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노동의 역습 - 대가 없이 당신에게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
크레이그 램버트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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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리치의 개념을 빌려와 현대인의 일상을 분석하고 있는 책인데,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이란 책에서 집안일처럼 임금에 기초한 경제에서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모든 일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했다. (17쪽 참조, 또는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 참조)

 

제4차 산업혁명 시대, 이제는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가 도래했는데, 그러면 인간은 자신들의 노동을 기계에 맡기고 더 많은 여가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이론상 그래야 하는데... 과연 우리에게 여가 시간이 늘어났는가? 하는 질문을 이 책은 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이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니, 이것은 분명이 기계화, 정보화 되었음에도, 아니 기계화 정보화 되면서 그림자 노동이 더 늘어났다는 얘기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즉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여기서 임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예전에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즉, 예전에는 그 일을 누군가가 임금을 받고 일을 했는데, 기계화, 정보화 되면서 그 일을 포함하고 있는 일을 기계가 처리하고 (이런 기계 군단을 '키오스크'라고 한다. 무인정보화시스템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김포공항에 갔다가 그 키오스크를 보게 됐다. 당당하게 키오스크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기계. 거기에서 직원 없이 직접 항공권을 뽑는 사람들) 그에 따르는, 누구 말로는 부수적인 일들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예전에는 주유소에 가면 주유를 해주고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냥 앉아서 카드만 내면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셀프 주유소가 많이 생겼다. 셀프 주유소에서는 내가 차에서 내려 직접 주유를 해야 한다.

 

주유를 해주던 사람은 임금을 받고 그 일을 했는데, 이제는 직접 내가 임금을 받지 않고 내 차에 기름을 넣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다.

 

비슷한 예가 바로 지금 이렇게 리뷰를 작성하는 일. 예전에는 서평을 기고가들이 돈을 받고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쓴다. 이렇게 시간을 쓰면서도 돈은 받지 않는다. 이것 역시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다.

 

이런 사례들이 이 책에는 많이 나온다. 매표를 하는 경우도 그렇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먹고 나오는 경우도 그렇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경우도 그렇다. 여기에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의 일은 더 많아졌다.

 

프랑스에서는 업무시간 외에 오는 상사의 이메일에는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명시한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하고, 우리나라 역시 이와 비슷한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단다.

 

그만큼 여가 시간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된 사회가 되었는데, 일을 지시하는 일 이외에도 이메일로 오는 수많은 스팸메일들을 확인하고 지우는 시간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노동 시간을 줄여준다는 기계들이 오히려 다른 일을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사회적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간이 돈이기 때문이다. 즉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지닌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자신의 돈을 소비하는 것이고, 이는 생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상류층도 그림자 노동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그 일을 할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류층은 이런 변화된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림자 노동을 시킬 수가 없다. 자신이 온전히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가 시간이 늘어날 수가 없다. 오히려 노동 시간은 비슷하다고 해도 하지 않았던 일까지 떠맡게 된 것이 현실이다.

 

알게모르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기계문명의 발달로 사람들은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회색신사들에게 시간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시간을 많이 확보한다는 환상을 지닌 발달이 오히려 그림자 노동을 더 확산시킨 셈. 회색신사들의 꾀임에 빠진 소설 속 사람들처럼 우리는 참 바쁘게 산다.

 

바쁘게 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에 대한 대책은 나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시간은 돈이다'는 명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물어 보라. 왜 공부하니? 대학 가려고요? 왜 대학 가려고 하니? 돈 잘 벌려고요. 왜 돈을 벌려고 하니? 행복하게 잘 살려고요. 그럼 지금 행복하니? 아니요.

 

삶의 목표는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결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수단인 돈을 벌기 위해 행복을 희생시키고 있는 현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그럼 대책이 뭔가? 답은 명확하다. 시간이 중요하다.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은 내가 자유롭게 쓸 시간이라는 의미다. 돈을 버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즐기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돈을 쓸 수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또 내가 쓸 수 있는 시간보다 더 빨리 하기 위해 기계를 확산하는 것보다, 조금 벌더라도 내가 쓸 수 있는 만큼 벌고 나머지 시간은 여유롭고 자유롭게 보낼 시간을 확보하는 것.

 

나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너무 빠른 속도의 기계를 거부할 수도 있는 것. 미국에서도 셀프 주유소를 금지하고 있는 주가 있다는 사실... 이런 사실이 더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회색신사로부터 그림자 노동의 역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 아닐까.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대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계가 처음 나왔던 시대처럼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 운동)'을 벌일 수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슬로 라이프라고 천천히 여유롭게 살기 운동을 전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행복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 그리고 인터넷 속에, 스마트 폰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시간, 그런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 가는 것.

 

조금 더디더라도 일자리를 나누는 것, 기계에 모든 일자리를 주지 않는 것, 아마도 인공지능이 모든 직업에 잠식한다면 사람들에게 여가 시간이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즐길 수 없는 생계 불능의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우리 모두가 조금씩 불편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지니고, 더 즐거운 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요즘 그런 느리게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대안을 제시 못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대안은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이 시대의 방향을 틀거나 반대로 돌려야 하는데, 그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제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더 많은 여가 시간,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문제는 제기해야 한다. 문제를 알아야 해답을 찾으려 노력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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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25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트런드러셀의 <게으름에대한찬양>에서 주장하는 철학과 일맥상통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kinye91 2017-02-25 18:13   좋아요 1 | URL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림자 노동의 역습이란 책은 그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기는 하지만 통하는 면도 꽤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은 빨리빨리 문화나, 또 자동화, 기계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니까요.
 
GMO사피엔스의 시대 - 맞춤아기, 복제인간, 유전자변형기술이 가져올 가까운 미래
폴 크뇌플러 지음, 김보은 옮김 / 반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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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경악했다. 이렇게까지 의학-과학기술이 발전했던가 하고, 이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하면서 읽었다. 복제인간에 대한 논의가 예전에 황우석의 실험조작으로 우리나라에서 꽤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은 있었지만...

 

아직은 인간복제는 먼 얘기구나 하고 있었는데, 먼 얘기가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여러 의학자, 과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실험되고 있다니...

 

인간복제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대상을 유전자로 삼아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하니, 유전자를 배아단계에서 변형, 조작함으로써 원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연구, 실험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어느 정도 성과도 있다고 하고. 착상전유전자진단법은 상당한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이런 결과로 인간의 질병을 유전자변형을 통해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하는데... 또한 유전자를 편집하는 기술도 꽤 발전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질병치료를 목적으로 유전자에 변형을 가하는 것으로 쓰이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인간복제로까지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두 방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인공지능을 창조하는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일이다.

 

둘 다 창조라는 영역을 개척하는 일인데,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의 분야에서 인간을 넘어서게 되자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해서 경악하면서도 인공지능이 가져올 변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공지능으로 인해 없어질 직업을 살펴보기도 하고,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도 논의하게 되었다.  또한 인공지능이 감정을 가지게 되면 이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인공지능은 생명체로 아직은 보지 않고 있으니, 복제인간보다는 덜 윤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인간을 위해서 장기를 적출한다거나 인간 대신에 죽어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다. 인공지능이 감정을 지닐 수도 있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인공지능으로도 경악을 금할 수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며 너무도 놀랐다. 의학-과학기술이 이렇게 발달했나 싶을 정도였고, 인공지능이 문제가 아니라 복제인간이 더 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제인간은 감정을 지닌 생명체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문학이나 영화를 통해서 복제인간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했다. 대부분이 암울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복제인간 전 단계로 유전자변형인간에 대한 연구가 급속도로 진척되었다고 한다. 유전자변형인간을 이 책에서는 GMO사피엔스라고 하는데...

 

이미 유전자변형에 관해서 합법화한 나라도 있다고 하는데... 영국은 세부모체외수정법을 합법화했다고 하고, 중국에서도 유전자변형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잘 모르고 있어서 그렇지 유전자변형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고 있는 중이고, 그래서 과학자들이 모여 연구의 한계를 정하는 회의를 하고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이 책에서는 유전자변형 중에서 유전자편집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크리스퍼-Cas9 유전자 편집기술은 상당히 발전했고, 또 많이 연구되고 있다고 하는데...

 

돌연변이 유전자를 찾아가 잘라내고 그곳에 다른 유전자를 생성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컴퓨터에서 문서나 그림을 편집하듯이 우리의 유전자를 편집하는 기술이라고 하는데, 이 기술이 실험실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이 기술을 아직은 사람에게 적용하지는 말자는 합의가 대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직까지다. 누군가가 사람에게 이 기술을 적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과학적 명성이나 돈을 위해 시도한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이미 발견된 기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 누군가가 다른 분야에 적용할 것이다. 이 기술이 광범위하게 인간에게 적용된다면 우리는 맞춤아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런 맞춤아기들은 자연스러운 생식과정을 거친 사람들보다 유전적으로 뛰어날 것이며, 이들이 인류의 상층부를 형성할 가능성도 있다.

 

또 누구나 다 이렇게 돈만 있으면 맞춤아기를 만들어낼테니 자연스럽게 우생학과 연결이 되기도 한다. 어떤 기준으로 우월한 인간을 설정할테고, 그 설정에 따라 유전자를 편집할 것이다. 이것은 유전자편집기술이 상용화되면 자연스레 일어날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인간의 유전자 다양성은 사라질 것이고, 이것이 또다른 재앙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 책의 저자는 그래서 유전자변형 실험을 하려는 의학자, 과학자는 최소한 ABCD라고 하는 네 가지 항목은 준수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줄기세포배아연구 감독위원회의 승인과 감독 (의무적 승인 Approval), 생명윤리 교육을 우선 이수 (생명윤리 교육 Bioethics Training), 명확성과 투명성: 대중에게 정보 공개 (Clarity), 생체 내 응용 실험으로 확장하지 않는다 (Don't extend)이다.

 

하지만 이것도 완전하지는 않다. 누군가 생체 내 응용 실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발견된 기술을 쓰지 않기란 너무도 힘든 일이다. 쓰려는 유혹을 받게 되고, 그것을 실험하는 사람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던져진 주사위가 인류에게 재앙으로 다가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

 

이것은 특정 과학자나 정책입안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 전체의 문제인 것이다. 인공지능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유전자변형인간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그 심각성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알려주고 있다. 전문적인 용어가 가끔은 나오지만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소위 GMO사피언스라고 하는 유전자변형인간에 대해서 일반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써나갔다.

 

지금, 우리에게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다. 읽고 지금 이러한 유전자변형인간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잘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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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고 더불어 - 신영복과의 대화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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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고 더불어'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표제가 장식되어 있다. 마치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가는 모습, 글자들이 함께 모여 있어 신영복 선생이 평소에 말한대로 나무들이 서로 모여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우리도 서로서로 손을 잡고 더불어 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표제다. 또 하나 이 표제를 보면서 이 대담에서 신영복 선생이 말했던, 이탈리아 사상가 그람시의 진지전이라는 개념까지 떠올리게 됐다.

 

글자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단단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 어려울 때는 자신들을 지키는 참호 역할을 해야 하고, 실천할 때는 발판이 되는 진지... 이렇게 이 글자들은 서로 모여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야 할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한다.

 

숲과 진지는 다른 말이 아니라 함께 쓰일 수 있는 말임을... 이 대담집을 통해 느끼게 되었는데...

 

신영복 선생은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다음에도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그런 결과를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고. 그러나 대담은 강연과는 좀 다르다.

 

강연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일방적으로 전달한 다음에, 여러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준비된 내용에 따라 진행된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대담은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지고, 질문이 누구처럼 미리 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 질문이 나오기에 대담하는 사람의 장식되지 않은 모습, 꾸미지 않은 사상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10개의 대담이 시간 순서대로 실려 있다. 갓 출옥해서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의 대담을 모아놓은 것이다. 따라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대담 내용이 달라짐을 느낄 수도 있고, 사회경제적 문제부터 국제정세까지 신영복 선생의 생각을 다양하게 접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이 10가지 대담을 관통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냉철한 이성보다는 '따뜻한 가슴'이 더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 대학은 직업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할 인문학적 감성을 키우는 공간이라는 것 등등.

 

'관계론'을 잘 나타내는 말이 바로 이 책의 표제가 아닐까 싶다. "손잡고 더불어" 이것은 혼자만이 존재할 수 없다는, 나는 바로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는 그런 것.

 

그렇기 때문에 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나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존재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 나와 다른 존재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 물론 같아져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른 것을 무작정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차이란 다름을 알아차리는 것, 다름을 알아차린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할 수가 있다. 그냥 다르다가 아니라, 다르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로 나아간다는 것. 다른 존재를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서 내가 출발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핵심이다.   

 

이런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다. 계속 나오는 말이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지난한 여행이 필요한 것이다. 가슴에 도착하는 여행이 이루어졌을 때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신영복 선생은 또다른 여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다음에는 다시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을 해야 한다고.

 

따스한 가슴을 지니고 발로 걷는 실천을 해야 한다고... 발로의 여행, 그것은 바로 다른 존재와 '손잡고 더불어' 가는 여행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 바로 대학 아니던가. 지금은 직업 양성소 수준으로 떨어져 있지만, 이렇게 어려운 시대일수록 대학은 바로 신영복 선생이 말한 이런 역할을 해야 한다.

 

미래 세대들이 살아갈 시대는 바로 지금이 아니라 10년 뒤 20년 뒤 아니 30-40년 뒤이기 때문이다. 당장 필요한 직업 기술이 아닌 사회를 함께 살아갈 철학, 그런 마음을 지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학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만 그 사회가 '손잡고 더불어' 가는 함께 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10개의 대담들이 거의 이런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제 한 해가 지났다. 그럼에도 신영복 선생의 말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대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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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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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

 

이제는 고인이 된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여러 선배들에게 들었던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이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다.

 

이론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고, 현재를 뛰어넘어야 하지만, 실천은 현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기층 민중과 함께 가야 한다고. 그들을 앞에서 끄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어깨 겯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이론에 매여 이론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재단하지 말고, 내치지 말고 그들과 함께 할 때는 이론을 잠시 넣어두고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사람이 우선이라고. 냉철한 머리보다는 따스한 가슴으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고.

 

신영복 선생의 삶을 보면 그는 자신의 학교 생활을 각 20년씩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우선 제일 먼저 20년은 본인이 배우는 시절이다.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절인 것이다. 초,중,고,대학교를 거치면서 배우는 학교 생활. 그러나 이 생활은 관념에 매인 생활이었다는 것. 아직 익지 않은 열매에 불과하다는 것.

 

두 번째 20년은 감옥 생활이다. 이 감옥 생활을 또다른 대학시절이라고 부른다. 섣부른 이론, 관념에 갇힌 이론에서 사람을 만나면서 현실을 깨닫게 되는 학교 생활. 그것이 바로 감옥의 생활이다. 이때에서야 비로소 신영복 선생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관계를 알게 된다. 그가 실천을 우경적으로 할 수 있는 발판이 이때 마련된다.

 

세 번째 20년은 성공회대 교수로 생활한 학교 생활이다. 두 번의 학교 생활을 거쳐 이제는 실천을 하는 단계다. 그는 많은 강연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알리고 다닌다. 여러 사람을 만난다. 만나면서도 이론을 앞세우지 않는다. 사람을 앞세운다. 사람보다 앞선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이론은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사람이 이론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지금 잃어버린 '관계'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관계는 사람을 사람으로 볼 때 찾아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을 사람보다는 하나의 상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온통 교환가치만이 판치는 세상이고, 교환가치를 잃은 사람은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대우하는 것, 그것이 관계를 찾는 첫번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신영복 선생의 생각을 볼 수 있는 유고집이다. 여러 곳에 실렸던 글을 모았고, 또 강연 내용도 수록했으며, 기존에 발표하지 않았던 글도 모아 놓았다.

 

내용이 겹치는 부분도 꽤 있지만, 겹친다는 얘기는 반복된다는 것이고, 반복된다는 것은 강조한다는 것이니, 신영복 선생이 어떤 생각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나와 있는 이 부분을 참조했다. 그냥 신영복 선생의 생각을 텍스트로 읽고 아는 것이 아닌, 또 신영복 선생의 삶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닌, 바로 읽는 나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나와 함께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 그런 의미를 새기면서 읽었다.

 

'책은 벗입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반가운 벗입니다. ... 독서는 모름지기 자신을 열고, 자신을 확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뛰어넘는 비약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삼독(三讀)입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텍스트를 집필한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그 텍스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뿐만 아니라 필자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발 딛고 있는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처지와 우리 시대의 문맥을 깨달아야 합니다.' (249-250쪽)

 

'독서는 만남입니다. 성문(城門)바깥의 만남입니다. 자신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는 자신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남인 한 반드시 수많은 사람들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마치 바다를 향해 달리는 잠들지 않는 시내와 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이 모이고 모여 어느덧 사회적 각성으로 비약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트리고, 우리를 뒤덮고 있는 욕망의 거품을 걷어 내고 드넓은 세계로 향하는 길섶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253쪽)

 

이렇게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읽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숲을 이루면 세상의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책을 읽는 사람 하나하나를 나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그 나무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모여 숲을 이루자. 이것이 바로 '관계'다. 희망이다.

 

그래서 절망의 시대에 좌절하지 말고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말을 명심하자고 한다. 씨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것. 왜냐, 심어야 하니까. 심어서 열매를 맺게 해야 하니까. 어려울 때 씨과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가 땅에 심어야 한다는 것.

 

지금 우리는 새로운 씨앗을 심을 때가 아니던가. 사람들이 매주 토요일에 광화문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새로운 씨앗을 심고자 함이 아니던가.

 

한 사람 한 사람은 비록 작은 나무에 불과할지라도 이 나무들이 모여 관계를 맺으면 거대한 숲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촛불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기가 막히게도 이 책은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가 싶다.

 

정치란 무엇인가

평화와 소통과 변화의 길이다

광화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길이다. (378쪽)

 

이 책의 제목은 신영복 선생이 감옥에서 또 사회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있을 때 불렀다는 노래에서 따왔다.

 

냇물이 강물로 가고, 강물이 바다로 가듯이 우리들도 이렇게 함께 모여 숲이 될 때 사회를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

 

그 바다는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고 다름을 포용하고 함께 가는 그런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는 것. 그것은 바로 '평화와 소통과 변화'라는 것.

 

제목에서도 신영복 선생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신 지 이제 일년. 지금 우리는 정치의 시대에 와 있다. 어떤 정치를 우리가 해야 하는가를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그 점에서 신영복 선생의 이 마지막 글은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은 시간은 차분히 글을 읽으며 다시 신영복 선생을 만나는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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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승우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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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조항은 헌법에 있다. 그것도 제1조다. 헌법이라는 법조문이 글자로만 존재하거나 또는 선언적 의미만 지니고 있어서는 안된다. 헌법은 국민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야 한다. 아니 국민들의 생활이 바로 헌법이어야 한다.

 

그만큼 헌법은 국민의 실천을 기반으로 작성된 문구들이다. 죽어있는 문자가 아니라 펄펄 살아있는 문자들, 국민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문자들, 국민들의 실천이 담겨 있는 문자들이다.

 

이런 문자들이 헌법 조항이어야 하는데, 그동안 헌법은 책 속에 또는 국회에 또는 법원에 또는 헌법재판소라는 곳에 갇혀 있었다. 그 속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그냥 문자로만 존재했다. 그러므로 헌법은 국민들의 생활과 별 관계가 없는 글자에 불과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파동 때 수많은 촛불들이 거리로 나와 외쳤던 구호가 바로 이 헌법 조항이다. 헌법이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때부터 헌법은 국민들의 생활에 들어왔다. 들어와서 나가지 않았다. 잠시 잊고는 있었지만 헌법은 이미 국민들의 생활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다시 8년 뒤, 이번에 국민들이 또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헌법 조항들도 함께 나왔다. 광장에서 헌법 조항은 국민들의 목소리와 함께 했다. 국민들은 다시 헌법은 바로 국민들의 생활임을 깨닫고 외치기 시작했다.

 

헌법이 몇몇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 헌법은 바로 국민들의 생활이라는 사실을 광장에서, 수많은 촛불들이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헌법은 국민들의 곁에 다가왔고, 국민들의 몸에 들어왔고, 국민들의 입을 통해서 밖으로 보내졌다. 귀를 막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서.

 

이런 일들이 한 달 넘게 행해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광장에서 한 달이 넘게 국민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도 정말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왔을까? 국민들은 광장에서 소리치고 있는데 정작 결정은 9명으로 구성된 헌법재판소에서 난다. 물론 이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겠지만, 그들의 결정에 국민들이 따른다는 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과는 배치된다는 생각이 든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겨우 9명의 사람에게 결정권을 넘겨주기 위해 그렇게 외쳤던가. 그렇게 헌법을 지키라고 외쳤던가를 생각하면 아직도 헌법은 국민들의 생활보다는 법조문에 갇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이제 우리는 광장에서 광장 너머를 상상하며 나아갈 때가 된 것이다. 적어도 헌법이 우리 국민들의 몸에 들어와 국민들의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이 책은 이런 헌법 조항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국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민주주의의 주인이 바로 국민임을 외치는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목적으로 쓴 책.

 

그렇다. 역사는 결국 기록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강자, 이긴자들의 기록만이 아니라 약자, 패자들의 기록이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면, 약자들의 싸움, 패자들의 싸움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그것을 딛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약자들, 패자들의 기록도 중요한데, 지금 광장에 모인 국민들은 약자도, 패자도 아니다. 국민들은 강자다. 헌법의 주인이다. 헌법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 헌법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강자다.

 

그러므로 그 강자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국민들이 어떻게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끌어내리는지, 어떤 국민들의 목소리가 우리 함께 나아가게 했는지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런 소중한 작업을 삶창이 했다.

 

단지 서울에 모인 사람들만의 기록이 아니다. 전국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기록이다. 서울, 부산, 광주, 전주, 대구, 대전 등등 전국 곳곳의 이야기가 실려 있고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헌법을 선언이 아닌 실천이 되게 하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 촛불을 들었다. 외쳤다. 우리가 바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주인됨을 선언한 지 한 달이 넘었고, 그 한 달 남짓 전국 광장의 모습, 국민들의 모습, 헌법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모습, 민주주의의 참모습을 이 책이 담고 있다.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소중한 기록이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마음 속에 그리고 이제는 머리 속에 기억해야 할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기록은 완결된 기록이 아니라 진행되는 기록이다.

 

그래서 이 기록을 발판으로 우리는 선언이 아닌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여기서 멈춰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한 해가 끝나간다. 아직 헌법은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실현되도록 국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새 해에도 이런 실천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삶창도 함께 할 것이고.

 

덧글

 

삶창의 이런 노력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국민들과 함께 있으며 국민들에게 삶을 보여주는 창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고맙게도 이 책을 보내주었다. 이 기록을 통해 광장의 모습을 다시 되새길 수 있었고, 함께 한다는 느낌을 지니게 됐다.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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