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감각을 못 견디는 나는 번번이 수영강습에서 낙오되었고 낚싯배 타서도 선실에 콕 박혀 있었다. 겁쟁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은 용감하다. 조각배 하나에 의지해 먼바다로 나가, 배 보다 더 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다. 가난한 그는 빈 손이다. 망망대해에서 고독을 달래줄 라디오는커녕 물고기에 뿌릴 소금조차 없다. 원양어업에서 으레 동원할 든든한 장비도 없다. 달랑 몸뚱어리뿐이다. 그나마 노화하여 말도 제대로 안 듣는 몸. 그런데 몸이야 말로 일당백이다. 예를 들어 노인의 목소리는 망망대해에서 외로움을 달래줄, 건전지 안 먹는 독백 라디오가 된다. 노인의 억센 손과 강건한 어깨는 물고기와 맞서게 해줄 무기다. '아! 몸 그 자체가 도구, 존재 자체가 어부이구나!' 여기에 생각에 미치자 그제야 왜 소년이 산티아고 노인을 "최고의 어부"라며 존경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물고기 잘 잡는 어부들이야 많겠죠. 훌륭한 어부도 더러는 있고요. 하지만 진짜 어부는 할아버지뿐이에요.



세상은 노인이 84일째 물고기를 잡지 못하자 측은지심을 넘어 무시한다. 소년의 부모님은 노인에게 불운이 붙었다며 아예 노인의 배에 타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도 소년은 노인에게서 "최고의 어부"를 본다. 소년은 "최고"에 걸맞은 예우를 할뿐더러 "최고"에게서 배우고 싶어 한다. 노인은 남들 눈에 덕지덕지 녹이 낀 작살 같을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인정해 주는 소년이 고마워서라도 거대한 물고기와 끝까지 싸웠다. 노인 역시 '내가 죽느냐, 물고기 네가 죽느냐'의 상황에서 물고기를 인정해준다. 심지어 '형제자매'라고 부른다.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을 때마다 헤밍웨이가 숨겨 놓은 문장의 빙하 밑으로 파내려가게 된다. 곱씹는다. 왜 소년에게 노인은 '최고의 어부'인지, 소년의 눈에만 '최고'인지, 만약 그렇다면 노인은 그런 한평생에 만족하고 세상을 뜰 수 있을지? "최고의 어부"란 무엇인지? 나는 "최고"인 노인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전폭 지지해주는 것만큼 잠재력을 끌어올리게 하는 당근이 있는지...[노인과 바다]는 얇은 철학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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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5-30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의 깔끔한 문장도 좋고, 말씀하신대로 숨겨놓은 문장을 발견하게 되는 탁월함도 있어, 저도 좋아해요.
그의 생과는 별개로^^;;;;

얄라알라 2024-05-31 07:45   좋아요 1 | URL
우연히 검색하다 본 어떤 전기에서는 헤밍웨이가 총 들고 있느 사진을 표지에 썼더라고요...고작 저는 인터뷰집 1권 읽었는데 좀 더 알아보고 싶어지네요^^;

햇살과함께 2024-05-3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0대 때는 알지 못했는데 다시 읽으며 저 문장들이, 노인이 물고기를 대하는 자세에 대한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몇 주 동안 [노인과 바다]를 세 가지 버전(각각 백정욱, 이정서, 박상은 번역가 버전)으로 접했다. 내친김에 [헤밍웨이의 말: 은둔 시절의 마지막 인터뷰]까지 읽었고 박균호 작가의 [세계문학 필독서 50]을 펼쳐서 작품해설도 살펴봤다. 한 마디로 엄청난 재발견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대표작이라고 어른들이 하도 권하시길래 10대 때 읽었다. 대학 입시 영어 시험도 대비할 겸 원서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철부지 나는 줄거리만 따라가며 '이렇게 밍밍한 책이 도대체 왜 유명하지?,' 책 추천해준 어른들에게 속은 느낌이었다.


아둔함은 독이다. 교만함은 독자의 눈을 가린다. 청소년기 나는 빨대 꽂아 음료 마시듯 [노인과 바다] 줄거리만 쪽쪽 빨고는 진짜 중요한 양분은 싹 내 버린 셈이다. 단순한 줄거리 이면에는 헤아리기 벅찬 인생의 지혜와 생각거리가 담겨 있었는데도 말이다. 어렸던 나의 경솔과 오만을 속죄하듯 이번에는 [노인과 바다]를 경이로운 마음으로 읽었다.




"빙산 원칙"에 따라 작품을 쓴다는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단순한 줄거리라는 빙산 아래, 자신이 경험한 인생의 폭과 밀도를 꾹꾹 눌러 감춰두었다. 80여일 동안 빈 배로 돌아오던 노인이 사투를 벌여서 인생 최고의 물고기를 낚는다. 몸길이가 5.5미터에 이르는 물고기(청새치로 추정)를 실을 공간이 없어 쪽배에 매단다. 그 와중에 프리라이더 상어 떼에게 물고기 살점을 다 뜯겨 뭍에 닿았을 즈음, 물고기는 뼈대와 꼬리, 머리통만 남아 한때 정녕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노인은 물고기와 목숨을 걸고 했던 사투로 기력을 다 써서 깊은 잠에 빠진다. 사자 꿈을 꾸면서......



Jackiemora01,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나는 엉뚱하게도 노인의 소박한 식사법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 일단 노인은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고, 음식이 제 몸으로 들어간 후 어떻게 작용할지를 상상하고 외부의 생명과 자신의 연결성을 이해하며 먹이를 음미한다. 노인의 식사법에는 과도함,즉 과식과 낭비가 없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은 혀끝의 자극과 쾌락, 소비를 통한 과시, 습관적 먹기를 하며 음식을 사유하지 못한다. 

노인은 자신이 잡은 5.5미터짜리(자신의 배보다 몇 뼘 더 큰) 청새치라면 어른 한 명이 겨우내내 식량 삼을 수 있다 가늠하면서도 이걸 먹을 자격 갖춘 인간이 흔히 없다는 것도 안다. 비록 둘(물고기 혹은 노인)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인지라 물고기에게 작살을 꽂았지만 노인은 물고기를 형제의 마음으로 대하고 존중한다. 자연에서 음식을 취하며 생존하고 자신을 살게 해주는 그 존재에 감사하는 노인이야말로 어부이자 철학자가 아닌가, 나는 감탄했다.


그 외에도 뼛 속까지 어부인 노인이 바다를 여성형 명사라면서 바다 및 바다 생물체에 보이는 태도, 몸 속 장기가 밖으로 녹아 나올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의지, 라디오 하나 없이 가난한 어부로서 망망대해에서 혼잣말하는 노인의 외로움, 피붙이도 아닌데 망망대해 위에서 의리와 신뢰 관계로 다져진 노인과 소년의 우정, 노쇠해가는 몸을 살살 달래고 어르며 노화를 수용하는 노인의 태도 등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읽을수록 좋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출세하지 못했더라면 어부로서 이름을 날렸을 거라는 농담 아닌 농담도 믿게 되었다. 



Look Magazine, Photographer (1953)/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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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4-05-18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키트와 보양탕 ㅋㅋㅋ 적절한 표현입니다 해마다 다시 먹어줘야죠~

얄라알라 2024-05-18 02:37   좋아요 1 | URL
ㅎ네네^^ 그리고 이왕이면 몇 글자라도 보양탕 몸보신 기록을 해주는 게 좋은데
저는 자꾸만 적는 걸 귀찮아하네요.

2024-05-16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18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례 주택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1
유은실 지음 / 비룡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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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손을 떼지 삶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믿는다). 한 때 수입의 1/3을 책 사는 데 쓰고, 비행기로 박스 째 책을 실어 나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오랫동안 책에 치여 살았다. 서가는 물론, 옷장과 수납장 구석구석을 책으로 채우며 뿌듯해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적 디딤돌 없이 살면서 물질로서의 책이 거추장스러워졌다. "많이" 쟁여 둘 게 아니라 한 권을 읽더라도 뼈와 피 삼는 게 중요하겠다 싶었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한 밤 숲 속에서 흰 빵 흘리는 헨젤처럼 야금야금 책을 버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후 3000권 넘게 내보냈다.

​*

서두가 길다. 책을 거의 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내용을 기억하기 어려운 전문서적만 주로 집으로 모신다. 800번대 책을  사는 일은, 1년에 1권? 책 덕후치고는 야박하다. 그런 내가 어젯 밤 서점에 다녀왔다. 이미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순례주택] 을 갑자기 소장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이 소설은 전체를 놓고 보아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따로 보아도 좋다. 작가의 인생관과 지혜를 그득 담아 놓았다. 게다가 그것은 나의 지향과 상당히 공명한다.

​**

[순례주택]의 주요 캐릭터 순례 할머니는 "순례(巡禮)"로 개명했다. 이름처럼 무소유와 홀가분함을 지향한다. 17억 빌딩 주인이면서 시세보다 훨씬 월세를 싸게 받고, 통잔 잔액이 1000만원 넘지 않게 관리한다. 세신사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산 집이라서 "때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런 순례씨가 20년을 남친 삼았던 할아버지의 친 딸은 "원더 그랜디움 Wonder Grandium"아파트에 산다. 엄밀히 말하면 딸과 사위가 제 아버지의 집을 뺏다시피 무단점거한 것이다. 딸은 아버지 재산을 행여라도 빼앗길까 순례씨와 아버지의 결혼을 결사반대하고 순례씨를 '동거녀'라며 폄하한다. 한술 더떠서 순례씨가 사는 '빌라촌' 주민을 길고양이 취급했다. 딸의 남편도 만만치 않은 속물이어서,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데 장인어른과 4명의 누이의 지원금으로 살았다. 그 돈으로 대학을 마쳤는데 이후로도 도움만 기대한다. 염치도 없다. 그들은 고층 아파트 "Wonder Grandium"처럼 고층의 삶을 지향할 뿐, 땅에 발 딛게 될 경우 두발로 서지도 못할 인간형이다. 큰 딸 '오미림'도 그런 엄마아빠를 닮아서 "드라이클리닝 냄새 가시지 않은 잘 다려진 옷을 입고 BMW mini타고 출근하는 미래를 꿈꾼다. 공부는 잘해서 전교 1-2등 권이다. 반면 동생 오수림은 반에서 12-13등 짜리라고 제 엄마아빠에게서 "모지리" 취급 당하지만 [순례주택]에서 가장 당차고 똘똘한 캐릭터이다. 


****


수림이 엄마아빠처럼  '상대적으로' 조금 더 학교를 다녔고 '상대적으로' 조금 더 좋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정직하게 사는 선량한 사람을 멸시하는 속물.  "나" 화법만 쓰지 "너"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젠체들, 교육 받은 예의범절로 저열함을 감춘 사람을 나는 싫어한다(내가 그럴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다). 대신 사람 내면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초감각과 제3의 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대한민국 공교육을 통해서 잘 길러지기 어려울 감각이다. 그런데 [순례주택]의 중학생, "오수림"은 그런 제3의 눈을 가졌다. 수림이는 아마도 유은실 작가가 본인의 할머니를 본따서 입체감을 더했을 캐릭터일 터인데 "생활지능"이 높고 삶을 독립적으로 살 힘을 지녔다. 즉,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존재이다. 나이만 40~50살이지 아직도 덜자란 '덜어른' 수림이 엄마아빠와는 달리...




유은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재미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 분의 인생경험과 인생 롤모델은 과연 무엇이길래 이런 작품을 썼을까? 너무 재밌어서....어쩌지. 3번 읽고나니 이제 유은실 작가에게 팬레터를 쓰고 싶어진다. 본격적인 [순례주택] 리뷰를 다음 번으로 미루고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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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06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까지 이 책이 건축에 관한 책인 줄 알았는데 청소년 소설이었군요. 아, 이런~
글치않아도 소설이라고 쓰셔서 오타 아닌가 했었다는. ㅋㅋ
저도 얼마전부터 다시 안 읽을 책은 슬금슬금 버리고 있습니다. 그래봐야 새 책 들여놓을려고 버리는 꼴 밖엔 안되지만. 이젠 기증도 중고샵에 가지고 나가는 것도 다 귀찮더군요. 근데 얄라님 이 책 좋아라 하시니 갈등 생기는데요? ㅎㅎ

얄라알라 2024-03-06 11:55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추천 받기로는.....서너번이나 오프라인에서 열렬히 추천 받고도 ‘표지가 구려서‘ + ‘건축관련‘ 책인가 싶어 안 읽었어요 ㅎㅎㅎ 저랑 비슷하신 생각을 하셨네요.

중고샵이 귀찮아 지셨으면, 그냥 빌려읽으시어요^^ 가볍게 가볍게 가벼운 삶을 !^^ 어떤 마음이신지 저도 알 것 같아요 ㅎ

그레이스 2024-03-07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한동안 ˝생활지능˝이란 말로 농담했습니다. 생활지능이 낮아! 하고...!^^

얄라알라 2024-03-10 11:45   좋아요 1 | URL
ㅎㅎㅎ농담으로 쓰기 넘 좋아요^^

저는 ˝생활지능˝이 바닥을 칩니다 ㅎ 오미림보다 더한..

2024-03-07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0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2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nan 2024-03-1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넓고 읽고 싶은 책은 많습니다. 오늘 얄라알라님 덕분에 또 한 권 읽고 싶은 책이 생겼습니다. 작년에 전자책 리더기를 산 이후에는 주로 전자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알라딘 구매이력은 늘고 있)는데 이 책 역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생활지능이 높아지길 기대하면서~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이고 싶다니,

(누가)..... (누구를) 죽이고 싶은 걸까?

[죽이고 싶은 아이]



"죽음"은 어린이 동화용으로는 암묵적 금기어이다. 그림책 천 여권을 읽으며 알게된 사실이다. 하물며 "죽이고 싶은"은 어린이책 제목으로 더더욱 어울리지 않다. 비록 주어를 생략했으나 "(자연사를 포괄한) 죽음dying"과 달리 "죽이고 싶은kill"은 주체의 살생의지와 폭력의 표적을 내포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죽이고 싶은 아이]를 피해왔다."재밌다"는 소문이 뜨거운데도 차갑게 외면해왔다.



하지만 어쩌다 읽었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과연 소문대로 재미있었다. 손에서 놓기 싫을 정도로. 왜? 이꽃님 작가가 "재미 극대화" 장치를다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살펴보자!

일단 첫 페이지부터 사람을 죽인다.




처음엔 다 자살인 줄 알았죠. 지주연이 죽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상상도 못 했지. 하여간 지주연 때문에 우리 학교가 망했다고 다 난리예요. 솔직이 학생이 죽어 나간 학교에 누가 다니고 싶겠어요.

[죽이고 싶은 아이] 8-9.



"살인/ 살해/ 죽음"이 요즘 판매부수 높은 청소년 소설 특징인가?(아! 암울할지어다!) 소설 2~3장 넘기는 사이에 6명(7명이었나?)을 칼부림과 묻지마 폭력으로 죽이는 [아몬드], 피비린내 진동하는 가족 살해 현장 묘사로 시작되는 이희영의 [소금아이]. 그리고 [죽이고 싶은 아이]도 다르지 않다. 첫 장부터 벽돌 가격으로 '죽임 당한' 아이와 '죽이고 싶었던' 아이를 등장시킨다. 첫 장면부터 작가는 노골적으로 용의자를 드러낸다. 죽은 아이의 유일했다는 친구. '정말 친구가 살인자인가? 여고생이 벽돌 산산조각 날 만큼 센 힘으로 친구 머리를 내려칠 수 있던가' 그게 궁금해서라도 독자는 책을 손에서 못 놓게 된다.


둘째, 이꽃님 작가는 중심 캐릭터 외에도 다양한 화자를 등장시킨다. '죽은 아이'가 알바했던 편의점 사장님, 남자친구. '죽이고 싶어한 아이'의 학원동창, 변호사, 정신과 의사 등등. 덕분에 "Shorts" 빨리 넘겨보기인양 글 호흡이 짧고 진행이 빠르다. 게다가 작가는 실제 고등학생이 쓸만한 저속한 입말을 구사해서 현실감을 더했다. 사망 사건을 목격했다거나 관련 증언하는 다양한 주체가 나와서 저마다의 추측과 편견으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독자는 '누구를 미워해도 되는지,' '누구를 동정해야 하는지' '누가 죗값을 받아야하는지'를 자연스레 정하고 책 읽는 내내 그 도덕률에 따른다.

스포일링을 하자면.....(스포를 원하시지 않는 분은 여기까지만 읽으세요^^)


**************************************

강 스 포!

피해자는 가난한데 밝고 선량하다(가난이 죄다).

가해자는 부자이며 자기중심적이고 지배성향 강하다. (돈으로 친구를 휘두른다)

이 죽음 혹은 살인사건을 세상은 "학교폭력, 주종관계" 심지어 "치정관계"로 몰고간다.

이러한 전형성과 달리 소설의 결말은 황당하다. 친구를 "죽이고 싶어했기에" "미움받고, 죗값 받아 마땅한" 소녀는 사실 범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아이를 '가해자, 살인자'로 만들고 싶어했고 아이는 세상의 시선에 고개를 수그려 수긍했다. 있지도 않은 죄를 자백했다. 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를 '미워해도 되는 대상'으로 상정하고 책 읽던 독자야말로 진짜 가해자 아닌지? [죽이고 싶은 아이]는 결국 독자 자신도 '(상징적) 살해' 공모죄에서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려준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미워해도 될' 이유를 붙여주고 더러운 이름을 주는 순간 그 대상을 정말 사회적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고 나자 영화 "라쇼몽"이 생각났다. "진화evolution"를 전공하신 교수님께서 리뷰과제로 내주셨던 영화였다. 철없고 까막눈이었던 나는 당시 "라쇼몽"이 도대체 "인류진화사"와 뭔 관계이길래 내가 이 고생을 하나,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라쇼몽"이야말로 "인류진화사"를 얘기할 때 곁들이기 좋은 영화 맞다. 객관성의 신화에 대한 폭로이자 진실 만들기라는 공모의 범죄를 다루고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죽이고 싶은 아이]를 통해 작가가 사회에 던지고 싶었던 문제의식과도 같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제목 그대로 음산한 작품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관계성 - "친구 대 친구", "제자 대 선생님", "부모 대 자녀" - 중 어디에서도 서로 보듬고 넉넉히 헤아리는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소위 뒤에서 욕하고 등치고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 [죽이고 싶은 아이]는 마음 기댈 데 없이 불안한 요즘 아이들의 세계를 보여주는가? 삭막하고 스산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의식과 별개로 인간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니컬한 시선을 느끼고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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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08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쇼몽 포스터군요
ㅎㄷㄷ

중학교에서 추천했더니,,, 쌤들이 안된다고,,, 제목이 넘 폭력적이라고 그러시네요
요즘 학교가 넘 험악해져서;;

얄라알라 2024-02-08 23:14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그래도 그레이스님 그 중학교 선생님들께서는 깨여 계시는 거라 생각해요. 저는 [아몬드]가 초등 논술학원에 왜 그렇게 필독서로 올라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칼로 찌르고 발로 차고.. 그런 죽음으로 도입부가 시작되는 소설, 후반부에도 잔혹한 폭력이 등장하잖아요....초등학생들이 많이 읽더라고요. 중고등학생에게도 벅찰 것 같은데.

stella.K 2024-02-08 17: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소년 소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더니 정말 그러네요.
옛날엔 사랑이 꽃피는 나무 같은 청소년 드라마도 있었는데 어린이 드라마도 있고. 언제부턴가 그런 드라마에 대한 구분이 없어졌어요.
라쇼몽. 옛날 영화 가끔 보긴하는데 넘 오래된 건 잘 안 보게되더군요.

얄라알라 2024-02-08 23:16   좋아요 1 | URL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저는 그 말씀은 들어본 적 없는데 stella님 말씀 들으니 절로 공감이 됩니다.
몇 해전에 ˝이원수 동화작가˝님 작품 읽고 띵...머리가 띵해졌어요.

그 안에 담긴 세계, 정서가 너무나 요즘의 것과 달라서 띵해졌어요. 무형의 정서가 참으로 격하게 변해가나봅니다^^:;; 이걸 아쉬워하면 꼰대가 되는 걸까요?

반유행열반인 2024-02-08 20: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라쇼몽 대학 때 과제로 봤는데 다른 강의 ’역사와 영화‘였어요 ㅋㅋㅋ좋은 영화랑 원작 소설 많이 읽은 덕분에 아직 기억에 남는 수업… 남의 과(인문대 서양사학과) 교수님에 교양 과목이었던ㅋㅋㅋ(정작 전공 학점은 개판이고…)
청소년 소설 보면 이렇게 까지 자극적일 일인가 싶다가도 저 어릴 때도 한국문학사 명작이랍시고 보던 소설들 막 불지르고 낫부림하고 야하고… 그랬던 거 보면 아 애들도 그런 거 재밌겠구나 끄덕끄덕 하고 맙니다 ㅋㅋㅋ

얄라알라 2024-02-08 23:18   좋아요 1 | URL
열반인님 서양사학과 과목^^ 저는 전공과목에서 보았어요. 저희 은근 통하는 게 많군요 ㅎㅎㅎ

열반인님 말씀도 맞아요. 저도 [테스] 중학교 때, [쿼바디스] 초딩 때 읽으며 그 야시러운 부분에 초집중해서 ㅎ

근데 제가 언급한 소설의 장면들은 피와 칼과 발길질과 죽음이 등장하니..저로서는 당황스럽더라고요
 



Zazie44,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에게 독자로서 불경을 고백합니다. [시계태엽 오렌지] 하면 오직 "스탠리 큐브릭" 감독만 생각나는 겁니다. 영화 원작 소설을 누가 썼는지는 관심 없었고요. 하지만 책날개 작가 소개가 워낙 인상적인지라 한 번 알게 되니 쉽게 잊히지 않겠군요. 앤서니 버지스는 뇌종양 판정을 받고 홀로 남을 아내의 여생을 염려하며 창작열을 불태웠는데 실은 오진이었던지라 이후 33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부모님이 '돈이 많이 든다'라며 음악가의 길을 인정해 주지 않자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음악애호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디스토피아 블랙코미디 [시계태엽 오렌지]가 전개되는 내내 클래식 음악이 캐릭터 성향을 드러낼 뿐 아니라 작품의 상징 의미를 해독하게 해주는 중요 장치처럼 활용되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몽골몽골한 분위기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를 3시간 동안 읽는 내내 [1984]를 떠올렸는데요. 번역자 박시영의 해설을 살펴보니 앤서니 버지스는 조지 오웰의 열렬한 팬이었다 합니다. 


제가 계속 변죽만 울리고 있네요. 그래서 [시계태엽 오렌지]는 어떤 작품이냐고요?

작품 초반에는 역겨운 강력 범죄, 그것도 10대 소년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일탈이 충격적일 만큼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마약 탄 음료를 (비유적으로는 "칼을 섞어") 마시고 면도칼, 칼, 쇠사슬을 무기로 휘두르면서 이유 없이 폭력이라는 설사를 밤거리에 싸고 다니는 무리에서 독자는 공포감을 느낍니다. 전통 서구 사회는 이런 일탈자를 '교도소'라는 교화기관에 격리하는 방식을 택해왔죠? 이 디스토피아 SF 소설에서는 약물과 심리요법을 결합한 새로운 교화술로 일탈자를 다스립니다. 폭력, 범죄를 상상하거나 보기만 해도 신체적으로 극렬한 고통을 느끼기에 그 욕구 자체를 누르도록 인간개조를 하는 것이지요. 마치 영화 [이퀼리브리엄]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사람들이 약물로 인간 본성의 어떤 측면을 꾹꾹 눌러 억제하도록 강요당하듯이요.

이 교화술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며 국민을 통제하려는 정부고위관료(장관)은 이렇게 자화자찬합니다.


우리의 임상 대상은, 여러분도 보다시피, 강제적으로 착한 일을 하게끔 되었습니다...폭력적으로 행동하려는 의도에 동반해서 육체적 괴로움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자 승진 가능성을 확 낮출 걸 알면서도 교도소의 신부가 고위관료에게 소신발언합니다.


저 애에게는 진정한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자기 이익,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모독하는 괴이한 행동을 하게 된 거죠... 쟤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또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신의 피조물도 더 이상은 아니지요." 

고위관료에게는 "임상대상," 신부에게는 "불쌍한 아이"인, 우리의 주인공은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나, 나, 나. 도대체 나는 어쩌라고요? 난 여기서 뭐란 말이야? 내가 무슨 짐승이나 개란 말이야?.... 내가 무슨 태엽 달린 오렌지란 말이야?"



독자가 전반부에 묘사되는 강간폭력살인마약 등 자극적인 소재에 정신줄 놓지 마시고 끝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 앤서니 버지스가 인간 본성과 사회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도 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가정을 꾸려 사회 일원으로 정착하고픈 욕구'가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교화술인듯 제시되는 마지막 장면은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지만, 60년 전 소설(1962)의 흡인력이 이처럼 강렬하다니!

저는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무척 부적절한 영화겠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까지 섭렵하러 가야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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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24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와 <시계태엽오렌지>랑 좀 안어울리긴 하지만 책은 죄가 없죠 ㅋㅋ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3-12-24 23:23   좋아요 2 | URL
ㅋㅋ저는 새파랑님의 점잖은 유머감각이 좋아요
맞아요 맞아. 책은 죄가 없어요

다 읽고 나니, 증보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왕 읽을 걸 증보판으로 읽었으면 좀 틈새 정보 많이 알았을텐데, 살짝 후회되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하시어요 새파랑님^^

초원 2023-12-24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23년 알라딘 서재를 정답게 가꿔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

얄라알라 2023-12-24 23:22   좋아요 0 | URL
무한냥님 감사드립니다
다정한 이웃님들 계시는 알라딘 서재 덕분에 외롭지 않고 행복했어요.
무한냥님, 2024년에 더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