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 토요판에 실린 시. 노회찬. 이 한 시가 이 시집을 불렀다. 그 시를 읽으면서 노회찬이 생각났고, 노회찬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라면 다른 시들도 마음에 들겠단 생각을 했다.


  위로 위로, 위만 보고 가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아래, 밑에 있는 존재들을 살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 이야기가 시에 있으리라는 믿음.


  시집을 펼쳐서 읽는 순간 그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잘 골랐다는 생각. 시란 이렇게 별 부담없이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


  우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고, 무언가를 또는 누구를 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분노가 도무지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을 만났다. 이 시집을 읽고 있을 때였다. 마침 '산불은 봄비를 이길 수 없습니다'를 읽고 난 후였다.


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시가 떠올랐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고, 마음에 불이 났구나! 화가 났을 때 열불 난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시 한 번 들어볼래? 하면서 그냥 읽어 준다. 첫 시행을 읽고 지금 너야. 두 번째 시행을 읽고 지금 네 마음에 불이 났어. 네 번째 다섯 번째 시행을 읽고 그래서 다 태워버렸어. 지금 네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난다고 하는데, 그거와 같아. 온몸이 불덩이로 타버릴 것 같아. 여섯 번째 행을 읽어주면서 마침 옷도 까만 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봐, 다 타버려서 검게 변했잖아. 근데 어떤 생각이 들지. 


그 생각이 번지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하지. 이 시 뒷구절처럼 말이야. 잔뜩 난 화를 가라앉히는 비와 같은 역할. 그것이 바로 한번 더 생각하는 마음이야.


화 난다고 무작정 행동하지 않고 지금 이렇게 앉아서 이 말 저 말 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잖아. 마음에 비가 내리도록 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지. 이 시는 지금 그런 네 상태와 같다고 봐. 잘 들어 봐.


산불은 봄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홑동백 한 그루 키웠습니다

꽃잎이 불씨였는지 마음이 불씨였는지

이른 봄 소소리바람 타고 산에 오르더니

뒷산 앞산 할 것 없이 굴참 졸참 할 것 없이

개울 건너 언덕길 솔밭까지 다 태웠습니다

하 붉었던 탓인지 숫제 까맣습니다

재로 변한 잿등 아래 넋 잃고 주저앉아

낡은 서럽 꺼내듯 잔불들을 뒤적여 봅니다

마른 땅 마른 바람 메마른 가슴

미워하는 마음이 욕망이었습니다

집착하는 마음이 산불이었습니다

비가 옵니다, 사나흘 잔뜩 흐리고

오갈 데 없는 마음에 봄비가 내립니다

꽃 덤불 그리며 온 산야를 적십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

산불은 봄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유진수. 바로 가는 이야기는 없다네. 문학들. 2022년 초판 1쇄. 87쪽.


분노에 차서, 증오에 차서, 미움으로 가득해서는 밝고 희망찬 생활을 할 수 없다. 분노를 분노로 해결하지 않고, 분노를 용서로 해결하는 법. 


산불을 봄비로 이겨내는 법. 그것이 필요함을... 마음이 화로 가득찼을 때, 그 화를 누그러뜨리는 비를 불러올 수 있는 힘.


이것이 바로 마음의 힘이고, 이성의 힘이다. 인간이 지닌 강한 힘은 바로 증오를 증오로 대하지 않고, 비껴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데서 온다.


그렇게 이 시, 어쩌면 분노와 미움이 넘치는 사회에서 사랑과 용서가, 그리고 화해가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분노와 증오는 결국 나를 갉아먹으니, 내가 살기 위해서도 이 분노와 증오의 불을 꺼뜨릴 봄비를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에게 들려주었듯, 아니 그 사람에게 들려주면서 다시 내게 들려준 이 시. 내게도 봄비가 필요함을. 산불은 봄비를 이길 수 없다는 시 구절. 그렇게 다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에 봄비를 불러오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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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는 이번 호를 여는 글에서 '마법'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마법? 우리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졌을 때 마법처럼 일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마법이라는 말은 현실을 넘어섰다는 말과도 같다. 현실이 어려울 때 우리는 마법을 기대한다. 이 현실을 잊고, 이 현실보다는 나은 현실을 원할 때 마법처럼 그런 현실이 다가오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마법이 아니다.


  마법 같은 일은 이상하게도 힘 센 사람에게는 잘 이루어지만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작 마법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데...


그래서 신데렐라에서는 마법의 힘으로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참여한다. 옛이야기든, 솔닛이 쓴 [해방자 신데렐라]든 그 점에서는 변화가 없다. 다만 마법 그 후가 다르다. 마법으로 자신이 바뀌었는데 그것에만 만족하면 마법은 언제든지 풀린다. 힘없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듯이. 


하지만 마법임을 알고 마법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자신의 현실로 돌아올지를 스스로 결정하면 마법은 지속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마법이다. 순간적으로 잊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현실을 바꾸는 힘. 


빅이슈 이번 호 편집자가 말한 '마법'과 다른 의미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곧 '핫체리 엄지척(오후 14-17쪽)'을 읽으면서 안 좋은 쪽으로 마법을 부리는 존재를 발견했다.


언론이다. 그렇다. 강한 존재에게는 약하고, 약한 존재에게는 강한 그런 언론. 아니면 좋겠지만, 지금 언론의 행태는 앞에서 말한 것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특히 노동자들의 파업을 보도하는 내용에서는.


그러니 잘 읽어야 한다. 글자만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자료만을 믿어서도 안 된다. 이 글에 나온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에 관한 보도를 예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임금을 30% 인상하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30%, 엄청난 인상률이다. 그런데 이들이 예전에 임금 30%를 삭감당했다는 기사는 없다. 30% 임금을 삭감당하고 몇 년 지내오다 회사가 조업을 잘하고 있으니 다시 30%를 올려달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터무니 없는 임금인상 주장이라는 논조가 많다.


이대로라면 30% 인상도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지 임금이 인상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점을 지적한 언론은 별로 없다. 더 꼼꼼하게 기사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통계들을, 사실들을 언론을 통해서가 아니면 일반인들은 알기 어렵다. 언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남들보다 더 꼼꼼하게 사실관계를 따져야 한다. 역사적으로 어떻게 되어 왔는지도 살펴야 하고. 그들이 '체리피킹(cherry picking: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가져와 주장을 뒷받침하는 행위)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 체리피킹은 마법을 부릴 수도 있다. 통계를 통해서 사실인 양 제시하지만 약자층을 옭아매는 고리로 이용할 수 있으니, 약자에게 체리피킹은 자신들을 옥죄는 마법일 수밖에 없고, 강자에게는 그들을 옭아매는 마법일 수 있다.


그런 마법은 필요없다. 참고로 이 글을 쓴 저자는 '체리'라는 말을 빌려와 제목을 달았다고 한다. '체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은가. 참 나, 이 체리가 이렇게 우리 사회를 뒤흔들 줄이야.


여기에 '생존이 곧 투쟁이다(46-51쪽)'라는 글을 읽어보면 옥천에 사는 이주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 마법이 필요한 존재는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그런 노력들이 마법처럼 자신들의 생활을 바꾸기를, 자신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마법끼지 필요하지는 않다. 그냥 그들을 사람으로 바라보면 된다. 나와 같은 사람.


이 글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우리들의 마음이, 태도가 마법처럼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니가 베트남에서 온 물건이 아닌데, 인구를 유지하는 역할을 할 뿐인 물건 취급을 하는 거죠. 언니가 '나는 물건이 아니야.'라고 말해요. 자유롭게 인간으로 살고 싶은데, 그걸 뒷받침해주는 정책이 없어요. 실상 언니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한국 사회였음에도 언니가 그 '필요'를 벗어나는 순간 쉽게 버리는 거예요.'(51쪽) 


이런 데서 마법이 필요하다. 통계를 감추거나 필요한 부분만 유리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이번 호는 읽을 글이 많다. '돌봄의 기술자들'이라는 꼭지에 실린 '통역사, 케어러, 부모의 딸, 그리고 부모의 부모'라는 글도 여러 생각을 한다. 그들에게도 마법이 필요함을. 아니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 마법이 필요함을 느끼게 하고...


열심히 하루하루를 마법처럼 살아가는 빅판의 이야기도 좋고. 힘들게 살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여성 홈리스 이야기에서도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마법이 필요함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마법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또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우리 사회,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에게 마법이 필요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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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에 실린 시들이 새로운 기법을 시험했는지, 낯설기는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해할 수 있는 시들이 실려 있다.


  디졸브(dissolve)라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시집에서 말하고 있는데, 디졸브란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말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시집들은 앞 장면과 뒤 장면이 장면 전환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앞 시와 뒤 시라기보다는 한 시에서 제목과 시의 끝에 시인이 다른 글을 붙임으로서 디졸브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읽을 때 시와 또다른 글들을 순차적으로 읽어야 하는데, 제목을 읽기 전에 그 쪽 맨 밑에 있는 글을 읽고 제목과 시를 읽고 마지막으로 시 끝에 실린 글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표시대로 제목을 읽고 글을 읽고 시 내용을 읽고 다시 글을 읽든지.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첫번째 시는 시인의 글이 없다. 그냥 표시만 있다. 왜 그럴까?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내용을 짐작하라는 뜻일까?


시집에 실린 첫시는 '불온서적'이란 시다.


불온서적


벗 

대학시절

청년노동자

우리들의 하느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김현, 입술을 열면, 창비. 2018년. 10쪽.


지금 다시 하고 싶은 말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그런데 시집을 한 참 읽어가다 보면 다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처음이 되는 시가 나온다. '빛은 사실이다'라는 시.


   빛은 사실이다 




☽ 투표하고 이름 없는 것과 박물관에 다녀왔다. 박물관은 시간 때문에 넓었다. 남들이 보지 않는 역사에서 입을 맞췄다. 무덤을 나오며 팔짱을 뺐다. 쏘맥을 마셨다.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졌다. 이름 없는 것이 밤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근육이 사라진 목소리였다. 한번도 눈 뜨지 않았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픈 

시를 쓴다


모르긴 몰라도

빛이 묻는다


네 시의 정권은

나를 만나면서도

왜 영원히 어둡니?


나는 동성애자의 손목을 본다

사랑이 연역한 뼈라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빛에게 새끼처럼 매달린다

머리 쓰다듬어줘


끼 부리지 마

빛은 머리카락을 골고루 만져주고

밤이 되고 새들도

벌써 확정이라고 뜨는구나

이름 없는 것이 이름 없는 것으로 날아가 이름 없는 국가를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진실의 열쇠는 둘만이 아는 어둠에 있다


오늘은 혼자 눈 닫지 말자

대통령의 나라를 위해 보건에 힘쓰자


빛의 말씀은 

공공연하다


잠 속에서도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있고

역사의 힘일 수 있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민족해방 조국통일

구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노동권을 보장하라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외칠 수 있으나

우리는 눈을 부릅뜬다


지금부터 평등한 밤이다


모든 거짓은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눈을 떴다. 겨울 아침이었다. 더웠다. 출근 가운데였다. 남들이 보는 생활에서 이기고 싶었다. 젊은이들의 얼굴을 눌러보았다. 늙인이들의 얼굴을 열어보았다. 우리는 졌다. 어젯밤 이름 없는 것이 이름 없는 것을 내려다보며 청했다.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되어줄래. 그래. 사람은 어떻게 근육이 되는가. 사랑은 눈 앞이 컴컴한 밤의 정부에서.


김현. 입술을 열면. 창비. 2018년. 150-153쪽.


눈 뜨지 않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아직도 컴컴하다. 긴 시간 동안 터널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터널 속에 있다. 어두운 터널. 출구가 어디일까? 출구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앙상한 뼈만 남아서는 제대로 걸을 수 없다. 버틸 수 없다. 근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근육을 어떻게 키우지?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말이 더 필요없다. 이 시 마지막 구절, '모든 거짓은 / 사실로부터 시작된다'는 말.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거짓이고 사실인지 이제는 섞여서 구분하기 힘들다. 사실을 살짝 비틀어 거짓을 만든다. 


그러면 안 된다. 몇 년 전 겨울 아침. 우리는 다시 봄 아침에 이런 일을 겪었는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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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끝. [빅이슈 281호]는 여름을 특집으로 삼았다. 여름이 끝나갈 때, 여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잡지.


  우리는 여름을 더위와 비로 겪지만, 그런 겪음을 통해서 여름을 보내면서 어떤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여름이란 자고로 더워야 한다고... 무성한 녹음 속에서 더위를 피하기도 하지만, 그 더위를 온몸으로 겪기도 해야 한다고.


  물론 더위로 인해서 너무 고통을 받는 사람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여름이라고 해서 생각이 났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번 호는 여름에 청량한 마음이 들게 한다.


여름에 보면 좋은 영화,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점도 좋았고. 특히 이 말... 서로가 함께 지내야 할 때 지녀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아닌가 한다.


'이해란,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충분한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신뢰에서 시작된다' (43쪽)


여름의 끝에서 이 말을 생각한다. 이해, 서로 함께 지내는데 필요한 신뢰에서 시작한다고. 이런 신뢰를 통해서 이번 호에 실린 '늦게 철들 수 있는 권리'를 읽어보면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부분을 깨닫게 된다.


얼마 전에 만5세 초등학교 입학을 추진했었는데, 일찍 철 든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가 하면 그 아이들은 대학교에 진학하기보다는 일찍 사회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다. 약 5%. 반대로 늦게 사회에 진출하는,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대학을 나온 아이들도 약 5%.


그러나 이 두 집단을 대하는 태도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들이 나름대로 하고 있는 고민들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고려하고 배려하고 있는지.


일찍부터 취업하는 5%들과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5%를 비교해보면 과연 우리는 누구를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글 마지막에 있는 문장 둘. 


'가난하게 태어나도 너무 빨리 철이 들 필요가 없는 사회를 희망한다. 아이가 천천히 철이 들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어른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17쪽)


그런데, 무슨 만5세. 초등학교 취학. 더 일찍 철 들라고 강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적어도 이 글이 그들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주로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일찍 철 들었는데... 그것을 일률적으로 앞으로 당기고 싶어하니, 그래도 능력 있는 집에서는 아이들이 철 들 시간을 더 늦출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더 빨리 철들라고 하는 꼴이 되니...

 

[빅이슈]를 읽으면서 몇 년째 읽으면서 그러한 시간들이 빅이슈를 신뢰하게 만들고, 또 빅이슈를 이해하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이다. 힘든 여름을 난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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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된 시를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밤의 분명한 사실들이라는데, 무엇이 밤의 분명한 사실일까?


  '염해 줘 / 제발 / 잠의 붕대로 / 하얗게 이 밤'으로 시작하는 이 시집 제목이 된 시 '밤의 분명한 사실들'


  '까만 밤 / 사막 / 휙 지나갔다 // 분명히 / 라고 누군가는 /또,'라는 구절로 끝난다. 


  밤은 지나간다. 분명한 사실은 밤은 왔다가 또 사라진다는 것. 시집 뒤 해설을 본다. 음유시인... 이 시집에서는 '소리'를 강조하고 있단다. 시는 눈이 아닌 입으로 읽어야 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시를 읽어주는 사람. 얼핏 그럴 듯하다. 시집에 실린 시 중에 영어 표기를 발음기호로만 제목을 표기한 시도 있으니...


읽어라,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읽기 위해서는 언어가 읽기에 적합해야 한다. 낭송하기에 적합해야 한다. 물론 '봄의 히라프'라는 시는 읽기에 좋다. 읽으면서 가락도 느낄 수 있고.


하지만 이 시집 대부분의 시들은 시의 소리내기를 쓰고 있다지만 소리내어 읽기 힘든 시들이다. 먼저 눈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발음기호로 제목을 썼다고 하지만, 발음기호를 생각하기 전에 사람들은 발음기호를 눈으로 보고 의미를 생각한다. 


발음기호 역시 하나의 문자니, 문자를 눈으로 읽고 입으로 소리를 낸다. 소리를 낸 다음에야 비로소 의미가 머리 속에 들어온다. 아, 이 제목은 이것이구나 하게 된다.


그러니 낭송하기 좋은 시를 쓰려면 읽기에 편해야 한다. 남들이 모르는 언어를 써서는 안 된다. 영어 발음기호는 사실, 중고등교육을 배운 사람이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역시 착각.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발음기호만으로 되어 있으면 한참을 더듬거리게 된다. 여기서 소리가 중심인 시가 보자마자 입을 통해서 소리로 나오지 않고, 머리를 통해서 한창 궁리가 된 뒤에 소리가 된다.


읽기는 이만큼 다양한 과정이 있다. 한 과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읽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를 통해서 우리는 읽기의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밤을 생각한다. 어둠이다. 보이지 않는다. 시각이 작동을 멈추고 잠자리에 들 시간. 그러나 청각은 잠을 들지 않는다. 잠들더라도 시각보다는 한참 뒤에 잠든다. 밤은 시각보다는 청각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밤의 분명한 사실은 시각보다는 청각이 더 많이 작동한다는 사실. 이때 우리들은 온갖 소리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사실 아닐까 한다.


이 시집에서 읽기에 관한 시 한 편 인용하고 끝맺고자 한다.


비인칭 독서


  읽어라. 무엇을?

  멀리 닭 한 마리, 형체 없는 새벽을 운다.


  읽어라. 누구를? 먼동이 트는구나

  텅 빈 페이지 한 장 바람도 없이 일어서고 있다.


  읽으오.

  읽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청각장애인이 하도 떠드는 통에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암사역에 하차하면

  점자도서관에 가까워지니?


  분쇄된 활자를 백지 위에 쏟아 놓습니다. 흑색의 마취 혹은 각성의 가루들. 외눈박이처럼 한쪽 콧구멍을 막으면 더 황홀해질까요. 10분 뒤 당신은 죽은 새가 놓은 두 갈래 자갈길에 서 있게 된다. 흙을 주세요. 가엾은 새들. 어느 방향을 택해도 황무지, 황무지, 황무지가 펼쳐질 터.


  이름 감춘 자의 머릿속을 저벅저벅 걸을 수 있다. 소리는 멋대로 커지고 또 작아진다. 작가는 아무것도 돼서는 안 돼. 그녀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이름을 바꾼 자가 등장하지요. 그들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해 아무거나 돼 버리기 위해 당신의 맷돌은 짜르락짜르락 바람 위에 한 톨의 모래를 얹고 있습니까. 


진수미, 밤의 분명한 사실들. 민음사. 2012년 1판 2쇄. 5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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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8-25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인칭독서. 특이한 시네요. 좋은 페이퍼에 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점자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들과 시 낭송 수업을 했어요. 그 생각이 납니다. 그분들은 사실 24시간 밤에 살지요. 청각이 예민해진다고 일반적으로 여기지만 그만큼 둔해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항시 주어지는 시각이 오히려 무디어지듯이요. 시각장애인 중에 청력장애까지 겹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우리의 밤에 곤두서는 청각도 그런 의미로 무디어지진 않을지 경계해야겠네요. ^^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 보고 듣는 것에 대하여.

kinye91 2022-08-25 13:18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 님 글을 읽고 청각장애인들도 청각이 둔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맞습니다. 항시 주어지는 것,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네요. 익숙함은 편안함과도 통하지만, 그만큼 예민성을 잃는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청각도, 시각도 무디어지지 않게 민감성을 지니면서 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