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주의Cubism

입체주의의 몇 가지 기법과 발견은 20세기의 다양한 미술 유파의 기법에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는데, 이 운동의 핵심은 1907년경부터 1914년에 걸쳐 형성되었다.
입체주의라는 용어는 마티스에 의해 큐브처럼 생겼다고 잠시 언급된 후 비평가 루이 보셀이 쓴 글에서 유래했다.
야수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낸 장본인 보셀은 1908년 11월 14일자 『질 브라 Gil Blas』 신문에 실린 브라크의 전시회에 관한 비평에서 ‘정육면체 cubes’와 ‘이상한 정육면체 bizarreries cubiques’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인상주의 그리고 야수주의와 마찬가지로 입체주의도 경멸에서 비롯된 명칭이었다.

입체주의 작품에서는 역사적·일화적·감각적·정동적인 것을 불문하고 주제 자체에 대한 관심을 거부하고 묘사하는 내용은 좁은 범위의 정물에 한정시켰다.
심지어 이 범위에서 묘사된 사물조차 샤르댕처럼 감정이입이나 개성의 암시 없이 표현되어 사실주의 그림이 형태를 구성할 때의 소재 같은 것이었다.
대기와 빛의 표현은 그 밖의 인상주의적 전통과 함께 단호히 배제했다.
또한 색채의 감각적 매력에 무관심하여 극히 일부의 고유색만을 사용했으므로 색은 종종 모노크롬에 가까웠다.
대개 직접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요소는 묘사된 주제이건 그림 자체이건 지적 원리의 우위 아래 종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율동적인 선의 서정성과 그라데이션은 사라지고 기하적 형태가 중시되었다.
또한 동적인 표현도 포기했는데 이것은 훗날 미래주의의 공격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중요한 점은 자연주의적인 원근법과 삼차원의 환영적인 회화 공간 대신, 겹치고 교차해서 만나는 반투명한 몇몇 평면이 조금씩 후퇴하면서 얕은 회화 공간을 열어 가는 새로운 원근법이 사용된 것이다.
입체주의자들의 주요 목적은 이차원적 캔버스를 환영을 일으키는 삼차원의 회화 공간으로 전환시키지 않고 이차원 평면에 대상의 입체성과 부피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대상을 묘사하려면 특정 시각과 장소에서 보이는 부분적인 모습 대신, 대상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을 그리는 것이 필요했다.
이 목적을 위해 대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동시에 묘사되는데, 사실 사물의 형태는 많은 기하적 평면으로 분해되고 그러한 평면이 다양한 관점에서 동시에 재구성됨으로써 새로운 하나의 형태로 합쳐지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입체주의는 그들의 주장대로 사실적이었다.
단지 그것은 시각적이고 인상적인 사실주의라기보다 개념적인 사실주의였다.
입체주의는 자발적인 시각이라기보다는 지적으로 처리된 시각의 결과였다.

입체주의의 출현에 가장 중요하고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프리카인의 조각과 세잔의 후기 작품이다.
아프리카인 조각의 영향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이 작품은 입체주의 회화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화면 오른쪽에서 복수의 평면이 옮겨져 맞붙고 중앙 인물의 얼굴은 정면과 측면의 동시 결합을 보여주며 중앙 아래족의 정물 모티프는 시각적이라기보다 논리적인 원근법에 의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브라크는 세잔의 후기작에서 보이는 평탄한 회화 공간과 분석적 각도의 치밀한 평면 구성에 주로 영향을 받았다.
1907년 살롱 도톤에는 1906년에 타계한 세잔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같은 해에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가 발표되었다.
이 편지에서 세잔은 “자연을 원통형, 구형, 원뿔모양으로 다루어야 하며 모든 것을 원근법 속에 넣어야 한다.
즉 물체와 평면의 각 측면이 하나의 중심점을 향해 모이도록 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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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주의와 입체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


여기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에 관해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유학파는 물론 일본의 작가들도 이 세 가지 사조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었고 다만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세 사조의 작품들을 눈으로 보고 스스로 이해한 데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이 이런 사조의 양식을 영향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고는 하지만 눈으로 본 것을 피상적으로 모사한 것들에 불과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말한 대로 서양의 호랑이를 일본 화가가 고양이로 그린 것을 우리나라 유학파가 부엉이로 옮겨놓은 격이었다.
고양이는 그나마 호랑이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부엉이는 고양이를 잘못 그려 생겨난 것으로 호랑이와 비교할 경우 전혀 그 영향을 지적할 수 없다.

1905년에 등장한 야수주의와 1906년에 등장한 입체주의는 20세기의 첫 혁명으로 집단이 조직적으로 폈으며,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으므로 당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오늘날에도 그것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이 두 혁명은 현대를 특징짓는 동요, 불안, 근본적 변형의 요청 등 시대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자 결과였다.
예술철학의 견지에서 말하면 이성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어 이에 대한 모반이자 20세기 초 유행했던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직관 찬양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다. 시대적 요구란 일체의 관습에 대항하며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진실을 밝히려는 욕망의 분출이며, 새로운 세기를 맞아 거기에 걸 맞는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희망적 노력이었다.

이 시기에 직관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이의 철학적 리더가 베르그송이었다.
자연과학의 위대한 새로운 가설이 이성보다는 직관에 의존해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런 점을 오늘날의 물리학자들도 동감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예술가들은 과학에 대해 두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취해 왔는데 하나는 예술에 있어서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직관을 권리로 여기고 과학에 반발하는 것이었다.
야수주의 예술가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 반면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을 과학으로 바꾸어놓든지 아니면 자신들의 과학을 창조하려고 했다.
따라서 야수주의 회화에는 막연하고 애매한 요소가 있었고, 입체주의 회화에는 분석·합성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질서가 있었다.
입체주의가 더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 기욤 아폴르네르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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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Expressionism

표현주의는 1911년 독일 비평계에서 프랑스의 야수주의, 초기 입체주의, 그 밖의 인상주의나 자연 모방에 반대하는 화가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처음 사용되었다.
20세기 초의 독특한 경향이었던 표현주의는 1880년대 반 고흐의 작품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1905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등장했는데, 특히 독일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933년 나치의 등장으로 ‘퇴폐 미술’로 낙인찍혀 이들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방대한 편지에서 표현주의적 신조를 표명했으며, 그 작품은 “인간의 가공할 정열”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을 과장했다.
그는 사물이 예술가의 내부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가장 표현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색과 선을 철저히 정동적情動·상징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 자신은 아직도 본인이 인상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고갱은 스스로 인상주의와 단절했다.
그는 형태의 단순화, 평면화, 색채의 비사실적인 요법, 음영의 배제, 주제의 원시주의적 단순성, 격렬함, 상징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결코 반 고흐에게 뒤지지 않는 자극을 표현주의자들에게 주었다.

뭉크도 불안, 공포, 사랑, 증오 등 가장 원초적인 감정 표현을 위한 격렬한 색과 왜곡된 선의 기법을 일찍 터득한 화가였다.
그는 자신의 병적 편집 관념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판화 기법 효과로 표현했다.
독일에서 뭉크의 영향은 대단했다.
그 밖의 초기 표현주의자로 벨기에의 앙소르와 스위스의 호들러 등이 있다.
앙소르는 카니발의 그로테스크한 가면, 인간의 비열하고 섬뜩한 모습을 우화나 동판화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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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망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중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밑거름이 된 루소의 사상


18세기 중반까지 유럽 사람들이 군주의 압정에 시달리면서도 군주제 자체를 반대하지 못한 이유는 군주를 신격화한 아주 오래된 관습때문이었다.
가장 지성적으로 발달한 철학자, 예술가 계층조차도 정치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취하면서 군주제를 지지했다.

관습보다는 이성을 중시한 장 자크 루소는 일찍이 전제군주에 반대하고 철학자들이 부패했다면서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위한 논문>으로 1750년 디종 아카데미로부터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학문과 예술을 회복하는 것으로 도덕을 정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다.
그는 논문에서 특히 예술과 문학을 공격하면서 이 분야의 사람들이 부자와 권력자들의 사슬에 묶인 노예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루소는 자신의 주장을 유럽의 모든 군주제에 적용했다.
그의 논문은 발표 후 특히 3년 동안 과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좀더 진전시키면서 돈을 목적으로 하는 군대체제를 비판했으며 국민의용군의 조직을 옹호했다.

이 시기에 루소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집한 <백과사전>에 음악에 관한 이론을 실었다.
1752년에 오페라 <동네 점쟁이>를 작곡했고 이 작품은 처음으로 퐁텐블로 궁에서 소개되었으며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튿날 루소는 루이 15세에게 장려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거부했다.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에서도 소개되는 등 매우 대중적이었지만, 프랑스 음악과 전제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753년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그해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가 제시한 문제, 인간 불평등의 기원과 이것이 자연법에 따른 것인지에 관한 논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관한 논문>(1755)에서 인간의 자연적 상태를 가정하면서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동일하지 않더라도 평등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서로가 서로를 피했으며 각각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에게 종속되는 일은 없었다는 논리를 폈다.
루소에 의하면 지리적 지각 변동으로 인해 인간이 함께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여러 신화에 인간의 '황금기 golden age'로 설명되어 있으며, 인간은 원시사회를 이루면서 사랑, 우정, 노래, 춤의 즐거움과 질투, 증오, 전쟁의 고통 등의 감정을 겪으면서 선과 악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과 밀의 발견이 인간 진화의 세 번째 단계가 되었으며 인간은 자신의 재산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철과 밀이 인간을 문명화시켰고 또한 인간의 종족을 파멸시켰다. ...
땅을 경작하면서부터 필수적으로 계층이 생겨났고 ...
재산을 상속하는 경우가 허다해지고 이윽고 세상 전체에까지 만연되어 서로가 서로의 땅에 경계를 만들고 상대방의 땅을 빼앗게 되고 ...
미성숙된 사회는 가공할 만한 전쟁을 야기시켰다."

루소는 전쟁의 시기에 지주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한 것으로 보았다.
루소는 원시사회에서의 자연적인 인간 평등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디드로의 요청으로 <백과사전>에 기고하였고, 1755년에 따로 발표한 <시민론: 경제 정치를 위한 논문>에서 사회적 불평등으로 빚어진 불의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세 가지를 제안했다.

1. 정치적 권리와 의무의 평등, 즉 부유층이 어떤 사람의 자유나 삶을 침해할 수 없는 '일반 의지 general will'를 존중할 것.
2. 국가를 위한 계발의 의미에서, 그리고 고대 스파르타에서와 같은 준엄한 도덕을 위해 모든 아이에게 공공교육을 시킬 것.
3. 상속재산과 사치품에 부과하는 세금과 공공재산의 자원을 혼용해 경제적, 금융적 체계를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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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끝
 

미술에서는 궁정화가들의 영향이 컸다.
예를 들면 프랑수아 부셰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1756)은 당시 보편적인 미적 취향이 되었으며 화가지망생들에게 규범이 되었다.
부셰의 작품은 로코코풍으로 이 양식의 특징은 쾌, 환상, 즐거움, 도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로코코는 바로크의 마지막을 장식한 양식이자 르네상스 최후에 만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로코코 양식이 프랑스에 소개된 것은 1700년경이었고 18세기에 유럽 전역에 성행했다.
로코코는 회화와 건축에 나타난 양식으로 그 특징은 밝고 우아하며, 우스꽝스럽거나 쾌활하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로코코는 바로크(Baroque, 포르투칼어 바로코Barocco에서 온 말로 '불규칙한 진주나 돌'을 의미) 양식에 반발하여 생긴 양식이지만 동시에 바로크로부터 진전된 양식이다.
로코코Rococo란 말은 바로코Barocco와 돌이란 뜻의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의 합성어이다.
로코코의 어원적 의미는 '비속하게 현란하거나 잘 꾸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경멸적인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로코코 예술가들은 바로크의 복잡한 구성은 받아들이면서도 화면의 복잡함, 칙칙한 색, 지나친 허식 대신 밝은 핑크색, 파란색, 초록색을 사용하면서 때로는 흰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의 지나치게 과대한 장식에 진력을 내고 우아하면서도 편리한 점을 요구했다.
로코코는 이런 요구에 부응해서 처음에는 주로 장식적이었다.
로코코의 대표적인 화가는 와토이고 로코코의 성숙된 낙천적 정신을 잘 표현한 화가들로는 부셰와 프라고나르를 꼽을 수 있다.

로코코 회화의 전형적인 모티프는 남신과 여신의 호색적인 기질에 관해 전래된 신화와 님프, 목자가 있는 목가적 장면들이었다.
신과 목자는 도자기 인형에도 사용될 만큼 흔한 주제였으며 파스텔 핑크,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등이 주로 사용되어 화사하게 나타났다.
로코코 회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해주었지만 정신적인 면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계몽주의 철학자와 작가들은 회화가 단지 장식적이거나 감각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디드로는 말했다.
"먼저 날 동요시켜라. 날 놀라게 하라. 날 공격하고 전율하게 하며 울게 만들고 조바심나게 하고 화 나게 하라. 그리고 나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눈을 진정시켜라."

디드로의 말에서 로코코 회화가 무엇을 결여했는지 알 수 있다.
시각적으로만 요란한 로코코 회화에는 관람자의 정신 혹은 영혼에 호소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미적으로 이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던 시기에 다비드가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프아수아 부셰
로코코 화가로 알려진 부셰는 젊었을 때 와토를 좋아하여 그의 많은 작품을 판화로 제작했다.
그는 1727~31년 이탈리아로 가서 수학했고 파리로 돌아와서는 빠르게 화가로 성공했다.
1765년 앙립미술아카데미의 책임자, 루이 16세의 궁정 수석화가가 되었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퐁파두르는 화가들 가운데 부셰를 가장 좋아했다.
부셰는 그녀에게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으며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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