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자, 전시회로'라는 제목이 있다. 코로나가 우리 생활을 완전히 제약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때가 되었다.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했고, 학교는 모두 등교 수업을 하게 됐다.


  학생들도 체육시간에 마스크를 벗어도 되고, 교실에서는 드디어 짝도 생겼다고 한다. 짝!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눌 사람. 코로나로 학생들은 짝도 잃었고, 대화도 잃었고, 몸을 움직일 시간도 잃었었다. 게다가 함께 잠을 자는, 학창시절 가장 큰 즐거움인 수학여행도 잃고 지냈으니...


  어떤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두 해가 지나고, 이제는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이때를 맞이하여 빅이슈에서 다룬 주제가 바로 '전시회'다.


나하고는 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장소. 전시회.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보고 싶었던 전시회를 찾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런 때를 맞아 빅이슈가 소개하고 있는 전시회에 가보아도 좋을 듯 싶다.


전시회와 더불어 저번 호에 이어서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보다는, 그들의 투쟁에 응원을 보내는 글들을 실었다. 그래. 언론에서는 중립을 표방한답시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을 함께 내보냈지만, 과연 그것이 중립일까?


중립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약자들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언론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같은 말이라도 어느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임을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 있음을...


그것을 같은 비중으로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중립이라고 하면 그 중립은 강자 편을 드는 일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전시회'가 '장미'라면 '지하철 타기'는 '빵'이다. 장애인들이 전시회에 가려고 해도 지하철(버스)을 제대로 타고 갈 수 없다면, 전시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빵과 장미'로 대표되는 인간의 권리인데, 이들은 '장미'를 향유하기 위해서 '빵'이 확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빵'조차도 확보되지 않은 현실에서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다.


이번 호에서 전시회와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글이 실렸는데, 묘한 등치를 이룬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회를 즐기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두 주제가 함께 실린 이번 호는 꽤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에 탱고에 관한 글이 이 두 주제를 묶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탱고를 둘이 함께 추는데, 혼자만 잘한다고 상대 생각없이 제 멋대로만 춘다면, 그 춤은 볼썽사납게 되어버리고 만다고.


'나는 팀의 목표를 서로 잘 연결되어 기분 좋은 순간을 창조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를 위해 리더는 상대방이 움직일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상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 본인도 움직여야 한다. 분명히 리드하지 않거나, 팔로워의 움직임을 확인하거나 기다려주지 않은 채 혼자만 급히 움직인다면 역할을 정성껏 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는 불쾌한 순간과 보기 싫은 몸짓이다. 나는 대부분의 팔로워가 자신을 '추하게' 만드는 리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68쪽) 


리드와 팔로워를 정치인과 시민으로 바꾸고, '추하게'를 '힘들게'로 바꾸면 우리나라 정치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이때 팔로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장애인도 팔로워에 해당한다. 그들도 한 팀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춤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출 수 있게 리드해야 한다. 리드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지하철 출근 투쟁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치인들은 자기만의 속도로 춤을 추는 리더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 팀은 제대로 춤을 출 수가 없다.


중립이란 바로 이렇게 리더가 제 역할을 해서 팔로워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힘들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하는 데 있다. 그것이 바로 중립이다. 양쪽 다 문제가 있다 또는 양쪽 다 이해가 간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고.


그래서 '전시회와 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함께 다룬 이번 호는 '빵과 장미'처럼 함께 이야기될 수 있는 그런 주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렇게 '빵과 장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한 [빅이슈] 275호가 중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맙다. 이렇게 중립을 지켜주는 잡지가 있어서...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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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편안해지면서 따스해진다. 세상이 마냥 평화롭다. 평화로워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갈등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평화를, 위안을 가져다 준다.


  시집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시인과 아내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 시인으로 살아가는 모습 등등... 


  여기에 '못난 시인의 기도3'이란 시가 있다. '시를 쓰는 시간만큼이라도 / 딱 그 시간만큼이라도 / 세상이 고요해질 수 있다면 / 날밤을 새워 시를 쓰겠습니다' (39쪽)라고 하는 시인.


  이런 마음을 지닌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세상을 위해서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시를 통해 잊지 않게 해주고 있다.


이런 잊지 않음, 기억은 시인의 친구들에게로 확장이 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하는 시인. 그 전화번호를 그대로 둔다고 한다. 왜? '언젠가는 / 하늘나라에서 /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서로 떨어진 곳에 있으면 / 전화 걸어 / 막걸리 한잔 해야 하니까' (32쪽)라고 한다.


2부에서는 이웃사람들로 시상이 확대된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시인이 함께 살아가는 농민들 이야기를 시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젊은이가 거의 없는 농촌의 현실이 시에 나타나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울하지만은 않다. 그런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하도 구슬파서 웃었겄지'(슬퍼서 웃는 사람들 부분. 48쪽)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3부는 자연으로 더 시상이 확장된다. 사람이 사람과만 살 수 없고, 자연의 일부임을 시를 통해서 알게 된다.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간식거리와 저녁거리'(88-89쪽)라는 시에 너무도 잘 드러난다.


우리에게는 간식거리인 고구마가 새들에게는 저녁거리임을, 그런 저녁거리를 '간식거리 고구마말랭이를 / 어디 겁도 없이 훔쳐'(88쪽)라고 큰소리를 친 뒤 곧 놀란다. 왜냐하면 '오늘 당장 / 때까치 식구들 먹을 / 저녁거리가 마당에 떨어졌는데 // 어린 새끼들이 배가 고파 / 꼬르륵 꼬르륵 / 밤새 잠 못 들지 모르는데' (89쪽)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이런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 


4부는 새로운 가족 이야기다. 시인의 아들이 결혼했나 보다. 그런데 새식구와 함께 지내는 모습이 1-3부에 나온 시들에서 보여주는 시인, 마을, 자연과 비슷하다. 


서로 배려하면서 함께 살아가려는 모습. 그런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우리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 시집에 나온 시들처럼... 시인처럼... 그렇게.


그 중에 짧은 시.. 그러나 정말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는 시.


   감골 할머니의 쓴소리


돌아댕기는 곡식을 줏으면 사램을 살리지만은, 


돌아댕기는 말을 줏으면 사램을 직이는 기라.


서정홍, 그대로 둔다. 상추쌈. 2021년 초판 3쇄.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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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창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그것도 잘나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어서 좋다.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다가 새로운 사실을 만나고는, 그래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글들을 만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빨리 실시했으면 좋을 그런 일들.


복지와 농업을 합할 수 있다는 사실. 그렇다. 농업과 치유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은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생활에서 하는 농업과 치유, 복지가 함께 할 수 있음을, 조예원의 글 '농업·농촌 치유의 공간으로 태어나'라는 글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는 치유농업(케어팜이라고 한단다)을 우리나라에서도 도입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농업과 치유, 사회복지가 함께 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치유농업 말고도 우리가 받아들일 것이 많다. 


여기에 더불어 박총이 쓴 '전혀 시대착오적이지 않은'이라는 글에서는 여전히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만날 수 있다.


노조조직율이 매우 낮은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은,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가 힘듦을 이 글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데...


사회의 수준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여전히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반대도 있는 우리 사회로서는, 노동자들의 삶, 노동자들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삶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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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으로 이 시집 시들은 내용이 쉽다. 머리 속에 잘 들어온다. 그만큼 시 속 상황을 이해하기 쉽다. 시 속 상황을 내 삶과 연결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연결시킬 수가 있다.


  시인이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이 아니듯이, 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시들이 어디 사람과 사회와 떨어져 있는 내용을,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이야기를 하던가.


  시는 사람과 사회를 시 속에 담고 있을 때, 그렇게 사람과 사회를 시에서 잘 보여줄 때 우리들 마음에 다가온다. 그 담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 시인에 따라서 다양하기에 시는 하나이면서도 여럿이 될 수 있겠지만.


그 표현의 다양성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고, 사람을, 사회를 찾아내어 자신의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들이는 일, 시를 읽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시를 읽게 해야 한다. 읽지 않는 시는 독자에게 다가올 수 없기 때문이다. 당의정이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이 시에 나오는 연약한 과육 속에 단단한 씨를 품고 있어야 한다. 시는. 그래서 말랑말랑한 느낌을 받지만, 시를 읽고 나서는 무언가 단단함을 얻은 느낌을 받도록 해야 한다.


시인이 이야기한 방향과 다르지만, 이 시집 제목이 된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는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는 시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


어쩌면 이 시는 바로 시를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시를 읽는 순간, 또는 시를 읽는 의미가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부분, 40-41쪽)


시 역시 마찬가지다. 읽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포도씨처럼 무언가가 마음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것은 바로 시가 우리에게 남기는 미래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집에 있는 시들을 읽어가면 열매를 먹으며 씨를 남기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시집엔 어려운 말들이 없기에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쉽게만 그냥 술술 소화가 되고마는 시들은 아니다. 무언가를 남긴다. 그 남김... 소화되기 전에 곱씹게 만드는 무엇. 그것이 있어야 좋은 시가 된다.


특히 이 시, 시는 시대를 넘어서 보편적인 무엇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는 생각을 하게 한 시다.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따온 소재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시 역시 동화처럼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옛날 숲속에 자칭 잠자는 미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날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그녀를 깨울 때까지는

  계속 잠만 자야 하는 것인 줄 굳게 믿고 있었다


  잠을 깨운다

  벌거벗긴 채 닫힌 문 밖에 껍질 벗긴 자두모냥 서 있는 다섯살짜리 아이의 흐느낌이,

  한 달째 놓쳐버린 줄풍선인 여자아이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늘 담장에 핀 소담한 꽃이었던 양순한

  포장마차 내외가 단속에 밀려 겨우내 차디찬 가지와 줄기로 얼어붙어 있는 것이,

  등 따스운 잠을 깨운다


  하지만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깨어나지 않는다

  그녀의 잠을 깨우기에는 무언가 2%가 모자란가보다

  그녀는 아직 먼 나라의 꿈을 꾸는가보다 그 꿈은 좀처럼 깨어나기 싫은 꿈인가보다

  걸어잠근, 작지만 아늑하고 깊은 방인가보다


  '영등포 슈바이처'라 불린 한 의사의 씁쓸한 죽음이,

  석면공장 근로자들의 20여년 잠복기 석면폐증이,

  딸 옆에서 유서를 쓴 한 대학강사의 돌연한 죽음이,

  포근한 잠을 깨운다


  이제 잠자는 미녀의 숲은 철거되어야 함을

  더이상 그녀를 재워줄 숲은 없음을

  잠을 자다가 그대로 숲그늘의 고락과 함께 묻혀버릴 수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그녀가 너무 오래 누리고 있는 평화를, 혹독함의 왕자여, 처참히 흔들어 깨워다오!


이선영,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 2009년. 98쪽-99쪽.


깨어나야 한다. 왕자를 기다려서만 안 된다. 왕자처럼 궁궐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모르고 지내는 존재에 의해 깨어나서는 안 된다. 이미 미녀가 잠들 숲조차 파괴되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고통을,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고 눈 감고 단잠에 빠져들면 결국 자신조차도 개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서 자신만의 숲속에서 나와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숲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깨어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것도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래야 깨어남이고, 그래야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들이 포도가 포도씨를 남겨 미래를 만들어가듯이 시도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깨어나 함께 할 수 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지금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잠자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니, 이것은 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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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흐름에 휩쓸렸을 때는 자신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격랑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칠 뿐이다.

  

  그렇게 강물에 떠다니던 나날들이 지나고, 과거를 생각해 보면 그 때 무엇을 했던가 하는 후회에 잠기게 된다.


  역사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들 대부분의 삶이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발톱이 있다. 비록 필요없다고, 지저분하다고 깎아버리기 일쑤지만 발톱이 빠진 상태를 생각해 보라. 걷기에도 힘들다. 발톱이나 손톱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고, 또 다른 존재들을 움켜쥐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발톱을 스스로 깎는다? 저항하기를 포기한다고 읽히는데... 장경린의 이 시를 보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삶이 혁명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 드러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강물 위에서 발길질을 하는 물오리도 되지 못하고, 그냥 흐름에 맡겨 이리저리 떠다니는 신세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움켜쥘 발톱, 손톱을 스스로 깎아버린 존재.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발톱이 미미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는데...


오래 전에 쓰인 이 시를 읽으면서 최근 우리도 발톱을 스스로 깎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아가겠다고, 더 이상 저항은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손톱, 발톱을 깎아버렸다는 생각. 시 한 편... 읽으면서, 내게 아직도 발톱과 손톱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


    발톱


발톱을 깎았다

깎은 발톱은 버렸다


불통인 가정과 미친 척 통화했다

어머니는 백발의틀니의꾸부정의신경질의 생존자

아버지는 경제적무능력꿈의무중력아무튼무책임한 과식주의자

가정의 발톱을 깎아주고

구둣솔로 먼지를 털다가

물오리처럼 떠다닌 그들의 일대기가 혁명이었음을

5·16 군사혁명 언저리에서 나를 구겨 신고 태어난

내가 물오리였음을 발견한다


예비역 병장인 나의 한국은행 예비군 대대의

예비역 병장인 나의 혁명은

근로자 증권저축 속에서

탁상일기 속에서

손톱깎이 이빨 사이에서

잘려져 나간다


돌이켜 보면 어제가 나의 혁명이었다

돌이켜 보면 작년이 나의 혁명이었다

흘러가 버린 날들이

좀 긴 듯한 나의 발톱이 혁명이었다


장경린,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민음사. 2007년. 개정판 1쇄.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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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10 1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톱을 깎다...발톱으로 이런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다니 역시 시인은, 시는 놀라운 세계네요

kinye91 2022-05-10 14:21   좋아요 2 | URL
같은 존재를 다르게 보는 눈을 지닌 사람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읽다보면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많거든요.

그레이스 2022-05-11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톱에 비유하다니 탁월합니다.
잘려나가는 존재!

kinye91 2022-05-11 22:00   좋아요 1 | URL
비유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