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제린
크리스틴 맹건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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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모로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여자의 심리스릴러라고 하는데,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는지, 그토록 느끼고 싶었던 서스펜스 스릴을 느낄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모로코 항구도시 탕헤르의 이국적이고 낯선 분위기가 조금은 긴장감을 주기도 했지만, 초반에는 자주 책을 내려놓다가 중반부터 속도가 나기 시작하더니 결말에 ‘어? 이게 다인건가? 결국 이거야?‘ 라며 혼잣말을 했다.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스릴러 소설들과 다르게 서서히 조여오며 마지막에 터지는 그런 한 방이 없어서 그랬나 싶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한 불길한 분위기는 계속되고, 두 여자, 루시와 앨리스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는 번갈아 진행되며 누구 말이 진실인지 의심하는 사이 미스터리한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나는 이 과정이 이상하게 지루했다.

이야기보다는 두 여자의 심리에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이 소설은 ‘가스라이팅‘ (심리학적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위키백과) 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1938년 공연된 연극 <가스등>에서 유래한 말로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가스라이팅은 부모와 자식, 연인, 친구 등 모든 인간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종의 학대로 이 소설은 가스라이팅이 어떻게 한 인간에게 작용하여 자기 자신조차 의심하게 만들고 파멸시키는지 그 과정을 두 여자의 은밀한 내면 묘사를 통해 보여준다.

조지 클루니 제작, 스칼렛 조핸슨 주연 영화로도 만들어 진다는데, 아마도 스칼렛이 루시를 연기하지 않을까 싶다. 루시든 앨리스든 이 평범하지 않은 인물을 어떻게 연기할지, 실제로 영화 배경도 모로코일지, 무엇보다 이 소설을 시종일관 지배하고 있는 그 기분 나쁜 분위기를 영화는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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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18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던 책인데 이렇게 리뷰로 패스하게 되네요.

coolcat329 2021-01-18 13:06   좋아요 1 | URL
아 다른 분들은 다 후한 점수를 주셔서 제 글 읽고 패스하신다니 괜히 죄송하네요 😥
두 여자의 심리에 집중해서 읽어야할듯 합니다. 저는 다른쪽으로 기대를 많이 한거같아요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 고흐의 불꽃같은 열망과 고독한 내면의 기록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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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에  대한 나의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이 책은 그의 후원자이자 동생인 테오와 주고 받은 편지를 담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흐의 삶과 인생관, 작품세계, 그가 그림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가운데서 사랑을 갈망하고 사람들 속에서 그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고흐.

죽기 한 달 전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 '사랑했던 사람들도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p.298)보는 것처럼 기억 속에서만 남아있어 자신의 삶은 계속 고독할 것이고, 그림만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p.298)라는 말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살아서 인정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죽은 다음에 인정받으면 뭐하나...아니야, 그래도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고 비싼 그림의 화가잖아...이런 안타까움과 위안이 책을 읽으면서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의 내밀한 속마음을 담은 이 편지글들이 나에게 보여준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단순히 천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한 진정한 예술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화가로서 세상에 어떤 책임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깊은 고뇌와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했고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했다.

 

또한 그는 책도 많이 읽었다. 특히 졸라, 플로베르, 모파상, 공쿠르 형제 등을 거론하며 이런 프랑스 자연주의자들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p.152)이라고 글을 쓰는 여동생 윌에게 말한다.

모파상의 <좋은 친구>(벨 아미)는 걸작이며, <삐에르와 장>은 '참 아름다운 소설'(p.165) 이라며, 자신은 모파상의 소설을 통해서 '좋은 웃음의 필요성'(p.152)을 발견했다고 한다.

반면,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을 원한다면' 공쿠르의 작품이나 졸라의 <목로주점>,<삶의 환희>를 읽어보라고 한다. 작가들이 글을 쓰기 위해 세상을 바라보던 관점과 자세를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을 향한 열정과 진지함이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다음은 내가 고흐를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하며 감동 깊게 읽은 문장들이다.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흔히들 말하는 내 그림의 거친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자만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p.64)

 

나는 이 세상에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 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어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 그것이 나의 목표다. 이런 생각에 집중하면 해야 할 일이 분명해져서, 더 이상 혼란스러울 게 없다. 요즘은 작업이 아주 느리게 진행되고 있으니, 더욱더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겠다.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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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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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에서 거대한 간극에 대해 썼습니다. 문화대혁명 시대와 오늘날의 간극은 역사적 간극일 테고, 이광두와 송강 사이의 간극은 현실적 간극일 것입니다. (중략)
우리의 삶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현실과 역사가 중첩되는 거대한 간극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자(病者)일 수도 있고, 모두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극단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과 과거를 비교해봐도 그렇고, 오늘날과 오늘날을 비교해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 작가 서문 중

 

문화대혁명과 개혁 개방시대를 거치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아가는 두 형제를 중심으로 급박한 시대 변화에 우왕좌왕 하면서도 어떻게든 발맞추어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2005년 출간된 위화의 소설이다.

 

나는 지금은 절판된 2007년 휴머니스트에서 나온 3권짜리로 읽었는데, 작년 12월, 2020년 한 해 동안 지친 마음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위로하고자 집어든 책이다. 근데 몇 장을 넘기자마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위화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으나 내가 생각했던 그런 위화의 소설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너무나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묘사에 당황스럽다가도 때로는 그것이 너무 과장스럽게 느껴져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싶기도 해서 중간중간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공중변소에서 여자 엉덩이를 몰래 훔쳐보다 들키는 이광두, 그의 부친도 그렇게 여자 엉덩이를 몰래 훔쳐 보다 똥통에 빠져 익사했다는 사실. 그런 이광두의 부친을 똥통에 들어가 건져 내는 송범평. 그 반듯한 남자와 재혼하는 이광두의 모친 이란. 그렇게 가족을 이루고 송범평의 아들 송강과 이란의 아들 이광두는 둘도 없는 형제가 된다. 이광두는 송강과 즐거운 유년 시절을 보내고 특유위 '또라이'짓들로 (ㅋㅋㅋ) 독자를 안절부절 웃게 만든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오면서 지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송범평, 병을 치료하러 상하이로 갔다가 남편이 죽은지도 모르고 돌아온 엄마 이란,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죽음으로 무너지는 이란의 이야기 등,

이렇게 비극과 희극이 맞물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기가 막힌 이야기가 900페이지 넘게 펼쳐진다.

 

문화대혁명과 자본주의 개방이라는 이 극단의 시간을 40년 만에 겪어야 했던 중국인들. 이런 극과 극을 오가는 삶을 산 중국인들과 그 시대를 묘사하기 위해 위화는 역시 극단적인 과장으로 풍자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더럽고 천박하며 허황되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그 기가 막힌 시대를 진지하고 깊이있게만 묘사했다면 오히려 위화가 말하려한 그 '역사적, 현실적 간극'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지 못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화 소설의 힘은 역시 이야기에 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될 것 같은 이야기를, 그러나 중국이기에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어쩌면 그리도 끊임없이 나오는지 읽으면서 '역시 중국인들이고 중국 작가답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광두가 공중변소에서 여자 엉덩이를 훔쳐보던 더럽고 순박한 시절을 지나 문화대혁명이라는 광기로 얼룩진 비극의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를 받아 들여 '돈'이라는 새로운 광기가 지배, 천박한 욕망이 끓어오르는 현대의 중국까지, 중국 현대사와 그  변화 속에서 각기 다르게 살아가는 온갖 인간 군상들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위화 소설의 매력은 비극을 마주하면서도 웃을 수 있고 희극을 보면서도 눈물을 짓게 만드는데, 이 소설은 그런 그의 특징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듯 싶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덧붙인다. 

웃기고 재미있다. 더럽고 추잡해서 얼굴이 찡그려 지다가도 어느새 웃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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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1-07 1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 배고파집니다.
하도 웃어서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1-07 16:36   좋아요 2 | URL
저는 만두가 먹고 싶어지더라구요 ㅋㅋㅋ
 
시지프 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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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 <이방인>을 다시 읽기 전, <이방인>의 '사상적 단초'가 되는 <시지프 신화>를 먼저 읽었다. 카뮈 글쓰기의 특징은 어떤 한가지 주제를 소설, 희곡, 에세이 세가지 형식의 세트로 발표한다는 점이다. 카뮈의 작품 주제는 3단계로 나뉘는데, 그 첫번째가 '부조리 3부작'으로 알려져 있는 소설<이방인>, 희곡<칼리굴라>, 철학 에세이<시지프 신화>이다. 두 번째는 '반항 3부작'으로 <페스트>, <정의의 사람들>,<반항하는 인간>이며, 3단계는 소설 <최초의 인간>, 희곡<동 파우스트>, 에세이<네메시스의 신화>를 구상했으나 비극의 자동차 사고로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p.15)

 

<시지프 신화>는 '자살'이라는 명제로 시작한다. 인간은 자신이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될 때, 무의미한 삶을 마감하고 싶을 때 자살을 생각한다. 카뮈는 인간이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고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는 그 감정을 '부조리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이런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고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우리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카뮈는 묻는다.

자살이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과연 부조리는 죽음을 명하는가'(p.23)라고.

 

무표정한 환자들로 가득한 병원에 있다가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고 반짝이는 차들이 대로를 달리며 밝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활기차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봤을 때,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병원 문을 열고 마주친 세상은 방금 전까지 내가 봤던 죽음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르기에 나는 '왜?!'라는 질문을 한다.  그러나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그 '낯섦'앞에서 고개를 흔들며 방금 내가 봤던 세상을 잊으려 할 뿐이다.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없고, 카뮈가 '피비린내 나는 수학'(p.33)이라고 한 시간 앞에서 인간은 그저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명확한 답을 원하고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야 만족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연속적인 후회와 무력의 역사'(p.37)일 뿐이다. 그 어떤 철학자도 답을 주지 못했고 (여러 실존철학에 국한할 때), 그들은 결국 신으로 '도피'하거나 '인간의 척도를 넘어' 부조리 자체를 무시하고 '비합리를 신격화'(p.63) 함으로써 '철학적 자살'을 저질렀다고 카뮈는 말한다.

 

카뮈는 '부조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p.52)이라고 말한다.  부조리는 세상과 인간을 '묶어주는 유일한 끈'이며 이 셋은 삼위일체로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셋 중 하나라도 없다면 전체는 파괴된다.

 

여기서 다시 카뮈의 '부조리는 자살을 명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결국 자살은 부조리를 끝나게만 할 뿐 해결책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가 지탱되려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기증 나는 추락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 되는 저 한 가닥의 구두끈이다. 자살자의 반대, 그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이다.(p.84,85)

 

'도피'나 '비약'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삼위일체-세상,인간,부조리- 중 하나라도 부정하면 그것은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부조리 상태에서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부조리를 주시'하고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그냥 의식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카뮈가 부조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끌어낸 세 가지 결론은 '반항','자유','열정'이다.

희망이 없음을 인정하되 그것이 절망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시키고 '극단적인 긴장, 고독한 노력'(p.86)으로 반항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놓은 목표에 자신을 가둬 놓지 않으며 내일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부조리만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당한 자유의 원리'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삶이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더불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p.91)라고 말한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p.97)

 

그렇다면 부조리한 인간은 어떤 사람인가?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의 예로 돈 후안, 연극배우, 정복자를 든다. 최대한 많은 여자를 만나며 그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이 삶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돈 후안, '모든 삶들 속으로 파고들어 다양한 모습의 삶을 경험'하고 연기하는 배우, 운명 앞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죽음을 의식, 죽음마저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정복자, 이들은 삶의 영원함을 믿지 않고 자신의 삶을 끝까지 소진하는 부조리의 인간들이다.

 

또한 카뮈는 예술가와 작가에 대해 말한다. 부조리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설명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묘사하는 것'(p.145)이며, 부조리한 작품은 '명철한 형태의 사고가 그 속에 개입되어' 있으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며, 어떤 인생의 목적이나 위안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지어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를 창조'하는 철학자여야 하며,이미지, 감각, 암시들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정 부조리한 작품은 그 어떤 답을 주어서도, '환상의 제물이 되어 희망을 사주'(p.155)해서도 안 된다. 카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영생의 기쁨과 희망으로 인간의 삶을 비약하는 알료샤를 예로 들면서 그는 '부조리한 소설가가 아니라 실존적 소설가'(p.167)라고 말한다.

 

신들을 속이다 미움을 사서 산 밑에서 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 시지프. 온 힘을 다해 올려놓은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러지고 시지프는 또 다시 아래로 내려가 돌을 굴려 올려야 한다. 카뮈는 그런 시지프의 운명을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에 빗대었다.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는 진정 부조리의 영웅이며, 끊임없이 반항하는 부조리의 인간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이 모습은 매일매일 똑같은 작업을 하는 현대 노동자들의 모습과도 닮았다.

 

그런데 카뮈는 시지프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모습 보다 다시 돌을 굴리기 위해 산 밑으로 내려오는 그 '휴지의 순간'에 주목한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 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p.182,183)

 

시지프는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에 희망이 없음을 안다. 그러나 절망하지도 않는다. 멸시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극복, 그 순간의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고 '바위보다 강'한 것이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이야말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며, 자신의 전부를 소진하여 끝까지 투쟁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당당히 대면할 때 행복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극의 주인공 시지프가 이 책의 마지막엔 '행복한 시지프'로 묘사되는 이유이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p.185)

 

이 책은 올해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고생한 작품이다. 200페이지도 안되는 책을 읽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실존주의 철학자들, 후설의 현상학, 내가 읽지도 않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들과 카뮈의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스타일의 문장들 그리고 자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는 번역. 

마침 올해 열린책들에서 새로 번역이 되어 나왔길래 도서관에 찾아봤더니 전체 도서관에 단 한 권도 비치가 안되어 있었서 참고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공부하듯이 최선을 다해 읽었는데, 리뷰를 쓰다보니 '이거 내가 지금 알고 하는 소리인가' 싶어 글을 쓰다가 멈추기를 수십 번 했다.

 

내가 어렵게 읽은 카뮈의 메시지는 이렇다.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가혹한 인간의 운명은 시지프의 형벌과 비슷하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부조리한 세상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희망은 없고 죽음의 댓가로 따르는 영생의 기쁨같은 것도 없다. 다 환상이 만들어낸 거짓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절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항해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면 안된다. 미래의 계획, 인생의 목표, 영원의 기쁨에 묶여 있지 말고 모든 가치판단,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가는 반드시 죽는 사형수이기 때문이다. 늘 명철하게 부조리의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소진시켜 열정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지프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기쁨을 갖고 산을 내려오는 이유일 것이다.

신들에게 반항하는 시지프는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초상인 것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삶 속에서다.(p.135)

 

이 문장은 예쁜 캘리그라피 책갈피로 만들어 간직하고 싶다.

이런 문장을 보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욱 안타깝다. 너무나 아까운 죽음이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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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12-3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29님 ^^ 올 한 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많이 뵈요~

coolcat329 2020-12-31 23:21   좋아요 1 | URL
앗~~^^ 방금 초딩님 글 읽고 댓글 발견~~통했네요.
초딩님 댓글 감사하고 오늘 밤 좋은 꿈 꾸시길~~☺

페크pek0501 2021-01-01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명한 저서를 읽으셨네요.

님이 뜻하는 대로 일이 술술 풀리는 행복한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 ★ ★

coolcat329 2021-01-01 13:50   좋아요 0 | URL
술술~풀리는~정말 이런 한 해가 우리 모두에게 오기를요~
감사합니다 ~☺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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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두 편의 중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표제작인 <달에 울다>는 평론가 신형철이 극찬을 해서 유명, '시소설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한다. 통속적인 스토리를 마루야마 겐지만의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 독특한 형식으로 서늘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여준 소품같은 작품이다.


남자 주인공 방에는 병풍이 있다. 주인공의 상상 속에서 계절 마다 변하는 병풍 속의  풍경과 달의 모습, 눈 먼 법사가 부는 비파 소리의 묘사는 이 소설의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다. 춘하추동(春夏秋冬) 각 계절의 풍경에 맞추어 주인공의 열살부터 마흔까지의 삶이 그려지는 구성이 매우 인상적이다.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를 부수어 만든 이불 속 아이는 바로 30년 전, 이제 막 열 살이 된 나다.(p.9)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와 사과 농사를 지으면서 한번도 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작고 외진 마을이지만 이곳에도 세상의 폭력과 잔인함, 그 뒤엔 권력이 숨어 있다.

 

마을의 권력인 촌장의 곳간이 털릴 뻔하고 한 남자가 도망친다. 그 남자는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 선두에는 화자인 '나'의 아버지가 있다. 도둑을 잡은 기념으로 마을엔 시끌벅적한 잔치가 열리고 죽은 남자의 아내와 딸은 마을을 떠난다. 떠난 지 얼마 안되 다시 돌아온 모녀, '나'는 죽은 남자의 딸인 야에코를 사랑한다.

 

주인공이 20살, 30살, 40살...나이 듦에 따라 병풍 속 계절도 바뀌고 세상도 변한다.

야에코와 사랑을 나누는 '나'는 20대 여름의 '뜨거운 영혼'.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야에코를 보내고 홀로 남아 뻔한 앞 날만을 마주한 30대의 '나'는 가을의 마비된 영혼이며, 삭막하게 변한 세상 속에서 모두가 떠나고 홀로 사과 농사를 짓는 40대의 '나'는 '패기 한 조각 없는 회색빛 영혼'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 하얀 눈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야에코를 발견한 '나'는 그녀의 삶은 그래도 '시시한' 나의 삶보다는 '농익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슴 속에는 야에코가 아버지를 잃은 그 날의 죄책감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봄이 와 땅이 부드러워져 그녀를 묻어 주고 나면 그 '긴 꼬리'는 끊어질 것임을 '나'는 안다.

 

마음을 적시는 문장들 속에 도시화로 인해 황페해져가는 자연과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향한 작가의 싸늘한 시선도 눈에 띈다.

야에코의 아버지를 집단으로 죽여 놓고도 전혀 죄책감을 못 느끼는 마을 사람들, '온갖 짓을 다 저지르고도' 잘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며 '나'는 세상에 환멸을 느낀다.
소독약은 진드기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반디도 죽이며, 오염된 지하수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마을 주민 전원이 살아가는 방식을 고쳐야 한다’(p.82) 고 작가는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말한다.
또한 사람들은 점점 나쁘게 변하고 ‘그저 애매한 상태로 질질 후퇴’(p.96)만 할 뿐이며, 심지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들까지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p.96)고 나날이 변하는 세상의 모습에 회의적이다.

"앞으로도 좋은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아."(p.105)라고 말하는 버스 운전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 인간들, 그 속에서 ‘사과나무와 함께 언제까지나 이 땅에서 움직이지 않’(p.38)겠다는 주인공의 모습이 애달프고 귀하게 느껴진다.
야에코와 ‘영리한 개’ 백구, 화자가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병풍 속에서 사과나무는 셀 수 없이 많아짐을 ‘나’는 본다.

'봄이 오면 하얀 강아지를 키우자'는 '나'에게 남은 건 이제 사과 나무뿐이다. 야에코네 사과와 자신의 사과를 접목기켜 어린 나무를 심겠다고 한 꿈, 남자는 그 꿈을 이루었을까...

다음은 야에코에게 생명이 되어주고 싶은 '나'의 사랑이 아름답고도 강렬하게 나타난,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이다.

 

 

마을 지하수는 뜨겁다.
그렇다고 온천수는 아니다. 백구나 야에코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항상 그 물을 감지하고 사과나무처럼 끊임없이 빨아들이며 살고 있다. 내 몸에서 여과되고 농축된 물은 야에코 몸으로 옮겨 가 그녀의 나날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p.48)

 

 

두 번째 소설인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는 직장과 가족에게 버림받고 제2의 인생을 위해 고향을 찾아간 한 40대 남자의 이야기이다.

맨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 떠나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기로 한 주인공과 그가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이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그려진다.

 

주인공은 속세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이곳에서 또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피리새. 피리새만이 자신을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소리를 쫓아 간 곳에서 노인을 발견하는데, 노인의 딸은 인근 도시에서 몸을 팔아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매일 온천욕을 즐기며 피리새를 키우고 있는 노인에게 죽이고 싶을 정도의 증오심을 느끼지만 결국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 떠나기로 한 날 아침 피리새 소리를 듣고 잠을 깬 '나'는 피리새를 돌려주기 위해 노인을 찾아가는 도중 생각한다.

 

'누구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면 된다. 나는 나대로 내 멋대로 살아가겠다. 단순한 이치였다.'(p.261)

 

그러나 노인은 온천에서 죽어 있었고 '나'는 조롱을 언덕 위 나무에 매달아 놓고 피리새가 날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다. 피리새가 자유를 찾아 날아가기를 바라며 '나'또한 마을을 떠나고 물 흐르듯이 삶을 이어나간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찾아온 곳에서 피리새를 얻기만 하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주인공. 그러나 작가는 그것은 착각이며 외부에 의존하는 삶은 결코 그 답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진정한 삶을 살고 싶다면 오직 스스로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달에 울다>가 시소설로서 문장이 아름답고 계절마다 변하는 이미지가 인상깊었다면, 두 번째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상처받은 영혼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한 인간의 고독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러나 <달에 울다>에 비해서 재미가 없었고, 정신이 불안한 주인공의 심리가  많이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아 잘 읽히지 않았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은 처음 읽어 봤는데, 글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달에 울다>를 만난 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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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2-28 14: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이 아주 오래 전에 <납장미>를 쓴 이로군요.
깡패 총 쏘는 얘기 하다가 어떻게 ˝시소설˝을 쓰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0-12-28 17:29   좋아요 0 | URL
네~맞아요ㅎ 납장미. 예전에 폴스타프님 리뷰 중 성윤석 시인의 <밤의 화학식> 읽었는데, 거기 첫번째 시가 ‘납‘(Pb)인거에요. 그래서 마루야마의 납장미에 대해 써놓으신걸 읽고, 굉장히 서정적이다 생각했어요. 납장미가 총알이 무쇠종에 부딪혀서 표면에 퍼진 자국이라고. 저는 납으로 만든 장미인줄 알았거든요.

페크pek0501 2020-12-28 14: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는 1인입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추천하는 걸 책에서 보고서 샀는데 읽지는 못했어요.
새해엔 꼭 읽으려고요.
아, 새해엔 구매한 책이 많은 해가 아니고 책을 많이 읽은 해로 기억되길 소망합니다.

coolcat329 2020-12-28 17:30   좋아요 0 | URL
이 책 갖고 계시군요. 네 저도 책 그만 사들이고 있는 책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새해엔 페크님 책도 꼭 읽을게요. 😀

잠자냥 2020-12-28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새로나온 버전으로 <달에 울다> 살까말까 고민중이었는데 쿨캣 님 포스팅 참조할게요! ㅎㅎ

coolcat329 2020-12-28 17:3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이 안 읽으신 책이 있다니, 살짝 기분이 좋으네요 ㅎ 이번에 새로 나왔군요. 😊

scott 2020-12-31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켓님
2021년산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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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 福마뉘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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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12-31 10:24   좋아요 1 | URL
만나면 기분좋은 스콧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