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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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크리스티앙 보뱅의 산문집이다. 황정은의 <일기>를 읽다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궁금해서 주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에는 서문을 포함해 총 열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저자가 시인이라서 그런지, 에세이 형식의 글인데도 시처럼 읽힌다. 본문의 글도 좋았지만 서문의 글이 압도적으로 좋았는데, "책이라면 손도 대지 않는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독서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누가 가난한 사람이고 누가 부자일까." (16쪽) 같은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독서가가 있을까.


"글쓰기는 (중략) 계급 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코 읽지 않을 한 권의 책을 바로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17쪽) 같은 문장을 읽을 때는,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를 저자가 먼저 깨닫고 일러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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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력 젊은 만화가 테마단편집 1
AJS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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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기>에 이어서 읽은 여성 만화 앤솔로지다. <극락왕생>의 고사리박사 님이 참여했다는 말만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했는데, 고사리박사 님의 단편 <조용한 세상의 미소>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자급자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여성+비건+초능력자들의 이야기랄까요... 영상화될 때까지 존버합니다ㅠㅠ). 


AJS님의 <함안군 가야리 땅문서 실종사건>은 잊고 있던 기억을 재생시켜 무엇이든 찾아주는 사무소가 있다는 설정도 좋고 에피소드 내용도 감동적이라서 장편으로 연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이랑 님의 <바람이 불면>은 평범한 여학생 민아와 '크리스퍼(초능력자)'인 선형이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인데,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민아와 선형 중 어느 쪽이었을까요...ㅎㅎ) 반갑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 시절 여러모로 부족하고 서툴렀던 나를 받아주고 이해해 준 사람들(특히 친구들) 모두 감사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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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걸음 - 풍경, 정체성, 기억 사이를 흐르는 아일랜드 여행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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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대표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기 훨씬 전인 1997년에 발표한 책이다. 이때만 해도 젊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고, 작가로서의 경력도 일천했던 저자는, 외삼촌으로부터 아일랜드 국적이 생길 거라는 말을 듣는다. 어머니가 아일랜드 이민자 집안 출신이라서 아일랜드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건 알았지만, 저자는 스스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얼마 후 아일랜드 여권이 나왔을 때도 내 것 같지 않은 어색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여러 번에 걸쳐 아일랜드 더블린과 서해안 지역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담고 있다. 아일랜드의 역사와 정치, 문화와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아일랜드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고 현재도 영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자동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떠올리게 될 때가 많았다. 영국의 식민 지배가 아니었다면 아일랜드의 근대화, 산업화 속도가 지금보다 더뎠을 거라고 주장하는 영국의 모습에서, 현재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보수 진영을 보는 것은 나뿐일까. 


아일랜드의 독립 영웅 로저 케이스먼트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된 인물인데, 검색을 해보니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에도 등장할 만큼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아일랜드로 돌아가 목회자로 살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을 <걸리버 여행기>에 담았다고 하니, 조만간 <걸리버 여행기>도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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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1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앞부분에 말씀하신대로 오래전 조상이 아일랜드출신이라는 이유로 아일랜드 국적이 생기는 이야기 굉장하 신기하더라구요. ^^ 저는 반쯤 보다가 나중에 시간될때 찬찬히 봐야지 하면서 덮어뒀는데 다시 꺼내 읽어야겠어요. ㅎㅎ

키치 2022-01-14 08:20   좋아요 0 | URL
저도 신기했어요 ^^ 덕분에 알게된 아일랜드에 관한 이야기들도 흥미로웠습니다.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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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철거되기 전까지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실제로 존재했던 '벽수산장'이라는 건물이 소재인 소설이다. 도대체 어떤 건물이길래 '아방궁'이라는 별명이 붙었나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과연 아방궁이라고 불릴 만하다. 면적이 무려 200평에 달하고 정원에 연못도 있었다고. (참고 : '큰거문고' 님 블로그 "벽수산장을 아시나요" https://blog.naver.com/graz2000/222599526739) 


이야기는 1966년 이해동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는 윤원섭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언커크(UNCURK, UN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호주 대표 애커넌의 개인 비서인 해동은 현재 언커크 건물로 쓰이고 있는 벽수산장의 옛 주인이자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의 막내딸 원섭을 애커넌에게 데려간다. 비록 천애고아로 고모 손에 컸지만,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다는 게 나름의 자랑이었던 해동은 친일파의 딸인 데다가 사기죄로 복역까지 한 원섭이 애커넌의 마음에 들어 자신의 윗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후에도 원섭이 계속 눈엣가시 같은 행동을 하지만, 해동은 좀처럼 벽수산장을 떠날 마음을 먹지 못한다. 지방 출신에 무학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받아주고 과분한 월급까지 주는(그것도 달러로!) 직장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나올 만큼, 건물 자체가 매혹적이고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보기에 좋은 것만이 전부일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해동은 자신이 벽수산장에 매혹된 '진짜 이유'는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 건물이 상징하는 당대 최고의 권력과 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설에는 두 가지 유산이 나온다. 하나는 벽수산장을 비롯한 '물질적 유산'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이나 애국심 같은 '정신적 유산'이다. 벽수산장은 결국 전소되고 철거되었고, 해동의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고모네 식구들은 고모의 죽음을 계기로 해동과 등졌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정신만큼은 계속해서 이어질 줄 알았지만, 이마저도 1965년 한일수교 이래 빛바랜 가치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 <영원한 유산>이 뜻하는 '영원한' 유산은 무엇일까. 어떤 유산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제목일 수도 있지만, 그 모든 환난과 고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해동과 그의 새로운 가족들을 보면서, 결국 사람이 유산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을 길러내고 있을까. 벽수산장처럼 종국에는 파괴되어 잊힐 것들만 만들어내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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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The Power
나오미 앨더만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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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몇몇 여자들이 손끝에서 전기가 나오는 경험을 한다. 이 전기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여자들은, 그동안 남성들에게 당해온 차별과 폭력에 적극적으로 맞서기 시작한다. 앨리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성폭력을 행사해온 아버지를 죽이고, 록시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남자를 찾아 나서고, 마고는 경쟁 상대였던 남성 정치인을 제치고 차기 대권 후보 자리에 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여성 상위 시대'의 모습은 어떨까. 


사람들은 여성이 권력을 잡으면 "온순하며 평화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들의 속성을 따라서 보다 나은 세상이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소설 속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성별만 바뀌었을 뿐, 남성 상위 시대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다. 남성이 강간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하는 경우는 여성이 강간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하는 경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남성이 그런 일을 당해도 가해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남성은 오로지 여성의 성욕을 풀어주고 임신, 출산을 위한 도구로 여겨지며, 여성과 동일하게 직업 및 재산을 가질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여성 상위 시대가 남성 상위 시대만큼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어느 한 집단이 다른 한 집단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흔히 남성/여성, 남성성/여성성이라고 구분하고 정의하는 특질은, 성별 고유의 특성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집단/못 가진 집단의 특성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는 것도 작가는 암시한다. 


이 소설은 본편도 재미있지만, 본편의 액자에 해당하는 나오미와 닐의 편지가 더 재미있다. 작가는 나오미와 닐의 편지를 통해 여성 상위 시대가 실현되었을 때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가 어떤 식으로 글을 쓰고 교류할지를 상상하고, 이를 통해 남성 상위 시대인 현재, 얼마나 많은 남성 작가들이 문단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여성 작가들을 하대하는지 풍자한다. 이게 비단 문단만의 일은 아니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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