Lippold(1915~)의 아버지는 기계공학자였다. 리폴드는 1933~37년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1940~41년 미시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중 철사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거의 독학으로 조각을 공부했다. 그의 작품은 금속선과 금속대를 사용하여 긴장감 있게 구성된 구조물로 무게가 없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광선과 키네티시즘에 주로 의존하며, 특히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에서 움직임이 발생하는 기법을 이용했다.

네덜란드 실험예술가 헨크 페테르스Henk Peeters(1925~)는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눌Nul 그룹의 일원이었다. 눌은 네덜란드 신경향 미술을 대표하는 구성주의, 실험예술가들의 그룹으로 1961년 페테르스를 비롯하여 얀 스혼호벤, 헤르만 데 브리스가 결성했다. 독일 그룹 제로Zero와 유사한 목표를 추구했으며 종종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페테르스는 1960년에 추상화로 스위스 상을 수상했다. 주로 흰색의 일상 재료들로 콜라주와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예를 들면 뒷면에 투명 나일론을 댄 탈지면으로 된 패널이다. 또한 빛과 물의 효과를 탐구한 작품도 선보였는데 예를 들면 1965년 겔젠키르헨에 있는 할프만스호프에서 전시한 <물-천장>이다. 빛을 독립된 미적 매체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에서 프리즘과 렌즈를 이용하여 빛의 굴절을 통제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실험예술가 알베르토 비아시Alberto Biasi(1937~)는 그루포 N의 일원이었다. 그루포Gruppo N은 1959년 파도바에서 결성된 그룹으로 여기에 비아시를 비롯하여 엔니오 키조, 조반니 안토니오 코스타, 에도아르도 N. 란디, 만프레도 마시로니가 속해 있었다. 주로 기하 추상, 특히 옵 아트, 환경 미술, 관람자의 참여에 관심을 가졌다. 비아시는 자그레브에서 아르테 프로그라마타 협회 및 신경향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고, 산마리노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주로 프리즘을 통해 굴절된 빛의 분산을 이용하여 작업했다.

광선을 미적으로 사용한 또 다른 방식은 광선 스펙터클로 이는 광선 환경에 포함된다. 광선 스펙터클의 원형은 베를린의 건축물에 조명을 비추는 것을 내용으로 한 가보의 <광선 축제>(1929)이다. 가보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1938년 나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작품 <빛의 대성당>을 제작하면서 가보의 아이디어를 이용했다. 이 작품이 현대의 ‘소리와 광선’ 공연의 시초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광선 환경과 광선 스펙터클은 일본, 유럽,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실험예술가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펼치는 분야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폰타나와 무나리가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독일에서는 제로 그룹, 특히 피네, 마크, 워커 등이 광선 연구에 전념했다.

제로는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오토 피네Otto Piene(1928~)와 하인츠 마크Heinz Mack(1931~)가 결성한 그룹으로 두 사람 모두 키네틱 아트와 루미니즘에 관심이 많았으며, 뒤에 귄터 워커Gunther Uecker(1930~)가 그룹에 가세했다. 그룹의 주장은 그룹의 명칭과 동일한 이름의 정기간행물 <재로>를 통해 발표되었다. 제로는 새로운 소리를 발생시키는 침묵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이런 의미는 시각예술에서 순수한 색채와 빛의 효과를 위해 구체적인 형상과 형태를 포기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피네는 작품 ‘빛의 발레’에서 색깔이 있는 투명한 가스가 채워진 풍선을 이용했다. 이 그룹은 신경향 운동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공동으로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1948~53년 뮌헨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1953~57년 쾰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피네는 1965년부터 뒤셀도르프에서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는 주로 단색조의 그림을 그렸지만 차폐장치를 사용하여 광선을 조절함으로써 화면 위에 보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반사경, 일광 반사 신호기 등을 이용하여 광선에 대해 연구했다. 1959년 무렵부터 양초 모양의 검정색으로 된 패턴을 사용하여 그림자 소묘와 그림자 회화를 제작했다. 동시에 무용수 대신 기계가 그림자를 투사하는 광선 발레도 제작했다. 피네는 자신의 광선 발레에 관해 말했다. “나는 광선이 벽 위에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투영되는 거대한 반원형의 공간을 생각한다. 관객들은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전기 광선과 플렉시글라스로 오브제를 만들어 그것을 헬륨 조형물Heliumplastik이라고 불렀고 키네틱 광선-구를 실험하기도 했다. 피네는 루미니즘과 다감각적인 환경 미술의 가능성을 실험한 선구자이다.

1950~53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쾰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마크는 1965년 마르조토 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파리 비엔날레에서 1등상을 차지했다. 마크는 스스로 ‘역동적인 구조물’이라고 부른 광선 오브제를 제작했는데, 이것은 매끄럽게 광택을 낸 금속판들을 플렉시글라스나 휘어진 유리판 뒤에 놓고 전기 모터를 통해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전달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반사 광선을 생성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1968년애는 광선 오브제에 눈부신 태양 광선을 반사시켜 실재하지 않는 형상을 구현해내는 ‘사하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또한 TV 영화를 위해 11m 높이의 광선 기둥을 세운 것도 특기할 만하다.

베를린과 뒤셀도르프에서 공부한 워커는 1950년대 후반부터 흰색 못을 사용한 독특한 작업을 선보였는데, 바탕 판에 흰색 못을 용접하는 방식으로 오브제를 제작했다. 이 오브제는 공간 안에서 특별한 광선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광선 숲>(1959)에서 못의 머리 부분은 그 크기가 일정하지만 못의 길이는 약간씩 불규칙하여 못들이 꽂혀 있는 판 위로 물결이 치는 듯한 또 하나의 새로운 표면이 만들어진다. 1960년대에는 광선 상자와 회전하는 원반을 이용했으며 후에는 네온 튜브를 사용하여 광선 조각을 실험했다. 그의 작품은 옵 아트, 키네틱 아트, 루미니즘과 유사하다.

미술작품에 광선을 이용한 실험예술가의 수가 너무 많고 그들이 사용한 기법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그들을 각각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광선을 미술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현상으로, 광선은 매우 환상적이고 독창적으로 사용되어 한마디로 규정지어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새로운 광선 연구에 깊이 몰두한 예술가들 중 일부는 새로운 방법과 기구에 몰두하는 만큼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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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구성주의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1890~1977)는 브리안스크 태생으로 앙투안 페브스네르(1886~1962)의 동생이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 및 자연과학, 공과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 강의를 들었다. 1913년과 1914년에 파리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앙투안을 통해 처음 아방가르드 미술을 접했다. 오슬로에서 가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입체주의 특성과 후에 유럽 구성주의의 전조가 되는 기하적 추상을 결합하여 첫 번째 구성을 제작했다. 1917년 앙투안과 같이 러시아로 돌아왔고 1920년에 형과 함께 ‘사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러시아 구성주의의 창시자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 이끄는 이른바 ‘생산주의자’ 그룹에 대립하는 유럽 구성주의의 기초 원리를 제시했다. 한편 앙투안은 절대주의의 창시자 카시미르 말레비치(1878~1935), 칸딘스키와 더불어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 교수로 임명되었다.

말레비치는 인후크Inkhuk 내의 논쟁에서 칸딘스키와 페브스네르 형제에 동조하며 모든 미술은 반드시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생산주의 예술가들의 견해에 반대했고, 산업미술은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미술에서 나오는 새로운 발상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인후크는 1920년 5월 모스크바에서 미술 실험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기관으로 러시아어로 미술문화연구소Institut Khudozhestvennoi Kulturi의 약자이다. 미술부 산하의 한 분과로 설립되었으며, 1918년 인민계몽위원회(IZO 나르콤프로스) 밑에 설치되었다. 1921년 말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타틀린, 비텝스크에서는 말레비치의 책임 아래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칸딘스키가 인후크 프로그램의 정비를 맡았지만, 그의 계획안은 인후크의 대다수 좌파 예술가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칸딘스키는 곧 이곳을 떠났으며 그의 계획안은 후에 그의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수법에 바탕이 되었다.

1948년 예일 대학에서 행한 트라우브리지 강연에서 소비에트 구성주의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학하게 밝혔다.
“구성주의란 단어는 1920년대에 미술을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단의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그들은 이젤회화와 조각, 즉 예술가의 이념이나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인했다. 그들이 예술가 특히 소위 구성주의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것은 물질적 가치가 있는 구조물, 즉 편리한 물건, 주택, 의자, 탁자, 스토브 등의 제작에 예술가의 재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철학적으로는 물질주의를,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다. 구성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을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소중히 생각되는 쾌락이며,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백해무익한 존재로 치부했다. 나와 동료들은 이런 이상한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미술은 예술가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게임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으며 현재도 그렇다. 나는 미술이 인간 생활의 정신적, 사회적 구조에서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미술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인생 자체와 맞먹는 최고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모든 창조물보다 뛰어난 것이다.”

구성주의는 많은 현대 미술용어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용어의 사용도 일원화되어 있지 않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구성주의적Constructive이라는 용어는 1900년대와 1910년대에는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지 않으며 치밀하게 구성된 미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구성주의로 분류되었던 미술이 모두 현재에 구성주의라고 일컬어지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목적과 관념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운동이 동시에 구성주의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하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났다. 현재는 후자를 국제 구성주의 혹은 유럽 구성주의라고 명명하여 러시아 구성주의와 구별하기도 한다.

러시아 구성주의가 매우 구체적인 명칭인 반면, 유럽 구성주의는 의미가 모호하며 점차 비재현적 혹은 비표현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광범위한 화파와 양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동일한 명칭 때문에 두 운동은 근본적으로는 하나인 이론의 두 가지 갈래인 것처럼 논의되었으며, 이론 인해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사실 주요 유럽 구성주의 화파 중 러시아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이념을 수용한 화파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유럽 구성주의의 목적과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선언문을 통해 순수미술이라고 비판한 종류의 것이었다. 가보와 앙투안, 말레비치, 타틀린, 로트첸코, 포포바, 클리운, 푸니, 로자노바의 1920년 이전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국제적 구성주의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나 러시아 구성주의는 이 모두를 부인했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유럽 구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초기 작품을 의도적으로 배격했다. 엘 리시츠키(1890~1941)만이 러시아 구성주의와 유럽 구성주의에 모두 동조했다.

1909~14년 다름슈타트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모스크바에서 건축을 공부한 리시츠키는 입체-미래주의 양식과 루보크lubok라 불리는 농민 목판화 전통이 융합된 양식을 사용하면서 샤갈과 함께 유태교 서적의 삽화를 그렸다. 루보크는 밝게 채색된 러시아 민속 판화를 말하며 복수형은 루프키lubki이다. 일반적으로 민속 우화나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루보크는 17세기 중반부터 최소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작되었다. 루보크란 용어는 교육받은 계층이 평민 미술에 대해 내린 경멸적인 평가를 함축하며 조잡한, 값싼, 단정치 못한, 심미안이 결여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리시츠키는 1919년 비텝스크에서 말레비치와 알게 되었고 러시아 구성주의를 주도하는 예술가의 한 명으로 성장했다. 리시츠키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추상 예술가였다. 그의 전성기 작품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타틀린과 로트첸코의 구성주의, 그리고 몬드리안의 네덜란드 신조형주의가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1920년경 러시아에서 구성주의의 기본 개념은 1920년대에 순수 미술과 실험실 미술에 반대하고 생산 미술을 지지하던 비대상 예술가의 이념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타틀린은 입체-미래주의자들의 활동기간에 널리 유행한 구성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작품과 관련하여 채택했다. 타틀린은 자신의 구성물에서 실제를 흉내내는 대신에 실제 물질을 사용했으며, 회화의 가상적 공간 대신에 실제 공간을 이용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원칙은 환영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서구의 구체 미술 개념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했다. 이는 사회적 유용성과 더불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타틀린의 물질-문화주의는 현대적 물질의 미적이고 실용적인 실제 특징을 조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이후 구성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예술가들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구성주의자라는 용어는 1920년 8월에 간행된 가보와 앙투안의 ‘사실주의 선언’에서 타틀린의 미학적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보는 ‘사실주의 선언’에서 자신이 주창하는 비대상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과 구성주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후에 가보는 구성주의와 구성주의자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며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가보와 생산주의 화파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미술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보는 창작 미술로부터 사회적인 이익이 간접적으로 도출될 수도 있지만, 창작 미술은 비사회적이고 비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생산주의자들은 미술이 사회주의 사회의 생활향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으며, 이것이 소비에트 구성주의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가보가 서구에 소개한 구성주의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에 의한 구성주의였지만 러시아 내에서 구성주의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미술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타틀린이 가보의 신조와는 매우 동떨어진 공리주의 원리를 구체화시킨 <제3 인터내셔널 기념물>을 제작한 이래 구성주의 미술의 이론적 근거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기념물은 1919년 러시아 미술부가 모스크바 중심에 세울 구조물로 타틀린에게 디자인을 의뢰한 것이다. 타틀린이 처음에 계획한 기념물은 유리와 철로 된 것으로, 그 높이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두 배이며, 중앙에 들어 있는 유리로 된 원통이 회전하는 것이었다. 타틀린은 이를 “공리적인 목적을 위하여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순수 조형적 형태들을 결합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1920년 12월 제8회 러시아 의회 전시장에서 기념물의 모형이 전시되었다. 가보는 기념물의 구도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난했으며 사실상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후 러시아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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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케Die Brucke


브뤼케Die Brucke 그룹은 젊은 독일 건축학도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프리츠 블라일에 의해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되었다. 키르히너의 <브뤼케 그룹 연감 Chronik der Kunstlergemeinschaft Brucke>에는 키르히너가 블라일과 헤켈을 만난 1903년이 창립 연도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슈미트-로틀루프가 합류한 1905년에 공식적인 모임이 처음 이루어졌다. 1906년 막스 페히슈타인이 가입하고 1907~08년 에밀 놀데가 참여함으로써 그룹의 규모는 더 커졌다. 그러나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는 1년 동안 그룹에 가담했지만 본질적으로 고독한 기질의 그는 그룹이나 협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키르히너는 그룹 내에서 처음으로 폴리네시아 미술을 비롯한 여러 원시 미술을 열렬히 찬양한 인물이지만 원시주의 미술품의 영향은 그보다는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후기 고딕 양식의 독일 목판화와 드레스덴에 있는 츠빙거 뮤지엄의 민속 자료실에 소장된 목조조각과 같은 윈시 미술의 영향을 받았으며 야수주의의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았다.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일화적인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모두 혐오했고,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싹튼 표현주의를 뭉크와 호들러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으로 창조하려고 했다. 실제로 표현주의라는 명칭을 주로 현대 독일 미술 경향에 작용하게 된 데는 이들의 영향이 컸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은 강한 사명감을 가진 청년들로서 당대의 원대한 사회적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던 그들은 회화를 수단으로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해나가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적인 엘리트로 여겼으며 호라티우스의 ‘세속적인 인간에 대한 증오 Odi profanum vulgus’를 신조로 삼아 도전적인 반부르주아적 태도를 취했다. 브뤼케라는 명칭은 슈미트-로틀루프가 채택한 것으로 그룹을 하나로 묶는 유대를 상징한다. 나중에는 이 명칭에 좀더 심오한 의미가 부여되어 자신들의 작품이 미래의 미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는 그들의 신념을 나타냈다. 놀데를 멤버로 초대하는 편지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적었다.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끌어당기는 것, 이것이 바로 브뤼케라는 명칭에 내포되어 있는 목적이다.” 그러나 미래의 미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결코 내려진 적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계속해서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1910년경 브뤼케 그룹의 예술가들은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페히슈타인은 그곳에서 놀데와 함께 신분리파Neue Sezession를 결성했다. 이 그룹은 놀데의 <오순절>이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거절당하자 그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결성된 것이다.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로틀루프도 신분리파에 가담했으며, 거기서 오토 뮐러를 만나 그를 브뤼케 그룹의 마지막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브뤼케 그룹을 독립적이며 완전한 그룹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곧바로 신분리파를 탈퇴했고 페히슈타인이 계속 신분리파에 집착하자 그를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시켰다. 드레스덴에서 공부하고 1906년에 브뤼케 그룹의 일원이 된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는 1908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인상주의에 반대하는 현대미술 논쟁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신분리파 창설을 주도했다. 1912년에 신분리파를 떠나라는 요구를 페리슈타인이 거부하자 브뤼케 그룹에서 축출 당했다. 그는 프랑스 야수주의, 특히 마티스의 피상적인 특징을 모방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청기사) 그룹의 두 번째 전시회에 함께 참여했지만, 키르히너가 <브뤼케 그룹 연감>에서 밝힌 그룹의 목적과 정책이 1913년 논란을 일으켜 해체되었다.

브뤼케 그룹을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는 1901~05년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그 사이 1903~04년에는 뮌헨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키르히너가 초기 목판화 작품에서 보여준 독일판 아르 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양식화된 선은 곧 가파른 각진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런 특성들은 그가 높이 평가한 독일 후기 고딕의 목판에서 끌어온 것으로 브뤼케 그룹의 양식적 특성이 되었다. 키르히너는 뮌헨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본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고갱과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주로 뭉크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된 드로잉과 과감한 대조를 보이는 색채를 사용하면서 야수주의자들의 작품과 유사한 방식을 발전시켰다. 1907~10년까지 ‘야수들의 왕’ 앙리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이 1905년에 도달한 양식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야수주의보다 더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태도로 주제에 접근했으며, 회화적 가치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야수주의보다 더욱 주제에 몰두했는데, 도시 풍경의 인간적 파편들 속에서 섹슈얼리티의 뉘앙스를 가지고 서커스와 뮤직홀의 생활에서 뽑아낸 감성과, 유쾌함, 슬픔을 물감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키르히너는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2년과 1913년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성숙된 표현으로 여겨지는 거리풍경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더 격렬해진 양식으로, 속도와 병적인 우울함과 화려함,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베를린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서 재현되었던 대도시인들의 자기 노출적 에로티시즘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전쟁에 징집된 직후인 1914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쇠약 상태를 겪었다. 요양소에서 얼마 동안 머문 후 1917년 스위스의 다보스 근처의 산중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독일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비난으로 인해 정신적 불안을 겪었으며, 1938년 자살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28년부터 키르히너의 양식은 변화를 겪는데, 직접적으로 자연을 그리던 과거 작품에 비해 더 추상적으로 변했다. 이는 일종의 그림-문자로서 그의 ‘상형 문자적’ 형상들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직접적인 재현이 차지하는 부분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가시 세계의 내적 이미지를 비자연주의적인 형태를 통해 만들어낸 ‘상형 문자’는 시각적 법칙에 따라 형태를 취하게 되고, 그 형태의 경계가 넓어지기도 한다. 이 시각적 법칙은 이제까지의 미술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예를 들어 반영의 법칙, 간섭과 분극화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912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표명된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새로운 방식은 경험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일종의 추상적인 그림문자를 써 넣은 피카소의 실험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4년 드레스덴 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에리히 헤켈Erich Heckel(1883~1970)은 다른 그룹의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화가로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그의 재능은 때로 회화보다는 판화에서, 특히 목판화에서 더욱 충분히 드러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1906년 그의 회화양식은 독일 표현주의와 반 고흐의 양식에 기초를 두었으며, 풍경화, 누드화, 초상화에 보이는 거칠고 강한 색채의 병치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헤켈의 작품은 브뤼케 그룹의 다른 멤버들의 작품에 비해 다소 서정적인 편이며 그는 병과 내적 고통을 묘사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또한 풍경화에서는 대부분의 독일 표현주의의 특징이 아닌 장식적인 특징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1911년에 베를린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파이닝거, 마케, 마르크와 교류하면서 그의 회화의 형태적인 구조가 힘과 짜임새를 갖추었다. 그러나 인간의 이미지는 거칠게 각이져 비틀리고 표정은 고통스러우며, 몸짓은 딱딱하면서도 산만하게 표현되어 한층 비관적이 되었다. 눈에 거슬리는 노란색과 흐린 푸른색을 강렬한 빨간색과 거칠게 대비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했다. 1914년부터 헤켈은 플랑드르 지방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으며, 그곳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친 엔소르, 베크만과 만나게 되었다. 풍경화에서 색채는 좀더 어두워졌으며 구성 요소들을 대립시켜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고, 작품의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1920년 이후의 작품은 좀더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본래의 이름이 카를 슈미트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는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들에 비해 그의 양식은 더 활력이 넘치면서도 거칠었다. 이런 특징은 특히 목판화의 투박한 표현방식에서 두드러졌으며, 색조의 변화 없이 대조되는 색채의 평면으로 이루어진 회화에도 반영되었다. 1906년 놀데와 함께 알젠 섬에 머물면서 놀데로부터 ‘기념비적인 인상주의’를 이어받았는데, 이것은 1907년 헤켈과 함께 방문한 당가스터에서 그린 풍경화들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 그의 기념비적인 회화양식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는 흑인 조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의 회화는 색조의 변화가 없는 원색들의 강한 대조와 거칠고 단순화된 형태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후에 슈미트-로틀루프는 원근법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를 사용하여 이런 거칠고 평면적인 형태를 수정해나갔는데, 이는 키르히너의 영향 또는 1924년 파리 여행과 1930년 이탈리아 여행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896~98년 드레스덴에서 회화를 공부한 오토 뮐러Otto Muller(1874~1930)는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1827~1901)의 영향을 받았으며,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표현하는 회화를 목표로 삼았다. 뮐러는 다작을 하는 화가였지만 1908년 이전에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을 나중에 파괴했다. 1908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0년 베를린 신분리파 가입을 거부당했다. 당시 거부당한 예술가들이 모여 개최한 전시회에서 브뤼케 그룹 화가들을 만나 브뤼케 그룹에 동참했으며, 1911년 키르히너와 함께 보헤미아 지방을 여행했다. 뮐러의 양식은 브뤼케 그룹의 영향으로 더욱 거칠고 딱딱하게 변해갔으며 윤곽선을 강조하게 되었다. 풍경 속의 누드 혹은 순수한 풍경화를 그렸으며 1920년 이후에는 집시도 모티프로 사용했다. 그는 능수능란한 기교를 지녔기 때문에 디스템퍼를 사용해 번들거림이 없는 마무리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브뤼케 그룹은 종종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에 상응하는 독일의 미술 운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야수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모티프를 자연에서 직접 취하고 추상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랑스 화가들이 늘 회화적 의도를 가장 주요시했던 것에 비해 독일 화가들은 주제에 임하는 화가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욱 주력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삶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 야수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더 왜곡되고 거친 표현을 추구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본능적이고 자발적이며 주관적인 것에 역점을 두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 민족의 고전적인 절제 감각은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브뤼케 그룹의 화가들은 야수주의 화가들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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