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정원
가쿠타 미츠요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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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콩가루 가족 구성원들이 차례로 들려주는 '아,우리는 얼마나 콩가루 집안인가!'의 결정판.

가족 구성원들의 서로에게 향하는 비밀과 증오, 오해, 배신들에 대한 감상들이 섹스와 디스커버리 센터와 러브호텔을 중심으로  경쾌하게 나열되고 있다.

미덕이라면 경쾌하고 유머스럽기도 하며 전개 속도가 빠르고 쓸데없는 말이 없다는것.
그리고 어쩜 존재할 지도 모르는 콩가루 집안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는것.

단점이라면,할머니에서 15살 손자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 모두가 한사람의 목소리가 분명한 톤으로 내적인 고백을 한다는것이었다.어쩜 그렇게도 지적수준에서 신경질적 인것과 냉소와 생뚱맞은 것까지 똑같은 지.그것도 여자인게 분명해 보이는 목소리로 .즉,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만 다를 뿐 모두 한 사람같아 보인다는게 흠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조숙하다 못해 현자처럼 말하고, 날라리 처럼 행동하며 ,결정적으로 어른을 용서하는 10대 애들의 모습은 그렇게 현실성 있게 다가서지 않았다.

가족의 생생한 공중분해를 시도함.가족들의 지탱해주고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역설하려 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난 별로 작가의 의도를 알고 싶지 않다.전혀...

이런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신기할 뿐이다.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것엔 토를 달고 않겠지만,도대체 무엇에서 감명을 받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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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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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의 첫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책들의 잊혀진 묘지'라는 장소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책 표지의 사진은 아마도 그 정경을 찍어놓은 듯하다.
이젠 잊혀진 책들의 무덤속에서 운명처럼 한권을 집어든 아들 다니엘에게 그 책 한권으로 인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한 권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과 저자 훌리안을 둘러싼 신비한 전설, 그 책을 없애려 쫓아다닌다는 괴한,우연히 알게된 거지 페르민과의 아름다운 우정,악랄한 경감 푸메로, 엄마없이 아들을 최선을 다해 키우려 애쓰는 이해심 깊은 다니엘의 아버지.다니엘의 연인 베아와의 사랑과 무엇보다 이 책의 기둥 줄거리인 작가 훌리안과 페넬로폐의 금지된 사랑...

쉴새 없이 전개되는 사건과 이야기로 풍성한 이 책은 마치 저절로 써내려가는 것처럼 흐름이 자연스럽다.롤러코스트를 타는 기분으로 따라 가다보면 책을 사랑하고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면서 2권이나 되는 분량을 금세 다 읽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재밌다...스릴러와 다소 감성적인 로맨스가 결합된 잘 쓰여진 소설이다.

단 거대한 주제를 아우르는 그런 통찰력은 보이지 않는다...격조있고 잘 쓰여진 베스트셀러?정도 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선한 주인공들이 모두 무사하더라 하는 면에서도 안심하고 읽어도 된다.
당신의 가슴은 이 책을 읽고나서도 무너지지 않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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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사랑 -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바다는 당신입니다
피핀 페레라스 지음, 최필원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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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실화다.읽어내려 가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절대 나오는 등장인물에게 정을 붙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이름을 익히고 난지 한 2페이지 남짓 넘어가면 아마도 죽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연쇄살인을 다룬 책도 아닌데 이렇게 나오는 사람 족족 죽어나가는 책을  첨 본다.

저자 피핀은 영화 그랑브르의 소재였던 프리 다이빙(심야 잠수)이 그다지 위험하지 않는 정교한 스포츠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는데,아이러니한 것은  책 속에 등장하는 피핀의 친구였거나 아는 사람이었거나 동료었거나 아내였던 사람들은 줄줄히 잠수를 하다 죽어나간다는 사실이다.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피핀은 그때마다 도무지 왜 그들이 죽었는 지 알 수 가 없다고 하늘에 대해 항의를 하던데,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는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말이다.
내가 보기엔 이렇게 사망률이 높은 스포츠는 없을 듯 보임에도, 피핀만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재밌었다.10명중 8명은 죽지 않나 싶을만치 위험한 스포츠던데,게다가 고수중 고수라는 사람도 죽어 나가는 마당에 여전히 위험하지 않다고 ,그들이 죽은 것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실수에 불과하다고 항변하는 그를 보자니, 손가리고 아웅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산을 오르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아직 인간의 정복이나 이해가 미치지 않는 곳이 심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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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야찬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세욱 옮김, 선종훈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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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시하다.

'어린 왕자'같은 어른을 위한 통찰력있는 동화 비스드름한 걸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실패한 듯 보인다.


솜사탕같이 부드럽지만 알맹이는 없고,제목 하나는 잘 지었다고 칭찬을 해주고 싶다.

책의 내용과는  별 관련이 없는 듯 보여서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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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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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차대전때 독일의 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정신과 전문의의 의사가 증언하는 수용소 체험기.

 엘리 위젤의 "night"를 읽고서 궁금함 맘에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두 책이 비교가 되었는데,덕분에 명확히 그곳 수용소의 실상에 대해 파악을 할 수 있었다.왜냐면 수용소를 두 사람이 그려내자 윤곽이 더 뚜렷해져서  각자의 주관만으로 그려낸 실상을 양면으로 겹쳐보니 현실적으로 보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말하는 수용소에는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었다.
공통점은 당연히 같은 장소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으로써 느끼는 온갖 감정들과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기에 별로 특이하달 것이 없었지만 ,내가 특이하게 생각한 것은 다른점이었다.

무엇보다 위젤의 경우는 15살의 나이로 끌려가서는 정말 살기 위해 기를 썼지만,결국 아버지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이었고.프랭클의 경우는 어느정도 성인이자 지성인으로 끌려 가서는 때로는 포기도 하고 신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도 하면서 지냈지만 그는 살았다는 것이었다.그래서인지 둘이 묘사하는 수용소의 풍경은 위젤의 경우가 더 살벌하고 황량하며 가슴이 아플정도로 절망적인 반면 프랭클의 경우는 그래도 위젤의 묘사에 비하면 낭만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빙판길에 엎어지고 넘어지며 몇 마일을 나아가는 동안 우리들은 서로 부축하고 이끌기를 수없이 되풀이 했을 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나 우리는 서로 자기 아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내 생애 처음으로 시인들이 노래하고 그토록 많은 사상가들이 궁극적인 예지라고 단언했던 진리를 보았다. 그 진리는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열망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도 지고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 그리고 신앙이 전달코자 했던 가장 위대한 신비의 뜻을 파악했다.'인간의 구원은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안에서 이루어진다.'나는 이 세상에 남길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짧은 순간이나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명상함으로서 여전히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있다는 이유를 이해했다. .....">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었고,그 누구나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글귀일 것이다.한 10여년쯤 전에 내가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다.그때 난 수첩에 받아적고는 가끔씩 꺼내 읽거나 남에게 베껴 주어서 거의 외울 정도었었다.

그런데,가슴 아픈 것은 위젤의 경우는 그런 감정적 사치마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비참하게 죽어가면서 외아들인 자신을 불러대는 아버지를 외면한 죄책감에 평생 괴로워하면서 살아가니까...게쉬타포의 이목을 끌까봐 아버지의 애원을 원망하다가, 간밤에 아버지를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도 안하고 시체 소각장으로 끌고 갔다는 것을 알고서는, 슬픔면서도 또한 안도감이 들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위젤의 경우를 보면 ,한가로이 사랑을 운운하는 프랭클이  감상적이고 순진해까지 보인다.만일 그때 그의 아내가 자신의 옆에 있어서 그녀의 생존이 자신의 걸림돌이 되었다면 그때도 사랑 운운 하는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정신과 의사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정신적인 변이를 분석할 수 있었던 프랭클과는 달리 위젤의 경우는 순진한 나이에 끌려가 자신의 정신이 변하는 것을 너무도 괴로워하고 굴욕 적으로 느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위젤의 경우는 자신을 변호할 그런 분석기제가 없었던 것이다.고로 그는 자연스런 반응인 무관심이나 부정의에 저항못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따라서 둘의 책중 위젤의 경우가 훨씬 더 읽기 어렵다.위젤의 고통과 굴욕, 그리고 수치심이 곳곳에 박혀 있으니까.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인간적이지 못했다는 자책이 섞어있는.그에 비해 프랭클의 책은 마치 인간 교육의 장으로서 아우슈비치가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진다.서바이벌 게임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었다가 인간의 정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는 무사히 살아남은 자의 보고서처럼 읽혀진다는 것이다.그는 살아남았고 거기다가 인간적일 수도 있었으며 거기다 교훈까지 덤으로 얻었더랬다.위젤에 비하면 남는 장사를 한 듯하다.

10여년전 프랭클의 책을 읽었을 때 난 그의 말은 무엇이든지 진리처럼 느껴졌었고 그 같은 고매한 인간이 되고 싶어 했었다.지금도 물론 그의 말이 틀리다거나 진리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젠 좀 다르게 보인다.

난 이제 위젤의 편이다.옳은 말만 구구절절하는 프랭클이 이젠 별로 믿음직 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인생에서 닥치는 고통들을 단지 사랑하나 만으로 땡하고 처리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에는 너무도 변수가 많고,어쩌면 인간적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박제된 듯한 설교보다 참회하는 인간의 울부짖음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고나 할까?

혹은 어쩌면 인간은 아주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일 것이다.프랭클의 책은 너무도 근사하지만 그처럼 살 수 있는 인간은 별로 없다.그래서 보통 인간인 엘리 위젤이,절규하듯 통곡하는 그가 더 맘이 쓰여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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