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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양자통계역학의 핵심적인 발명자가 되었다




1924년 6월 인도의 사티엔드라 나스 보스Satyendra Nath Bose(1894~1974)라는 젊은 물리학자가 자신의 논문을 영어로 작성해 아인슈타인에게 보냈다.
그 논문은 복사를 기체구름으로 가정한 후 통계적인 방법을 적용해 플랑크의 흑체복사 법칙을 유도한 것이었다.
그런데 비약이 있었다.
보스는 같은 에너지를 가진 두 개의 광자는 이론적으로는 물론 실질적으로도 구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통계 계산에서 별개로 다루지 말아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보스의 논문이 발표될 수 있도록 심사를 통과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세 편의 논문을 통해 그 결과를 확장했다.
그 논문에서 그는 훗날 “보스-아인슈타인 통계학”으로 불리게 될 보스의 계산방법을 실제 기체분자에 적용함으로써 양자통계역학의 핵심적인 발명자가 되었다.

보스의 논문은 질량을 가지지 않은 광자를 다룬 것이었고, 아인슈타인은 통계적인 목적에서 질량을 가진 양자 입자를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그 이론을 확장했다.
그는 “양자나 분자는 통계적으로 서로 독립적인 구조로 취급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이 보스의 논문에서 발견한 핵심적인 사실은 여러 개의 양자 입자의 가능한 상태에 대한 확률을 계산하는 방법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그런 방법을 통해 놀라운 특징을 발견했는데, 고전 입자의 경우 서로 끌어당기지 않으면 기체로 남아있게 되지만 양자의 경우에는 입자들 사이에 인력이 없는 경우에도 액체와 같은 상태로 응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보스-아인슈타인 응축Bose-Einstein condensation으로 불리는 그런 현상은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발견이었으며, 아인슈타인은 그 업적에 대한 공로의 대부분을 인정받았다.
보스는 자신이 사용한 통계수학이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방법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방법은, 자신과 드 브로이가 제안했던 것처럼 입자들이 파동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효과를 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기체분자들을 이용해서 토머스 영의 빛상을 두 개의 슬릿에 통과시키면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빛이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보여준 이중슬릿실험을 한다면, 분자들이 파동처럼 서로 간섭할 것임을 예측했다.
그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기체분자살은 빛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절현상을 나타내야만 한다”고 했다.
놀랍게도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발전 방향에 대해서는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최소한 한동안은 양자역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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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


 

1925년 여름 스물세 살의 청년으로 등산을 좋아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1901~76)가 양자역학에 대한 또 다른 접근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의 학생이었고, 후에는 괴팅겐의 막스 보른의 학생이었다.
젊었을 때의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론은 관찰하거나 측정하거나 확인할 수 없는 개념을 멀리해야 한다는 에른스트 마흐의 격언을 받아들였다.
하이젠베르크에게 그런 주장은 관찰할 수 없는 전자 궤도의 개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들이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과정에서 방출하는 복사의 스펙트럼선의 파장처럼 관찰 가능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접근에 의존했다.
결과는 너무 복잡했다.
그는 자신의 논문을 보른에게 주고, 그가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캠핑여행을 떠났다.
보른은 모든 것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하도록 해주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에서 보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통해 훗날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과 동등한 것으로 밝혀진 행렬역학matrix mechanics을 완성했다.

아인슈타인은 보른의 아내 헤드비히에게 “하이젠베르크-보른 개념은 우리의 숨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라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신중하게 꾸며진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이해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라이덴에 있는 에렌페스트에게 보낸 편지에 “하이젠베르크가 큰 양자 알을 낳았습니다. 괴팅겐에서는 그것을 믿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 스물여섯 살 때 양자물리학의 개념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으면서도 가장 당혹스러운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로 물리학에 기여했다.
그는 움직이는 전자와 같은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모멘텀(the도와 질량의 곱)을 동시에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관찰하는 행동, 즉 광자, 전자, 다른 입자나 에너지 파동이 물체에 충돌하는 것 자체가 관찰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그것을 넘어섰다.
전자는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기 전에는 명백한 위치나 경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단순히 우리의 관찰이나 측정능력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관찰범위 바깥에는 객관적인 실체, 심지어 입자의 객관적인 위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더욱이 하이젠베르크 원리를 비롯한 양자역학의 다른 면들은 우주가 엄격한 인과법칙을 따른다는 생각을 무너뜨렸다.
우연, 비경정성, 확률이 확실성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특징들을 반대하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는 “저는 비결정주의, 즉 엄격한 인과성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라는 단호한 답장을 보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6년에 강연하러 베를린에 왔을 때 처음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어느 날 저녁에 아인슈타인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우호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에테르를 인정하지 않는 자신에게 반발하던 보수주의자들과 가졌을 수도 있는 형식의 논쟁과 닮은꼴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는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궤도를 관찰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이론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양을 근거로 해야만 합니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러나 자네도 물리학 이론에는 관찰할 수 있는 양만 들어있어야 한다고 믿지는 않겠지?”라고 반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놀라면서 “선생님도 상대론에서 정확하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어쩌면 나도 그런 종류의 추론을 사용했겠지만 그것은 어쨌든 터무니없는 것이었네”라고 응답했다.

1920년대 중반에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닐스 보어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론적 발전은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으로 알려졌다.
물체의 성질은 그런 성질이 어떻게 관찰되거나 측정되는지의 범위에서만 논의될 수 있으며, 그런 관찰은 단순히 그림의 한 면이 아니라 상보적이라는 것이다.
즉 다른 관찰과 상관없는 유일한 근원적 진실은 없다는 것이다.
보어는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떠한가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1927년 봄 뉴턴 사망 200주년을 계기로 인과성과 확실성을 근거로 하는 고전역학 시스템을 유지시켜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새로운 양자역학에서 엄격한 인과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마지막 판결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뉴턴 방식의 정신이 우리에게 물리적 진실과 뉴턴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심오한 요소인 엄격한 인과성의 결합을 회복시키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에테르나 절대적 시간과 공간 그리고 동시성처럼 관찰할 수 없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친구 필리프 프랑크에게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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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이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의 관찰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양자역학이 인과성을 포기하고 물리적 실재를 비결정성, 불확정성, 확률을 이용해서 규정한다는 이유로 양자역학을 거부했다.
그는 물리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원인과 결과를 엄격하게 결정해주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결정주의와 인과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믿음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스피노자에 대해서 “그는 자연현상의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을 알아내려는 노력이 여전히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시기에 살았지만 모든 현상의 인과적 의존성을 철저히 확신하고 있었다”고 했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도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을 지배하는 우아한 법칙은 신성한 설계를 반영한다고 믿었다.

아인슈타인은 막스 보른에게 말했다.
“양자역학은 확실히 훌륭합니다. 그러나 은밀한 목소리가 내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이론은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우리를 악마의 비밀 가까이까지 데려다주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나는 신이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틀리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완전하지 않다고 보았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더욱 완전한 설명, 즉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모두를 아우르는 설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 과정에서는 그 어느 것도 우연에 맡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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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것으로 기대



아인슈타인은 전기와 자기 그리고 중력과 양자역학을 함께 묶어서 우주에 대해 더 완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을 찾아내기 위한 외로운 탐색을 계속했다.
그는 일반상대성의 중력장 방정식을 확장해서 전자기장도 함께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는 그런 통일이론에서 양자역학이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1918년 플랑크의 60회 생일축하연에서 “양자이론을 전기동력학 그리고 역학과 함께 하나의 논리적 체계로 통일하는 일에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축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플랑크에게 그 일을 요청했다.

증기선을 타고 아시아를 순방하는 동안 그는 새 논문을 다듬었고, 1923년 2월 이집트에 도착한 직후에 발표를 위해서 논문을 베를린에 있는 플랑크에게 보냈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중력장과 전자기장을 하나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기자에게 “이 이론은 영국 천문학자의 이론을 근거로 한 것이다”라고 말해 에딩턴의 공로를 인정했다.

그해에 발간된 여러 편의 후속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목표가 단순한 통일이 아니라 양자이론의 불확정성과 확률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1923년에 발표한 논문 “장이론이 양자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해줄 것인가”는 전자기장과 중력장이론이 어떻게 초기 조건과 결합된 편미분 방정식partial differential equation을 통해서 인과적 해답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편미분 방정식은 수학에서 여러 개의 독립변수로 구성된 함수와 그 함수의 편미분으로 연관된 방정식으로 소리나 열의 전파과정, 전자기학, 유체역학, 양자역학 등 많은 역학계에 관련된 예가 많다.

아인슈타인은 2년 만에 그런 접근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의 새로운 방법은 전자기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중력법칙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형식적 표현을 찾아낸 뒤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이 첫 번째 근사로 얻어질 것으로 보았다.
그는 물리학보다는 수학에 더 의존했다.
그의 논문은 1929년 1월 30일에야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는 『타임』과 인터뷰했고, 『타임』은 그의 사진을 표지에 실었는데, 그가 표지에 등장한 다섯 차례 중 첫 번째였다.
프로이센 과학원은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1천 부나 발행했다.
그의 논문은 1월 30일에 공개된 뒤 곧바로 매진되었고, 과학원은 3천 부를 더 인쇄해야 했다.
그의 논문을 유리창에 붙여두었던 런던의 어느 백화점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꾼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난해한 방정식 33개가 들어있는 복잡한 수학 논문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코네티컷의 웨슬리 대학은 도서관 소장용으로 아인슈타인이 손으로 쓴 원고를 상당한 비용을 들여 구입했다.

사람들이 열광했지만 물리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팬이었던 에딩턴은 의문을 표했다.
실망한 사람들 중에는 볼프강 파울리도 있었다.
파울리는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주장이 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배반했으며 물리학적 실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수학적 형식주의에 의존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순수 수학자로 전향했다고 비난했다.

아인슈타인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론을 포기했다.
그러나 탐색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아인슈타인의 제안 중에서 어느 것도 성공적인 통일장이론으로 완성되지는 못했다.
사실 새로운 입자와 힘들이 발견되면서 물리학은 훨씬 덜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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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에게 주어진 생일선물




쉰 번째 생일을 맞이한 아인슈타인은 사회적 명성으로부터 벗어난 조용한 생활을 원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를 찾아낸 유일한 신문이었다.
신문의 제목은 “생일날 숨어있던 아인슈타인을 찾아내다”였다.
전 세계에서 선물과 축하편지가 쏟아졌다.
그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보통 사람들로부터 온 선물이었다.
어느 여성 재봉사는 시를 지어 보냈고, 몇 푼의 동전을 모아 그에게 담배를 사서 보낸 실업자도 있었다.
실업자의 선물을 받은 그는 눈물을 흘렸고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베를린 시는 그에게 시청 소유의 대규모 호반 소유지에 있는 시골집에서 평생 동안 살 수 있는 권리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곳에서 은둔하면서 나무보트를 타고, 고용함 속에서 방정식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아인슈타인은 베를린 시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전적인 양식의 그 집은 하벨 강의 호숫가에 있는 블라도브 마을 근처 공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살펴보러 갔던 엘자는 그 땅을 시청에 팔았던 귀족 부부가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곳에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류를 살펴본 결과 그들이 옳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들을 내보낼 수가 없었다.

베를린 시는 아인슈타인이 직접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그에게 그 땅의 다른 부분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도 시의 구매협약을 어기는 것이었다.
오히려 원래 소유주는 압력과 소문 때문에 그 땅에 집을 짓는 것을 더 강하게 반대하게 되었다.
그런 소식은 신문의 1면에 소개되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특히 세 번째 대안도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더욱 그랬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이 땅을 선택하면 시청이 그 땅을 구입해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더 멀리 떨어진 포츠담 남쪽의 카푸트라는 곳에 있는 친구 소유의 땅을 골랐다.
그곳은 하벨 강과 숲 사이에 있는 전원지역이었고 아인슈타인은 그곳을 좋아했다.
시장은 아인슈타인의 쉰 번째 생일선물로 그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2만 마르크를 쓸 수 있도록 승인해줄 것을 시의회에 요청했다.

어느 젊은 건축가가 주택을 설계했고, 아인슈타인은 근처에 있는 작은 텃밭을 구입했다.
그런데 정치가 끼어들었다.
의회에서 우익의 독일국민당이 이 결정에 반대하면서 투표를 지연시키고 전체회의의 의제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이 개인적으로 논쟁의 초점이 될 것이 분명해졌다.

아인슈타인은 우스운 기분으로 선물을 거절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시장에게 “권력기관은 느린 속도로 일하지만 인생은 매우 짧습니다. 내 생일은 이미 과거가 되었으며, 선물을 거절하겠습니다.”
다음 날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에는 “공식적 망신 완성/아인슈타인 거절”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카푸트 지역을 좋아하게 된 아인슈타인은 땅을 구입해서 설계해두었던 집을 짓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돈으로 그 땅을 구입했다.
엘자는 “우리가 땅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저축한 돈을 모두 써버렸다”고 불평했다.

그들이 지은 집은 다듬은 나무판으로 내부를 장식하고 바깥에는 칠을 하지 않은 널빤지를 사용한 단순한 것이었다.
큰 창을 통해 하벨 강의 고요한 모습이 보였다.
유명한 바우하우스 가구디자이너인 마르셀 브로이어가 실내장식을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끊임없이 기계 공작실이나 병원 수술실을 떠올리게 해주는 가구 위에 앉아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신 베를린 아파트에서 쓰던 가구들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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