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소설가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서 인용한 데이비드 실즈의 말이다.

잘츠부르크의 소금 광산 깊은 곳에 겨울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던져둔 후 두세 달이 지나 꺼내 보면 그것들은결정들로 반짝인다. (중략) 나뭇가지의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란 힘들다. 내가 결정화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하는대상의 모든 모습에서 새로운 장점을 끌어내려는 영혼의 작용이다. 스탕달 ‘연애론’

this is my answer: not that I loved Caesar less, but that Iloved Rome more.
이것이 내 대답이오. 내가 시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연발하다 한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란의 소설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무덤 앞이었다. 그의 소설 《눈먼 부엉이》의 인상적인 첫 문장이 생각났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없다. 타인들은 결코 그런 고통을 믿지 못하고 정신 나간이야기로 치부할 뿐이다. 만약 누군가 그 고통에 대해서 묘사하거나 언급이라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남들의 태도를 따라서, 혹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의심 섞인경멸의 웃음을 지으며 무시해버리려고 한다. 아직 인간은그런 고통을 치유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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