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음악이 이야기한다 - 동갑내기 두 거장의 예술론.교육론
오에 겐자부로.오자와 세이지 지음, 정회성 옮김 / 포노(PHONO)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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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하면 몇 사람 밖에 모르는데... 그래도 요즘 애정을 가지고 만나는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다. 그가 쓴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일본 작가들 작품 중에는 가장 많이 읽었나 보다.

 

특히 그가 의식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그런 작가라는 생각에 더 애착이 간다.

 

그와 함께 대담한 오자와 세이지는 음악 분야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아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꽤 잘 알려진 이름일 테다. 그들이 공교롭게도 동갑이라고 하니, 1935년생인 그들은 군국주의 천황제 국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민주주의가 막 정착하려고 할 때 청년기를 보내고 2000년대 들어 수구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본 사회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둘 다 가정적으로는 변방에 속한다고 할 정도로 부유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 세계를 개척한 사람들이다. 이런 두 거장이 2000년을 맞이하여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하는 대담을 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쇄국에 가깝게 일본 사회가 변하고 있는데...

 

사실,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하는가 보다는 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 음악과 문학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 과연 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등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둘의 공통점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일본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인 것과 일본적인 것이 다르다는 이중 기준, 이중 규범을 부정한다. 그런 것에 매몰되면 쇄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일본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편적인 것이 일본적일 수 있다는 것, 그래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대담에서 이들은 국가주의를 비판하며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고 있다. 개인이 존중되는 사회가 그들이 원하는 사회고, 이런 개인을 국가나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일본적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사용하거나, 그들을 따라가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어로 소설을 쓰지만 그의 작품이 번역되는 것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삶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자와 세이지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고, 점점 극우화되어 가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어쩌면 이들 대화에서 우려하고 있던 쇄국으로 일본이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이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19년 전 대담이지만, 지금 일본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이들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이것이 꼭 일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나 음악가가 지녀야 할 자세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자세를 지니고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파울로 프레이리와 마일스 호튼의 대담집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와 같은 느낌... 거장들의 대화를 읽으며 우리 삶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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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36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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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이다. 몇몇 구절을 인용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살아온 삶을 정리해 주고 있는 구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 동안 나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오름길만이 신에게로 이끌어 감을 분명히 알았다. 밑으로 내려가거나 평탄한 길이 아니라 오직 오름길만이. 사람들이 너무 자주 사용해서 더럽혀진 <신>이라는 어휘의 내용을 조금도 선명 선명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무능력 때문에 나는 자주 주저했지만 신에게로 올라가는 길, 그러니까 인간 욕망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한 길에 대해서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나는 신의 세 가지 피조물인 나비가 되려는 벌레와, 본성을 초월하려고 물에서 뛰어오르며 나는 듯한 물고기와, 배 속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에게 늘 매혹되었다. 나는 항상 내 영혼이 가야 하는 길을 상징한다고 상상했던 그들과 언제나 신비로운 일치감을 느꼈다. (670-671쪽)

 

  우리들의 삶은 전체가 상승, 절벽, 고독이다. 우리들은 많은 동료 투쟁자와, 많은 사상과 거대한 일행과 함께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올라가도 정상이 이동하여 자꾸 멀어지면 다른 투쟁자들과, 희망과, 사상은 숨이 차서 더 높이 올라갈 마음이나 능력이 없어져, 우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움직이는 정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우리들만 남았다. 우리들은 언젠가는 정상이 움직이지 않아서 우리들이 거기에 다다르게 되리라는 순진한 확신이나 교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그곳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높은 그곳에서 행복과, 구원과, 천국을 찾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들에게는 올라간다는 행위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요, 구원이요, 천국이기 때문에 올라갔다. (688-689쪽)

 

제목이 왜 '영혼의 자서전'인가 했더니, 그가 만나고 겪었던 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견뎌왔는가를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권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젊은시절부터 계속 신을 추구하는데, 신에 대한 추구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밝히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서 니체로, 부처로 나아가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도달할 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다른 도달점으로 현실을 택하기도 하는데, 러시아혁명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를 언급하기도 한다. 레닌이 또다른 신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카잔차키스가 도달해야 할 정점에 가는 하나의 길, 봉우리일 뿐이다.

 

따라서 이 자서전에서는 그리스와 세계 정치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정치인으로서 생활을 한 카잔차키스의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크레타인, 그리스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카프카스'에 흩어져서 고난을 받던 그리스인들을 조국으로 데려오는 행위만이 이 자서전에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그는 그리스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고 하겠는데... 하권에서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게 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조르바가 카잔차키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잘 알 수가 있고. 이성적인 인간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인간, 그런 인간에게서 불멸성을 보게 되는 순간, 깨달음이 조르바와 얽힌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 있다.

 

카잔차키스는 평생을 고뇌하며 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뇌가 극에 달할 때 그는 글쓰기로 빠져드는데, 그렇게 해서 많은 작품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만년에 '오디세우스'에 대해서 글을 쓰는데, 그만큼 그는 영혼의 항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지점은 바로 정점이 아니라, 즉 '파우스트'에서처럼 정점에 도달해서 '멈춰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나아감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정점은 없다. 영혼에게 정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신을 추구했지만 어느 신에게도 자신을 내맡길 수가 없었다. 계속된 영혼의 여행, 오디세우스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도달해서도 안 된다. 그냥 도달하려고 가야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영혼의 여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작품을 남겨주고 있다. 작품으로 불멸성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카잔차키스의 고뇌, 영혼의 방황, 여행, 그리고 그가 도달한 지점까지 그가 쓴 '영혼의 자서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만, 구원은 멈춤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 구원은 우리가 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이 자서전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다고나 할까.

 

그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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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3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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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다. 그만큼 기억하기 힘든 이름이기도 하고. 러시아 사람 이름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러시아 이름이 자꾸만 카잔차키스 이름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자꾸만 카잔차키스라는 이름을 까먹고 '카잔키스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카, 러시아 이름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카잔차키스... 이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니)

 

그리스 사람. 그리스 문학자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고대 작가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작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현대 작가로 그리스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 카잔차키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비록 발음을 잘하지 못하지만.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아주 오래 전에는 '희랍인 조르바'라고 번역이 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본 소설 아니던가. 그만큼 유명한 작가인데...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사실 오래 전에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가 내게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우리나라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 "영혼의 자서전(상,하)'을 사 놓고, 읽지 못하고 망설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웬지 그의 삶이 내 삶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너무도 몰랐기 때문에 선뜻 손에 들기 망설여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책을 펼쳤는데... 한번 펼치자 책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삶을 살았구나.. 그가 얼마나 고뇌하는 삶을 살았는지, 격동의 시대를 거쳐왔는지를 알게 된다.

 

상권에서는 예루살렘에 간 카잔차키스까지다. 그의 삶을 추적하면 그는 이쪽과 저쪽, 즉 피안과 차안, 내세와 현세, 그리스와 터키, 그리스정교와 그리스 신화 사이에 놓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라는 나라가 반도다. 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마주치는 곳이다. 잘하면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장소고, 잘못하면 어느 쪽에 점령당하는 운명에 처할 곳이다. 그러니 그리스 태생이라는 것이 이미 중간에 끼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 출신이다.

 

크레타 섬은 그가 태어나고 자랄 당시 터키의 지배에 있다가 그리스로 독립되었으며, 두 나라 사람들이 섞여 살던 곳이다. 그러니 그는 태생부터 경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너는 전투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나 크레타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다른 방향에서 크레타 독립을, 그리스를 위해서 삶을 살아가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는 크레타인임이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

 

이런 그에게 종교와 상반되는 과학이 사춘기에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그는 점점 자라면서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순례하고, 성지를 찾아가게 된다.

 

마음을 두지 못할 때, 고뇌에 시달릴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글쓰기다. 문학이다. 그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 그렇게 너무나도 힘이 들 때 그는 격정에 휩싸여 글을 쓰게 된다. 이것이 젊은 시절 카잔차키스의 모습이다.

 

절절한 고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지도 못하며 자신의 영혼이 진리를 향해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카잔차키스... 그에게 종교는 특정 민족의 종교가 아니다. 그에게 종교는 모든 사람의 종교다.

 

그는 크레타 섬 출신이지만, 그리스인이기도 하고 세계인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나사렛이라는 지방에, 예루살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도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상권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보다는, 부활한 예수에 대한 그의 소망이 더 잘 드러난다. 왜 예수의 고난만 강조하는가? 오히려 부활한 예수를 강조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이 세상에 평화와 사랑이 더 넘치지 않는가.

 

그런 관점들이 상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하권에서는 젊은시절 예루살렘에서 시나이 산으로 가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의 영혼이 어떻게 정상을 향해 오르게 되는지... 살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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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8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8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noent 2019-12-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는 1월 말 개봉하는   영화 <카잔자키스>도 관심부탁드려요~
 
그리스인 이야기 3 - 에우리피데스에서 알렉산드로스까지
앙드레 보나르 지음, 김희균 옮김, 강대진 감수 / 책과함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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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이다. '에우리피데스에서 알렉산드로스까지'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하지만 작은 제목에 현혹되면 안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책 중간까지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가 건설한 거대한 제국은 결국 아테나이라는 도시국가를 멸망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종말, 그것이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한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는 더 존속한다. 이 책에서는 그 뒤의 이야기가 반 넘게 펼쳐지고 있다.

 

저자인 앙드레 보나르는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관념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이 책에서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 철학자 하면 떠올리는 인물이 셋인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닌가. 그런 이들에 대해서 저자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그리 큰 역할을 주지 않는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경험과 자료에 근거한 책을 썼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세상은 피폐해졌고,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중우정치로 나아가고 있을 때, 그때를 도시국가의 쇠락기라고 하는데, 이 쇠락기에도 철학이나 과학은 멈추지 않고 발전을 한다.

 

쇠락기에 플라톤은 자신만의 이상국가를 이야기한다.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를 꿈꾼다. 그만큼 현실이 어려웠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꿈은 꿈에 불과하다. 오히려 플라톤의 이런 꿈이 기독교와 만나 종교로 더 발전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로스, 그에 대해서 이 책은 꽤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테나이인이라고 하기도, 그렇지 않다고 하기도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엄밀하게 따지만 그리스인에 들겠지만, 더 엄밀히 따지만 아테나이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방인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런 그가 한 업적은 영토 확장이 아니라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정책을 폈다는 점이다. 그는 그리스인과 야만인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능력있는 사람들을 민족에 상관없이 등용한다. 그로 인해 문화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의 융합은 그 자체로 발전이다. 쇠국을 강요하는 것이 진보의 반대 방향이라면 융합은 진보의 방향이다. 그렇게 세상은 다양한 문화들이 융합하기 시작한다. 그런 문화의 융합으로 과학이 발전하게 된다.

 

철학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접어든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과학의 발전들이 이때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천문학, 지리학, 의학 등등 인류에게 필요한 학문이 발달하고, 문학이 다양한 종류로 분화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그리스는 쇠퇴기에도 다양한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다. 그렇게 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에피쿠로스가 나온다. 소위 쾌락주의자라고 하는 에피쿠로스.

 

한데 그냥 피상적으로 알던 에피쿠로스가 아니다. 저자는 에피쿠로스에 대해서 극찬을 하고 있다. 그는 유물론자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과 같이 이상세계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세계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우정을 통한 행복. 이 때 우정에는 차별이 없다. 모든 이들은 우정으로 맺어질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저 너머에 행복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행복을 찾으러 지금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행복은 바로 지금-여기에 있다.

 

어떻게, 나 개인의 행복만을 위해?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개인의 행복은 우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즉, 개인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집단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도록 하는 이념을 멀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인 이야기는 에피쿠로스로 끝난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사람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찾는데, 그것은 종교에서도, 저 먼 너머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사이에 있음을, 우리들이 함께 찾고 만들어 갈 수 있음을 저자는 에피쿠로스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방대한 그리스인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리라. 평등에 기초한 우정, 우정에 기반한 행복.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바로 이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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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2 - 소포클레스에서 소크라테스까지
앙드레 보나르 지음, 김희균 옮김, 강대진 감수 / 책과함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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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치가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서 좋다. 어쩌면 문학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그리스인들의 전형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권 시작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으로부터 시작한다. 두 극단의 부딪힘. 그러나 안티고네로 대표되는 극단은 본성과 자연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고, 크레온으로 대변되는 극단은 인위와 개인의 욕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극단과 극단이 부딪히면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안티고네의 죽음, 크레온의 파멸. 그러나 둘 다 파멸에 처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안티고네는 칭송을 받는다. 크레온은 비난을 받고, 어떤 동정도 얻지 못한다.

 

이 극단적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 삶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나'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아무리 법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용납되지 않음을 처음 부분부터 보여주고 있다.

 

이런 법만을 따지는 개인의 욕망이 그리스를 쇠퇴로 이끌어갔다는 논지가 뒷부분에 나온다. 소송천국 그리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소송이 필요한 사회, 넘쳐나는 소송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생산적이 아닌 남들을 파멸시키는데 쓰게 된다.(소송 망국 아테나이. 416쪽)

 

결국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지고 마는데, 이 법의 맹신에 대해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작은 제목에 나오는 마지막 인물, 소크라테스다. 그는 공정한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에 이른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으며 신을 믿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법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법이 얼마나 잘못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너무도 많지 않은가. 또 아테네에서도 벌금으로 처벌을 면하는 제도가 있었듯이, 재판 따로 처벌 따로인 경우가 쇠퇴기에 넘쳐났는데, 우리나라 역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고 하여 온갖 보석들이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한 사회의 쇠퇴기에는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통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보다는 문자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온갖 해석가들이 나타나게 되고, 당시에는 이들이 소피스트라는 이름으로 등장했고, 요즘은 변호사 또는 브로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으니...

 

소포클레스에서 가장 중심에 두는 인물은 오이디푸스다. 이 책을 읽으며 왜 쿤데라가 '농담'이라는 소설에서 오이디푸스를 언급했는지 알겠다.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그것을 비껴가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간. 인간으로서 가장 고결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 오이디푸스. 왜 신들이 그에게 고난을 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그래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인간, 영원한 안식을 얻은 인간, 오이디푸스.

 

우리가 언제 자신이 한 행동에 걸맞는 대접만 받았던가. 내 호의가 악의를 유발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마다 억울해 하지 않았던가.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 하면서 변명만 하지 않았던가. 특히 정치인들, 오이디푸스처럼 왕이라는 자리에 있어 테베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인들이라면 자신에게 파국이 닥쳐오더라도 정면으로 맞서야 하지 않을까.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당당하게 나아가기. 책임지기. 다른 존재 탓하지 않기. 오로지 내게 주어진 일일 뿐.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나아간다. 그런 그를 그리스인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제시하는 이유는 그가 바로 뛰어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는 인간. 그 인간이 바로 오이디푸스이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인물들 말고도 이 책에서는 힙포크라테스를 다루고 있다. 의학을 발전시킨, 그의 의학 앞에서는 어떤 인간 차별도 없었음을 보여주는, 현대에도 의대를 나오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고 하는데, 돈이 아니라 병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런 의사의 모습. 그렇게 중요한 의사가 이 권에서 나오고,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나오기도 한다.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웃음으로 사회를 치유하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을 통해 당시 그리스 모습을 꼬집는다. 그는 웃음으로 흘려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사회를 개조하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성공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비극에서 희극으로 나아가고, 아테네는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그 쇠퇴의 정점에서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는 것,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아닐까 한다.

 

이제 3권으로 가야 한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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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1 1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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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1 15: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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