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azie44,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에게 독자로서 불경을 고백합니다. [시계태엽 오렌지] 하면 오직 "스탠리 큐브릭" 감독만 생각나는 겁니다. 영화 원작 소설을 누가 썼는지는 관심 없었고요. 하지만 책날개 작가 소개가 워낙 인상적인지라 한 번 알게 되니 쉽게 잊히지 않겠군요. 앤서니 버지스는 뇌종양 판정을 받고 홀로 남을 아내의 여생을 염려하며 창작열을 불태웠는데 실은 오진이었던지라 이후 33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부모님이 '돈이 많이 든다'라며 음악가의 길을 인정해 주지 않자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음악애호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디스토피아 블랙코미디 [시계태엽 오렌지]가 전개되는 내내 클래식 음악이 캐릭터 성향을 드러낼 뿐 아니라 작품의 상징 의미를 해독하게 해주는 중요 장치처럼 활용되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몽골몽골한 분위기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를 3시간 동안 읽는 내내 [1984]를 떠올렸는데요. 번역자 박시영의 해설을 살펴보니 앤서니 버지스는 조지 오웰의 열렬한 팬이었다 합니다. 


제가 계속 변죽만 울리고 있네요. 그래서 [시계태엽 오렌지]는 어떤 작품이냐고요?

작품 초반에는 역겨운 강력 범죄, 그것도 10대 소년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일탈이 충격적일 만큼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마약 탄 음료를 (비유적으로는 "칼을 섞어") 마시고 면도칼, 칼, 쇠사슬을 무기로 휘두르면서 이유 없이 폭력이라는 설사를 밤거리에 싸고 다니는 무리에서 독자는 공포감을 느낍니다. 전통 서구 사회는 이런 일탈자를 '교도소'라는 교화기관에 격리하는 방식을 택해왔죠? 이 디스토피아 SF 소설에서는 약물과 심리요법을 결합한 새로운 교화술로 일탈자를 다스립니다. 폭력, 범죄를 상상하거나 보기만 해도 신체적으로 극렬한 고통을 느끼기에 그 욕구 자체를 누르도록 인간개조를 하는 것이지요. 마치 영화 [이퀼리브리엄]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사람들이 약물로 인간 본성의 어떤 측면을 꾹꾹 눌러 억제하도록 강요당하듯이요.

이 교화술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며 국민을 통제하려는 정부고위관료(장관)은 이렇게 자화자찬합니다.


우리의 임상 대상은, 여러분도 보다시피, 강제적으로 착한 일을 하게끔 되었습니다...폭력적으로 행동하려는 의도에 동반해서 육체적 괴로움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자 승진 가능성을 확 낮출 걸 알면서도 교도소의 신부가 고위관료에게 소신발언합니다.


저 애에게는 진정한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자기 이익,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모독하는 괴이한 행동을 하게 된 거죠... 쟤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또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신의 피조물도 더 이상은 아니지요." 

고위관료에게는 "임상대상," 신부에게는 "불쌍한 아이"인, 우리의 주인공은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나, 나, 나. 도대체 나는 어쩌라고요? 난 여기서 뭐란 말이야? 내가 무슨 짐승이나 개란 말이야?.... 내가 무슨 태엽 달린 오렌지란 말이야?"



독자가 전반부에 묘사되는 강간폭력살인마약 등 자극적인 소재에 정신줄 놓지 마시고 끝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 앤서니 버지스가 인간 본성과 사회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도 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가정을 꾸려 사회 일원으로 정착하고픈 욕구'가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교화술인듯 제시되는 마지막 장면은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지만, 60년 전 소설(1962)의 흡인력이 이처럼 강렬하다니!

저는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무척 부적절한 영화겠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까지 섭렵하러 가야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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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24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와 <시계태엽오렌지>랑 좀 안어울리긴 하지만 책은 죄가 없죠 ㅋㅋ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3-12-24 23:23   좋아요 2 | URL
ㅋㅋ저는 새파랑님의 점잖은 유머감각이 좋아요
맞아요 맞아. 책은 죄가 없어요

다 읽고 나니, 증보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왕 읽을 걸 증보판으로 읽었으면 좀 틈새 정보 많이 알았을텐데, 살짝 후회되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하시어요 새파랑님^^

초원 2023-12-24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23년 알라딘 서재를 정답게 가꿔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

얄라알라 2023-12-24 23:22   좋아요 0 | URL
무한냥님 감사드립니다
다정한 이웃님들 계시는 알라딘 서재 덕분에 외롭지 않고 행복했어요.
무한냥님, 2024년에 더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