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와 폴 고갱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1888년 11월 16일경 고갱이 아를에서 반 고흐의 노란집에 묵고 있을 때 모호한 구성의 그림을 그렸는데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이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건초와 돼지가 있는 가운데 누드 여인”이라고 언급했다. 해석하고 읽어내기 어려운 작품이다. 상단 끝에 돌로 된 벽이 조금 보이고 여인은 허리까지 알몸을 드러낸 채 등을 돌렸는데, 등과 어깨는 하얀 피부지만 팔꿈치 아래 왼손은 벌겋게 탔다. 화면 아래 왼편에 핑크빛 오렌지색의 돼지 몸통이 보이고 여인 오른편에도 돼지 뒷부분과 꼬리가 보인다. 여인의 허리 아래 갈퀴가 보여 여인이 작업 도중에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이 모호해서 앉아 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를로 오기 전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드로잉한 여인의 기억을 되새겨 이 작품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인의 모습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의 누드를 상기시킨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들라크루아가 영국을 여행한 후 연극에 대한 이해가 한층 많아진 후 그린 것으로 바이런의 희곡 <사르다나팔루스>(182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1828년 살롱전의 소개 책자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사르다나팔루스는 거대한 화장대 위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 누워 화관들과 궁정의 근위병들에게 그의 처첩들과 시종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말들과 개들까지 모조리 목을 자르라고 명한다. 그의 쾌락에 봉사했던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은 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바이런의 희곡은 수도 니네베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감연히 분신자결을 택한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군주 사르다나팔루스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아시리아 중심으로 왕 옆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미르하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침대에 엎드린 채 자신의 목을 자르려 다가오는 근위병들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구성이다. 요란한 살육의 장면들이 적색, 오렌지색, 황색, 갈색 등으로 현란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고전주의에 대한 형식 파괴를 보여주는 낭만주의의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당시 화가들은 발루아 지방의 역사 혹은 16, 17세기의 영국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사실들을 찾아내어 이런 것들을 극적인 장면들로 묘사했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살인이나 전투, 학살장면 일색이었다. 그래서 일부 관람자들은 화가들이 대중을 타락시켜서 방탕함에 짓눌리게 한다고 비난했다.

고갱은 1888년 크리스마스에 아를을 떠나 파리로 간 후 그곳에서 두 달 머물다가 퐁타방으로 갔다. 브뤼셀과 볼피니에서의 전시가 경제적으로 실패하자 빚이 늘었고 우울해졌다. 퐁타방은 돈이 적게 들어 그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시골이었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퐁타방에 계속 머무는 것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아 1889년 10월 근처의 르 풀뒤로 갔다. 바닷가의 이 작은 마을은 화가들에게 제2의 브르타뉴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안주하기 전 그곳을 자주 찾았고 1889년 봄에 <파도 속에서>(고흐 425, 426)를 그렸는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와 유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여인이 수영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파도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해서 삶의 즐거움을 맞이하는 의미를 담았다. 고갱은 이원론적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삶과 죽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인 것이다. 그가 르 풀뒤에서 작업한 작품들은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다. 등을 관람자에게 돌린 여인의 모습은 <신비롭게 보이는>과 <큄퍼 주전자가 있는 정물>에서도 삽입되었다.
 

고갱은 르 풀뒤에서의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타히티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타히티행을 결정한 것은 1890년 여름이 다할 무렵으로 반 고흐가 자살한 그해 7월 27일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는 르 풀뒤에서 르동에게 편지를 썼다.
“마다가스카르가 좀더 유럽 가까이 있지만은 타히티로 가려고 하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선생이 좋아하는 저의 예술이 먼 곳에 심어지고 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에서 성장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서 지내야 만합니다. 사람들이 ‘고갱은 끝났어. 그가 보여줄 것이란 더 이상 없어’라고 말하면서 저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1890.9)

고갱이 타히티로 간 이유 가운데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컸다. 그는 타히티에서는 거의 무일푼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1891년 2월 23일 월요일 드루오 호텔에서 작품 서른 점을 경매에 붙여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한 달반 전부터 언론과 잡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이 일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고갱의 친구 모리스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로 하여금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에게 고갱의 작품에 호감을 주는 글을 청탁했다. 미르보의 글이 전시회가 열리기 한 주 전 1891년 2월 16일 <에코 드 파리>에 발표되었고, 사흘 후 일간지 <르 피가로>에 장문의 글이 기고되었으며, 경매 카탈로그에도 기재되었다. 미르보는 고갱을 “화가, 시인, 사도, 악마”라고 적으면서 회화의 그리스도라고 추켜세웠다. 미르보는 잉카의 후예인 고갱의 작품에서 야만적 아름다움과 모호한 상징주의의 요소가 발견되며 절대적인 고립을 위해 마르티니크로 간 적이 있는 고갱은 이제 자신의 꿈의 세계에 좀더 근접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그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고갱은 미르보의 글에 대단히 만족해하며 그에게 직접 감사를 표했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도 고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오리에도 고갱을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상징주의를 개척한 “축복받고 영감을 가진 예언자”라고 극찬하면서 회화에서의 상징주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자신의 명성을 쌓은 고갱은 정부 공무원과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는데, 그가 편지를 보낸 인사들 중에는 공화당 대변인이자 예술부 장관 안토냉 프루스트와 철학자이며 역사가 에르네스트 르낭도 포함되었다. 고갱은 프루스트에게 ‘타히티에 대한 정부 후원 미션’을 신청했으며 정치인으로 훗날 국무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는 “타히티의 풍경과 풍물을 그리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받게 해주었다. 고갱은 예술원으로부터 마르세유에서 타히티행 배표를 얻을 수 있었고, 식민지 책임자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갖게 되었다.

고갱은 1891년 4월 1일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타히티로 향했다. 그가 탄 배가 누메아에서 일주일 정박하고 타히티에 도착한 것은 6월 9일이었다. 타히티는 남태평양 중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소시에테 제도 가운데 동쪽 윈드워드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1767년에 발견되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프랑스 관리와 군인이 통치하던 곳이다. 고갱의 표현으로 하면 “신비스러운 것들이 요염한 조화를 이루는 환희와 적막”을 맛볼 수 있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그는 만족해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 근처>를 그렸는데 등을 돌린 동일한 여인이 삽입되어 있어 그가 실재에 상상의 인물을 삽입했음을 보고 또한 이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893~94년에 제작한 판화에서도 이 이미지를 삽입했다.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세상을 떠났다.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의 도움을 청한 후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으로 그의 아버지의 사인과 같았다. 그의 유해는 가톨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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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누드 여인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폴 고갱(1848~1903)은 반 고흐와 세잔과 더불어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조각가, 판화가이다. 아버지는 오를레앙 출신으로 기자였고 어머니는 페루 출신의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그림을 그리다가 1883년 본격적으로 회화에 전념하기 시작했으며 1886년 가족을 버리고 이후 5년 동안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에서 살았다. 그의 강한 개성과 미술에 대한 사상에 매료되어 그곳으로 모여든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만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1887년 4월 파나마로 가서 파나마 운하를 개발하는 프랑스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대량 해고바람에 해직되고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통나무 집에 거주하며 지냈다. 고갱은 열대의 빛나는 다양한 색과 공간 등에서 감동을 받았고 원주민을 모델로 회화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더 이상 인상주의자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는데, 태양이 작열하는 열대에서는 구태여 빛이 사물에 닿아 일으키는 작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색을 토막내어 칠하지 않아도 되었고, 원색들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빛과 색, 공간과 부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긴 것으로 이는 화가에게 매우 중요한 깨우침이었다. 그는 색을 평편하게 칠하면서 색들이 대조를 이루게 했으며 부드럽고 유연한 아라베스크 선으로 사물을 단순화해서 표현했다. 그러나 고갱과 라발은 말라리아와 이질, 그리고 간질환으로 심하게 앓았다. 두 사람은 1887년 11월 파리로 돌아왔다.

고갱은 처음으로 개인전을 부소&발라동 화랑에서 가졌는데 화랑의 회화부 책임자가 반 고흐의 동생 테오였다. 고갱은 브르타뉴와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작품과 도자기들을 개인전에 소개했다. 평론가 옥타브 미르보는 “기괴한 초목과 꽃, 엄숙한 형상들, 장엄한 석양이 있는 숲의 장면은 종교적 신비와 에덴동산을 닮은 성스러운 풍요를 안겨준다”고 평했다.

고갱은 인물을 장식한 단지를 많이 제작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누드로 장식하면서 향후 2년 내에 점토와 나무로도 제작할 계획이었다.(고흐 257) 그가 클레오파트라를 단지에 장식하게 된 것은 퓌비 드 샤반의 회고전을 관람하고 난 후였다. 이 회고전은 고갱이 파리로 돌아온 직후인 1887년 11월 11일, 뒤랑-뤼엘의 화랑에서 개최되었는데 드 샤반은 당시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였다. 고갱은 특히 1872년작 <희망>(고흐 258)에 관심을 갖고 이 누드 여인을 피부가 검은 여왕으로 자신의 도자기에 삽입했다. 상징주의의 대가 드 샤반은 반자연주의적이며 시적인 장면을 주로 그렸으며 침묵이 흐르는 그의 작품은 이집트인의 회화와도 같았다. 고갱은 드 샤반의 모티프를 현대화하여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성적으로 호감을 주는 여인으로 재해석했다. 드 샤반은 봄의 풍경 속에 누드 여인을 삽입하여 자연의 재탄생을 시사했지만, 고갱은 가슴을 크게 하고 성에 굶주린 여인으로 변모시켰다. 전통적인 주제를 변모시키는 것은 그 밖의 장식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의 주요 예술적 행위 중 하나가 되었다.

누드 여인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을 통해 나타났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1896년 4월에 <왕후>(고흐 796, 797)를 그렸는데 독일의 대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르네상스 회화 <다이아나>(고흐 798)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속의 동일한 여인을 <열대 풍경 속에 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누운 여인>(고흐 795)이란 제목으로 7년 전인 1889년 말 참나무에 릴리프로 제작한 적이 있다. <왕후>를 그린 후 파리에 있는 몽프레에게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벌거벗은 왕후는 풀의 카페트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하녀 한 명은 과일을 따고 있으며, 큰 나무 근처에서는 두 남자 노인이 선악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네. 배경에 바닷가가 보이고 ... 격조 있게 울려 퍼지는 색을 이렇게 써본 적이 없네. 과일이 무르익었으며, 개는 경계를 펴고, 오른편의 두 마리 비둘기는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네.”

고갱의 누드 작품은 타히티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유럽의 영향이 반영되었다. 비록 타히티 여인을 모델로 그렸지만 미개인의 누드로 한정하지 않고 유럽인의 감각으로 보는 객관적 개념의 에로스를 표현하려고 했다. 그가 유럽인의 시각에서 타히티 여인을 바라본 것은 배경에 나타난 선악과나무와 나무를 둥글게 감고 있는 뱀의 형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분명히 성서를 참조한 것이다. 고갱은 말했다. “타히티의 이브는 매우 섬세하며 자신의 순진무구함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눈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비밀은 불가사의함으로 남아 있다.” 고갱은 원죄를 암시하지 않은 채 열대의 이브를 묘사했다. 1896년 봄 고갱은 연속적으로 원주민 여인들 누드를 신비감에 싸인 모습을 그렸으며 여인들은 꿈속의 영상처럼 나타났다. 그에게는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색으로 충분했는데, 노란색, 붉은색, 파란색, 혹은 푸른색만 있으며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미개인 누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의도적으로 침대 커버와 배경을 꽃으로 장식하여 누드의 아름다움을 더욱 드려내려고 한 작품이 <두 번 다시, 오 타히티>(고흐 811)이다. 이 작품은 잘못 그려진 캔버스를 재활해 사용한 것이다. 풍경화가 실패하자 물감이 두텁게 칠해진 윗부분을 잘라내고 캔버스를 다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므로 그가 의도적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기다란 캔버스가 되었다. 그는 여기에 맞게 침대에 길게 누운 누드를 그렸는데 1892년에 그린 <저승사자>(고흐 730)와 유사한 구성이지만 좀더 우수에 젖어 있고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상징주의 작품이다. 침대 위 누드 뒤로 누드를 바라보는 새가 한 마리 보인다. <저승사자>에서의 모델은 테하마나이지만 이 작품의 모델은 당시의 동거녀 파라후이다. 침대는 고갱이 상상해서 그린 것으로 짐작되며 두 작품 모두에서 침대 머리는 둥근 형태이다. 빛이 대각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비치는 조명을 사용했으며 몸의 섬세한 명암을 묘사했다.

고갱은 1901년에 들어서서 연속적으로 꽃이나 과일이 있는 정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화상 볼라르가 이런 작품이 팔기 수월하니 많이 그리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볼라르는 꽃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라면 자신이 구입하겠다고 했으므로 고갱은 정물을 그리게 되었다. 그는 자연에 나가 그리지 않고 있다면서 타히티는 꽃의 땅이 아니라고 했다. 정원에 심은 몽프레가 보내준 씨앗들은 꽃으로 피어났고 그것들을 꺾어다가 자신이 원하는 정물을 그렸다. 1901년에 그린 해바라기 정물이 네 점 남아 있다. 해바라기 그림은 반 고흐가 1888~89년 아를에서 그린 것과 관련이 있다. 고갱은 반 고흐가 자신이 사용할 방을 위해 그린 해바라기를 가까이서 늘 보았을 뿐 아니라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모습을 그린 적도 있다. 그는 <해바라기와 퓌비 드 샤반의 <희망>>(고흐 845)을 그렸는데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에 배경으로 종종 사용했다.

고갱은 1898~99년에 목판화를 제작하기 위한 목판을 14점을 제작했다. 그는 1900년 1월 볼라르에게 적었다.
“다음 달 약 475점의 목판화를 보내려고 하는데 25장에서 30장을 찍은 후 각각의 목판을 없애려고 합니다. 절반 가량의 목판은 이미 두 번이나 사용한 것으로 나 같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때 제작한 14점의 목판화는 <노아 노아>를 위해 1894~95년에 제작한 어두운 밤의 장면이나 남자와 여자의 공포를 묘사한 열 점의 목판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들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장면들이며 과거의 주제들을 인용한 것들이다. <망고를 든 (지친) 여인>(고흐 852)에 크라나흐의 <다이아나>를 변형시킨 <왕후>가 삽입되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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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과 반 고흐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상징주의는 1885년경~1910년경에 성행했던 문학과 미술운동으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적 목표에 대한 반동이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상징주의 회화는 색채와 선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며, 에로틱한 것과 병적인 것도 중요하게 다뤘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했다.

예술이 곧 표현이라는 생각은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이미 나타났고 이를 분명하게 글로 밝힌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미술에서 표현을 중시하게 된 것은 천재의 개념과 함께 낭만주의 시대에 수립되었다. 천재는 어떤 분야에서건 정신적인 세계, 즉 절대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우월한 통찰력을 가지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우월한 인성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자신과 유사한 수준의 통찰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근거하여 예술작품의 가치가 예술가의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갱과 반 고흐의 작품에는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요소가 함께 내재해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 그리고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에서 이런 점을 발견하기란 쉽다.

고갱이 반 고흐에게 보낸 자화상 <레 미레제라블: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고갱 16)을 보면 성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려고 했다”면서 1888년 10월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동심 어린 꽃송이와 소녀 같은 배경이 우리의 예술적 순수성을 나타낸다네. 장 발장에 관해 말하자면, 사회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힘이 부랑자처럼 달라진 것이라네.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 자신을 장 발장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넘어서 사회에서 비참하게 희생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한 것이네.”

고갱은 자신을 고뇌하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순진한 모습의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를 배경에 삽입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과 대조되게 하고 꽃무늬를 후광처럼 장식해 자신의 얼굴을 장 발장으로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이 작품과 편지를 받고 반 고흐도 답례로 <자화상 (폴 고갱에게 바침)>(고갱 17)을 고갱에게 보냈다. 그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에 수도승이 등장하는 피에르 로티의 소설 <마담 크리상템>을 읽었고 일본 판화 복사본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물과 불 같은 성격이 드러났는데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한 면이 있었다. 반면 반 고흐에게는 북유럽 사람의 기질인 거친 면이 있었으며,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 같은 사람이었다. 반자연주의적인 혹은 상징주의 그림을 주로 그린 두 사람은 지성이나 관망한 사물로부터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성에 기초하여 그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할 수 있다.(고흐 56)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나타내는 상징주의와 화가의 우월한 인성을 드러내는 표현주의는 종종 모호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예를 두 사람의 정물화와 인물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가 1885년 그린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고흐 8)은 세 가지 오브제 현대소설, 펼친 성경, 촛대로 구성되었다. 이런 오브제들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종종 등장한 것들로 반 고흐의 오브제 선택에는 새로운 점이 없다. 이 정물화의 특징은 크고 작은 것의 대비로서 커다란 성경과 작은 소설, 펼쳐진 책과 닫힌 책, 단색조의 책과 밝은 색상의 책을 꼽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모호한 느낌을 준다. 펼쳐진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유명한 ‘종의 노래’가 기록된 페이지로 이사야가 시적으로 예언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역할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으로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 La Joie de vivre>이다. 진리를 상징하는 성경은 커서 권위의 느낌을 주고 소설은 작지만 밝은 노란색으로 시선을 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졸라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에게 묻는다. 반 고흐는 이 정물화를 통해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반 고흐가 실재를 신성화하는 신성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는 경향으로 나아갈 때 고갱의 작품은 초자연적 이상주의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가 심화되어 고갱은 말년에 악마숭배 및 엑소시즘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고갱의 대표작 <설교 후의 영상>(고흐 24)은 1888년 9월 중순 퐁타방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시골뜨기 여인들이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서 환희를 경험하는 순간을 모티프로 삼았다. 반 고흐의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고흐 31)이 개신교 입장에서 본 새로운 종교화라면, <설교 후의 영상>은 가톨릭 입장에서 본 고갱의 환상적인 새로운 종교화라고 할 수 있다. 반 고흐의 환상이 실재적인 데 반해 고갱의 환상은 비실재적이다. 반 고흐의 작품이 물리적이며 자연주의적인 데 반해 고갱의 것은 형이상학적이며 초자연적이다. 고갱이 <설교 후의 영상>을 팔지 않고 브르통의 한 성당에 기증하고 싶어 한 것이 흥미롭다.

상징주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는 1891년 3월에 발표한 ‘회화에 있어 상징주의 운동’에서 고갱의 작품으로 상징주의를 설명했다. 오리에는 상징주의 성격의 작품에는 다섯 가지 내용이 필히 구비되어야 하는데 고갱의 작품에는 그것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1. 아이디어가 표현되어야 한다.
2. 상징적이어야 함은 고유한 표현이 아이디어에 있기 때문이다.
3. 추상적이어야 함은 일반적 의미 속에서 형태와 부호가 기록되기 때문이다.
4. 주관적이어야 함은 객관은 객관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자에 의해 관망한 부호가 되기 때문이다.
5. 장식적이어야 함은 이집트인, 그리스인, 원시인들이 예술적으로 장식했으며 그것들은 주관적, 추상적, 상징적,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리에의 다섯 요소는 고갱의 미학을 적절하게 설명했으며 20세기 미술의 특징으로 나타날 표현주의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반 고흐와 고갱을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선조로 찬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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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에서  
 
고갱, 테이블 커버와 야채의 정물에서 세잔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1885년 고갱이 그린 <정물이 있는 실내>는 일반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 정물화는 고갱이 코펜하겐의 아파트를 세얻어 1884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 늦게까지 가족과 함께 지낸 곳에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10년 넘도록 아마추어 화가로서 노력한 끝에 도달한 결정판이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정물을 그리면서 테이블 뒤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루엣으로 묘사했다.
테이블 커버와 야채의 정물에서 세잔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벽지의 경우 그가 소장하던 세잔의 정물화에서의 벽지를 그대로 사용했음을 본다.

이 정물화에서 특기할 점은 고갱은 정물을 그리면서 배경에 인물을 그림으로써 정물화와 인물화의 구분을 없애고 두 장르를 혼용한 것이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점은 공간에 대한 배분으로 창문 옆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침대가 유난히 높고 카드놀이를 하는 테이블은 침대보다 낮으며 다섯 사람이 보이는데 그들의 관계를 알 수 없다.
테이블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사용하는 붉은색 나무로 제작된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컵 탱가드tankard가 방쪽을 향한 열린 문을 앞으로 하고 위치되어 있는데 컵 너머로 열린 방안의 모습을 화가가 보고 그린 것인지 아니면 테이블 뒤 벽에 부착된 거울에 반대편의 방안 장면이 비쳐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고갱은 천을 배경으로 나무로 제작된 탱카드와 물주전자만을 사용해 1880년에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다.

반 고흐가 1885년에 그린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Open Bible>과 같은 해 고갱이 그린 <정물이 있는 실내>를 비교하면 두 사람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두 사람의 회화적 경향은 이후 그들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두 정물화 모두 전통을 무시한 창작이었으며 상징주의 요소가 강렬하게 나타난 것들이고 자신들의 미적 정체성을 발휘한 작품들이다.

반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4년 동안 스스로 노력한 끝에 에밀 졸라의 소설과 성경책 그리고 촛대를 사용해 정물화를 그렸다.
특히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과 노력이 이 정물화에서 결실을 맺었다.
이 작품에서 그가 사변적으로 구성했음을 알 수 있는데 졸라의 소설은 낡고 덮인 채로, 그러나 성경책은 펼친 페이지로 모노크롬으로 그리면서 조명 효과에 의한 밝은색을 사용한 점과 두 권의 책에 대한 묘사 등에서 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펼쳐진 성경은 구약의 이사야서 35장으로 '종의 노래 Servant Songs'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장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성경 앞 낡은 소설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 La Joie de vivre>이다.
커다란 성경책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비해 작은 소설은 그렇지 못하지만 빛을 받아 밝게 빛난다.
이 작품에서 성경은 한 달 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반 고흐의 아버지를 상징한다.
반 고흐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목사가 되려고 했지만 신학교에 입학할 만한 실력이 되지 못해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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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은 퐁타방에서 인물과 풍경을 그리면서
 

아를에 비하면 조그만 항구 마을 퐁타방은 훨씬 원시적인 곳이었다.
당시 아방 강River Aven의 삼림 언덕을 따라 형성된 아를의 인구는 2만 3천 명이었던 데 반해 퐁타방의 인구는 불과 1,516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퐁타방에서는 농업, 제분업, 어업 등이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1860년대 이후 경제적 수입은 그곳을 찾는 관광객이나 작가들의 숙소와 음식물 제공에 의존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의 보헤미안 홈'으로 알려진 마이송 글로아느Maison Gloanec 여인숙에 묵으면서 여주인 마리 장느Marie-Jeanne로부터 방과 하루 두끼를 제공받고 매달 60프랑을 지불했다.
그는 빚에 쪼들리고 있었으며 고맙게도 마리 장느가 외상을 허락했으므로 당장 먹고 자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가 에밀 베르나르와 샤를 라발 그리고 메이어 드 한을 만난 곳도 바로 여인숙에서였다.
여인숙은 예술가들이 즐겨 묵던 곳으로 고갱은 훗날 그곳으로 여행온 폴 세루제에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는 곧 고갱의 제자가 되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인물과 풍경을 그리면서 피사로, 세잔, 드가로부터 익힌 화법들을 응용해 자신의 독창적인 기교를 찾아내려고 고심했다.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발견하지 못하면 화가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이미 경험한 그로서는 자신에게 혹독한 훈련을 가해야만 했다.
반 고흐가 아를에서 그곳 풍경을 그리면서 혹독한 훈련에 들어간 바로 그때 고갱도 1888년 6월 중순 퐁타방의 풍습을 그렸는데 <춤추는 브르통 소녀들, 퐁타방 Breton Girlfs Dancing, Pont-Aven>에서 새로운 각도로 그림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추수를 마친 들을 배경으로 고갱의 연출에 따라 춤 추는 브르통의 세 소녀의 모습으로 뒤로 교회의 탑, 농가의 지붕, 언덕이 보인다.
반 고흐가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는 주민들의 의상에는 관심이 없었던 데 반해 고갱은 주민들의 의상과 풍습에 관심이 많았다.
소녀들의 춤은 가보트 브르통느gavotte bretonne로 알려졌는데 그곳 주민들이 추수기간에 추는 페스티발 그리고 의식적인 성격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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