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내 삶에서 유일하게 소설 같았던 시절이지. - P14
* 1869년 이전까지 프랑스 제2제정의 의회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일당독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860년대 말부터 의회는 황제와 그 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된다. 1869년 5, 6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정부파인 보나파르트파는 정통파와 온건파로 양분되었으며 반정부파는 총 292석 중 71석(구왕당파가 41석, 공화파가 30석)을얻는 데 그쳤지만 이전에 비한다면 그 자체로 선전이었으며, 특히 총 득표수에서는 보나파르트파에 크게 밀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도시에서 대약진을 했다. - P19
그가 그런 식으로 고통을 가하면서 그녀의 몸속에 밀어넣고 싶은 것은 바로 자신의 의지였다. - P49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끔찍하리만치 비통한 이 밤에 갇혀 두 처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 P50
그는 극미그리량의 알코올에도 자신이 미쳐버린다는 것을 잘 알기에 단 한 잔의 술갔다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술을 마셨던 그의 아버지 대, 할아버지 대, 그 술주정뱅이 가계로부터 자신이 나쁜 피를, 서서히 진행되는 중독성을, 여자를 잡아먹는 늑대 무리에 자신을끌어넣어 깊은 숲속으로 몰고 가는 야만성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 P86
전속력으로 달리는 기관차 바퀴의 격렬한 진동에 몸을 실었을 때, 신호등을 주시하며 선로를 살피느라 정신을 집중하면서 역전기逆轉機 핸들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비로소 그는 무념무상이 되어 폭풍우 소리를 내며 무섭게스쳐가는 맑은 대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실 수 있었다. 그가 마음에위안을 주는 애인과 진배없이 자기 기관차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가 기관차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오직 행복이었다. 그가 직업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머리가 똑똑한데도 기관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던 것은 고독과 황홀 속에서 살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별다른 야심도 없어서 사 년 만에 일등기관사의 자리에 올라 일찌감치 2800프랑의 본봉에 화차 관리와 정비 수당까지 합쳐4천 프랑이 넘는 수입을 올리면서도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 P88
어떤여자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 즉시 그 여자를 덮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압도적인 침묵과 끝 모를 고독감이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면서 사람 하나 마주치는 일 없이 계속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황량한 고장처럼 적막하고 인적 없는 삶을 동경하도록 이끌었다. - P91
루앙의 검찰청 검사가 전직 법관이 희생자로 발견된 이 석연치 않은 참극에 지레 겁을 먹고 머리를 굴려 장관에게 사건을 이첩했고, 장관은 그것을 다시 자신의 사무처장에게 넘기고 자기는 손을 털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인연이 있었다. 카미라모트는바로 그랑모랭 법원장의 동창이었다. 그랑모보다 몇 살 아래인 그는그랑모랭과 막역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여서 그랑모랭에 대해서라면그의 비행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 P142
예심판사는 자신으로서는 무모하게 덤비지 않는 것이 상책이며, 사전 승인없이는 어떠한 것도 감행하지 말아야 처신에 이롭겠다는 것을 간파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무처장 역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본부 차원에서 수사관들을 가동시켰다는 확신을 안고 루앙으로 돌아왔다. 세상이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필요한 경우 그 진실을 보다 효과적으로은폐하기 위해서였다. - P142
그는 자기가 왜 법무부가 아니라 사무처장의 개인 거주지로 불려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요컨대, 사무처장이 잔뜩 굳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드니제가 결론을 지었다. "우리가 꽤 골치 아픈 사건을 다루게 될 거란 말입니다." 카미라모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다른 경우의 재판, 곧 루보 부부의 재판 결과를 따져보고 있었다. 만일 남편이 중죄재판소에 선다면그자가 다 불고 말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자기 부인 역시처넛적부터 꾐에 빠졌고 이후에는 간통을 일삼았다는 점, 그리고 자기는 질투에 눈이 멀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등을 까발릴것이다. 이 사건이 더이상 한 하녀와 한 전과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고, 그 예쁜 여자와 결혼한 철도원이 부르주아계급과철도 분야의 일각을 완전히 와해시켜버릴 것이라는 점은 일단 논외로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법원장과 같은 인물을 기화로무엇을 더 능멸하게 될지 어찌 알겠는가? 어쩌면 사람들은 예측하지못한 혐오감에 빠져 동요할지도 모른다. 안 된다. 결단코 안 된다. - P207
그녀는 그에게 이제 말할 테면 해보라고 다그친 것이다. 그녀가 그의 것이 되었듯이 그는 그녀의 것이 되었다. 고백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앞으로 날 힘들게 하지 마요, 당신은 나를 믿지요?" "그래요. 당신을 믿어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P218
"알다시피 나는 당신 친구이고 당신은 나를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없어요."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나는 당신의 일을 알고싶지 않아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될 거예요…… 내 말 알겠어요? 나는 전적으로 당신 거예요. 당신 마음대로 해도 돼요." - P219
그때부터 두 사람은 둘만의 화젯거리를 갖게 되었는데, 일종의 우정의 공모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그 상황에서 그들은 마침내 눈짓만으로도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방문할 때마다 그는 그녀에게 눈짓으로 그동안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기지는 않았는지물었다. 그녀도 같은 식으로 살짝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손은 남편의 등뒤에서 서로의 손을 갈구했고 그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그들은 오랫동안 손을 꼭 쥐는 것으로 감정을 전달했으며, 상대방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아주 소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관심을 따뜻한 손가락 끝으로 전하며, 서로 묻고 답했다. - P252
그녀가 자크에게 반한 것은, 그녀가그의 손을 살그머니 쥐었을 때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함부로 더듬지않는 것을 보고 실감했던 그의 그 부드러움, 그 온순함 때문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그녀는 사랑을 느꼈다. 그래서 절대로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전의 두 남자에게 몸을 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 남자에게 순순히 몸을 준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랑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무의식적인 욕망은 지극히 달콤한이 기분을 영원히 연장하는 것, 더럽혀지기 전의 새파란 젊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좋은 남자친구를 사귀어 열다섯 살 때 그러듯 문 뒤에서입술을 고스란히 내주고 깊은 포옹을 하는 것이었다. - P257
그렇게될 운명이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는 창고 지붕 위로 더욱 거세게퍼부었고, 역으로 들어가는 파리발 마지막 열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평음을 내고 지축을 뒤흔들며 지나갔다. - P266
"오, 내 사랑, 날 가져, 날 지켜줘, 난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게. "무슨 소리! 아니야, 내 사랑, 당신이 주인이야, 난 당신을 사랑하고당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야." - P268
그들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상태, 서로 어루만지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첫사랑의 그 두근거리는 순결함을 간직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헌신에 더 덕을보았다고 공을 돌리는 이른바 순종順從 싸움이라는 것이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저주스러운 자신의 유전 질환이 고쳐졌다고 생각했고, 그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P272
그녀는 오로지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그런사랑의 피조물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그를 부여안고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면 상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미친 듯한 욕정이 다시그들을 휘몰아쳤고, 때때로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품에 안겨 한참 동안 혼절해 있기도 했다. - P273
기관차와 객차는 이미 반쯤 눈에 뒤덮여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태세였다. 그 위로 이 새하얀 허허벌판의 전율하는 적막이 내리눌렀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은 그렇게 하얀 수의를 짜서 세상을 뒤덮었다. - P304
그녀는항상 다른 사람을 찾는 눈치였는데, 자신의 연적이 이제는 금요일마다. 기차를 타고 지나간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이 바깥을 내다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고개를 아무리살짝 들려고 조심한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연적은 늘 발각되었으며두 여자의 시선은 마치 장검이 부딪치듯 그렇게 마주쳤다. 기차가 휩쓸고 지나가버리면 기차가 싣고 가는 그 행복에 억장이 무너져서 하릴없이 눈으로 뒤쫓기만 하는 한 여자가 땅바닥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 P399
일각이 여삼추 같았다. 텅 빈 머릿속을 그런 생각만이 넘실대며 흘러가니 시간의 척도가 폐기되어버린 것이다. - P417
이렇듯 회사 사람들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범인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두 피살자를 동정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 가련한 젊은 여인은 과오를 너그러이 용서받았고, 그 노인은 자기를 둘러싸고 횡행하던 불미스러운 소문들을 말끔하게 씻어내고 다시 명망을 되찾았다. - P548
마침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그 재판이 도래했지만,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프랑스 전역이 뒤숭숭한 분위기에 짓눌리면서 논쟁의 반향은 급격하게 사그라졌다. 그래도 루앙은 재판이 열린 사흘내내 열기에 휩싸였고, 법정 문은 사람들로 미어터졌으며, 예약된 자리는 도시의 귀부인들이 독차지했다. 법원으로 개조된 이래 옛 노르망디공국 제후의 궁전에 그토록 많은 인파가 몰린 적은 일찍이 한 번도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6월 하순, 햇빛 찬란한 무더운 오후였는데, 열장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환하게 밝히며 통과한 강렬한 햇살이 벽면의떡갈나무 널빤지와, 벌집 문양의 붉은 벽지를 배경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흰 대리석 십자고상, 그리고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아주 은은하게 금빛을 발하는, 갖가지 문양이 조각된 금박을 입힌 나무 격자무늬가 인상적인 루이 12세 시대의 그 유명한 천장 위로 넘실거렸다. - P551
기차는 이제 볼벡에서 모트빌로 이어지는 평평한 고원지대를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기차는 급수를 위해 몇 군데 정해진 지점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한달음에 파리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큰 덩어리가, 인간 짐승들로 꽉 들어차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열여덟 량의 차량이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며 어두운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살육의 현장으로 실려가는 그 인간 군상들은 목이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는데, 그 악쓰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기차 바퀴 소리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 P566
기관차가 도중에 산산조각내버린 희생자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있단 말인가! 기관차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로 인해 뿌려진 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지 않은가? 운전자도 없이, 어둠 속 한가운데로, 마치 살육의 현장 한복판에 풀어놓은 눈멀고 귀먹은 한 마리 짐승처럼, 기관차는 이미 피곤에 절고 술에 취해 혼곤한 상태에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을 싣고, 그 총알받이들을 싣고, 달리고 또 달렸다. - P571
졸라는 "분노하며 살 것, 한 줄이라도 쓰지 않으면 하루라도 살지 말 것"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고결한 증오, 곧 분노로 표현된일종의 힘의 의지, 그것이 바로 1871년부터 1893년까지 거의 매년 한권꼴로 발표된 루공마카르 총서의 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졸라를 읽을 때 항상 새겨야 할 사항이다. - P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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