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다른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9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내가 진짜 나라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지?”

“당연히 알 수 있지.”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나를 닮은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욕실에 들어가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기도 하고 거실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그게 나라는 걸 미양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다시 물었다.    p.58

아내는 처음에 남편에게 단순한 건망증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부터 물건을 어디다 뒀는지 잊어 버리거나, 약속을 잊고 다른 약속을 잡는다거나 하는 등 자주 무언가를 잊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외출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 아무리 찾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했는데, 데리고 산책을 나가려고 했는데 '우리 개'가 보이지 않는다며 혹시 당신이 데리고 나간 거냐고 묻는다. 하지만 개라니, 어떻게 그걸 잃어버렸다는 걸까. 애당초 키운 적도 없는 그것을 남편은 대체 어디서 찾겠다는 걸까. 게다가 아내는 종종 자신의 남편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얼마 전 시내에서 그를 마주친 날 아내는 집에서 남편에게 종일 연구실에만 있었냐고 묻지만, 그는 당연한 듯이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누구보다 남편을 믿고 있다고 자신했던 아내는 점점 불안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홀수 장이 아내의 시선으로 남편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짝수 장은 남편의 시선으로 아내의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물론 교차 진행되는 이 이야기 속 부부는 서로 완전히 다른 커플이다. 소설가인 나는 아내와 취향도 성격도 달라 자주 다투곤 한다. 별 것 아닌 작은 다툼이 큰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금세 미안해하고 화해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휴대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다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며 나에게 보여준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실린 남편을 찾는다는 게시글이었는데, 그곳에 올려져 있는 사진 속 남자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도 닮아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도 사람들이 자신과 닮은 사람을 여기저기에서 목격했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던 터라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려니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내가 있지도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면, 어딘가에 정말 나를 닮은, 혹은 나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쓰는 나와 어딘가 닮은 데가 많았다. 그럼에도 결국 나와는 다른 타인이었다. 나는 내가 가보지 못한 어떤 곳으로 그들을 보내기도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다음에는 무슨 행동을 할지, 무엇을 바라는지 등을 오래 추론하고 고민해보았다. 그들을 이해해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그럼에도 그것도 다 소설이지 않나. 픽션, 허구, 거짓말이라고, 그거 어차피 다 지어낸 거라고.    p.111~112

아내는 개를 잃어 버렸다고 믿고 있는 남편을 위해 강아지를 새로 구해 집으로 데려오지만, 남편은 이건 우리 개가 아니라며, 대체 우리 개는 어디 있냐고,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처음부터 그들은 개를 키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내는 낮에 연구실로 전화를 했는데, 왜 거기 사람들이 아무도 당신을 모르냐고, 대체 나한테 뭘 숨기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에게 왜 약을 먹지 않느냐고, 당신은 아픈 사람이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모두 다 소설 속 이야기일 뿐, 그냥 당신이 그렇다고 믿는 이야기들일 뿐이라고 말이다. 대체 어느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어느 쪽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한편 소설가인 나는 게시판에 올려진 글의 내용이 자신이 쓴 소설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라, 그 여자에게 연락해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정작 찾아간 여자의 집에서 나를 남편처럼 대하는 여자를 마주하고 충격에 빠지고 만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점점 무너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증명해내야 하는 것일까.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 신작 시와 소설을 수록하는 월간 『현대문학』의 특집 지면 <현대문학 핀 시리즈>가 벌써 열아홉 번째 작품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2019년 『현대문학』 1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것으로,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 이후 임현이 두 번째로 발표하는 책이다.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부터 무너져가는 결혼생활과 마침내 내가 아닌 나의 삶과 만나는 순간 겪게 되는 정체성의 붕괴를 촘촘히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짧은 분량이지만 여러 번 다시 되돌아가 읽게 만든다. 삶과 허구,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신빙성의 우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서로 경계를 모르고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작품은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