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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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 가지 재능을 갈고 닦았다. 그 재능이 신의 섭리로 주어진 것인지, 엄마의 강철 같은 세계 안에서 살면서 체득한 것인지, 아빠의 호신술 교육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내 신체 조건에서 비롯된 자연적 본능인지는 몰라도, 그건 전쟁터에서 위용을 떨치는 장군들의 자질과 유사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만족하지 않고, 계산에 능하고, 복수심을 품고, 차분하게 행동할 줄 아는 재능.    p.19

열여섯 소녀 리사는 어느 날 학교에 가던 길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감금된다. 그녀는 현재 임신 7개월에 접어든 상태로, 부모님은 그 동안 까맣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변호사인 엄마는 지난 몇 달간 재판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뉴욕 남부지법에서 보냈고, 해군 특수부대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빠는 유방암 치료에 관한 책을 의뢰 받아 한창 집필에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리사는 부모의 무관심을 탓할 생각도, 남자친구와 있었던 일에 대해 실수로 치부할 마음도 없었고, 임신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 당당한 소녀였다. 하지만 산부인과 진료 예약을 하루 앞둔 월요일,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고, 그들은 돈이나 리사가 아니라, 아기를 원했다. 몸값을 요구하는 흔한 유괴범으로 보이던 일당은 사실 임신한 소녀들을 납치해 출산 후 아기를 팔아넘기고 산모는 죽이는 인신매매범이자 살인범이었던 것이다.

리사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공포에 빠지는 대신 분노한다. 그리고 철저한 계산과 준비 하에 과학적으로 탈출 작전을 세우고, 그들에 대한 복수 계획을 치밀하게 짜기 시작한다. 보통 밀실에 혼자 갇혀 지내다 보면 무서워하고, 공황상태에 빠져 자포자기하거나, 두려움에 넋을 잃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말이다. 그것도 성인이 아니라 열여섯 소녀라는 점 때문에 리사라는 캐릭터는 더욱 놀랍다. 사실 리사는 평범한 십대 소녀는 아니었다. 소시오 패스로 불릴 정도의 감정 절제력과 한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는 고도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감금되어 있는 시간 동안의 여정을 머릿속에서 한 편의 영화처럼 세밀히 거익에 저장해두고, 감금 생활 내내 빠짐없이 돌려보면서 매분, 매초, 매 장면을 분석하고, 그 안에 어떤 실마리나 도구가 있는지 찾는다. 이 작품의 원제인 ‘Method 15/33’은 리사가 연필깎이에 붙여준 번호 ‘15’와 납치 33일째를 조합한, 리사만의 작전명이기도 하다.

십칠 년이 지난 지금, 내겐 좌우명이 생겼다. "무언가를 기다릴 땐 만반의 준비를 하라." 무언가 기다릴 때는 정말로 넋 놓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벽돌 한 장, 모르타르 한 겹, 또 벽돌 한 장, 이렇게 차근차근 피라미드를 쌓아가면서 목표물이 내게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요즘 나는 그 좌우명을 되새기면서, 내가 기다리는 목표는 반드시 실현된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그 어떤 의심이나 물리학 법칙, 심지어는 시간이 나를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p.124

현직 변호사인 섀넌 커크는 자신의 법적 지식을 활용, 합법적이면서도 잔인한 피해자의 복수 방식을 서술하며 위협적인 남성 가해자와 연약한 여성 피해자라는 범죄 소설의 틀을 과감하게 비틀었다. 덕분에 그녀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의 신기원을 마련했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무엇보다 스릴러 장르에서 전무후무한, 아주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탄생시켰다는 점에 있어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리사는 초등학교 1학년때 반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울지도, 펄쩍 뛰지도, 비명이나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침입자가 총을 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패닉에 빠진 선생님 대신 침착하게 경보를 울렸다. 그녀는 기쁨이나 무서움이나 사랑 같은 감정이 닥쳐오면 마음속에 있는 스위치로 그것을 끄거나 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납치당한 순간에도 이동시간을 계산하고, 지극히 한정된 풍경과 냄새, 소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며, 감금된 곳에 있는 몇 안 되는 도구들로 탈출 작전을 짜는 소녀 캐릭터라니 정말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연필깎이, 뜨개바늘, 담요 등등의 평범한 도구들이 어떻게 무기가 될 지를 지켜보는 과정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뀌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여타의 납치 스릴러의 공식을 깨버리는 작품이라 인상적이었다. 열여섯 살 소녀의 완벽한 복수극이 궁금하다면, 납치 스릴러의 온갖 클리셰를 부수고 전복하는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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