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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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진치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았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서 이 조르바라고 하는 특유하고 괴팍한 노인이 실제 인물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란 사실에 많은 당황함을 느꼈다. 그 조르바라는 인물은 너무 특이하고 낯설고 또는 너무 가깝게 여기게 만드는 남자였다.

 

아마 이 소설에서 나라는 인물은 니코스 카진치키스일 것이다. 그의 행로에 대해 잘은 모르겠으나, 그가 아마 이 소설로 보이는 내용으로 보아 조르바라는 남자가 그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조르바라는 남자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기에 그가 여행을 떠나면서 조르바의 그림자를 느끼고, 조르바가 죽어가는 순간 조르바의 죽음을 알았을까?

 

자신의 곁에 없는 조르바, 하지만 이 소설의 나라는 인물은 조르바의 죽음을 느끼고, 조르바의 영혼을 숨 쉬었다. 그는 조르바와 다른 사람이었으나 어느 사이에 조르바의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아주 고생스러우며 마음 아팠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느끼는 내 감정은 아마 인간의 본연의 가치 내지 존재적인 희열일 것이다. 마치 조르바를 보는 순간 이 말이 생각난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조르바에겐 신이나 천사나 혹은 악마든지 뭐든지 관여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신이 되려는가? 아니면 악마가 되려는가? 마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나오는 싱클레어 모습처럼 그 자신의 존재의 여부가 선악으로 이원화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되었다.

 

그런 만큼 조르바의 깊은 상처와 슬픔, 고뇌도 너무 깊은 바다처럼 캄캄했으며, 그가 용솟아 오르는 춤과 흥처럼 모든 것을 초월했다. 이 작품 후기에서 나오듯이 작가인 니코스 카진치키스는 니체를 아주 좋아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 송도 좋아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의 작가 호메로스도 좋아했다.

 

니체를 좋아한 만큼 그의 조르바를 볼 때면 마치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찬사하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생각난다. 포도주는 모두를 즐겁게 만들기도 하나 모두를 미치게 한다. 하지만 이 자애롭고 잔인한 디오니소스야 말로 신중의 신이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의 주인공 갈탄광의 사장이 술집에서 만난 조르바는 그저 직설적이고, 공격적이고, 아무런 생각 없이 말하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철학 이상이 있었다.

 

아니 그는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조르바라는 끓는 피가 흐르는 노인이 말이다.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그의 말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또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후회를 버렸다. 조르바는 모든 것을 비우고 모든 것을 채워 넣는 마법의 항아리였다.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는 자신의 욕망을 갈구했다.

 

맛있는 고기와 생선을 게걸스럽게 먹고, 술을 있는 그대로 부어 마시고,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은 이방인과는 춤으로서 대화했다. 늙은 카바레 여가수인 오르탕스 부인을 유혹하여 그녀를 자신의 성적 욕망으로 갈구하다가 마치 아주 귀찮고 피곤한 여자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오히려 그녀를 유혹의 나락에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손으로 갔다.

 

억지로 만들어져 버린 약혼과 그 뒤에 결혼식, 그런 결혼식을 마치고 오르탕스 부인은 이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험한 인생의 종지부를 마치고, 인간처럼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조르바와 더불어 탄광 사장이 보는 앞에서 결혼했지만 결국 병으로 죽는다. 조르바는 새로운 여자를 찾아 그냥 갈 것으로 보일 인간이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부인을 저주했고 부인을 탐욕했고 부인을 사랑했고 부인을 애도했다.

 

부인이 병으로 땀과 진으로 침대가 범벅되어 냄새가 코를 질러 죽어가는 순간, 동네 주민들은 그녀에게 장송곡이라 해두고 그녀의 집에 가서 있는 물건을 가져갔다. 그녀의 모든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말이다. 그녀가 마침내 마지막 숨소리마져 끊어지자 동네 노파들과 청년들은 성난 이리 떼처럼 몰려들어 오르탕스의 물건을 가져간다. 심지어 창문과 대문까지도 말이다. 남은 것은 오르탕스의 뚱뚱한 발바닥이 새겨진 낡은 신발이었다.

 

모두 오르탕스 부인이 죽기를 바랐고, 그 이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르바만큼 눈물을 흘렀다. 매우 격정하고 고뇌했다. 그녀가 매우 불쌍하고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죽고 나서 모든 것을 정리하자 조르바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어간 오르탕스 부인을 대신해 열심히 살아가려 했다. 그리고 엉덩이가 펑펑한 젊은 과부와 그 과부의 어린 두 아이와 살아가며 새로운 인생을 꾸린다.

 

조르바는 오늘 죽기를 살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오직 오늘만을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철학이 메마른 곳에 성직자조차도 성난 이리와 잔혹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르바가 소크라테스처럼 죽음과 경계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런 유쾌하면서 비극적인 조르바, 하지만 그것은 그의 깨달음이었다.

그리스와 크레타 섬에서는 터키와 불가리아와 많은 시련의 투쟁을 거친 것 같다. 조르바는 자신도 용사가 되어 불가리아의 병사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망가뜨렸다. 그러나 그것만이 최선의 가치라고 알았다. 어릴 적에 터키 사람에 의해 교수형 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조르바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발에다 키스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것이라고.

 

그러나 조르바는 그것이 엉망임을 알았다. 국가, 종교, 민족, 사상 그 많고 많은 존재들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어디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해방한 그였다. 그가 그리스인을 위해 총을 들 때 불가리아 군인들에게 포위되어 어느 불가리아 집에 들어가서 어느 여성을 발견하고, 한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한손으로 그녀의 커다란 유방을 잡는다.

 

여자는 공포에 질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조르바에게 자신의 침대에 와서 같이 밤을 보내게 해주고, 게다가 불가리아 옷까지 빌려주어 그를 탈출시킨다. 조르바는 그 후에 귀대하여 파르핀으로 그 동네를 불사르면서 그녀가 그 슬픈 과부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슬픔은 불가리아의 유명한 신부의 암살이다. 그 신부는 매우 유명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났다.

 

그래서 조르바는 그 신부가 마구간에 오기를 기다린 후에 잠복하여 그 신부의 목을 베어 그 목에서 귀를 잘라간다. 어느 날 무기를 숨기고 와서 동네장터에 오니 어느 꼬마들이 구걸한다. 그 꼬마들은 굶주리고 여의고 희망이 없이 눈물범벅되던 애들이다. 그런데 그 애들의 아버지가 신부였다. 오! 이런 자신에게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 조르바는 모든 돈과 구매물품들을 그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조르바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었다. 진정한 자유를 말이다. 오히려 자유라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부수고 말았다. 윤리라는 척도가 오히려 인간이 인간다움을 고민하는 윤리, 또한 철학까지 부수었다. 그리고 조르바는 그 인간들을 가두는 윤리 같지 않은 윤리, 철학 같지 않은 철학을 부수고 버리고 조롱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조롱하고 사랑한 것이다.

 

그런 조르바를 보는 젊은 사장의 눈에서는 많은 심정의 변화를 느낀다. 나는 이 사장의 이야기에서 슬프게 여긴 것은 오르탕스 부인과 더불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오렌지나무의 과부이다. 그 과부는 몸매 라인이 매우 아름답고, 블라우스 밑으로 살짝 내려가자 그녀의 젖가슴 윗부분은 매우 하얗고 탐스러웠다. 조르바는 그녀가 사장을 좋아함을 알고 있었다. 조르바는 그녀에게 진정한 자비와 인간답게 대하는 방법은 사장의 딱딱한 껍질을 파괴하라고 했다.

 

그녀의 가슴을 붙잡고, 입술을 깊이 음미하고, 그녀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란 것이다. 음흉하고 야하고 짐승 같은 것이 그녀를 구원하리라고 말이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세상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인간들은 혼자이고 싶지 않다. 여자들은 모두 집에서 기다리나, 남자들은 그녀들을 버리고 전쟁에 가서 죽이고 죽여 가엾은 과부와 고아들을 만들었다. 조르바의 정력은 과부들과 고아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 과부는 아름다움이 죄인지 동네 청년 중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반대를 하여 자살을 하자, 그 청년의 가족이 그녀를 죽이려 한다. 아무 죄도 없는데, 단지 과부라는 이유로 말이다. 교회 안에 몰아넣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여 그녀를 죽이려는 남자에게 조르바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나 자신의 귀가 찢어지고, 젊은 사장은 말리려다 저지당한다. 결국 그 오렌지나무를 키우는 아름다운 과부는 여자로서의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한 채 목이 베인다.

 

그리고 그 목은 더 비극적으로 교회 문턱에 버려진다. 그것이 사랑인가? 그것인 인간의 윤리인가? 신이 살아있는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그녀는 무참히 생을 마감한다. 축복받지 못한 운명에 농락에 당하며, 사랑조차 받지 못하며, 경멸 속에서 죽어간다. 과부를 보면서 조르바는 슬퍼한다.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은 테인데 조르바만이 슬퍼한다. 사장도 슬퍼한다. 그렇지만 이 두 남자 외에 슬퍼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조르바는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오렌지나무의 과부가 보낸 향수 좋은 물을 젊은 사장에게 있는 것을 알자 조르바는 그 물을 몸에 뿌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아주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는 그렇게 욕심 많고 격정적이고 음흉하고 직설적이나, 그 누구도 진실적이었다. 니체의 책에서 나의 주변 사람들이 아닌 나의 주변 외의 사람에게 친절하라고 한다. 자신 안의 인간을 사랑하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국가와 성직자는 그저 조르바에겐 나쁜 존재에 불과했다. 그들이 사람들을 얽매이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로 있고 싶은 초인, 그 초인 조르바, 그의 죽음은 결코 죽었다 할 수 없다. 그가 아주 잘 타고 아끼던 산투리를 젊은 사장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듣던 사장은 그가 죽기 전에 크게 웃다가 울다가 생명의 촛불이 껴졌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기뻐하면서 슬퍼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혼을 나누던 그 젊은 사장의 회유할 수 없는 슬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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