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고대 정신의 재창조

18세기 후반 로코코는 신고전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고전주의의 이상은 명확한 윤곽선과 단순한 표현, 그리고 우아함보다는 간결하고 솔직함에 있었다. 사람들은 실내를 장식하는 달콤한 감상과 에로티시즘에 싫증을 느꼈다. 고대로의 복귀는 처음에 로마적인 것보다는 그리스적인 것을 지향했다. 그것은 남부 이탈리아 및 폼페이에서의 고고학적 발견과 독일의 미술사학자이자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이론과 그의 동료 콜렉터들의 영향 때문이었다.

빙켈만은 고전적 이상을 그리스 천재가 만들어낸 것으로 보았으며 그리스 미술과 로마에서의 모작을 확실하게 구별하는 최초의 역사가가 되었다. 그의 저서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하여>는 로마로 떠나기 바로 직전인 1755년 5월에 드레스덴에서 출판되었다. “이상적 예술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고대의 모방”이라고 주장한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며 유럽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이론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빙켈만은 이 책을 출간한 후 이탈리아로 가서 1759~64년에 걸쳐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비안코니 서한>(사후 간행),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브륄 서한>(1762년 간행), <최근의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한 퓌슬리 보고>(1764년 간행) 등 세 편의 보고서를 집필했다. 헤르쿨라네움(현재 이탈리아 명칭으로 에르콜라노)은 나폴리 동남쪽 베수비우스 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로서 기원전 79년 8월 24일 베수비우스 산 분화 때 폼페이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폼페이와 달리 용암이 응회암으로 변했으므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몰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빙켈만은 <라오콘>(다비드 35)을 고대의 걸작으로 꼽았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왕자이자 제사장으로, 그리스군 목마의 비밀을 트로이인에게 알려준 죄로 신으로부터 벌을 받고 두 아들과 함께 큰 뱀에 감겨 죽었다는 전설의 인물이다. 그리스군의 목마를 라오콘이 제단에 공물로 바치려 하는 순간 아폴로가 보낸 두 마리의 큰 뱀이 라오콘과 두 아이를 습격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들은 이미 뱀에 물려 숨이 끓어질 지경이고, 큰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뱀의 공격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빙켈만은 <라오콘>을 찬양해마지 않았다.
“그리스 걸작들의 일반적이며 탁월한 특징은 결국 자세와 표현에서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이다. 바다의 수면이 사납게 날뛰어도 그 심해는 늘 평온한 것처럼 그리스 조상들은 휘몰아치는 격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위대한 영혼을 나타냈다. 이 영혼은 격렬한 고통 속에 있는 <라오콘> 군상의 얼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고통은 얼굴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근육과 힘줄에도 나타나 있어서, 우리는 얼굴이나 육체의 다른 부분을 보지 않고 고통으로 움츠러든 하복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얼굴이나 전체 자세에서는 전혀 고통에 찬 격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위대한 이처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고대를 모방하라고 권한 빙켈만은 자신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생명력 없는 모방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정신의 재창조를 원했으며, 종종 인용되는 그리스 미술의 특징에 관해 그가 언급한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는 미적 요소와 더불어 윤리적 요소에도 적용되었다. 빙켈만은 1768년 트리에스테에서 살해되었는데, 여인숙에 같이 묵은 손님에게 금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인 듯하다.

빙켈만이 그리스 정신의 재창조를 역설하기 250년 전에 미켈란젤로는 이미 <다윗>(다빈치 203)을 통해 시위했다. 현재 루브르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반항하는 노예>(다빈치 309)와 <죽어가는 노예>(다빈치 310, 310-1)는 그리스 정신이 좀더 강조된 작품들이다. 일반적으로 고대에 대한 관심이 15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그에 대한 관심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14세기 중반 피렌체의 유명한 시인인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고대의 문헌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보통 사람들도 고대에 대한 동경과 고대 문물에 대한 존경으로 값비싼 골동품을 구입하고 싶어 했다. 고대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신분계급을 표시하는 메달을 가자로 만들어 고대 유물이라고 파는 상인이 생길 정도였고 작은 고대 조각품과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고대 조각품들이 발굴되고 알려지면서부터 고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고 미켈란젤로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현재 바티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로>(다빈치 313)가 이 시기에 발굴되었고 얼마 후 1506년 1월 <라오콘>이 에스퀼리누스의 티투스 우물가에서 발견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라오콘>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의 줄리아노와 로렌초의 무덤을 장식할 때 <라오콘>의 트로이 제사장의 얼굴을 상기하면서 벽에 그 얼굴을 드로잉했다.(다빈치 312) 그는 벽에 많은 드로잉을 남겼고 이는 그가 작품을 제작할 때 고전의 요소를 규범으로 삼았음을 알게 해준다.

<라오콘>은 엘 그레코에게도 영감을 주어 그로하여금 1610년경에 <라오콘>(미술사 수녀 190)을 그리게 했다. 엘 그레코는 뱀에 감겨 죽어가는 라오콘과 두 아들을 묘사하면서 오른편에 세 인물을 삽입했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상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짐작컨대 세 사람의 운명을 상징하거나 아니면 그리스에 호의를 베풀어 트로이가 파괴될 수 있도록 도운 세 여신인 것 같다. 하늘에 일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세 여신의 전능한 힘에 의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들은 엘 그레코 특유의 가늘고 기다란 모습이다.

에스파냐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로 주로 톨레도에서 활동한 그는 그리스인을 뜻하는 엘 그레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 그는 작품에 서명할 때 늘 그리스 문자로 표기했고, 종종 크레타인을 뜻하는 크레스Kres를 덧붙이가도 했다. 티치아노의 제자였던 그는 틴토렌토와 바사노 등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그의 양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지만 신화적 주제를 다룬 <라오콘>은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또 다른 이례적 작품으로 만년에 그린 <톨레도 풍경>이 있는데, 이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순수 풍경화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화가로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많은 대가들이 따뜻한 적색과 갈색 계통의 색채를 선호하던 당시에 차갑고 푸른 색채와 은회색조를 선택한 데 있다. 차가운 색조, 거친 광선 효과, 자유분방한 붓질, 전통 규범에 대한 경시와 고통을 겪는 인물상의 정신성을 작품 속에 나타낸 엘 그레코의 천재성은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엘 그레코의 회화에 대한 관심이 부활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그의 극도로 반자연주의적인 양식은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매너리즘적인 비례 관계의 불균형화(가늘고 길게 늘인 인체, 형태의 데포르메)는 화가가 의도적으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스스로 물려받은 다양한 예술적 전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정신적 표현에 더할 나위 없는 효과적 도구가 되는, 자신만의 개인적 미학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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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첫 번째 표현주의자는 누구였을까?" 

 
표현주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재현하기보다는 사고한 것을 나타내는 데서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코자 했다.
눈에 보이는 오브제를 어떻게 흡사하게 모사할 수 있을까보다는 정신에 내재한 갖가지 의식과 무의식을 어떤 이미지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점이었다.
표현주의라 하면 프랑스의 야수주의, 독일의 다리 그룹, 오스트리아의 삼총사 클림트, 쉴레, 코코슈카 세 사람을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대부분의 미술사나 모던 아트 책이 이 세 가지 유형의 표현주의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며 표현주의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해로 1905년을 꼽는다.
표현주의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이야 이제 와서는 쉬운 일이지만 1905년에 표현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못박을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과연 첫 번째 표현주의자는 누구였을까?"

표현이 강렬하게 나타난 작품으로 말하라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엘 그레코가 피렌체 대성당에 장식한 <십자가에서 내림>을 지적할 수 있다.
렘브란트와 고야가 말년에 그린 그림들도 마찬가지이고 바로크 예술가들의 작품에서도 표현적인 요소는 발견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상상 가능한 이미지들에 불과할 뿐 표현 자체를 내용으로 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하거나,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으나 깊숙한 잠재의식에서 자아를 괴롭히며 분출되는 충동을 솔직하게 묘사한 표현주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작품은 뭉크로부터 비롯되었다.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그림에는 프랑스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이 다루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들이 아주 많다.
그냥 덮어둘 수 없는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이들의 그림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미술사에서 세 사람의 공헌은 이런 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앙리 마티스이지만 표현주의 그림을 먼저 그린 사람은 뭉크이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제임스 앙소르 등과 함께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칭송을 받는다.
이같은 표현주의 회화는 19세기 말 자연주의와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와 관련해서 주관주의의 일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관주의 회화란 극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간결하고 명료한 형상과 강렬한 색채를 통해 오브제를 모사하는 회화와는 달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다.

뭉크처럼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착한 화가는 드물 것이다.
그가 외부세계보다 내면세계에 집착하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경험과 불안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잃었으며 자신도 병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죽음의 가정으로 기억하면서 그런 불행을 극복할 수 없었음을 고백했다.
그는 끊임없이 죽음을 의식하고 있었고 이런 의식이 그대로 그림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뭉크의 미학은 한 마디로 '혼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더이상 숨길 수 없는 혹은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을 고백의 형상들로 창조해냈는데 <절규 the Scream>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만화처럼 과장하고 왜곡시켰다.
몸을 비틀면서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인물은 과연 무엇에 놀란 것일까?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화면을 큰 경사로 단절시키는 다리와 난간, 후방의 가늘고 긴 두 사람, 황색, 적색, 청색에 의한 다이나믹한 필치, 강에 떠 있는 두 척의 배 이외에는 세부를 생략한 표현 등은 극적 효과를 높인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 표면적으로는 평온한 가운데 돌연 누군가에 의해 습격당하고, 그리고 주변은 변함없이 평온하게 느껴질 때 한층 불안감정이 더해지고 체념하여 절규하고픈 충동에 쫒긴다.
이 작품에서 절규하고 있는 이와 원경의 인물의 무관함은 이러한 상황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어서 불안한 현대인의 공감을 자아낸다.
표현주의 그림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정신적 동요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물론 더 나아가 기억의 형태까지도 변화시킴을 뭉크의 그림에서 알 수 있다.
이는 표현주의가 추구하는 점이기도 하다.
뭉크의 그림들은 전통을 무시한 새로운 양식의 회화이며 표현이 매우 강렬해서 회화가 결국 표현임을 충분히 웅변하고 있다.
표현주의가 공식적으로 출볌하기 10년 혹은 그 이전에 이미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하고 있는 그는 표현주의의 선구자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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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에서  
 
<베르 자크룸>에는 비엔나 분리파의 유기적 조직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구스타프 클림트는 1897년 4월 3일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요제프 호프만과 더불어 비엔나 분리파the Viennese Secesstion를 창설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따라서 그는 5월에 예술가연합에 탈퇴의사를 알리는 내용을 보냈다.
그의 편지는 공개되었고 탈퇴가 공식화되었다.

비엔나 분리파는 1898년 1월에 간행물 <베르 자크룸 Ver Sacrum>('신성한 봄'이란 뜻이다)을 창간하고 3월에 제1회 비엔나 분리파전을 개최했다.
전시회 포스터는 클림트가 디자인했다.
<베르 자크룸>은 콜로만 모저와 알프레드 롤러, 그리고 응용미술학교 교장 바론 펠리시안 폰 미르바흐가 편집을 맡았다.
<베르 자크룸>에는 비엔나 분리파의 유기적 조직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내용도 있었다.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은 이 잡지를 통해 자신들의 목표를 간결한 문장으로 공포했다.

1.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의 연합은 순수하게 예술적인 관심을 고양시키는 것, 특히 오스트리아 내의 예술적 감각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
2.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내 그리고 국외의 오스트리아인 예술가들이 하나가 되어 선두를 달리는 외국 예술가들과 결실을 맺는 교류를 가지며, 오스트리아 내에 비상업적 전시회 체계를 여는 데 앞장서고, 국외에서 전시회를 열어 오스트리아 미술을 소개함과 동시에 걸출한 미적 성취를 통해 국내 화단에 촉진제가 되며, 또한 오스트리아 미술에 대한 인식을 드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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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이 '미의 전당'으로 확립된 것은
 

뮤지엄Museum의 어원 Mouoelov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시, 음악 등 아홉 가지의 학예를 관장하는 여신 뮤사(영어로 뮤즈Muse)의 신전을 가리켰다.
원래 뮤사가 담당하는 아홉 학예 가운데 미술은 포함되지 않았다.
뮤지엄이란 말이 콜렉션이란 의미와 '콜렉션을 보존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이중으로 갖게 된 것은 16-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때까지는 캐비넷Cabinet이라든지, 미술공예실Kunstkammer, 진품실Wunderkammer 등으로 불리운 궁전이나 저택 등의 방이 왕후 귀족 등의 콜렉션 소장처였다.
또한 갤러리Gallery라 불리운 복도나 좁고 기다란 방에도 콜렉션이 진열되어 이 말은 화랑이란 한정된 의미를 갖게 되었다.

18세기 이전의 예술적 흥미는 왕족과 귀족의 위신과 과시, 박물학적 관심, 진기한 것들에 대한 기호 등과 뒤섞인 면이 농후하여 회화, 조상과 더불어 화폐, 메달, 서적 등의 골동류와 박래품, 박물표본 등도 수집대상이 되었다.
이런 수집품들은 왕후 귀족의 저택을 치장하는 장식품이며, 수집가의 권위와 재력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다.
물론 예술진흥에 열심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시작으로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 수집가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수집품들은 일부 특권층에만 접근 가능한 사유재산에 그쳤으며, 특정한 날 특정한 사람만이 관람할 수 있었다.

왕후 귀족의 수집품들이 일반인에게 널리 공개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 사회구조의 변동과 문화적 조건의 변화에 의해서이다.
즉 신흥 부르주아의 대두, 고고학, 역사학 등 인문과학의 발달, 예술개념의 확립과 예술의 문화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 무엇보다도 수집품 공개에서 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려는 의식을 보여주는 계몽사상의 보급 등이다.
1793년에 개관된 루브르 뮤지엄이 좋은 예이다.

뮤지엄이 '미의 전당'으로 확립된 것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서였다.
19세기에 왕후 귀족이나 교회의 수집품들에 대한 국유화, 공공화가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갖가지 역사양식에 의한 뮤지엄이 잇달아 설립되었는데 대부분 고전적인 기념비적 이미지를 계승했다.
비엔나의 왕립 미술사 뮤지엄만 해도 오늘날의 정황에서 보면 고전적인 뮤지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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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자화상의 효시로 알베르티(1404-72)가 그린 것을 꼽는다.
<미술가 열전>의 저자 바자리에 의하면 플로렌스의 팔라 루첼라이 가의 저택에 그의 자화상이 있었다고 한는데 이것은 현존하지 않고 그의 옆모습을 청동으로 부조한 고대 메달 형식의 부조상은 현존한다.
현존하는 또 다른 자화상으로 145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 푸케(1420년경-77/81)의 것이 있다.
두 사람에 의해서 자화상이 하나의 장르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하지만 자아의식이 명료하게 표현된 자화상은 뉘른베르크 출신의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그린 것이다.
그를 가리켜서 자화상의 아버지라 일컫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뒤러는 13살 때 자화상을 그려 더욱 유명하다.
그가 1484년에 그린 자화상은 독일 최초의 자화상이자 최연소자의 것이란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는 데생 오른쪽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것은 1484년 내가 소년일 때 나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그린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뒤러의 자화상에 나타난 자기 과시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최초의 자화상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 내지는 자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으며 이런 성격은 후세에 나타난 많은 자화상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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