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죽이기
강준만 / 개마고원 / 1995년 11월
평점 :
절판


추천 [서평] 강준만 저 <전라도 죽이기>(1995.11, 376쪽, 개마고원)

이 책은 1995년 중순 출판계 뿐 아니라 정치권에게까지 큰 화제가 되었던 강준만 교수의 역작입니다. <김대중 죽이기>와 더불어 강 교수의 책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지역주의, 지역감정,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와 논란이 있었고, 많은 국민들이 박정희-전두환-김영삼 독재정권의 고의적인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실체를 알게되었습니다.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죠.

서평을 쓰기 전에 먼저 지적할 게 있습니다.
이 책은 이미 서점가에서 절판된 책입니다. 중고책도 별로 나오지 않아 책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것은 전국의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기도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급적 비싸더라도 책을 직접 구입하는 편입니다. 책 값이 아무리 비싸더라도 음식값이나 술값, 휘발류값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고, 출판계의 어려움도 이미 아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새책이 없으면 중고책을 찾고, 중고서점에도 없으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습니다. <제국의 슬픔>이 대표적이었죠.

1990년대 후반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책이면, 당연히 전국의 도서관에 충분히 비치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도서관에서 찾기가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음모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 상식과 이성, 양심과 합리성이 실종된 대한민국입니다.

이 책은 제가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해온 지역감정과 지역주의 정치의 뿌리와 근본적인 문제점, 해결방안을 이번에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한반도 남단에 '지역차별' '지역감정' 그리고 '지역패권주의'를 창조(?)한 것은 박정희 일당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밀리자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불법부정선거로 당선된 이후 그리고 1972년 유신쿠테타를 일으킨 이후 본격적으로 지역차별 정책을 강행하여 남한의 주권자들을 동서로 갈라놓았습니다.

"1971년 이전에는 적어도 지역감정이 정치적 이념을 능가할 만큼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1971년 이후 16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지역감정이 전국적으로 득세할 수 있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역감정의 격화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 시기에 지역패권주의가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고, 지역감정의 격화는 지역패권주의의 당연한 결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지역패권주의가 등장하여 자기 목적을 위해 지역갈등을 유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역패권주의자들의 교언과 요설에 현혹되어 이를 과거의 지역감정의 연장선상에사 이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음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처럼 지역 감정 자체는 정치적 행위와는 직접적 관게가 없고, 다만 개인적으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에 적용되는 것인데, 여기에 지역패권주의자가 자기 목적을 위해 지역감정을 지역패권주의의 무기로 활용함으로써 지역갈등을 극대화하고, 이로 인해 정치적 이슈가 지역감정에 함몰되어 결국 지역패권주의 정권의 계속 집권이 가능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지역감정도 지역패권주의의 중요한 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p.46)

우리는 보통 지역차별이나 지역패권주의을 정치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술수' 정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너무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 당연시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를 무시하게 되죠. 하지만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에 대한 일화를 통해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가 어떻게 작동하여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야말로 오늘날 가장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그 지긋지긋한 지역갈등을 낳게 된 근본 원인 중의 하나다. 경부고속도로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일의 선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가 지역불균형 발전의 악순환을 낳게 했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의 재판이라 할 경부고속전철이 추진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노태우 정권 당시 야당이 고속전철 건설을 반대하자 노태우는 '고속도로 놓을 때 반대했죠. 어떻게 됐나 봅시다. 고속전철 놓는 걸 반대하면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태우는 박정희 정권 때 야당이 고속도로를 반대한 이유를 전혀 몰랐다. 당시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었다.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은 좋다. 그러나 순서가 잘못됐다. 먼저 국도를 전부 포장해 물동량이 전국에 걸쳐 자유롭게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러고도 지나치게 몰린 구역이 있을 때 거기서부터 고속도로를 놓자'고 주장했다.
'국도 포장율이 40%가 안 되는 상태에서 서울과 부산 간에 고속도로를 놓으니 모든 물동량이 경부축에만 몰리고 지역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리고 부산, 울산 등 영남지역도 공해와 교통난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았냐?'는 야당의 주장에 대해 노태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고속전철을 논의하던 노태우 김영상 정권 당시 호남선, 전라선은 철도 복선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호남선 복선화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와 동시에 완공했고, 전라선은 2010년에 순천까지 복선화되었다.)
대신 '고속전철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먼저 뚫고, 경부고속도로를 하나 더 만들라'고 충고했다. 경제는 총량이 아무리 늘어나도 배분이 잘못되고 지역불균형, 교통, 공해문제 등 부작용이 유발되면 건전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경부고속도로나 경부고속전철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필시 경제적 입지조건을 들고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미국과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마당에 경제적 입지조건이 호남, 충청, 경기보다는 영남이 유리하니 전체 국익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지역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돈으로 따질 가치도 없단 말인가?
도로와 철도에 있어서의 차별은 일단 그것이 저질러지면 나중에 차별이 자연스럽게 '시장기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아주 악질적인 차별이다. 고속전철에 있어서도 상식 이하의 호남차별이 지금까지 대담하게 저질러지고 있는 이유도 교통체계에 의한 차별이 갖는 매력을 영남패권주의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p.48~49)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과 같은 방식으로 지역차별적인 경제정책을 차별적으로 집행해 놓은 경우가 태반입니다. 울산, 구미, 창원 공업단지와 항만 등이 대표적이죠.
그렇게 저질러 놓고 나중에는 기존에 저질러 놓은 시설과 구조를 이유로 '경쟁력' 운운하면서 더 많은 세금을 쏟아붓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이후에는 세금을 쏟아붓지 않아도 경제논리, 시장논리로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이 작동하는 것이죠.

책장을 넘길수록 지역주의 정치의 근원, 정치적 의도,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 등이 단순히 지역주의 정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 계급계층적 배제와 차별에도 뿌리깊게 작동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발간된 1995년 이후 거의 20여년이 지난 현재는 지역차별이나 지역패권주의가 줄어들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997년 말 IMF 사태와 2008년 국제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지역차별 구도는 '경부축 : 비경부축'과 '영남 : 호남'에 더하여 '수도권 : 비수도권'이라는 구도까지 확대되었고, 특히 후자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이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지역은 '경부축 : 비경부축'과 '영남 : 호남'에 더하여 '수도권 : 비수도권'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지역차별 또는 지역패권주의는 다양하게 작동합니다. 정치 행정 법조 언론 학계 기업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인맥을 구성하는 세력들의 움직임에서 가장 큽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들어선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지역패권주의가 인맥을 통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장 최근의 주요 직책과 출신지역을 통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김기춘(거제) 청와대 비서실장, 정의화(창원) 국회의장, 양승태(부산) 대법원장, 조희대(경북경주) 대법관, 김진태(경남사천) 검찰총장, 박한철(부산) 헌법재판소소장, 박 만(경북구미) 방송통신위원장, 황찬현(경남마산) 감사원장, 유영익(경남진주) 국사편찬위원장, 강신명(경남합천) 서울지방경찰청장, 최동해(대구) 경기지방경찰청장, 김규석(경북)댓글담당 현국정원3차장, 이정회(대구)새 댓글수사팀장, 조영곤(경북영천)서울지검장 악어눈물검사, 김석기(경북경주) 전서울지방경찰청장-용산참사지휘-공항공사사장, 김용판(대구) 전서울지방경찰청장-국정원수사 은폐엄폐조작 무죄...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민주정부'는 지역감정과 지역주의 정치를 해소하려는 나름의 노력을 다했습니다만, 그런 노력은 사회구성원 전체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였고, 이명박 정권 들어서부터 오히려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 기사 : "국세청 고위공무원 41.2%가 대구경북 출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17992)
"고위공직자 영남비중 36%…지역편중"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3/06/03/0505000000AKR20130603073000001.HTML

강준만 교수가 '전라도 죽이기' 즉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제시하는 방향도 적절하고 공감이 됩니다. 즉 전라도에 대한 차별은 '호남인'만의 차별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지역차별, 소수자에 대한 차별, 약자에 대한 차별의 연장선 상에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강준만 교수에 대한 존경이 조금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그의 태도 중 하나가 바로 '차별에 대한 저항'이고 '불의한 정치에 대한 질타'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머리말 제목을 "때로 정치는 양심을 강간한다."로 달았습니다.
원래 정치(政治)라는 단어는 인간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사회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목적으로 하는 여러가지 대상 중 '권력'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을 때 정치는 양심을 강간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는 양심 뿐 아니라 사실, 진실, 정의, 자유, 평등 등 인류사회가 만들어낸 소중한 가치들을 '강간'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입니다.

"충청도와 강원도는 분명 '차별'을 받아온 지역이다. 앞으로 호남인들을 차별받는다고 말을 할 때엔 반드시 충청도와 강원도 사람들을 끌어안고 들어가라. 어디 충청도와 강원도뿐이랴. 제주도, 경기도, 경상도, 아니 서울까지 포함해 모든 지역의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하라. 그 점을 명심하지 않고선 호남인들의 차별을 척결하기 위한 투쟁은 그 투쟁에 동참할 수 있는 막강한 동지들을 오히려 적으로 만드는 지금과 같은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호남인만 사람이 아니다."(p.213)


[ 인상깊은 문장 ]

"나의 적은 오로지 차별일 뿐이다. 나는 모든 차별에 저항한다. 지역차별에, 학력차별에, 신세차별에, 남녀차별에, 빈부차별에 저항한다.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차별은 꼭 척결되어야 한다." (p.08)

"고문보다 더 무서운 건 부드러운 세뇌다. 우리 국민은 60년 넘게 각종 세뇌교육을 받아왔다. 밥상머리 교육에서부터 텔레비전 교육에 이르기까지..." (p.33)

"한국대학에 패거리는 있어도 지식인은 없다. 그걸 정확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식인의 위선과 기만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지식인이라고 부를 만한 특별한 사람은 없으며, 지식이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지식인일 뿐이다" (p.140)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투쟁은 모든 차별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인권의 문제라는 말이다. 예컨대 여성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그 투쟁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지역차별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p.143)

"선생님이 전라도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전라도 사람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전라도 사람을 증오하는 선생님의 '죄'를 보기 때문이며, 선생님의 떳떳지 못한 양심이 그것을 견딜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p.180)

"한 아이가 돌을 던지면 다른 아이들도 돌을 던진다. 돌을 던져 놓고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인지 돌 맞은 대상은 돌을 맞을 만하다는 자기기만을 일삼는다. 그것이 바로 남들을 따라 '지역차별'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보다." (p.255)

"호남차별 심리에 물들어 있는 보통사람들이 호남의 몰표를 비웃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심리를 이해는 한다 해도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지역감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지식인이 호남 몰표를 호남인의 바람직하지 못한 대응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 87년 선거시 광주학살 주범과 무관하지 않은 노태우 후보에게 표를 많이 주지 못한 게 호남사람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92년 선거시 광주학살 주범들과 합당해 후보로 나선 김영삼에게 표를 많이 주지 못한 게 호남사람들의 잘못인가?"(p.258)

"순도 100%의 도덕성을 강조하겠다면, 인권유린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군사정권 치하에서 무난히 살았다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일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 자학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독재자들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우리 정치판에 대해 좀 더 깊은 역사적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p.373)

[ 2014년 8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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