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것을 보았어 - 박혜진의 엔딩노트
박혜진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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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은 많지만 마지막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은 많지 않다. 마지막 문장을 이야기하면 작품 전체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까. 12년 차 출판사 편집자이자 8년 차 문학 평론가인 박혜진의 책 <이제 그것을 보았어>는 52편의 문학 작품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첫째로는 저자가 소개하는 문학 작품 대부분이 유명한 고전이라서 결말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거나 결말을 알아도 독서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프란츠 카프카 <변신>,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줄거리나 결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도 마지막 문장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거나 가물가물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둘째로는 마지막 문장이 가진 힘을 믿기 때문이다. 좋은 문학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마지막 문장은 끝까지 읽은 사람만 그 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광활한 세계다. 작품을 정직하게 완주한 사람만이 마지막 한 마디의 무게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그 점이 인생을 닮았다." (325쪽) 저자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10대, 20대, 30대에 읽고 각각 다른 인상을 받았던 경험을 소개하며 문학 작품을 한 번 완독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인생의 다양한 시기에 여러 번 다시 읽어보길 권한다. 독서의 목적은 읽은 책의 권수를 늘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생의 경험을 더욱 폭넓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길 당부한다.


이 책에는 편집자인 저자가 직접 편집한 한국문학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편집 후기 같은 글도 여러 편 실려 있다. 대표적인 예가 조남주 <82년생 김지영>과 김혜진 <딸에 대하여>인데 두 작품을 비교하며 쓴 글도 흥미롭다. 문학동네 계열사인 난다에서 출간된 책이지만 (저자가 재직 중인) 민음사에서 출간된 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와 오늘의 젊은작가 시리즈를 열심히 읽어온 독자(=나)라면 참고삼아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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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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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1960년대, 70년대가 배경인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면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이 심심찮게 나온다. 아마도 집안의 남자 형제의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자기 자신은 학업도 제대로 못 마치고 서울이나 인천 등지로 와서, 공장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과 하루 열몇 시간씩 노동을 하고 급료를 받으면 거의 그대로 집에 보내는 그런 여성들. 이제는 여성의 대학 진학률도 높아지고 전문직, 공직, 대기업으로의 진출도 활발해져서 더는 그런 여성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말 그럴까.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드는 책이 소설가 이서수가 2023년에 발표한 소설집 <젊은 근희의 행진>이다.


첫 번째 단편 <미조의 시대>의 주인공 미조는 변변찮은 직장을 전전하다 지인의 소개로 구로디지털단지에 위치한 웹툰 회사의 경리로 취직한다. 미조가 다니는 회사에서 웹툰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수영은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내용의 19금 웹툰을 그리다 원형 탈모를 얻는다. 수영은 미조에게 1970년대에는 여기(구로)에 가발 공장이 있었다는 말을 들려주며 - 가발이 19금 웹툰으로, 공장이 세련된 고층 빌딩으로 바뀌었을 뿐 - 그 시절과 지금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과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은 젊은 여성들의 노동으로 유지되어 왔는지를 상기시킨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가 노동이라면 다른 하나는 부동산이다. 미조의 가족은 아버지가 평생 일해서 모은 돈 5천만 원으로는 서울에서 반지하 집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나의 방광>에 등장하는 무주택자 부부는 무주택자인데 치솟는 집값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신체 질환을 얻는다. 그렇다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오른 집값이 다시 떨어질 리는 없고, 부부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물리적인 집' 대신 '정신적인 집'을 가꾸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다. 한국의 부동산 문제가 젊은 사람들의 '갓생' 열풍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기발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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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담아
에이미 블룸 지음, 신혜빈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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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존엄사를 종종 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존엄사를 선택한 인물에 관한 글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랑을 담아>의 저자 에이미 블룸은 1953년생 작가이자 심리치료사이다. 중년 이후에 만난 브라이언과 재혼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온 에이미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찾아온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던 브라이언이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은 것이다. 진단을 받은 지 이틀도 안 되어 브라이언은 병이 더 진행되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에이미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에이미는 브라이언의 결정을 존중하고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편을 택했다. 브라이언이 편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는 동시에 에이미를 범죄자로 만들지 않는 방법을 찾다가 스위스에 있는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를 알게 되었다. 디그니타스는 1998년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을 기치로 내걸며 설립된 단체로 현재까지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에도 존엄사를 허용한 주(州)가 있지만, 말기 환자이면서 여명이 육 개월 이하라는 의사의 진단을 얻어야 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이들이 주로 디그니타스를 찾았다.


이 책은 2020년 1월 브라이언과 에이미가 함께 스위스 디그니타스를 방문해 존엄사를 실행하고 에이미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브라이언과 에이미의 첫 만남부터 결혼과 알츠하이머병 선고,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존엄사를 선택한 남편의 결정을 지지하고 그 과정을 함께 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족의 자살을 방조하고 존엄사를 홍보하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할 만하기도 한데, 내가 보기에는 저자 자신도 남편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고, 남편을 원망하거나 남편을 말리지 못한 과거를 후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외국의 소설, 영화, 드라마 등을 보다 보면 적극적으로 존엄사를 택하지는 않더라도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보는데, 존엄사든 연명치료든 한국에서 슬슬 더 많이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는 브라이언이 정식으로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기 전에 보인 문제 행동과 그로 인해 생긴 자괴감, 주변 사람들에게 끼친 피해, 경제적 어려움, 신체적 위험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여러 의미에서 내가 더 이상 나로 살 수 없게 될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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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 - 타인의 고통이, 떠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양재화 지음 / 어떤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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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교토에 갔을 때의 일이다. 교토 국립박물관에서 하는 전시를 보기 위해 열심히 걸어가다가 예상치 못한 장소를 마주쳤다. 그것은 바로 '미미즈카'. 한국어로는 '귀무덤'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해 배울 때 왜군이 전공(戰功)으로 조선인 희생자들의 귀 또는 코를 베어 가져간 것이 무덤을 이루어 귀무덤이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그 귀무덤을 그곳에서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의 아픈 일면인 귀무덤을 찾아가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일본의 박물관 구경이나 하려고 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물론 일본에 갔기 때문에 귀무덤을 직접 본 것이기도 하지만...).


그 후로 외국 여행을 계획하거나 구상할 때마다 우리 역사와 관련된 곳이 있는지 찾아보고 기회가 되면 직접 가보는 습관이 생겼다. 외국의 역사와 관련된 곳을 직접 방문하는 일에도 관심이 생겼다. 기왕이면 밝은 역사보다는 어두운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곳. 책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의 저자 양재화는 바로 그런 여행을 오랫동안 해왔다. 대학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2005년부터 2017년까지 12년 간 세계 각지의 제노사이드 현장을 여행하고, 지난 6년에 걸쳐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가 찾은 다크투어 여행지는 아르메니아 예레반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기념관,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 캄보디아 킬링필드와 투올슬렝 제노사이드 박물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와 모스타르, 칠레의 기억과 인권 박물관과 아르헨티나의 오월 광장, 대한민국의 제주 4.3평화기념관과 북촌리 너븐숭이 유적지 등이다.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가 폴란드 아우슈비츠뿐이었는데, 세계 곳곳에 제노사이드 관련 장소가 있다니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저자가 2016년 제주 4.3평화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겪은 일들이 특히 충격적이었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더 깊이 배우려는 마음으로 기념관을 찾은 저자와 달리, 기념관의 의미는 물론이고 4.3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하는 듯한 모습으로 기념관 이곳저곳에서 몰상식한 발언 또는 행위를 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다니 내가 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제주 4.3평화기념관의 존재조차 몰랐던 내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나 싶고, 불과 몇 년 전까지도 4.3에 대한 교육은커녕 언급조차 금기시되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들의 탓만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마음이 무겁고 슬퍼지는 일에 쓰는 것이 아직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행이 일상과 무관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다크투어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타인의 고통이 떠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저자의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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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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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언제부터인가 자주 듣는 인사말이다. 상대는 분명 좋은 뜻으로 그 말을 했을 것이고, 그 말을 듣는 나도 결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삶을 누가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로 일은 인간의 경제적 지위를 상승시키고 사회적 자아를 성립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일하지 않고 벌이도 없는 삶보다는 많이 일하고 적게 버는 삶이 차라리 나은 이유다(슬프게도...).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에 실린 작가 후기에 따르면 작가는 이 소설을 "한국 노동자들에게 헌정하려 한다." 작가에 따르면 그동안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문학 작품이 수없이 발표되었지만 그중에 한국의 산업 노동자들을 다룬 소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작가는 다양한 직군의 산업 노동자 중에서도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철도 노동자들의 삶에 주목했다. 소설은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평생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현재는 사측에 맞서 고공농성 중인 이백만의 증손 이진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의 산업 노동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가난한 조선인 이백만은 어릴 때부터 여관, 정미소 등에서 일하며 열심히 돈을 벌었다. 뛰어난 손재주와 성실함을 인정받아 철도청 기술자가 된 백만은 자신의 두 아들을 철도 기관사로 키워낼 꿈을 품는다. 장남인 일철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심히 공부해 순조롭게 철도 기관사가 되었지만, 차남인 이철은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독립 운동에 투신해 집안의 근심 거리가 된다. 일철은 조선인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기 힘들었던 시절에 철도청 직원이라는 안정적인 지위를 가진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노동이 일본인들의 부를 늘리고 조선인들을 착취하는 데 쓰이는 것에 회의감을 품는다. 

 

이 소설은 아버지에서 아들, 손자, 증손자로 이어지는 부계 혈연 중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인 면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비중이 적지도 않고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이백만의 아내 주안댁은 혼자 힘으로 장사를 시작해 집안을 일으킨 생활력 강한 인물이고, 이일철의 아내 신금이는 시동생 이철과 함께 노동운동을 한 신여성이다. 이이철의 아내 한여옥은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독립운동가 '안옥윤'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며, 이지산 아내 윤복례는 한국 전쟁 직후 아무것도 없을 때 시장에 좌판을 벌이고 옷장사를 해서 생계를 부양했다. 이런 식으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성들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을 누락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 소설은 한국의 실제 근현대사를 바탕으로 하는 역사 소설이지만, 약간의 판타지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 독자의 흥미를 높인다. 이 소설은 사십오 미터 높이의 굴뚝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이진오가 과거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옛날 이야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회상의 계기가 되는 것이 바로 이진오가 보는 환상이다. 이집오의 집안 사람 중에는 이진오처럼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이거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인물이 몇 명 있어서 이들의 활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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