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커처Caricature
 
캐리커처Caricature는 이탈리아어 카리카레Caricare에서 연유한 말로 '무거운 짐을 지게 하다' '과장하다'라는 뜻이다.
얼굴의 각 부위와 사람의 육체적 특징을 과장하거나
어떤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신체를 왜곡하고
때로는 신체의 일부를 동식물로 변경시켜서 표현한다.

캐리커처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풍자의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초상적 요소가 강하며 대상이 되는 인물이 어느 정도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음을 전제로 한다.
다른 하나는 동시대의 풍속, 습관 혹은 전통을 비판하는 것으로 풍자의 농도는 전자보다 떨어지지만 유머나 우스꽝스러움의 표현이 내재해 있다.
이 경우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이며 인간집단의 특징을 포착하여 주관적으로 과장하는 성격이 농후하다.
브뤼겔P. Brueghel(1525/30경-1569)의 판화가 좋은 예가 되는데 그는 기묘한 우화적 상황설정을 이용하여 풍자의 맛을 고조시켰다.
캐리커처는 미신으로부터 자유롭고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벗어난 미를 추구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르네상스적 미의 패러다임인 조화와 균형을 깨는 데 적절했다.

캐리커처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한 화가로 도미에H. Daumier(1808-79)를 꼽을 수 있다.
시민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던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캐리커처가 전성기를 맞았다.
18세기 말에 발명된 석판화는 캐리커처 발달에 일조했다.
도미에는 뛰어난 소묘 솜씨로 석판에 부드러운 초크로 교묘하게 대상을 나타냈다.
추한 면을 과장한 캐리커처에서는 툴루주-로트렉과 키르히너의 그림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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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초상을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Portrait 내지는 Portraiture라 하고,
독일어로는 Blidnis 내지는 Portrat라고 하는데,
Bildnis를 제외하고 모두 라틴어 Protraho에서 유래했으며 '끌어내다' '노출시키다'라는 뜻이다.
상상의 인물 묘사는 예외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묘사할 경우 그 인물과 닮은 점, 즉 초사성이 요구된다.
인물의 독자성과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초상화의 목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목구비와 신체의 특징과 더불어 표정이나 제스처가 개성을 나타내는 요소로 사용된다.

초상화에서는 묘사대상인 인물에 얼마만큼 충실해야 하는가가 과제이다.
인물의 결점도 묘사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소 수정을 가해 이상화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1920년에 신설된 함부르크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한 파노프스키는 초사성과 이상화의 양극 사이에서 화가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작품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제와 의미가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초상을 전문으로 그린 초상화가가 출현한 것은 16세기이며 한스 홀바인 2세(1497/98-1543), 이탈리아의 모로니(1525년경-1578), 네덜란드의 모르(1517/21-1576/77), 스페인의 산체스 코엘로(1531/32-1588)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궁정에 살면서 궁정초상화를 발전시켰다.
17세기에 초상화를 세련되게 더욱 진전시킨 화가들로는 반 다이크(1599-1641)와 벨라스케스(1599-1660)를 꼽을 수 있다.
초상화의 여러 가지 기본형식은 르네상스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다 빈치(1452-1519), 라파엘로(1483-1520), 티치아노(1488/90-1576)가 여러 종류의 초상을 그렸다.
뒤러(1471-1528)가 1500년에 그린 <자화상>은 위의 계열에 속한다.
이는 화가가 자기 자신을 의식했다는 증거이다.
정신성을 강하게 표현한 많은 자화상을 남긴 사람으로 17세기의 대가 렘브란트(1606-1669)를 꼽을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엄격한 인물묘사로 유명한 고야(1746-1828), 빼어난 데생력으로 초상을 그린 앵그르(1780-1867), 광인의 초상을 그려 유명한 제리코(1791-1824)가 있다.
이후 카메라의 발명으로 초상화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사진이 초상화를 대신하게 되자 인상 통찰을 심화시킨 표현주의 초상화가 두드러졌는데 뭉크, 클림트, 쉴레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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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Landscape

원래 이 말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방에서 사용된 프라이만어인 Landskap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자연의 경관을 묘사한 그림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로 처음에는 이 말이 생겨난 지역, 즉 네덜란드 지방의 장르로서의 풍경화를 의미했다.
화가는 관람자의 즐거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인공적 자연을 만들기도 했다.
풍경화는 본래 무질서한 자연에 하나의 통합을 부여하면서 자연 자체보다 더 자연다운 외모를 그리는 것으로 화가가 의식적으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화가의 인위성에 의해서 자연성이 달성된다는 의미에서 보면 풍경화는 자연의 인간화된 이미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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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는 주제에 거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앙리 마티스가 <화가의 노트 A Painter's Notes>에서 "회화는 결국 표현이다"라고 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력 있는 미학으로 받아들여진다.
표현에 대한 마티스의 강조는 그로 하여금 야수주의 운동을 전개하게 했고 이는 체계적으로 전개된 프랑스 표현주의로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었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마티스는 얼굴을 초록색으로 나무를 붉은색으로 칠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회화란 눈으로 본 것을 눈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낀 것을 마음에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화가 자신의 감성과 사고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려는 노력이 라틴족에 한했던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도 이런 운동이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다리 그룹을 중심으로 발현된 게르만족의 표현주의는 마티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족의 표현주의와 비교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표현주의는 모두 1905년에 발현되었고 미술사에서는 이 해를 표현주의의 출발로 삼고 있다.
쉴레와 코코슈카에 의해 전개된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는 조금 후에 나타난 현상으로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적으로 나타난 것이 특기할 만하다.

표현은 회화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조각, 건축, 영화, 댄스 등 다양한 예술에서 20세기의 새로운 개념으로 확산된 미의 혁명이었다.
눈으로 분별하는 미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분출되는 솔직한 감성과 사고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는 미의 제전이었다.
따라서 표현주의는 시각예술을 시각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정신의 문제로 확산시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만이 아니라 막 잠에서 깨어나 하품하는 여인의 모습도 보기에 따라서는 아름답고, 수줍어하는 여인의 누드뿐만 아니라 가랑이를 벌리고 음부를 드러낸 여인의 누드로 아름답다.

표현주의는 주제에 거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풍경화를 그리는 표현주의자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무시하고 색을 기분 내키는 대로 사용하게 된다.
황혼의 하늘과 대지를 강조하기 위해 온통 붉은색을 칠할 수 있고, 바다를 핑크색으로 칠해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다.
표현을 위해서라면 자화상이나 여인의 누드를 정충으로 장식할 수도 있고, 인물을 공중에 매달린 모습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회화와 조각을 시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고의 문제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이런 사고가 유럽에 만연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 표현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
표현주의 화가들은 산이나 들에서 주제를 찾는 대신 작업실이나 카페에서 동료들과의 열띤 논쟁을 통해 문학, 철학, 신화 등에서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회화는 문학, 철학, 신화 등의 도움으로 내용이 풍요로워졌다.
19세기 상징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술가의 공상과 환영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나는 데는 데카당스 문학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시와 소설이 캔버스의 이미지들로 나타나는 경향이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정의를 전면으로 부정하기에는 아직 미흡했다.
왜냐하면 상상의 세계 역시 가시적 세계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변화는 부분적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관련이 있다.

회화를 재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시적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의 모방'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했다.
19세기 말에 나타난 이런 조짐이 표현을 위해서라면 가시적 세계마저도 정신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그림들이 나타났다.
회화적 구성을 위해 눈에 보이는 대상을 색으로 쓱쓱 문질러 없애거나 색의 대비로 배경을 바꾸었다.
또한 자연주의 색을 거부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색으로 대신하고 지나친 과장과 생략을 통해 관람자의 시각과 판단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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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미켈란젤로!

앙드레 말로는 "모던 아트는 의심할 나위없이 예술과 미의 개념이 구분되던 날 태어났다"고 했다.
말로에게 최초의 모던 아티스트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였는데 미가 곧 예술이라는 쾌쾌묵은 관념을 고야가 처음 부정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성modernity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최초의 모던 아티스트가 누구인지 정해질 것이며
이는 곧 현존하는 미술사의 일부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로와는 달리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마네와 모네를 최초의 모던 아티스트들로 꼽는다.
많은 미술사 저서들이 모던 아트의 출발점을 마네와 모네의 작품들에서 삼고 있음을 본다.
미술사학자들이 두 사람의 작품들에서 전통 미학과 단절하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증거들을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양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통 미학이란 르네상스식으로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는 것을 의미했다.
르네상스식이란 말을 르네상스 패러다임이란 말로 바꾸어서 이 패러다임은 바자리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그가 <예술가 열전>이란 저술을 남겼으므로 그에 의해서 미술의 개념이 생겨났다.
그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비교 설명하는 가운데 가장 규범이 될 만한 예술가로 미켈란젤로를 꼽았다.
바자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아티스트가 미켈란젤로였던 까닭은 그보다 더 대상을 정밀하게 바라보고 그 비례를 완벽하게 구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사람들은 완벽한 것을 보면
"오, 미켈란젤로!"
하고 감탄하는데 미켈란젤로를 완벽한 예술가로 보기 때문이다.
대상을 정밀하게 바라보고 그 비례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 19세기 중반까지 서양미술의 전통 미학 혹은 패러다임이었다.

오, 카메라!
"어떻게 하면 대상을 정밀하게 바라볼 수 있고 그 비례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심하던 화가들에 의해서 19세기 중반 카메라가 발명되었다.
카메라는 원근법의 도구로 착상되어 발명된 것이다.
카메라는 이내 미켈란젤로의 위상을 위협했으며 서양미술의 전통 미학 혹은 패러다임을 위협한 것이 바로 카메라였다.
화가들은 카메라보다 더 완벽하게 대상을 재현할 수 없게 되자 달리 방도를 찾아야 만했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 데서 화가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양미술이 더이상 존립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화가들은 미술이 곧 사실주의라는 오래된 관념을 무너뜨리고 미술은 추상과 표현이라고 주장해야 했다.
추상과 표현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권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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