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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르누보>



프랑스에서 응용미술을 장려하기 위해 설립된 공적 기구 장식미술연합Union Centrale des Arts Decoratifs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장식미술을 촉진시킨 단체로 프랑스 공예의 전통적 특징인 고급스러움과 호화스러움을 선호함으로써 대량생산체제로의 발전을 회피했다.
1890년대에 프랑스 공장들이 성공적이지 못한 것은 프랑스 아르누보가 공예양식으로 장려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프랑스는 1885년에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산업생산력을 갖추었으나 1896년경 미국과 독일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이 같은 쇠퇴에 대한 프랑스 정부가 고안해낸 해결책은 장식미술과 같은 프랑스의 전통적 장점을 강화시키는 보호정책이었다.

세기 전환기에 프랑스는 자신들의 영향이 유럽에서 쇠퇴하고 있음을 느꼈다.
프랑스 사람들은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1870-71)의 쓰라린 패배로 과거를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근대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온갖 과학의 발전과 제국주의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증대되던 도시노동자 계급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였다.
노동쟁의는 무정부적 폭력과 연계되어 1890년 이후의 제3공화정(1875-1940)의 허약함을 더욱 부추겼다.
여성의 역할 변화는 여성 이미지가 중심적인 장식 모티프였던 프랑스 아르누보와 특별한 관련이 있는 세기말적 사회현상이었다.
이런 변화는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정치계와 미술계 양편에서 감지되어 ‘신여성 Femme Nouvelle’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는데, 신여성이란 여성의 역할에 관한 문화적, 정치적 담론에서 통용되던 용어로 가정적이고 순종적이며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정형화된 여성의 이상을 거부한 여성을 말한다.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용어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1860년대부터 카페나 화랑, 집이나 상점 같은 현실세계에서 근대 여성을 묘사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반면 많은 아르누보 미술가들은 계속해서 19세기 말의 상징주의 회화, 예를 들면 신화와 성서에서 소재를 딴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내적 감정을 표현한 귀스타브 모로Gustav Moreau(1826-98)의 <밤 Night>(1880년경)에서 보듯 그리고 아카데미 회화와 공예품에서 여성의 형상이 자연의 구체적 표현인 식물의 덩굴손 및 잠자리와 결합된 데서 보듯 전형적인 어휘를 사용했다.
이런 어휘에는 루이 샬롱의 꽃병 <수련 요정>에서 보듯 요정, 요부 그리고 때때로 신여성이 포함되었다.

앙리-에른스트 다보Henri-Ernest Dabault가 제작한 브로치 <이브 Eve>(1901)는 에나멜과 은에 오팔을 장식한 것으로 성서의 인물을 다룬 아르누보 이미지의 한 예를 보여준다.
브로치는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유혹하는 뱀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지혜의 나무에서 금단의 열매를 땀으로써 인류를 낙원에서 죄악과 노역의 세계로 쫓겨나게 한다.
이브는 나약함과 약점, 유혹과 타락의 전형이다.

프랑스에서는 1890년대에 유행한 영국 선호 풍조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런 장식품들 외에는 영국 미술공예 양식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 양식이 반영된 대표적인 예로 르네 랄리크의 장신구와 유리제품, 에밀 갈레가 만든 유리제품을 들 수 있다.
건축에서는 엑토르 그리마르Hector Grimard(1807~1942)의 파리 지하철 설계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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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





1871년 발트해Baltic Sea 남쪽 연안에서 비슬라 강Weichsel River과 니멘 강Niemen River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한 프로이센Preussen 공국이 주도하여 독일을 제국으로 통합했지만 세기 말에도 여러 지역에서는 옛 소국가들이 지배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파리가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던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는 아직 크고 작은 제후국들의 권력관계를 인지할 수 있었다.
제국 최남단의 뮌헨에서는 적극적인 예술후원자로 등장한 통치자가 있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유입된 미술혁명 분위기는 가장 시민적이며 가장 혁명적이지 않던 섭정시대에 뮌헨에 도달했다.
미술에 열광한 ‘독일인의 왕’으로 불린 루트비히 2세Ludwig II(1845-86)가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뒤 그의 삼촌이자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인 루이트폴트Luitpold(1821-1912)가 통치자로 결정되었다.

독일에서는 수도인 베를린뿐만 아니라 뮌헨, 다름슈타트, 드레스덴과 같은 여러 아르누보의 중심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이 양식이 재생과 낙관주의 정신에서 비롯했다.
낙관주의는 프러시아가 보불전쟁을 통해 1871년에 프랑스에 군사적 타격을 입힌 뒤 빌헬름 1세Wilhelm I가 스스로 황제Kaiser임을 선포한 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불명예스럽게 끝나기는 했으나 왕국시대의 독일은 근대 독립국가의 모든 형식을 신속하게 갖추고 있었다.
세계 강국으로서의 독일의 지위는 1883년과 1885년 사이 일련의 식민지 활동으로 강화되었다.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른 1898년까지 독일은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1890년대와 1900년대에 베를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 뮌헨에서는 다원주의가 육성되었으며, 자유주의와 자신감에 찬 독재적 민족주의라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일의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에는 젊은이들의 영웅주의, 인종의 순수성 그리고 신비주의와 같은 사상이 배어있었으므로 독일에 긍정적이며 혁명적인 세기말 적 사고가 유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겐트슈틸은 새로운 관점에서만 바라본 독일어 유겐트jugend에 근거해 ‘젊은 양식’으로 번역된다.
이는 유겐트슈틸이 단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1896년에 창간한 정기간행물 <유겐트 Die Jugend>가 육성하려고 한 활력적인 젊은 에너지의 표출이었기 때문이다.
<유겐트>에는 젊음과 자연의 정신을 찬미하는 이미지가 많이 실렸고, 젊음의 자유와 에너지는 종종 구시대의 반동적인 세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1896년 3월호 <유겐트> 표지에는 루트비히 폰 춤부슈Ludwig von Zumbusch(1861-1927)가 디자인한 두 소녀가 심술궂게 생긴 눈먼 노인을 초월을 가로질러 강제로 끌고 가는 모습이 실렸다.
한 해 전에 출간된 간행물 <판 Pan>(1895-1900)이 1900년까지 5백 명의 구독자만 확보한 고급 잡지인 데 반해 <유겐트>는 1896년 발행 당시부터 매주 3만 부를 발행했다.
인기가 높았을 때의 <유겐트>는 20만 명의 독자를 확보할 정도로 문화적 중요성을 지녔다.
<유겐트> 창간호는 젊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동시대인들이 젊음의 이상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에 대한 좀 더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매주의 <유겐트>의 표지는 잡지의 주제가 변덕스럽고 일시적인 부르주아 유행보다 더 진지한 문제인 ‘미술과 삶 Kunst und Leben’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유겐트슈틸의 중심적 주제는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정신주의, 합리와 비합리의 융합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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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아르누보>





아르누보의 또 다른 중심지인 빈과 글래스고에서는 형태와 장식에서 기하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곳에서는 파리와 낭시의 전형적인 아르누보에서 보이는 채찍선과 자연주의 조각과는 반대의 양상을 보여주었으므로 장식이 후퇴하는 듯 보였다.
요제프 호프만과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하는 장식이 배제되고 실용성만 고려되는 기능주의 디자인의 시작으로 간주되었지만, 이들의 기하가 단지 기능적인 것만은 아니라 장식적 근원을 암시하는 정교함과 우아함을 갖추었음을 오토 바그너가 디자인한 <디 자이트> 신문사 배송국에서 볼 수 있다.
빈과 글래스고에서 제작된 작품들에 나타난 유사성으로 인해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가가 의문시되어왔다.

19세기의 산업혁명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도 공적 미술 취미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취미의 저하에 대한 반동으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에 힘입어 빈 공방Wiener Werkstaette이 창설되고 기능주의의 최초 옹호자들 가운데 하나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1870-1933)의 운동이 일어났다.
20세기 초 근대건축 개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로스는 브르노 태생으로 드레스덴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1893-96년 미국에 체류하면서 철골구조와 그 기능을 직접 표현함으로써 차단되지 않은 넓은 공간, 풍부한 채광을 실현한 루이스 헨리 설리번의 이론과 아카데미즘에 얽매이지 않고 금속을 건축재로 사용한 초기 시카고파에 자극을 받고, 귀국해서는 아르누보의 장식과 빈 분리파의 탐미적 경향을 비판했다.
그는 유명 일간지 <신자유 신문 Neue Freie Presse>에 전시에 관한 글을 연속적으로 기고하면서 현대 디자인에 내재된 철학은 모든 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형세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설리번과 오토 바그너로부터 유래한 실체의 개념을 배척하고 요소간의 상호작용이라는 견지에서 대상을 기능적으로 파악하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이론을 극단적으로 전개한 로스는 아르누보의 지나친 장식이 퇴락한 문화의 상징이며, 장식을 배제한 아름다움은 명석한 사고와 고도의 문명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20세기 초 10년 동안 로스의 작업은 빈에서 영향력을 거의 갖지 못했으나 1차 세계대전 직후 빈에 잠시 체류했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영향을 받았다.
건축을 사회적 요구와 공업기술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데 기여한 그로피우스는 바이마르에 소재한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장으로 재직(1919-28)했다.
그로피우스는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1919년에 바우하우스를 설립했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집을 짓는다’라는 독일어 Hausbau를 도치시킨 것이다.
주된 이념은 건축을 주축으로 삼고 미술과 기술을 종합하는 것이었다.

장식이 원시인과 범죄자들이 선호하는 야만적 현상이며, 불필요한 장식의 거부가 문명사회의 징표라고 로스가 역설했더라도 빈의 아르누보는 기능주의의 전조이기보다는 국제적 근대성에 대한 감각과 빈의 유구한 고전미술의 전통이 결합된 양식으로 보아야 한다.
세기말 빈의 문화적 보수주의는 동시대인들에게조차 전설적인 것이었다.
1900년경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부상한 빈은 전등, 철도교통망 그리고 1900년경에 등장한 자동차 문화와 같은 근대의 모든 특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빈은 틀에 박힌 예측 가능성과 융통성 없는 관료주의로 특징지어졌다.
미술가연맹Kunstlerhausgenossenschaft은 빈의 유일한 전시공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전시위원회의 보수성으로 인해 진보적인 젊은 미술가들은 그 전시공간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이에 클림트는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1868-1918),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1870-1956) 등과 함께 1897년 4월 3일에 빈 분리파Secession(또는 Sezession)를 창설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제체시온슈틸’이란 명칭은 빈 분리파전을 위해 올브리히가 설계한 분리파 건물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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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아르누보>




클라이드Clyde 강변에 위치한 글래스고는 19세기 말에 산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30km가 넘는 자연발생적 포구를 통해 부흥한 글래스고Glasgow는 켈트어로 Glas Ghu로 ‘푸른 골짜기’란 뜻이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석탄광업, 제철업, 화학공업, 조선업 등이 시작되었고 특히 조선업은 19세기 초에 번영했다.
이곳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들어섰다. 한때 담배와 솜 가공지였던 이 도시는 거대한 철광석 및 석탄매장지가 발견됨으로써 철강생산지로 변모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이 도시는 제국 내에서 런던 다음가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빈처럼 이 도시에도 강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조장한 강력한 시행정부가 존재했다.
이런 팽창의 결과로 빈처럼 이 도시에도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이 생겨났으며 그들 가운데 몇몇은 아르누보의 후원자가 되었다.
부유한 계층은 민족적 자긍심과 잉글랜드에 대한 저항에 자극을 받아 점차적으로 문화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일본에서는 목판화를 들여왔다.
켈빈 그로브Kelvin Grove에는 시립미술관이 건립되었으며, 1891년에는 아르누보의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인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자포니즘 양식의 유화를 사들여 소장했다.
이 미술관을 위해 휘슬러는 자신의 사후에 아틀리에에 남아 있는 작품 모두를 글래스고에 보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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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르누보>




19세기 말의 미국은 팽창하고 번영하던 광대한 국가였다.
1865년 남북전쟁의 종식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시기를 예고했다.
1869년에 동부와 서부 해안을 연결한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런 성장으로 신흥부유층인 중상류계층이 생겨났으며 이들의 과소비와 여가생활은 전설적이었다.
값비싼 물건에 대한 과시적 소비가 유한계급의 신사들이 평판을 얻는 수단이 될 정도였다.
미국은 유럽과 유럽의 문화전통에 대해 복잡하고 모순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대체로 유럽에서 경험한 가난과 당파적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던 이민자들의 나라였다.
부를 얻은 미국인들은 유럽을 미술과 문화의 원천으로 보았다.

산업노동자들이 여전히 이민 1세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미국 미술에 끼친 영향은 주목할 만하다.
루이스 컴포트 티퍼니의 도자기와 1853년에 설립된 덴마크 회사인 빙 앤 그뢴달Bing & Grondahl 제품 사이의 유사성은 티퍼니의 도자기부 부장이 덴마크 이민자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빙은 설립자의 이름에서 그뢴달은 디자이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빙 앤 그뢴달은 세계 최초로 매년 크리스마스 플레이트Christmas Plate를 제작했다.
플레이트에 쓰인 Juleaften은 덴마크어로 ‘크리스마스이브’라는 뜻이다.

1904년과 1910년 사이에 티퍼니Tiffany에서 생산된 제품 가운데 투각으로 된, 뚫고나올 듯한 식물 형태는 빙 앤 그뢴달의 제품과 유사하다.
빙도 프랑스 이민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미국 산업디자인계에서 프랑스의 특성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울퉁불퉁한 표면과 다채로운 색채를 띤 유리판제조에 뛰어난 프랑스의 유리판제조 기술자들이 1880년대에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티퍼니와 라 파지La Farge 밑에서 일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미국산 제품들에는 미국산 점토가 사용되고 거기에 강하게 나타난 미국의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윌리엄 헨리 그루비William Henry Grueby(1867-1925)의 <꽃병>에 미국의 고유 식물이 사용되었더라도 그가 1894년부터 자신의 보스턴 공장에서 생산한 도자기제품에 나타난 밀랍처럼 윤기 없는 녹색의 유약과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연꽃잎 모양은 프랑스 도예가 오귀스트 들라에르슈Auguste Delaherche(1857-1940)의 작품과 유사했다.
들라에르슈는 이미 수년 전에 이와 비슷한 윤기 없는 유약을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루비가 후에 자기화한 유기적인 구근 형태도 종종 사용했다.
그루비의 두 꽃병에서 이런 영향관계가 발견되며 모두 1898년 <스튜디오 Studio>에 게재된 들라에르슈의 꽃병과 유사한 형태와 장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럽 도자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루비의 회사뿐이 아니었다.
아르투스 반 브리글Artus van Briggle(1869-1904)은 룩우드 도자기Rookwood Pottery 회사의 가장 유능한 디자이너로 프랑스 아르누보를 매우 좋아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유동적인 상징주의는 당대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1900년경 제작된 아르투스 반 브리글Artus van Briggle(1869-1904)의 <두 머리 Dos Cabezas>는 작자미상의 프랑스 금속 꽃병을 닮았다.
티퍼니의 <꽃병>도 덴마크 회사에서 생산된 꽃병과 흡사하다.

미국의 건축에서 아르누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과 함께 그 이론적인 절정에 도달했다.
미국의 아르누보는 어느 정도 스스로 생산해낸 것이었다.
라이트의 유기적인 건축은 그의 스승인 설리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설리번은 프랭크 퍼니스의 고딕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와 비슷하게 티퍼니와 그 아버지의 회사인 티퍼니 상사는 프랑스 아르누보를 무작정 따랐다기보다는 아르누보와 동일한 원천에 토대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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