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살해/ 죽음"이 요즘 판매부수 높은 청소년 소설 특징인가?(아! 암울할지어다!) 소설 2~3장 넘기는 사이에 6명(7명이었나?)을 칼부림과 묻지마 폭력으로 죽이는 [아몬드], 피비린내 진동하는 가족 살해 현장 묘사로 시작되는 이희영의 [소금아이]. 그리고 [죽이고 싶은 아이]도 다르지 않다. 첫 장부터 벽돌 가격으로 '죽임 당한' 아이와 '죽이고 싶었던' 아이를 등장시킨다. 첫 장면부터 작가는 노골적으로 용의자를 드러낸다. 죽은 아이의 유일했다는 친구. '정말 친구가 살인자인가? 여고생이 벽돌 산산조각 날 만큼 센 힘으로 친구 머리를 내려칠 수 있던가' 그게 궁금해서라도 독자는 책을 손에서 못 놓게 된다.
둘째, 이꽃님 작가는 중심 캐릭터 외에도 다양한 화자를 등장시킨다. '죽은 아이'가 알바했던 편의점 사장님, 남자친구. '죽이고 싶어한 아이'의 학원동창, 변호사, 정신과 의사 등등. 덕분에 "Shorts" 빨리 넘겨보기인양 글 호흡이 짧고 진행이 빠르다. 게다가 작가는 실제 고등학생이 쓸만한 저속한 입말을 구사해서 현실감을 더했다. 사망 사건을 목격했다거나 관련 증언하는 다양한 주체가 나와서 저마다의 추측과 편견으로 사건을 재구성한다. 독자는 '누구를 미워해도 되는지,' '누구를 동정해야 하는지' '누가 죗값을 받아야하는지'를 자연스레 정하고 책 읽는 내내 그 도덕률에 따른다.
스포일링을 하자면.....(스포를 원하시지 않는 분은 여기까지만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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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스 포!
피해자는 가난한데 밝고 선량하다(가난이 죄다).
가해자는 부자이며 자기중심적이고 지배성향 강하다. (돈으로 친구를 휘두른다)
이 죽음 혹은 살인사건을 세상은 "학교폭력, 주종관계" 심지어 "치정관계"로 몰고간다.
이러한 전형성과 달리 소설의 결말은 황당하다. 친구를 "죽이고 싶어했기에" "미움받고, 죗값 받아 마땅한" 소녀는 사실 범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아이를 '가해자, 살인자'로 만들고 싶어했고 아이는 세상의 시선에 고개를 수그려 수긍했다. 있지도 않은 죄를 자백했다. 하지만, 어쩌면 누군가를 '미워해도 되는 대상'으로 상정하고 책 읽던 독자야말로 진짜 가해자 아닌지? [죽이고 싶은 아이]는 결국 독자 자신도 '(상징적) 살해' 공모죄에서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려준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미워해도 될' 이유를 붙여주고 더러운 이름을 주는 순간 그 대상을 정말 사회적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고 나자 영화 "라쇼몽"이 생각났다. "진화evolution"를 전공하신 교수님께서 리뷰과제로 내주셨던 영화였다. 철없고 까막눈이었던 나는 당시 "라쇼몽"이 도대체 "인류진화사"와 뭔 관계이길래 내가 이 고생을 하나,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라쇼몽"이야말로 "인류진화사"를 얘기할 때 곁들이기 좋은 영화 맞다. 객관성의 신화에 대한 폭로이자 진실 만들기라는 공모의 범죄를 다루고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죽이고 싶은 아이]를 통해 작가가 사회에 던지고 싶었던 문제의식과도 같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제목 그대로 음산한 작품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관계성 - "친구 대 친구", "제자 대 선생님", "부모 대 자녀" - 중 어디에서도 서로 보듬고 넉넉히 헤아리는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소위 뒤에서 욕하고 등치고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 [죽이고 싶은 아이]는 마음 기댈 데 없이 불안한 요즘 아이들의 세계를 보여주는가? 삭막하고 스산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의식과 별개로 인간관계에 대한 작가의 시니컬한 시선을 느끼고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