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전기 - 세계 사랑을 위하여
엘리자베스 영 브륄 지음, 홍원표 옮김 / 인간사랑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아렌트의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온 지도 꽤 오래되었고, 그의 거의 모든 저서가 번역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물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주요 저작들은 이미 다 번역되었다고 봐야 한다.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신의 삶과 같은 책들을 우리는 한글로 읽을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아렌트는 영어보다도 독일어로 사유하고, 독일어로 글을 썼다고 봐야 하는데, 그의 사상들이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이 될 때도 많은 과정을 거쳤을텐데, 이 저작들이 다시 한글로 번역이 될 때 우리는 아렌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의문.

 

워낙 고대 그리스 사상부터 로마, 그리고 중세, 또 칸트, 헤겔에 맑스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이 다양한 사람이라서 어느 한 면으로 아렌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인데, 우리나라 학문 풍토에서 이들 서양철학자들을 전면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서양철학에 서양정치사상사까지 훑은 학자는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공부가 아니라 그 정도는 공부해두어야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이해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는 읽는 나 자신의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에, 한글로 된 책을 읽으면서도 글자는 한글이되, 그 글자들이 모여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 전기도 마찬가지다. 전기문이라서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것이 우선 잘못이었다. 우리는 전기문을 학생들에게 권할 정도로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하지 않나. 그냥 그 사람의 일생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접어든 이 책은 우선 분량에서부터 주눅들게 했다. 아니 무슨 책이 이렇게 두꺼워.

 

여기에 만만치 않은 가격. 이렇게 비싼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책에 매겨진 값만큼은 읽고서 남겨야 하지 않나 하는 부담감. 전기문을 집어들었는데, 가격과 분량에서 우선 부담을 지니고 들어갔으니...

 

내용도 만만치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 읽기가 힘들다. 이건 전기문이 아니다. 굳이 전기문이라고 한다면 출생에서 죽음까지 다루었다는, 전기문의 시간적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만 전기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기문 중에 평전이라고 하면 된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 전기문.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평전과 또 전기문과 자서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아렌트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일생에 대해 알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그것은 실수다. 곧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망설이게 된다. 끝까지 읽을 것인가, 중간에 그만둘 것인가?

 

전기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아렌트 사상 해설서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이 전기문 자체가 아렌트 사상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고, 아렌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사상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렌트 사상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나온다. 따라서 아렌트의 책을 미리 읽지 않았다면 이해하기가 힘들다. 아니, 읽었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것은 아렌트 자신의 해설도 아니고, 아렌트의 책을 읽은 우리들의 해설도 아니고, 이 전기문을 쓴 영-브륄의 해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으면 뿌듯함이 밀려온다. 해내었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든다. 정치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은 도전해볼 만한 책이다.

 

나는 여기서 아렌트의 삶이 사회 전반의 문제에서 인간의 문제, 그리고 사유의 문제로 계속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직접 자신이 겪었던 무시무시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나타난다면, 그 세계에서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인간의 조건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세계속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정신의 삶. 즉 사유-의지-판단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결국 무국적자였다는 생각. 무국적자였기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관찰하는 사람에 가까웠고, 관찰하는 사람이었기에, 사유-의지-판단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런 고민이 결실을 맺었으면 우리가 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기문이 아니라, 철학사상서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이 두꺼운 책은, 끊임없이 우리의 머리를 괴롭힌다. 제발 생각 좀 하라고. 그냥 따라 읽지 말라고. 네 생각을 정립하면서 따라오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녀라고 한다. 평생을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위해 살았던 사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좋은 쪽으로밖에는 들어보지 못했다.

 

봉사의 화신.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 다들 테레사 수녀를 존경하고 본받으라고 한다.

 

그처럼은 살 수 없어도 그처럼 사는 사람은 존경해야 하고, 그처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런데 이 책은 아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살면 안된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고 있는 책이다. 어두운 면이라고 해도, 테레사 수녀의 개인적인 비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한 것은 사실이고, 그렇게 산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은 테레사 수녀의 그러한 삶이 어쩌면 또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는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비판을 제기한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많은 돈을 기부받았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도움을 받으면서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보이고 있다.

 

최신 의료 시설이나 더 나은 시설을 만들 수 있는 기부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데서 의심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가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다른 용도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성스러운 수녀인 그녀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부도덕한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린 그녀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고 하지만, 좋은 일을 할 때에는 동기도 중요하고, 재원을 어디서 확보하느냐도 중요한데, 이에 대해서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비판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어쩌면 자신의 배경으로 활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내비치는데...

 

이 책이 테레사 수녀에 대한 다른 면을 부각시켜주는 의미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테레사 수녀의 긍정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니, 어느 한 쪽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테레사 수녀의 평소 행적과, 그리고 이 책을 종합해서 읽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만,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우상화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 미국 흑인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짐 해스킨스 지음, 최성애 엮음 / 문예춘추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름이 차별이 되는 사회.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우리는 미국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생각해 왔다. 그리고 링컨 이후에 노예해방이 이루어진 다음에 미국은 인종차별이 없어진 나라로 생각하기 쉽게 배워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로자 파크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일테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알아도, 말콤 엑스라는 알아도, 로자 파크스라는 이름은 들어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킹 목사의 전기문을 읽은 사람은 어쩌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이름이기는 하지만.

 

로자 파크스,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흑인 여자.

 

이렇게 주로 알려져 있다. 흑백분리를 시행하는 남부 앨러바마주의 버스 탑승법에 맞서 싸운 사람.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 구치소로 끌려간 사람.

 

지금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1950년대 미국에서, 그 민주주의의 산실이라던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버스 탑승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하다못해 마시는 물까지도 흑백을 분리해서 급수대에 설치해 놓았다니...이거 어디 사람이 견딜 수 있었으랴.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력증에 빠진다는데 있다. 흑인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흑인들이 유권자 등록 운동을 할 때에도(세상에 이들에게는 형식적으로만 투표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유권자로 등록을 하는데, 백인의 보증이나 아니면 문해 시험을 봐서 통과해야만 했다고 하니) 백인들의 방해뿐만이 아니라, 이미 자리를 잡은, 또는 백인의 인정을 받고 사는 흑인들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더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지금도 좋다고 생각하는 기득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이들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수많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로자 파크스는 유권자로 등록을 하고 흑인 사회 운동에 참여하며(그 당시는 흑백 차별도 있었지만, 남녀 차별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삶의 모습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 양보 거부로 나타나고(본인은 이제는 지쳐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날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버스 타기 거부운동이 벌어진다. 시작하는 이들도 반신반의하면서 시작한 버스 보이콧은 흑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계속 이어지고, 이것이 결국 대법원에서 흑백분리 탑승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내게 된다.

 

미국사회에서, 그것도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 사회에서 드디어 인종차별을 버스 타기에서는 해서는 안되게 만드는 법적 근거를 지니게 된다. 이렇게 되게 하는데 기폭제가 된 사람, 바로 로자 파크스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의 삶이 멈추었다면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버스 탑승에서 해결되었다고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자 파크스는 이후에도 계속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행동에 참여하며, 한 사람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힘이 약하지만, 바위에 부딪쳐서 부서지지만, 그 물방울들이 쉬지 않고 계속 바위에 부딪치면 결국 바위는 뚫리고 만다. 이를 보여준 사람이 로자 파크스이고,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로자 파크스는 한 사람으로서의 시민이 어떻게 행동해야 사회가 바뀌는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결국은 사회를 바꾸었던 사람.

 

그런데 이 로자 파크스가 2005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내게 충격이었다. 우리랑 동시대 사람이잖아. 그 때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자리를 백인에게 양보하길 거부했던 때 나이가 할머니 나이가 아니라, 한창 인생을 살아가는 중년의 나이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 사회활동에 참여하며 살아왔던 사실. 우리랑 같은 시대에 살던 인물이라는 사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 이 책의 말미에 로자 파크스는 아직도 인종차별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걱정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차별들은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그 진행 중인 차별을 고치는 일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로자 파크스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지 한 여인의 이야기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있는 차별을 없애는데 우리의 힘을 보태는데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 개정판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렌트의 책은 읽기가 망설여진다. 무언가 통찰력이 있는 듯한데, 막상 손에 잡고 읽기 시작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아니다.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가 아니라, 고민을 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잘 안 올 때가 많다. 그래서 몇 장을 못 읽고, 책을 덮고, 쉬게 된다.

 

쉬다가 또 읽어야지 하고 책을 편다. 정말로 아렌트의 책은 자세를 경건하게 만든다. 그냥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로 읽어서는 금세 졸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깊은 철학적 지식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우리에게 그의 책을 읽기 힘들게 하고 있다.

 

어쩌면 철학적 사유에 대한 연습이 부족한 나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철학적 사유에 대해서 연습할 시간이 과연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면 이러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근대 초기에 태어나서, 근대를 온몸으로 살아간 사람들 이야기라서, 전기문이겠거니 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단순한 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전기를 통한 철학적 사유, 정치적 사유라고 해야 할 듯한 책이다.

 

더군다나 처음 들어본 사람은, 그 사람의 전기를 간략하게 소개해도 잘 읽힐까 말까 한데, 이거는 그 사람을 그 사회에 집어넣고, 그 의미를 추적하고 있으니 더더욱 읽기에 힘들다.

 

여기에 나온 사람들 이름을 나열해 보면, 레싱, 로자 룩셈부르크,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 칼 야스퍼스, 이자크 디네센,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벤야민, 베어톨트 브레히트, 발데마르 구리안, 랜달 자렐이다.

 

이 중에 적어도 내가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레싱, 룩셈부르크, 야스퍼스, 벤야민, 브레히트가 다니 이 책 읽기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지식의 얕음이 이런 데서 장애로 작용을 하고, 도전 욕구를 부추기고 있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어둠의 시대는 이 때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어둠의 시대라는 사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전기를 읽는 이유는, 이 책처럼 전기를 빙자한 철학적, 정치적 책을 읽는 이유는 내 삶을 가다듬기 위해서이다. 이들의 삶, 즉 이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응전하며 살았는가를 참조하여, 이 시대에 나는 사회에 어떻게 응전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찾는 목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적어도 이들은 어둠의 시대에 그 시대에서도 빛을 발하는 등불 역할을 했으므로, 이 등불들이 있었으므로, 어둠의 시대는 단지 어둠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지금 이 새로운 어둠의 시대에서 어떤 삶, 어떤 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적어도 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속으로 고립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 우정 또는 인간애라고 하는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이런 무기를 지니기 위해서는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통찰력을 갖출 수 있는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은 명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 책이 준 긍정적인 힘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어둠 속에 묻힌 삶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는 철학자는 철학으로, 문학자는 문학으로,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간애에 바탕을 둔 우정으로 돌파해나가야 한다는 사실.

 

브레히트 부분에서 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결국 시로써 물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렇담 어둠의 시대를 살아간 우리 시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를 적용시키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란 천상으로 날아오르려는 존재이기에 현실의 중력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적용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그들의 시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잣대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가 현실에 어떻게 대응을 해서 현실을 넘어선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느냐 하는 잣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면, 결국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을 때 사회의 변혁을 이끌 수 있으면, 이럴 때 어둠의 시대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고 본다.

 

이 책.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다 읽을 필요도 없다. 사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인물을 가지고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선, 뒷부분에 있는 헤제논문을 읽어라. 그러면 조금 틀이 잡힐 수 있다. 그 다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을 읽어라. 그 인물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과 중첩시키며 된다. 

 

어둠의 시대, 해제논문에서 우리나라도 이러한 책을 쓰는 이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이에 못지 않은 어둠의 시대를 겪었다. 많은 인물들이 그러한 시대 등불이 되어주기도 했다. 한 번 시도해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 - 어떤 ‘삶’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김진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김진애 하면 4대강 사업을 반대한 국회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히 논리적으로 4대강 사업의 허구성을 알린 국회의원.

 

아니 그 전에 건축가로서 알려져 있다.

 

나역시 김진애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오래 전에 읽은 "이 집은 누구인가"의 지은이로 건축가로 알고 있었다. 상당히 인문학적인 지식이 풍부한 건축가로.

 

만만한 건축가가 아니구나 싶었는데, 이 책을 읽고는 역시나 했다.

 

그는 한나 아렌트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 우리나라에서 아렌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꽤 있다고 하는데... 김진애도 그 중 한 명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을 빌려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만큼 이 책은 아렌트에게 헌정된 책이라고 봐도 된다.

 

이 책은 아렌트의 책에 나온 '활동적인 삶이란 노동, 작업, 행위'다라는 말에서 촉발되어 시작된다. 즉 인간의 삶이란 노동, 작업, 행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이러한 세 가지 편제에 맞게 이 책도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노동과 작업이 이 책의 전반부, 즉 김진애란 인간을 만들어내는 초기라면, 행위는 김진애란 인간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를 노동과 작업은 나를 완성시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고, 행위는 나에서 우리를 만들어가는, 즉 공적인 삶에서의 나를 완성시키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김진애가 건축가가 되고, 도시 계획가가 되는 장면까지가 바로 '나'를 완성해가는 과정이었다면, 이는 사적인 인간 완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사적인 완성과정에서 자신의 선택들이 결국은 자신의 운명이 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까지는 김진애의 개인사로 읽으면 된다. 물론, 여기에 계속 나타나는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있지만 말이다.

 

다음부터가 바로, 행위가 나오는 순간부터가 사적인 삶에서 공적인 삶으로, 사적인 인간 김진애에서 공적인 인간 김진애로 나아가게 된다.

 

행위를 소통이라고 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위한 노력이라고 한다면, 이 행위에 해당하는 가장 큰 개념이 바로 정치이리라. 그래서 그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아니, 우연인 듯하지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고자 했다면 필연적으로 밟게 될 과정이었다.

 

정치란 바로 공적인 삶의 대표 아니겠는가?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가기까지, 들어가서 어떤 자세로 어떤 활동을 했는가 하는 이야기들이 죽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서 만난 사람들까지.

 

하여 정말로 김진애가 쓴 "인간의 조건"에서 핵심부는 바로 뒷부분이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도, 사적인 삶의 완성에서 공적인 삶의 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치를 비껴갈 수가 없다.

 

우리가 아무리 눈 감고 피하려 피할 수 없는 대상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김진애처럼 국회로 들어가 정치와 즉 인간의 공적인 행위가 직접 맞닥뜨리지 못한다 해도, 우리 역시 너무나 많은 정치적인 행위들을 할수가 있다.

 

그러한 정치적인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공적 인간으로서의 우리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

 

그래 우리도 이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말처럼 "어떠한 '삶'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에 관심을 가지고, "가치"를 추구한다면, 우리 삶은 사적인 삶의 완성인 나의 완성에서 공적인 삶의 완성인 '우리'의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인간이게 만드는 인간의 조건이 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생계를 위한 노동, 자신의 완성을 위한 작업, 그리고 인간의 완성을 위한 행위. 우리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서 행위에, 공적인 삶에, 자기 성찰에 힘쓰는 사람이 되자.

 

국회의원 김진애, 건축가 김진애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인간됨을 위해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