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없는 사회 - 사회수선론자가 말하는 각자도생 시대의 생존법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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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어른이 없을까?

 

이때 어른은 생물학적인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 어른이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임을 넘어서 공동체의 책임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나만이 아닌, 공동체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어른인데... 생물학적으로 나이를 먹어갈수록 공동체에서 멀어지는 것이 현대인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자본주의 관계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사고방식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한다.

 

상품을 주고받는 관계로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어버린 자본주의 사회. 이것을 가정에까지 적용시켜 가정에서도 맹목적인 주고받음은 이제 일어나지 않고 이익을 주고받음의 관계로까지 변질이 되었으니, 여기서 공동체가 존재할 틈이 없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내 이익에 관계없는 것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어른이 존재하겠는가.

 

우치다는 적어도 한 사회에 7%정도만 어른이 있어서 그 사회는 견딜 만한 사회,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풍요시대를 거쳐온 지금 일본의 40-50대는 공동체가 파괴된, 모든 것을 상품으로 환원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다고 한다. 이들이 곧 60-70대가 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자란 30-40대가 사회의 주축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어른이 있을까? 그야말로 어른이 없는 사회가 도래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어른이 없는 사회, 공동체가 파괴된 사회, 모든 것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사회가 된다는 얘기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이야기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것은 일본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얘기다.

 

우리 역시 어른이 없는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상품사회 말고도 어른이 없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제자가 없기 때문이다. 제자가 없다는 얘기는 스승이 없다는 얘기다. 즉, 보고 배울 어른이 없다는 얘기다. 아니, 어른은 있을지 모른다. 찾지 않고 있을 뿐.

 

그러나 우치다의 이 책을 읽다보면 어른이 없기 때문에, 스승을 찾는 제자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어른이 되었어야 할 세대들이 어른이 되지 못했는데, 이들이 한 번도 제자가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스승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지? 학교마저도 상품관계로 넘어간 지가 오래되었는데... 교사는 상품판매인이고, 학생은 구매자일 뿐이다.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학교에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따지고 거부하는 것이 지금의 모습 아닌가.

 

여기서 스승을 찾는다는 것, 제자의 자리로 자신을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제자가 없는데, 어떻게 스승이 있을 수 있겠는가. 스승이 없으니 자연스레 어른은 없다. 이 사회에 어른은 없다.

 

보여주는 모습이라고는 어린이의 모습뿐이다. 자신은 어린이의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이들에게 어른스런 행동을 하라고 하면 누가 듣겠는가. 스승이 '바담 풍 하면서 바람 풍 하란다'고 자신이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제대로 따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른이 먼저 되어야 한다. 남이 어른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먼저 어른스러운 일을 하면 된다. 어른스러운 일은 나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다.

 

'혼술'이라든지 '혼밥'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우리나라에서 공동체는 참 먼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혼밥, 혼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주거공동체'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 않은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함께 생활하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고, '밥상공동체'라 하여 함께 상을 차려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어른이 되려는 사람들이다.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배우려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다. 배우려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자신의 것만을 주장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들으려하는 사람, 남과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바로 어른이다. 하여 이런 어른들은 우선 제자의 자세를 갖춘다. 제자란 무엇인가?

 

스승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아닌가? 단지 말뿐이 아니라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배우려 하는 사람이다. 온몸으로 스승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후세에 전달하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바담 풍' 하지 않는다.

 

어른이 없는 사회, 다른 말로 하면 제자가 없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잘났다. 모두가 잘나서 공동체가 없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만이 옳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 사회다. 그렇지 않은가.

 

어른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사실상 '피의자' 신분이 되었는데...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그냥 내 잘못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 잘못이야, 난 억울해. 마치 애처럼 떼를 쓰고 있다.

 

이 상황에서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겠는가.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람이 어린이처럼 굴고 있는데... 어른이 없다는 사실, 그래서 어른답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는 학생 세대... 이게 현실이다.

 

우치다의 이 책, "어른 없는 사회"를 읽으며 마음이 아팠던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치다 역시 마찬가지로 얘기한다. 한 사회의 사람들이 모두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고. 7%정도만 어른이 돼도 그 사회는 행복해질 거라고.

 

그렇다면 바로 나부터 어른이 되면 된다고. 남을 보지 말고 바로 나부터 행동하면 된다고, 나부터 제자가 되려고 하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 어른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가 어른이 되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그게 어른 없는 사회를 어른 있는 사회로 바꾸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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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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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메갈리아'란 말이 인터넷 공간을 점령한 때가 있었다. '있었다'라는 과거형을 쓴 이유는,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메갈리아'가 뭐하는 곳인지도 잘 모른채, 그 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남성들로부터 추행, 희롱당한 사례들이 많이 있었다. 

 

양성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에, 비록 제대로 정치를 못해 하야 압박을 받고는 있지만, 어쨌든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나라에서 아직도 여성은 피해자의 자리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음을 보여주는 사이트였는데...

 

마찬가지로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에서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으며, 인종차별, 여성비하 등을 일삼는 부동산 재벌이 여성 후보를 누르고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니... 이 나라나 저 나라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지금도 뭐 좀 힘있다고 여기는 남자들이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외모로만 판단하는 말들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니, 이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페미니즘이 나온 지가 한참이 되었음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여성들의 권리가 신장되었음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무시되고 있는 권리들, 또는 암묵적으로 비하되고 있는 부분들, 사회적 분위기, 또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여성에 대한 남성적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양성평등 교육을 강화하고, 성희롱, 성추행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도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성차별적 편견들을 없애는 데는 긴 시간, 오랜 노력이 필요하겠단 생각을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이 몸에 배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차별인지도 모르고 행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당신 그것은 성차별이야 하고 말해주는 사람도 적기 때문이고, 따라서 자신이 성차별적 말이나 행위를 하고도 모르고 넘어가는 수도 꽤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이 이 책에서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것이 꼭 남자만의 문제일까? 여성을 비하하는 말 또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일까?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들 역시, 그것도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고 있는 여성들도 알게모르게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도 많다.

 

극단적인, 또는 올바른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사람들, 이 책에서 말한 이런 구분... 이건 유머라고 해야 하나?

 

근본주의 페미니즘은 곧 분노, 유머 감각 없음, 공격성, 확고부동한 원칙을 나타내며 적합한 페미니스트 여성이 되는 방법, 적어도 적합한 백인 이성애자 페미니스트가 되는 방식을 규정한다. 포르노그래피를 싫어하고 여성의 대상화는 무조건 매도하고 남성들의 시선에 부응하지 않고 남자를 미워하고 섹스를 싫어하고 일에만 열중하며 제모를 하지 않는다. (356-357쪽)

 

요즘은 이렇게 페미니스트를 규정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을 페미니스트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은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여기서 '나쁜'이라는 말은 도덕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간 말이 아니라, 이러한 페미니스트 규정에 따르지 않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이다.

 

우리 말로 하면 '날라리' 페미니스트 정도 되겠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규칙대로 규정대로 살아갈 수가 있을까? 그것은 기계적 삶이다. 매뉴얼대로 입력과 출력이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그런 삶을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다.

 

그때그때 자신의 처지에 맞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를 주장한다고 해서 꼭 다리나 겨드랑이의 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지내야 한다는 말, 이것은 이 저자도 '나는 종종 가장 마지막 건을 농담으로 삼는다'(357쪽)고 했듯이,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쪽에서 하는 말이기 쉽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대부분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의 일들을 보고, 그 일들에 대한 글을 써서 발표를 한다. 그런 발표글들이 이 책에 묶여 있는데...

 

개인의 경험도 섞이고, 미국 사회의 문제도 섞이고, 페미니즘의 관점과 인종주의의 관점, 계급주의의 관점이 적절히 섞인 그야말로 자신만의 관점에서 미국 사회의 편견을 바라보는 글들이다.

 

여성차별주의가 중심이 되고 있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여성이 아님을 이 책에서는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 상류층 백인 여성과 하류층 흑인 여성, 그리고 이주해온 동양, 라틴아메리카 여성이 그 사회,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아이티에서 이민온 흑인계의 후손으로서 흑인 여성의 입장에서 많은 일들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3부에 실린 "엔터테인먼트:인종과 젠더"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보여주고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흑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또는 흑인문제를 주제로 다룬 영화들에서 흑인들을 표현하는 방법을 다르게 파악하고 있는 것. 여전히 영화에서는 백인의 시선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흑인 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여성이기에 또 흑인이기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음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간과하기 쉬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은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하지만, 이 때 여성은 개별적 여성이어야 함을, 그리고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보아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성을 무시하고 원칙이라는 큰틀만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개성을 살리고, 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여성이라는 성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나쁜'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것이다. 글들이 참 통쾌하다. 읽기도 수월하고. 특히 영화에 관한 평은 내가 참 감명깊었다고 생각하는 영화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짚어주어서 더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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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GMO재앙을 보고 통곡하다
오로지 지음 / 명지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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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않고 살 수가 없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생명들의 목숨값으로 살아가는데... 그 목숨값에 걸맞게 잘 살아야 하는데, 목숨값을 조작하기도 한다면?

 

GMO식품, 소위 유전자조작 (일각에서는 변형이라는 순화된 표현을 쓰기도 한다) 식품에 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는 그래도 GMO식품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데도 그것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유통되고 있는지는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GMO표시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철저하게 GMO표시를 하고 있다고 하고, GMO식품이 반입이나 유통이 안 되도록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하다못해 우리보다 못 산다고 하는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GMO식품에 대한 규제는 심하다고 하는데, 잠비아는 2002년에 기근으로 시달리게 되자 GMO 옥수수 원조를 미국이 제공하였지만, 과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논의를 하여 원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당장의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위협에 국민들을 노출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들의 GMO 정책' 참조... 266-268쪽)

 

그런데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GMO 식품 수입국가라고 하니, 그것도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아 국민들 대다수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독을 먹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먹어서 죽는다'(법정 스님의 글 제목이기도 하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핵발전소의 위협보다도 더 심각한 위협이 바로 유전자조작 식품으로 인한 위협이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급격히 발생하고 있는 질환들이 이런 유전자조작 식품, 특히 그 식품에 포함되어 있는 '글리포세이트'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우리나라 과학자들과 의사들과 정책추진자들은 무엇하고 있는지... 소위 전문가라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알고 있는지.

 

혹 이들 역시 거대 유전자조작산업체의 지원을 받아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자는 유전자조작 식품의 위험성에 대해 무지한 것은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담배의 예와 이 GMO의 예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이들이 정보를 왜곡 호도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무지한 상태로 아무 것도 모르고 유전자조작식품을 먹고, 병에 걸린다고 한다.

 

이 병들이 너무도 심각해서 우리 민족이 절멸할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하고 있는데... 절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도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의 수치대로 가면 절멸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 먹는 것이.)

 

이 책에 나와 있듯이 예전보다 엄청나게 질병의 발병 빈도수가 높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런 질병들이 어린 아이들에게서 먼저 나타나고 있으니, 정말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구체적인 자료들을 들어 유전자조작 식품의 위험성에 대해서,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 다음에 우리 사회를 위해서,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아니 우리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결국 각성된 시민들이 운동을 이끌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시민들이 운동을 이끌면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무엇보다도 먼저 GMO표시제를 도입해야 한다. 무엇이 GMO식품인지 알아야 먹든 말든 결정을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 운동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이것과 병행해서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시도하고 있는 GMO농작물 실험을 금지해야 한다.

 

이미 위험성이 알려져 있는데, 그것을 이제와서 실험하는 기구를 만들고 실험지를 통해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하니, 참, 좋은 것을 따라가도 시원찮을 판에, 안 좋을 것을, 안 해도 될 것을 꾸역꾸역 따라가는 심사를 모르겠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잘 모르면 이것만이라고 실천하자고 하는데... 지금으로선 이정도도 참으로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피해야 할 음식들' 294-296쪽)

 

우선은 식용유, 이것은 절대로 쓰지 말라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유기농 농산물을 구입해도 식용유에 조리를 하면 말짱 헛것이 된다. 식용유는 거의 다 GMO라고 보면 된단다. 여기에 더해서 카놀라유도 마찬가지라고.

 

아무리 좋은 식품을 구입해도 조리하는데 쓰는 기름이 이렇다면 낭패. 어떤 기름을 써야 하나?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참기름, 들기름, 또 포도씨유, 올리브유에는 치명적인 독성 성분인 '글리포세이트'가 없다고 보면 된다고 하니...

 

이 정도만 해도 참 답답해지는데... 더 많은 것들이 있을테니... 한시라도 빨리 GMO표시제를 도입하도록, 그리고 GMO실험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먹어서 죽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읽으면서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이렇게 깜깜하게 무식하게, 정말로 GMO산업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무지하게 지내왔나 싶기도 해서, 참...

 

많이 읽고 많이 알려야 한다. 그리고 논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정말로 '먹어서 죽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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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지음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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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라냐?"

 

요즘 나오는 말이다. 21세기에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특정한 개인의 의견을 주로 참조해 국정을 운영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대통령이 사과, 또 검찰의 조사를 받겠다고까지 한 일이 일어난 우리 사회.

 

삼권분립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라는 개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현재의 상황에서 어쩌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주 일어났던 일인데... 지금까지 대통령 측근의 비리가 끊이지 않았던 데에는 대통령이나 그 주변 인물들의 부정과 부도덕이라는 면도 있겠지만, 제도에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절대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말이 역사에서 통용되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절대권력을 주면 그 권력 주변에는 부패한 세력들이 꼬여들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한 사람의 권력이 사법, 행정, 입법, 또 경제까지 장악해 전권을 휘두룰 수 있는 구조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특별히 훌륭한 개인이 이 구조 속에서도 훌륭히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통상이 아니라 아마 예외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태를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안 된다. 구조와 제도의 면에서 보아야 하고, 해결책 역시 제도와 구조의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제목에서 요즘 사태와 관련해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지 않은가. 또 우리에게 참조가 될 만한 사항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있다.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이미 무너진 나라를 대상으로 그 이유를 분석하는 것은 현재 유지되고 있는 나라를 대상으로 앞으로의 전망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쉽다. 왜냐하면 결과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를 가지고 망하지 않은 나라와 비교하면 망한 이유를 밝힐 수 있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가 흐른 다음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자명한 사실이 그 당시에는 자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역사를 참조하는데, 과거의 일들은 잘 밝히면서도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이다.

 

조선이 망한 이유를 제도에서 찾고 있는 이 책은 정치, 경제, 사상 쪽 등 다양한 분야를 분석하고 있다. 전문 역사학자가 아닌 저자가 조선이 망한 이유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가 경제학자로서 제도권에서 일한 경험이 많기 때문이고, 그것을 사회구조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 나온 이론을 조선에 적용해서 분석하고 있는데... 착취적 제도와 포용적 제도라는 개념을 동원해서 나라를 분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특히 조선이라는 나라가 500년 이상을 유지되어 온 이유를 분석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것에 모두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제도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나라가 온전히 유지되기는 힘들다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다. 강력한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집단이 지배층으로 등장하고, 이들이 성리학을 구현할 나라를 세우려고 노력을 했는데...

 

사상 면에서 성인군자를 추구하는 것을 비판할 수는 없고, 이것이 서민들의 존중을 받았음은 명백한 사실인데... 조선은 농업과 상공업 경시, 신분제, 배타적 지식의 독점과 배타적인 정치 독점 등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음을 여러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온 것들을 지금과 비교해 보면...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것들이 있지 않나 싶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조선에서는 농업을 중시했지만, 이것도 말뿐이고 사실은 공부하는 유학자를 존중했고, 양반이 농사를 짓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으니, 농업이 중시될 수가 없었고, 이렇게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있는 농업도 실질적으로는 천시받았으니, 상업이나 공업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지만 제대로된 상업, 공업이 발달할 수가 없었고, 하다못해 수레를 쓰자는 논의가 어떻게 무시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경제가 특정 규모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는 제도와 구조를 지니고 있는 나라가 조선이었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든 박지원의 허생전을 보면 당시 만 냥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파탄낼 수 있음을 허생을 통해 알 수 있고,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제기한 내용들이 거의 채택되지 않았음을, 그래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등장하여 개혁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정부의 지식 독점으로 그들의 책들이 거의 출간되지 않았고, 또 출간되더라도 극소수에게만 읽히도록 출간되었으니... 조선은 꽉 막힌 제도, 변화의 여지가 별로 없는 제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신분제를 통한 사람 착취제도가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니, 그 사회가 변화를 받아들일 분위기를 형성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정치에서도 사색당파 때까지야 이러저러 참아줄 수 있다고 해도,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세도정치로 다른 집단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조차 박탈했으니...

 

(다른 집단이라 함은 소위 양반들 중에서 노론과 노론 중에서도 특정 성씨 집안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을 말한다. 남인과 같은 양반들도 이미 정치에서 소외된 지 오래 된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대한제국 때 '만민공동회'를 통해서나 나타나게 되지만, 이도 정부의 탄압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분제로 사람 착취, 세도정치나 또는 양반들만의 정계 진출로 정치적인 독점, 농업이나 상공업을 경시한 생활태도, 게다가 세계 최초라고 늘 자랑하는 금속활자를 만들어 놓고도 이를 대중에게 모두 알리는 책을 편찬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지식인 집단만 보게 출간하는 행위,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이 있음에도 이를 활용한 문자생활을 장려하지 않은 점 등등.

 

이렇게 보면 조선은 꽤나 폐쇄적인, 그리고 다른 힘없는 존재들을 착취하는 제도를 지닌 나라였다. 그러니 사회가 급변할 때 그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더이상 변화할 수 있는 제도를 지니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밖에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이것들이 주로 작용했다는 것이 이 책이 주장하는 핵심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대한민국이 출범한 지 70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조선으로 치면 나라가 기틀을 잡고 안정을 추구하기 시작하던 때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겨우 나라의 초기에 접어들었는데...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나라에 대한 방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 방향성에 맞지 않으니 이런 절규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으니 이런 말이 나온다.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가 아니라면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나라라는 것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국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국민들이 만들어낸 제도, 문화, 생활 등의 총합이 바로 나라다. 특정 정치인의 전유물이 나라가 아닌 것이다.

 

지금, 특정 정치인이 전횡을 휘두루고, 그를 조종하는 다른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런 제도에서는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이 책에서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이 큰 정도전은 정치에서 왕과 재상이 함께 하는 세상을 꿈꾸었다는데, 이렇게 권력이 분산되고 공유되어야 특정인에게 휘둘리는 일이 없을 거라고 이미 조선초에도 주장했는데...

 

지금 헌법 개정문제가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나라냐?" 이렇게 외치고 있는 지금...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이 책은 지금의 우리가 나아갈 길에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주장한 내용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이 책에서 나온 쟁점들을 가지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참 시의적절하게 책이 왔다. 그리고 많이 참조가 되기도 했다. 조선에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 이렇게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를 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가끔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많이 참조가 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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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5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5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5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 광복을 염원한 사람들, 기회를 좇은 사람들
선안나 지음 / 피플파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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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들이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였으면 이런 책도 나오지 않았으리라. 이렇게 역사에서 책임을 묻는 일을 끊이지 않고 하지도 않았으리라.

 

이들에게 자꾸 과거의 행적을 떠올리게 하고,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도 청소년들로 하여금 계속 읽게 하는 이유는,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회의 지도층, 주도층, 또 지식인의 책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하기 위해서다. 그냥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들에게는 보통사람들에게 거는 기대보다 더한 기대를 하고, 책임을 묻게 된다.

 

그만큼 이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이들이 사회에서 받은 혜택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그것은 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룬 것이지, 사회에 기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혼자 이룬 것은 없다. 모두 다른 사람과 또 사회적 환경과 관련이 되어 있다. 따라서 사회 지도층, 주도층, 지식인이 되었다 함은 그만큼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때 자기 이익이 아니라 어떤 것이 사회를 바람직한 쪽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우선시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생일대의 선택 상황, 갈림길에 처할 때가 있다. 그것도 자신이 출세해서 잘 사느냐 아니면 자신을 희생해서 사회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것이냐 하는 갈림길.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갈림길이 몇 번 나오고, 그 갈림길에서 많은 이들이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갈림길이 바로 일제강점기라고 할 수 있다.

 

30여 년을 식민지 지배에서 살아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느냐 (이 길은 얼핏 생각해도 험난한 길이다. 갈림길에서 보면 가시밭길이다) 아니면 식민지배에 협력하느냐 (이 길은 평탄한 길이다. 출세를 향한 탄탄대로, 잘 포장된 길이다)의 선택에 처하게 된다.

 

특히 사회 지도층, 주도층, 지식인들에게는 이 선택의 길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들의 선택은 개인의 선택으로 묻히지 않고 역사라는 책에 선명히 기록되고, 지워지지 않게 된다.

 

이 책은 일제시대라는 갈림길을 다시 세분한다. 명문가, 부자, 여성, 문인, 언론, 여성지도자, 독립군과 토벌군으로.

 

각 갈림길에서 두 명씩을 배치해 상반된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이었는지 우리에게는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다만, 그 시대에는 그 답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 말도 어폐가 있다. 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아마 답을 보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는 분명 알았을 것이다. 다만, 옳은 길이 늘 자신의 행복을 담보해주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 옳음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우선으로 한 선택을 한 경우가 많았으리라)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약간 편파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한 길은 비록 험난한 길이지만 칭송받는 길이고,  한 길은 편안한 길이지만 대대로 욕을 먹는 길이기 때문이다. 서술에서도 한 편은 존경으로, 한 편은 아쉬움과 비판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읽으면 답은 너무도 명확하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했어야 했다. 딱 정해져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정해진 길을 가기는 정말 힘들다. 당위와 현실은 거리가 너무도 멀기 때문이다. 이 먼 거리를 좁혀 당위를 현실로 끌어와 행한 사람들, 그래서 이들이 더 위대하고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누구누구가 나오는지 보자. 우선 조선시대에 명문이라는 소리를 드는 집안에서는 이회영 집안과 이근택 집안이 나온다. 부자에서는 안희제와 김갑순, 여성에서는 남자현과 배정자, 문인에서는 이육사와 현영섭, 언론에서는 안재홍과 방응모, 여성지도자에서는 김마리아와 김활란, 독립군과 토벌군에서는 장준하와 백선엽.

 

많은 사람들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친일파로 분류된 사람들 중에서 자신들은 친일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많고, 그 후손들도 조상의 친일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들의 행위가 친일 행위였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 사실로 남아 있는 친일 행위를 그토록 부정하고도 여전히 사회주도층으로 살아남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무리 부정해도 그들의 행위는 역사를 통해 기억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의 사실만을 알기 위해서, 또 친일 행위를 단죄하기 위해서 이 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는 기록을 남기고, 우리는 그 역사를 배우는 것이니까.

 

일제강점기라는 갈림길 앞에서 상반된 선택을 한 사람들... 역사가 누구를 더 칭송하는지, 누구를 오욕의 역사로 기억하는지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청소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는 것,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많은 청소년들이 읽고 아직도 왜곡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속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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