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소녀
세라 페카넨.그리어 헨드릭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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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바깥세상에 내보이는 건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허울이에요. 대부분의 사교적 만남에서는 가식적 대화만이 오가죠. 자신의 본모습, 뿌리 깊은 두려움, 숨어 있는 욕망까지 드러낼 만큼 누군가를 신뢰하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 친밀한 관계가 탄생한답니다. 당신은 오늘 나를 당신 안으로 맞아들였어요, 제시카.

당신의 비밀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거예요.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말이죠.   p.105

 

'뉴욕 시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가 진행하는 윤리 및 도덕성에 대한 연구에 참여할 18~32세 여성을 찾고 있습니다. 고액의 사례금 지급. 익명 보장.' , 당신이라면 이 실험에 참가할 의사가 있을까. 그럴 생각이 없다면, 돈 때문에 낯선 사람에게 가장 사적인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작품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심리 실험에 참여하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스물 여덟 제시카 패리스는 방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그 날도 예약 고객을 만나 메이크업을 하던 중이었다. 우연히 어떤 심리학 교수가 설문조사에 참여할 학생들을 모집했고, 설문지 작성 만으로 50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금액이면 제시카가 열 건을 뛰어야 벌 수 있는 돈이었고, 그녀는 형편이 어려웠다. 게다가 부모님 몰래 꽤 오랫 동안 여동생의 상담 치료 비용을 대고 있는 중이었다. 여동생은 외상성 뇌손상으로 인지 능력과 신체 능력에 문제가 생겨 치료가 필요했다. 결국 제시카는익명 보장사례금 지급이라는 조건에 이끌려 뉴욕대 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실즈 박사가 진행하는 심리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의 설문 조사는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당신의 양심의 가책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살면서 어떤 부정행위를 해봤는지 이야기해보세요. 안전한 대답을 하거나 겉핥기 식으로 대충 대답하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 없다. 아끼는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어떤 일을 비밀에 부친 적이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한 적은 언제였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사적인 비밀을 나누는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은 제시카를 알 수 없는 상황으로 계속 몰아넣게 된다.

 

 

 

 

누구나 비밀스러운 회한을 안고 살아가지요. 거리에서 보는 타인들, 이웃들, 동료들, 친구들,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끊임없이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어떤 선택은 사소하지만, 어떤 선택은 인생을 바꿔놓기도 하죠.

...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년 후에도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선택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를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그때가 언제일지를 궁금해하지요.    p.326~327

 

도덕성을 시험하는 문제는 사실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받아야 할 금액보다 더 많이 받았을 때 당신은 그것을 되돌려 주는가. 버스에서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적어서 사람들에게 돌리며 돈을 구걸하는 이가 있을 때, 당신은 그를 외면하지 않는가. 급박한 현장에서 만약 나 하나만 희생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극 중 실즈 박사는 '돈과 도덕성이 교차할 때 인격에 관한 흥미진진한 진실이 밝혀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원초적 이유로 도덕적 기준을 어기곤 한다. 생존, 증오, 사랑, 시기심, 치정, 그리고 돈. 제시카의 솔직한 답변은 실즈 박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급기야 ‘52번 피험자가 아닌제시카한 명을 위한 실험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실즈 박사의 이해할 수 없는 요구와 지시들이 이어지고, 그와 비례해 보상과 선물, 자상한 심리적 배려도 점점 커져가지만 제시카의 일상은 점점 그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렇게 실험과 현실의 경계는 흐려지고, 제시카는 점점 더 실즈 박사에게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 사이의 그녀>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그리어 헨드릭스와 세라 페카넨의 신작이다. 영화화가 확정된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도 출간 전에 드라마 판권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시종일관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유발시키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불안과 공포를 만들어 내며 거듭되는 반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었던 전작만큼이나 <익명의 소녀>도 매혹적인 심리 스릴러이다. 제시카를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실즈 박사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어 독자 역시 극중 제시카처럼 불안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중반 즈음 드디어 실즈 박사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지만, 동기를 알았음에도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 점점 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불안하고 외롭고 의문에 시달리는 제시카의 복잡한 심리 묘사와 교차로 진행되는 실즈 박사의 감정 묘사가 굉장히 섬뜩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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