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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뢰겔에 대한 평가
 

  브뢰겔에 대한 평가는 그가 타계하기 2년 전인 1567년에 나왔다.
루도비코 기차르디니는 저서 『네덜란드 남부 전체에 관하여 Description of All the Low Countries』에서 브뢰겔을 가리켜서 보스의 “위대한 모방자 great imitator”라고 적었으며 그를 “제2의 보스”라 칭했다.
이듬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도 브뢰겔을 보스와 관련지우면서 “뛰어난 마스터 excellent master”라 불렀다.
바사리는 두 화가의 년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지는 못했지만
두 화가를 “유채로 풍경을 그리고, 환영과 기괴한 것들, 꿈 그리고 상상한 것들을 그렸다”고 적었다.
그는 브뢰겔이 풍경화와 환영적인 장면을 주로 그린 화가로 분류했다.
바사리는 리제의 도미니쿠스 람프소니우스Dominicus Lampsonius of Liege의 자료를 참조했는데,
람프소니우스는 브뢰겔이 타계한 지 3년 후인 1572년 자신의 친구가 제작한 브뢰겔의 초상화(메트로 3)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적었다.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 새로운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누구인가?
붓과 펜으로 보스의 혼이 있는 꿈을 모방할 수 있으며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능가할 수 있는 빼어난 예술성을 지닌 그는 누구인가?
옛 대가의 익살스러운 디자인 장르를 위한 예술에 몰두한 피테르는 어느 예술가보다 못하지 않다는 칭찬을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들을 것이다.


람프소니우스는 브뢰겔의 재능으로 펜놀림과 디자인을 꼽았으며 유화보다 이 둘을 장점으로 꼽은 건 매우 타당성이 있는 견해이다.
그는 브뢰겔이 익살스러운 디자인 장르에서 최고의 화가라고 높이 평가했는데,
이 장르는 일반적으로 등급이 낮게 취급되어 왔다.
브뢰겔의 친구 오르텔리우스는 보스를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브뢰겔이 “그려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그렸다”는 말로 상상력이 매우 풍부한 화가라고 적었다.
그는 브뢰겔의 자연주의를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대가 유폼파스Eupompas에 견주면서 “다른 예술가들을 따르기보다 자연을 따랐다”는 말로 칭찬했다.
이와 유사한 칭찬을 반 만데르도 1604년에 발간한 브뢰겔 일대기에서 적었다.
그렇지만 기차르디니와 마찬가지로 바사리, 람프소니우스, 그리고 반 만데르 모두 브뢰겔을 보스의 모방자로 간주했으며 보스의 화풍을 따랐다고 적었다.
브뢰겔이 환영적인 주제와 자연주의 그림을 먼저 그린 화가는 아니더라도
현존하는 61점의 드로잉이 그가 초기 플랑드르 화가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Rogier van der Weyden, 그리고 보스와 견줄 만한 화가임을 입증해준다.

브뢰겔은 풍경화의 대가였다.
그가 가장 초기에 그린 풍경화로는 1552년에 그린 다섯 점이다.
이 시기 1551~52년 그는 안트베르펜 화가들의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많은 플랑드르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는데,
다섯 점은 그가 이탈리아로 여행하던 중에 그린 것들이다.
바사리가 지적한 대로 이 시기에 그는 이탈리아 화가들의 화풍을 배웠다.
다섯 작품을 살펴보기 전 그를 지도한 피테르 쿠케 반 알스트Pieter Coecke van Aelst가 1535년경에 제작한 <아이 시의 점령 The Capture of the City of Ai>(메트로 16)을 볼 필요가 있는데,
이 시기의 브뢰겔의 작품에서 그의 영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보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으며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쿠케의 방법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브뢰겔에게 전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이 시의 점령> 왼편에 있는 나무는 쿠케가 풍경을 묘사하는 데도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브뢰겔이 이런 장르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보스와 브뢰겔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 발표된 두 사람에 관한 수천 점의 글과 두 사람의 작품에 과한 수백 권의 책 그리고 수없이 많은 미술사학자들의 논문이 말해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사람에 관한 책이 단권의 번역서로만 나와 있을 뿐이라서 독자들에게 두 대가의 작품은 여전히 낯설을 것이다.
두 대가의 작품에 대한 설명과 보스에 대한 브뢰겔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으며, 당시 활약했던 플랑드르 화가들에 관해서도 넉넉하게 언급했으므로
네덜란드 회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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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풍경화가
 

  브뢰겔의 빼어난 풍경화의 토대는 1550년대 초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면서 연필로 소묘를 그리면서부터 생겼다.
소묘에는 수많은 획과 점묘들이 있다.
원근법적인 표현과 정확한 세부묘사 등이 눈에 띄지만 이런 요소들은 풍경화에 나타난 생생한 대기 등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그는 색채에 의존하는 깊이감의 표현과 전통적 구도를 따르기보다는 실재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데 전력했다.
뒤러를 제외하고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등장하기 전 그처럼 사실 묘사에 충실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풍경 소묘를 제작한 화가는 일찍이 없었다.

1560년대에는 이전 화가들의 강한 색채를 사용하면서도 기교로 미묘한 변화를 시도하면서 엄격한 색채 공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대형 패널화와 밝은 색채 그리고 생기 있는 붓질은 보스를 연상하게 하지만
<월력화 The Months> 시리즈와 같은 풍경화에서는 풍자나 교훈적 요소를 발견할 수 없다.
<월력화> 시리즈는 이 분야 최초의 작품으로 풍경화가로서의 그가 성취한 으뜸가는 업적이며 당대의 문인과 후원자들도 이 점을 인정해주었다.
그의 혁신적인 풍경화의 영향은 지대하지만 후계자들은 오히려 그의 풍속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피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와 같은 천재 화가는 브뢰겔의 풍경화가 빼어남을 인정했다.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화가 루벤스는 브뢰겔의 아들 얀의 친구였다.
얀이 1625년 부모의 무덤에 비문을 새겼을 때 루벤스는 자신의 그림으로 묘비를 장식했는데,
이는 브뢰겔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루벤스는 오르텔리우스가 소장한 <성모의 죽음>을 비롯하여 브뢰겔의 작품을 몇 점 소장했으며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카드놀이를 하다 다투는 농민 Peasants Quarrelling Over a Game of Cards>을 모사했다.
그는 브뢰겔의 작품을 연구했다.
그의 후기 풍경화는 브뢰겔의 <월별노동>을 상기시키는 우주적 스케일을 보여준다.
후대의 네덜란드 화가들 가운데서 브뢰겔의 후기작이 지닌 기념비성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이 루벤스였다.
루벤스와 같은 대가가 브뢰겔의 조형적 특징에 이끌린 건 당연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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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나타난 상징과 우의 그리고 교훈
 

  브뢰겔이 일반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농민, 속담, 민속의 장면을 유머스럽게 그렸다고 해서 그를 농민화가로 본 견해는 후대 연구가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했다.
플랑드르 사회의 가장 부유하고 지식인 계층이 브뢰겔의 작품을 수집한 것으로 봐도 그가 농민일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점이 제기되었다.
게다가 브뢰겔의 친구들 중에는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지도제작자인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1527~1598)도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오르텔리우스의 『교우록 Album Amicorum』 중 추도문에 나타나 있다.
브뢰겔의 사후 몇 년 동안 집필된 『교우록』에서 오르텔리우스는 브뢰겔의 인간성과 그의 작품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런 지식인과 우정을 나눈 것을 보더라도 그가 농민화가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브뢰겔은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단지 유머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밖에도 깊은 의미가 내재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일부 연구자들이 그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나머지 심오한 철학적·도덕적 개념이 있으며
인간에 대한 비관적 시각을 구체화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며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되는 작품조차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정교한 우의로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의 작품을 묘사가 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옳지 않으며 이런 태도는 보스의 작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묘사된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브뢰겔의 창작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보스와 브뢰겔의 시대에는 상징과 우의가 선호되었으므로 두 사람의 작품에 나타난 상징과 우의는 유행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교훈을 목적으로 제작하는 것도 당시에는 일반적 경향이었다.
따라서 브뢰겔이 관람자에게 주려고 한 교훈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보스와 브뢰겔의 작품은 당시의 예술적·사회적 환경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브뢰겔에 있어서 주변 환경은 보스의 경우보다 중요하다.
보스의 문학적·시각적 영향은 상당 부분 중세의 유산에 속한다.
브뢰겔의 테마 역시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시사성을 함축한 점이 특기할 만하고
자신이 살아가던 복잡한 도시생활을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민중 연극, 종교적 축일 행렬, 민담과 속담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에게 작품을 의뢰한 은행가, 상인, 인문학자들의 취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브뢰겔 당시 플랑드르 문화적·사회적 배경을 이해하는 가운데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그는 처음으로 플랑드르 도시의 삶을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화면을 통해 소개했다.
그의 작품을 세심하게 관찰하면 당시 플랑드르인의 일상생활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속담과 아이들의 갖가지 놀이도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삶의 현장을 시각화한 것이 아니라 유머를 첨가하여 익살스러운 방법으로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를 지적하고 관람자를 교화시키려고 했다.
이런 그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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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뢰겔의 보스풍 판화
 

  브뢰겔이 1556년에 드로잉한 것을 코크가 이듬해 발간한 판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다 Big Fish Eat Little Fish>를 보면
코크가 브뢰겔에게 보스풍의 판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드로잉 오른편 손가락으로 큰 물고기를 가리키는 사람의 모습과 상단 왼편의 바위 위의 구조물은 보스의 요소임을 이내 알 수 있다.
현존하지 않지만 보스의 작품을 보고 모사한 것이 분명해보이는데,
피테르 반 데르 헤이덴Pieter van der Heyden이 엔그레이빙으로 제작한 판화 하단 왼편에 보스가 디자인한 것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에는 브뢰겔의 서명이 있지만 판화에서는 브뢰겔의 서명 대신 보스가 디자인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코크의 의도로 보인다.
브뢰겔의 이름이 판화에서 의도적으로 빠진 예는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Temptation of Saint Anthony>에서도 발견된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다> 하단 오른편에 코크가 1557년에 발간했다고 적혀 있다.
아래에 대문자로 GRANDIBVS EXIGVI SVNT PISCES PISCIBVS ESCA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 필기체로 Siet sone dit hebbe ick zeer langhe gheweten/ dat die groote vissen de cleyne eten이라고 적혀 있는데,
대문자는 ‘작은 물고기는 큰 물고기의 밥이다’라는 뜻이고,
필기체는 ‘자 아들아,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는 바는 큰 물고기가 작은 것을 먹는다는 것이란다’라는 뜻이다.

뭍으로 끌어올려진 큰 물고기 입 밖으로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작은 사람이 대단히 큰 칼로 물고기의 배를 가르니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뱃속에서 또한 쏟아져 나온다.
뒤로 두 다리가 달린 물고기가 입에 작은 물고기를 물고 걸어간다.
화면 앞 보트에는 아버지가 이 장면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들더러 보라고 말한다.
하단에 필기체로 ‘자 아들아, 내가 오랫동안 아는 바는 큰 물고기가 작은 것을 먹는다는 것이란다’라고 적혀 있어 두 사람이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물고기의 등을 보면 브뢰겔이 다양한 펜놀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브뢰겔의 현존하는 드로잉은 모두 61점에 불과하고 6점은 원작은 사라진 채 모사품으로만 전해온다.
그가 몇 점을 드로잉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드로잉은 16세기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 화가들에게 기본적인 행위였다.
화가로서 훈련을 받을 때 그리고 화가로 활동할 때도 드로잉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였다.
브뢰겔은 초크를 사용한 적이 없지만
화가들은 주로 펜, 초크, 수채, 색종이를 사용했으며 다른 화가들의 판화, 드로잉, 그림을 모사하는 건 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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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뢰겔의 보스풍 판화


브뢰겔이 1556년에 드로잉한 것을 코크가 이듬해 발간한 판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다 Big Fish Eat Little Fish>를 보면
코크가 브뢰겔에게 보스풍의 판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드로잉 오른편 손가락으로 큰 물고기를 가리키는 사람의 모습과 상단 왼편의 바위 위의 구조물은 보스의 요소임을 이내 알 수 있다.
현존하지 않지만 보스의 작품을 보고 모사한 것이 분명해보이는데,
피테르 반 데르 헤이덴Pieter van der Heyden이 엔그레이빙으로 제작한 판화 하단 왼편에 보스가 디자인한 것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에는 브뢰겔의 서명이 있지만 판화에서는 브뢰겔의 서명 대신 보스가 디자인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코크의 의도로 보인다.
브뢰겔의 이름이 판화에서 의도적으로 빠진 예는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Temptation of Saint Anthony>에서도 발견된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다> 하단 오른편에 코크가 1557년에 발간했다고 적혀 있다.
아래에 대문자로 GRANDIBVS EXIGVI SVNT PISCES PISCIBVS ESCA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 필기체로 Siet sone dit hebbe ick zeer langhe gheweten/ dat die groote vissen de cleyne eten이라고 적혀 있는데,
대문자는 ‘작은 물고기는 큰 물고기의 밥이다’라는 뜻이고,
필기체는 ‘자 아들아, 내가 오랫동안 알고 있는 바는 큰 물고기가 작은 것을 먹는다는 것이란다’라는 뜻이다.


뭍으로 끌어올려진 큰 물고기 입 밖으로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작은 사람이 대단히 큰 칼로 물고기의 배를 가르니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뱃속에서 또한 쏟아져 나온다.
뒤로 두 다리가 달린 물고기가 입에 작은 물고기를 물고 걸어간다.
화면 앞 보트에는 아버지가 이 장면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들더러 보라고 말한다.
하단에 필기체로 ‘자 아들아, 내가 오랫동안 아는 바는 큰 물고기가 작은 것을 먹는다는 것이란다’라고 적혀 있어 두 사람이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물고기의 등을 보면 브뢰겔이 다양한 펜놀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브뢰겔의 현존하는 드로잉은 모두 61점에 불과하고 6점은 원작은 사라진 채 모사품으로만 전해온다.
그가 몇 점을 드로잉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드로잉은 16세기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 화가들에게 기본적인 행위였다.
화가로서 훈련을 받을 때 그리고 화가로 활동할 때도 드로잉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였다.
브뢰겔은 초크를 사용한 적이 없지만
화가들은 주로 펜, 초크, 수채, 색종이를 사용했으며 다른 화가들의 판화, 드로잉, 그림을 모사하는 건 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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