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 흠흠신서로 읽은 다산의 정의론
김호 지음 / 책문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 김호 저 <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 [흠흠신서]로 읽은 다산의 정의론>을 읽고 / 2013. 5., 360쪽, 책문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당 5억'이라는 충격적인 이름으로 '만민평등'이라는 민주주의를 웃음거리로 만든 법원의 판결이 크게 논란이 되었다. 법과 법관이 형벌의 형평성 원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400억원대의 벌금·세금을 내지 않고 출국한 뒤 뉴질랜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는 모습이 포착된 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의 구치소 노역 ‘일당’을 5억원으로 정하는 등 법원이 ‘솜방망이’ 처벌을 한 것은 ‘전관예우’와 지역법관(향판)제의 문제점이 맞물려 가능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2008년 12월30일 광주지법 형사2부는 허 전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508억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법관의 재량으로 형을 덜어주는 ‘작량감경’을 적용해 검찰이 구형한 벌금 1016억원을 절반으로 깎았다. 벌금 508억원을 내지 않을 경우 일당을 2억5000만원으로 계산해 203일 동안 구치소에서 일하게 했다."(관련기사 : "‘먹튀 회장님’ 노역 일당 5억 판결은 전관예우·향판제의 합작품"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9212.html)

신문기사는 '전관예우와 향판제'로 인해 '황제 노역'이 가능했다고 분석하지만, 허재호와 장병주 사이에 발생한 '법의 균형 상실'은 이미 과거에도 숱하게 발생한 바 있다. "벌금 1100억 원을 선고받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하루 일당은 1억 1천만 원, 그리고 손길승 SK 명예회장은 벌금 400억원을 선고받았는데, 실제 노역비는 하루 1억 원이었습니다."(관련기사 : http://www.ytn.co.kr/_ln/0103_201403241135161476)

실제로 한국사회는 80년대 후반 헌법이 개정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래 사법부의 '균형감을 상실한 판결'을 수차례 목도하여 왔고, 사법부가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헌법을 임의대로 '해석'하면서 주권자들의 사법권력에 대한 불신을 키워 왔다. 주권자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인 셈이다.

물론 공공부서나 공직자의 '무소불위'와 '전횡'이라는 문제점은 사법부 뿐만은 아니다. 청와대, 경찰, 검찰, 국방부, 법원 등 주권자인 국민을 보호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 공공기관이 오히려 불의와 불법에 앞장서는 최근 몇 년을 겪으면서 이 책을 읽으니 대한민국의 공권력과 사법체계는 조선왕조보다 못한 것 같다.
"조선 왕조체제와 대한민국 체제는 껍데기만 다른 착취수탈 체제'라는 어떤 학자의 분석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법률을 채택한 대한민국의 현재가 왕조와 사대부 세력이 갈등, 공존하며 지배세력을 형성했던 조선시대보다 나은 면이 있기나 할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인 1822년, 현대인들에게 '시대의 선각자'라 불리우는 다산 정약용은 백성들이 소송을 통해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촌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려고 해도, 그 일이 권세 있는 아전이나 간악한 향리와 관련되어 있을 경우에 노여움을 살까 봐 겁이 나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한결같이 앞뒤가 맞지 않게 들리니,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게 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다산이 보기에 스스로 억울함을 말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어디가 아픈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병든 아이와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의 호소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산은 소송을 통해서도 제대로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백성들을 위해 형법서 한 권을 남겼는데 그게 바로 [흠흠신서]다. 
인명에 관한 일은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뜻에서 ‘흠흠신서’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책은, 다산이 지방관들을 위해 중국과 조선의 법전들과 재판 때 쓰던 조서 등을 모으고 정리한 뒤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만든 일종의 형법 참고서라 할 수 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다산이 제시한 원칙과 방법으로라도 조선의 형법체계가 구성, 운영되었다면 조선 후기의 비극적인 상황이 변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산이 이런 형법서를 편찬했다고 해서 다산의 생각과 원칙대로 조선시대의 형법이 운영된 것은 아니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조선시대 후기에 대한 주된 평가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표현되듯이 다산이 살았던 시대 전후로, 특히 19세기에는 조선의 국가 운영체제 자체가 기득권자들만의 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기에 그에 따른 민중(백성)들의 저항과 민란이 19세기 내내 끊이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다산이 [흠흠신서]에서 문제제기하는 여러 재판이나 형벌집행을 보면, 조선시대 후기에는 친분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관용을 남발하거나 사적인 감정이나 신분질서에 근거하여 엄한 형벌을 내리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검찰과 법원, 그리고 정치권과 재계와 언론과 학계가 결탁하는 모습은 19세기 초 조선왕조의 사법관리들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이다. 
저자가 풀이한 다산의 [흠흠신서]는 형법의 원리나 원칙의 측면에서 근대 사상과 일대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산의 사상은 토지와 권력을 소유하는 왕조-사대부 계급과 그들의 소유물이자 지배를 받는 평민-하층민이라는 지배-피지배 권력체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산은 "법의 수단에 기대기보다 덕의 교화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성리학적 유교이념의 원리"에 입각한 형법체계를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흠음신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의미있는 책이라 할 수있다.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주권자의 권력을 위임받아 일시적으로 행사하는 사법부와 검찰, 경찰의 일상적인 부정부패와 정치권과 재계의 전횡과 부정부패, 그리고 이를 감시, 감독, 비판하지 못하고 오히려 결탁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의 모습은 19세기 조선 왕조, 부패기득권 체제의 부활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서문에 [흠흠신서]를 번역한 저자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아져야 가능한 일이요,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는 행동이 늘어나야 가능하다. 다산의 절절한 마음이 오늘날까지 울리는 이유는 우리 모두 공정한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폭력과 불의에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면, 다산이 정의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다산은 백성들을 보살펴야 할 관리들이 이 땅에 진정한 정의의 마중물을 부어 주길 바랐다. 정의가 흐릿해지고 금권이 판을 치는 요즘 세상을 보면, 그가 꿈꾼 정의와 정의로운 나라의 모형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듯하다."

적어도 사법고시나 로스쿨을 졸업하여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다산의 [흠흠신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이익보다 헌법과 정의와 양심을 되찾기를 바란다.
이 말은 검찰과 형사법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스스로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법조인이라고 주창하는 이들 중에서도 사적 감정이나 편견에 무릅을 꿇고 양심과 근거를 멀리하면서 정치논리나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조인들이 서로의 잘못과 실수를 감싸고 자신들만의 성을 쌓으려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이 법조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존중받으려면 '법조인'으로 대우하고 존중하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전문권력을 위임한 주권자들 편에 서야 할 것이다.

[ 2014년 4월 08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