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서평]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저, 안규남 역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을 읽고 / 2013. 08., 123쪽, 동녘

이 책은 공부모임 선정 도서인데, 제목부터가 한국사회에서도 필요한 문제제기라 생각이 들어 흔쾌히 주문한 것이다. 얇은 책 두께도 선택에 한 몫..ㅎ

왜 사람들은 불평등을 감수할까? 저자는 불평등을 감수하는 사회적 원인을 따져 보고 이런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려 한다.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은 공동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고, 저소득층은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지옥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사회적 기회는 기득권자들이 독식하며 양극화의 심화와 승자독식이라는 불평등은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되었다.

정치적,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이 점점 더 심화되는 21세기 한국사회 그리고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지구촌은 저자의 말처럼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라는 저자의 말이 실감나는 현실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의 불평등은 이전의 불평등과 질적으로 다르다. ‘20 대 80의 사회’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다. 오늘날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다. ‘0.1 대 99.9’의 사회라고 말해야 더 정확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돌연변이다. 질적으로 다른 사회적 종의 출현이다.
그런데도 언론과 학자, 전문가들의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없고, 불평등의 찬가, 현실 긍정의 찬가가 유행한다. 우리는 애써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마트에 가서 웃으며 물건을 사고 백화점에서 대기업이 유혹하는 상품을 바구니에 담기에 바쁘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불평등’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쇼핑을 하고 웃고 떠든다.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불평등을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된 일인가?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왜 불평등에 동의하는가?

저자는 이 기이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는 계층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그 대표적인 새빨간 거짓말 4가지를 바우만은 이렇게 제시한다.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가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왜 우리는 이런 거짓말에 속고 있을까? 바우만은 이 책 3장에서 왜 우리가 이런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면밀히 검토한다.

그렇다고 거짓 믿음들을 버리기만 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조화된 현실의 힘, ‘운명’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거짓 믿음에 근거한 잘못된 선택이 바로 우리를 옥죄는 구조화된 현실을 만들고 공고히 하는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하고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패배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바우만은 말한다.

"패배했다는 것이 임박한 파국에 맞서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무지 그리고/또는 무시로 인해 승리가 저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p.112)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에서 미국이 "부자들은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에 살면서 자녀들을 값비싼 사립학교에 보내고 최고의 의료 혜택을 받는 반면에, 나머지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기껏해야 보통 수준의 교육과 배급제와 다름없는 의료 서비스를 받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한 것처럼, 한국사회의 부자들 역시 ‘영훈국제중학교’ 입시 비리 사건에서 보았듯이 온갖 탈법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쌓아가기에 바쁘다.
최근 '부자감세'와 과태료 과잉징수, 폐지 노인들에 대한 과세와 ‘부유세’ 등의 논란 속에서도 1퍼센트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나머지 다수의 약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이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p.59)

컵을 피라미드같이 쌓아놓고 위에서 물을 부으면 제일 위의 컵에 물이 다 찬 뒤에 그 아래에 있는 컵으로 물이 넘치게 된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수도권을 우선 지원하여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 지방에 돌아간다는 주장이 바로 낙수효과(Trickle Down)이다.
이런 논리라면 역사는 기득권이 영원히 보존되는 형국이 될 것이며, 아마 기득권자들은 이런 세상이 영구화되길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꼰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p.22)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 ‘낙수효과’는 정부가 경제정책을 대기업 중심으로 가져가는 데 주요 근거가 됐다. 정부가 감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늘려주면 결국 총체적인 국가의 경기를 자극해 경제발전과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1990년 초 미국에서 시행된 이런 정책은 이미 폐기된 지가 오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2013년 들어서도 여전히 이런 잘못된 믿음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아니 시민들은 점점 그 효과를 의심하는 데 반해, 정부와 여당 그리고 어용방송과 보수(극우)언론은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선전하고 세뇌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전면적 경제 시스템 교체 없이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 ‘경제민주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는 요즘 '철도 민영화'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지금 정부의 눈길은 온통 민영화에 쏠려 있다. 정부와 여당은 공개적으로는 '민영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민영화를 추진할 생각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방만하기만 하고 인건비만 더 투입되는 철도공사의 자회사를 만들어 흑자 노선인 KTX를 분리시키려 할까? 왜 의료법인의 자회사가 영리사업이 가능하도록 만들려 하는가?
이러한 정책은 스티글리츠가 <불평등의 대가>에서 지적한 것처럼 또 다른 불평등을 낳을 것이고 우리는 결국 다시 좌절의 늪에 빠질 것이다.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가 우리들의 시선을 끈 것은 그가 언급한 미국의 불평등한 현실에 못지않게 한국의 불평등 정도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이 책에서 “모든 불평등은 시장의 정치적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나고 이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바우만은 사회학자답게 정치나 경제적인 측면 외에 더 나아가 한 사회적인 상황도 주목한다.

"사회적 비용이 큰 선택일수록 선택될 확률이 낮다. 그리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고분고분히 선택할 때 받게 되는 보상처럼 압력을 받고 있는 선택을 거부할 때 드는 비용도 주로 사회적 용인, 지위, 위신이라는 소중한 통화로 지불된다.
우리 사회에서 이 비용들은 불평등과 불평등의 공적, 사적 결과들에 대한 저항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저항하기보다는 체념하고 얌전히 굴복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시도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정된다.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소비자 사회의 주민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서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다."(p.41)

바우만은 이렇게 우리가 불평등을 감수하는 사회적 원인을 밝힌 뒤, 이런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p.113~114)

저자는 이 책에서 섣불리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쉽게 현실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어떤 식으로건 문제를 회피하지 말 것! 그리고, 손쉽게 타협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유하라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나는 저자의 제안대로 '사유'만 해서는 이 사회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사유'와 '실천'이 병행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상승작용을 하지 않으면 한국사회의 미래를 없을 것이다.

[ 2013년 12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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