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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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츠바이크의 책으로 현재 절판 상태.

<이별여행>, <당연한 의심>두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별여행>은 사랑과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이야기이다.

 

"시간은 사라져버지리 않았어요. 시간은 우리 마음 속에, 우리 의지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저는 이를 악물고 9년을 기다렸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에게 묻겠어요, 그 맹세를 기억하고 있어요?" (p.64)

 

9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온 사랑...그 사랑은 과연 그대로 일까?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의 그 미묘한 감정부터 그것이 '열정적 사랑'임을 깨달으며 받아들이는 황홀의 순간, 그리고 오랜 시간 가슴 속에서 간직해 온 사랑이라는 감정이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지, 츠바이크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과 속성을 섬세하면서도 예리하게 보여준다.

못 이룬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떠난 이별여행,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과거를 찾아 헤매는 두 사람의 그림자...쓸쓸한 연민을 자아내는 이야기.

 

<당연한 의심>은 '나는 그가 살인범이라고 확신한다' 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가 츠바이크인줄 모르고 읽었다면 그의 작품이 절대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그의 소설과는 좀 색다른, '코지 미스터리'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떤 대상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넘치는 애정을 쏟아붓는 '지나치게 왕성한 혈기'를 가진 남자와 그로 인해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주변의 변화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츠바이크가 '심리 스릴러를 썼어도 참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릴있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에서는 사람의 심리  뿐 아니라 개의 심리까지 묘사, 색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이 두 작품 외에도 이 책은 뒤에 이사벨 오쎄(Isabelle Hausser)라는 이탈리아의 번역가 겸 비평가가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생애와 작품>이라는 글을 담고 있는데, 그의 유년부터 브라질에서의 마지막 삶까지 간략하지만 소상하게 담고 있어 그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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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2-08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인가 가물가물 해서 블로그를 검색
해 보니 제가 읽은 츠바이크의 책은 이 책
이 아니라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였네요.

이화북스란 출판사에서 작정하고 츠바이크
의 책들을 낼 모양이니 기대해 봅니다.

coolcat329 2021-02-08 13:32   좋아요 2 | URL
그쵸? 이화북스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ㅎ 조제프 푸셰도 읽는 중인데 참 재밌습니다. 크리스티네 장편인가요? 이것도 구해서 읽어야 겠습니다. 저는 <초조한 마음>이 유일한 장편인줄 알았거든요. 이화북스에서 새로 다 내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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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 소설 속 인물들은 '적당히' 하는 법이 없다. 감정의 깊이와 폭이 극단으로 치닫는 그런 인간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 책이 담고 있는 두 편의 이야기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도 마찬가지다.

 

<체스 이야기>는 츠바이크가 세상을 뜨기 1년 전에 쓴 작품이다.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여객선 위에서 두 남자, 세계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와 나치에 의해 감금당했다가 풀려나 브라질로 떠나는 B박사가 벌이는 체스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외부 이야기인 선상 위에서 벌어지는 체스 대결과 내부 이야기인 미스터리한 B박사의 과거가 극적으로 전개된다.

 

<낯선 여인의 편지>는 열세 살때부터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해 온 한 여자의 고백을 담은 서간체 소설이다. 감성이 발달하지 않은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여인이지만, 츠바이크는 독자로 하여금 그래도 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끔 만들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왜냐하면 여인이 사랑에 빠졌던 순간과 남자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 자신의 가난을 보여주기 싫은 여인의 자존심, 후에 남자와 함께한 밤의 희열, 남자가 자신을 하룻밤의 여자로 대할 때의 그 비참함과 좌절, 그러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남자를 구속하고 싶지는 않은 사랑에 빠진 여인의 마음을 너무나 섬세하고 깊이있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자기를 알아봐주기를 그토록 원했던 여인, 그러나 끝까지 '낯선 여인'으로 남게 된 한 여인의 이런 마음을 츠바이크가 아니였다면 아마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여인은 마지막에 남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저를 위해서 해마다 당신 생일에-그래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날이지요-장미를 사서 꽃병에 꽂아주세요."(P.147)

여인은 남자의 생일 때마다 꽃을 보내왔는데, 자신이 죽어도 그 의식을 이어가 달라는 부탁이다.

이런 여인을 보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미치지 않기 위해 시작한 체스가 결국엔 광기로 치달아 자아분열까지 간 남자와 한 남자만을 평생 사랑한 여인의 애절한 고백을 통해 인간의 광기와 순도 100%의 사랑을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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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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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 많은 외국어로 번역,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 백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많고,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아쉽게도 책을 가까이 한 세월이 그리 길지 않아 모든 작가가 호기심의 대상이고 그만큼 관심이 가는 작가는 많으나, 이렇게 작가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냥 '무조건' 좋은 작가는 아직까지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유일한 듯 싶다.

2013년 처음 그의 전기소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읽고 (책에 관심만 많았지 거의 안 읽던 시절이었는데 어떻게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고전적이면서도 세련되고 유려한 문체에 그냥 푹 빠져버렸고, 그의 문체만큼이나 그가 실제로 교양있고 예의바르며 여러 외국어에도 능통한 지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매료되었다.

 

<감정의 혼란>은 1년 전 '녹색광선'의 다른 두 책 <눈보라>,<미지의 걸작>과 함께 구입한 책으로 책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이 구매욕에 기름을 붓긴 했지만, 푸시킨, 발자크, 츠바이크의 작품이라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또 어떤 책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올지 기대하게 만드는 시리즈인데, 구성과 내용을 좀 더 알차게 해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이야기는 30년간의 교수생활을 기념하여 어문학자들이 헌정한 기념 문집을 보며 주인공 롤란트가 과거를 회상, 진실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전기문이기도 한 이 책은 그저 자신을 '기술했을 뿐', 자신의 본질을 밝혀주지는 못하기에,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지금의 자신을 만든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전기문에는 존재하지 않는 감정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대학 학장으로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학구적인 집안에서 자란 그는 학문에 대한 반감에 공부를 멀리했지만 대학만큼은 다녀야 한다는 아버지의 주장에 베를린 대학 영어학부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은 형식적이며 지루하고 답답할 뿐, 대학 생활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방탕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이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불시에 찾아오고 애인과 방에서 즐기고 있던 그는 자신의 문란한 삶을 아버지에게 들키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가 불쾌감과 경멸감을 억누르고 침착하고 냉정하게 묻자그는 아버지에게 순간 존경심을 갖게 되고 자신의 의미없는 삶을 반성하게 된다.

진지하게 학문에 임하고자 작은 도시에 있는 대학의 영문학부에 가게 된 그는 그곳에서 우연히 셰익스피어를 강의하는 영문학 교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 순간 그는 교수에게 알 수 없는 강함 끌림을 느끼게 되고 동시에 학문의 열정에 휩싸이게 된다.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심장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내 자신이 스스로의 열정을 동원해 감각을 고양시킬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한 인간에게, 선생님에게 사로잡힌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p.46)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알게 된 교수는 자신이 사는 주택에 세 놓은 방도 소개해주고 저녁에 초대하는 등 두 사람은 제자와 스승으로 교류를 하게 된다. 롤란트는 무엇을 하던지 '언제나 열정으로부터 시작'하라는 교수의 가르침과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신뢰에 보답을 하고 그에게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 공부에 전념한다.

 

난생 처음으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부지런함을 그토록 뜨겁게 가열시킨 것은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그의 신뢰에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고 나를 사로잡았던 그의 미소를 얻고 싶은 허영심,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선생님도 내게 느끼기를 바라는 바로 그 허영심이었습니다. (p.67)

 

그러나 이 교수에게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토록 멋진 강의로 모든 이들을 감격에 휩싸이게 하던 그가 어떤 날은 활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딱딱한 강의로 실망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호기심에 그가 쓴 책들을 찾아본 롤란트는 그만 놀라고 마는데, 이유는 20년간 쓴 책이 몇 권 되지도 않고 그 내용도 강의에 비해 전혀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롤란트는 같은 집에 세들어 살면서 교수 부부와 식사도 같이 하고 유대감을 느끼며 그를 흠모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 가지만, 그가 자신의 그런 마음을 내비치는 순간 교수는 냉정하고 쌀쌀맞은 표정으로 돌변, 비꼬는 말로 상처를 주면서 롤란트를 절망스럽게 만든다.  게다가 갑자기 며칠 씩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 이런 돌발 행동이 롤란트를 혼란스럽고도 불안하게 한다.

 

교수에겐 35살의 아내가 있는데 부인과의 관계도 수상스럽다. 부부 사이에 아무런 긴장도 느낄 수 없고 둘 사이엔 '무겁고 후덥지근한 감정의 무풍(無風)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롤란트는 묘사한다. '오직 정신적인 것에만 활기를 띠는' 교수와는 달리 그녀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않고, 항상 흥얼거리며 육체적인 활동을 할 때 가장 기분좋아 보인다. 이렇게 상반된 두 사람이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 교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미스터리하다.

 

이런 기묘한 집안의 분위기,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갑자기 차갑게 변하는 모습, 어느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이런 교수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롤란트도 불안하지만, 읽는 나도 긴장되고 때로는 오싹한 느낌마저 들어서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 교수는 왜 이러는 걸까? 이 궁금증이 책을 내려놓기 힘들게 한다.

나중에 진실에 도달하기까지, 이런 인물들 사이를 오고가는 알 수 없는 사랑과 감정들, 지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향한 열망과 육체적 욕망, 그 안에서 꿈틀대는 금지된 욕망 등이 이 세 인물을 통하여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된다.

 

토마스 만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은 사랑과 자유 정신의 모델"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간의 모순성과 그로 기인한 여러 감정을 담고 있는 사랑의 모습을 생각했다. 고통, 절제, 절망, 연민, 신의, 우정, 배려, 숭고함, 존경, 순수, 부끄러움 등...이 모든 미묘한 인간의 감정을 담고 있는 사랑의 모습.

 

이 책은 두 번 읽으면 좋다. 왜냐하면 처음 읽을 때는 수상한 교수의 정체를 생각하며 긴장 속에서 읽게 되기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감정에 몰입하기가 힘든데, 두 번째 읽을 때는 교수의 감춰진 비밀을 알기 때문에 그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감정이입하며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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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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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의 성(性)안에만 갇혀서 사는 건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남자다움, 여자다움이라는 사회적 통념, 강박에서 나와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그런 날을 그려보며, 진정한 평등은 여성해방 뿐만아니라 남성도 그들의 세계에서 해방되어야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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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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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레스코프(1831~1895)는 톨스토이(1828~1910)와 도스토에프스키(1821~1881)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19세기 러시아 작가이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데, '문단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독특한 문학세계로 인해' 당시엔 인정받지 못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그의 문학이 재조명을 받게 되어 러시아 문학사에 한 획을 긋게 되었다고 한다.

문학사가 미르스키는 러시아를 정말 알고 싶다면 도스토옙스키나 체호프보다 '러시아 작가 가운데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 레스코프를 읽으라고 한다. 또한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도스토옙스키를 그렇게 많이 읽는 게 이상하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 또 그에 반해 왜 레스코프는 읽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 책은 두 편의 소설이 담겨 있는데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쌈닭>으로 1865년 발표했다.

둘다 여성이 주인공인데, 레스코프는 러시아 여성에 관심이 많아 '고향 오룔 부근의 여성들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12편의 시리즈를 쓰려고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두 작품만을 발표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은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오십이 넘은 상인에게 시집 온 카테리나 리보브나가 주인공이다. 20년을 살다 간 전 부인에게서도 자식을 얻지 못한 상인은 가업과 재산을 물려줄 자식을 얻고자 카테리나 리보브나와 재혼을 했고, 5년이 지났으나 그녀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얻지 못한다. 풍족한 생활이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주위의 비난과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지루한 생활은 처녀시절 자유분방했던 그녀에겐 숨막히는 권태로 다가온다.

 

다시 하품이 나온다. 나른한 기분에 젖어 한두 시간 누워 잠을 잔다. 깨어나면 또 다시 러시아의 권태, 상인집의 권태가 찾아온다. (중략) 그녀의 이러한 권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4)

 

이런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제분소의 둑이 터져 남편이 집을 비우게 되고 그녀는 하인 세르게이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이 하인은 여자 꼬시는 데는 도사로 먼저 일하던 집의 마님과도 정을 통했다고 소문이 나있는 그런 전형적인 색마인데, 이런 그가 기나긴 권태에 짓눌려 있던 카테리나 리보브나의 그 숨겨진 욕망을 간파하는건 식은 죽 먹기.

남편이 계속 집을 비운 사이 그녀는 밤마다 세르게이와 즐거운 밤을 보내는데, 어느 날 이 사실을 시아버지가 알게 된다. '세르게이 없이는 단 한시간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카테리나 리보브나. 이 때부터 자신의 사랑을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해 버리는 그녀의 무섭고도 거침없는 행보가 시작된다.

카테리나 리보브나의 추진력은 그 어떤 인물도 따라 오지 못할 만큼 그 과정이 어떤 망설임이나 고민없이 진행되는데, 이는 정작 살인을 저지르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세르게이와 대조된다.

작가는 이런 카테리나를 통해 겉모습은 아름다고 약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남성을 능가하는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러시아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다.

 

이와는 다르게 <쌈닭>은 또 다른 여성상을 보여준다. 주인공 돔나 플라토노브나는 외모부터 카테리나와 다르다. 

 

돔나 플라토노브나는 키가 크지 않았는데, 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아주 작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녀는 거대해 보였다. 이런 착시 현상은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흔히 말하듯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뚱뚱했기 때문인데 높이로 자라지 못한 것을 넓이로 대신한 듯했다. (p.118)

 

높이 자라야 하는데 넓이로 자랐다니...안 웃을 수가 없다. 그녀의 잠버릇은 또 얼마나 웃긴지.

 

"게다가 잠은 그야말로 떡잠을 잔다고. 눕기도 전에 곯아떨어져 버리거든. 그리고 나는 한 번 잠들면, 누가 나를, 참새들이 있는 곳에 허수아비로 세워놓는다고 할지라도, 양껏 다 자기 전엔, 결코 아무것도 느끼질 못한다고." (p.118,119)

 

돔나 플라토노브나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산전수전 안 겪어 본 일이 없는 세상 물정에 밝은, 그러나 그만큼 험한 경험도 많이 한 여인이다. 공식적인 직업은 레이스 상인이지만 여기 저기 관여를 안하는 일이 없어 중매, 가구와 중고의류 구매 알선, 돈 구해주기, 일자리 알선, 비밀 편지 전달 등 '사방팔방으로 눈과 귀를 열고, 도처에 코를 들이'미는 사람이다. 그녀의 이런 오지랖은 그녀 자신도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 그녀의 삶은 늘 분주한 일로 가득차 있다.

 

이 소설은 이런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온갖 주변 일에 관여하는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소설 속 화자인 '나'에게 들려주는 수다로 전개되는데, 이는 작가 레스코프가 당시 생생한 삶을 보여주기 위해 특유의 언어유희를 사용한 것으로 '스카즈 '기법이라고 작품 해설에 나와있다.

이런 끊임없는 수다를 통해 그녀가 특유의 단순함과 억척스러움으로 어떻게 대도시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살아왔는지,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어 재미있다.

 

그러나 숱한 역경에도 늘 오뚜기처럼 일어섰던 그녀가 마지막 결말에 가서 아들뻘 되는 남자를 혼자 사랑하며 끙끙 앓다가 급성 쇠약증으로 떠나는 모습은 소설 앞부분에서 자신의 주먹을 쥐어 보이며 "나한테 여성미인지 뭔지는 바로 이 안에 있다고."(p.112) 말한 그녀의 모습과 상반된다.

주먹을 꼭 쥐고 험한 대도시 삶을 견뎌온 여인이 사랑 앞에선 그 주먹을 더 이상 꼭 쥘 수 없다니, 카테리나처럼 그녀도 사랑의 열정 앞에선 자신을 파멸로 몰 수밖에 없는 여인일 뿐임을, 작가는 당시 러시아 여성들에게서 이런 자기 모순적인 점을 느꼈던 것일까...

 

이 작품의 역자는 '이지적이며 행동력 있는 투르게네프의 아가씨들이나, 도스토옙스키의 팜므파탈적 여성들, 혹은 체호프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들과는 달리 레스코프의 촌부들은 러시아 벽촌 풍경과 함께 러시아인들의 원시적 특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고 말한다.

 

두 작품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고 사랑 때문에 쓰러지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면에 남성 못지 않은 강인함, 촌부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아둔함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한 여성의 모습도 보여준다.

레스코프가 계획한 대로 12편의 유형별 여성 이야기가 나왔다면 당시 러시아 민중 여성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더 다채롭게 볼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다. 두 작품 다 재미있었지만 <쌈닭>의 영악한 대도시가 만들어낸 돔나 플로토노브나라는 캐릭터가 권태에 바람이 난 카테리나보다 더 인상 깊었다.

색다른 러시아의 소설을 읽고 보고 싶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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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1-21 13: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에서 문제가 됐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러시아의 맥베스...>를 오페라로 만든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였습니다. 그거 영화버젼도 있는데요, 저는 VHS 필름으로 가지고 있는데, 우아, 오페라 영화이긴 합니다만 무지무지하게 야~해서, 무척 좋습니다. 목욕탕 장면에서 남자들이 떼를 지어 홀딱 벗고 정면으로 서 있습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1-21 13:23   좋아요 2 | URL
‘떼를 지어 홀딱 벗고 정면‘이라뇨! 😂 ㅋㅋㅋ
<시대의 소음>을 읽어 보고 싶어요. 이렇게 또 독서 확장을 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미미 2021-01-21 1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왼손잡이>궁금했는데 이 작품도 읽어보고싶네요!

coolcat329 2021-01-21 13:54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왼손잡이>읽고 싶어요!

Falstaff 2021-01-21 15:54   좋아요 4 | URL
저는 이 책을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읽고 바로 다음날 읽었거든요, <쌈닭>.

두 작품 공히 여자가 출현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먼저 조지 엘리엇. ˝속눈썹에 조그만 이슬이 맺혀있지 않습니까?˝
니콜라이 레스코프. ˝왜 아침부터 소금물로 세수를 하고 있어요?˝

아이고, 제가 헷갈렸습니다. <왼손잡이>하고 <쌈닭>하고요. 죄송합니다. 위 대사는 <쌈닭>입니다.

미미 2021-01-21 14:0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미들마치>를 하루만에 읽으신것도 놀랍네요!

Falstaff 2021-01-21 14:15   좋아요 3 | URL
<미들마치> 다 읽고 그 다음 날에 읽었다는 거였습니다. ㅎㅎㅎㅎ
<왼손잡이>를 읽으시면 새삼스레 애국심이 고취됩니다. 세계를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의 위력을 쌈박하게 느끼실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잉글랜드의 <더버빌가의 테스>도 충청도 사투리에 점령당하지 않았습니까.
아, 저도 충청도 말씨를 멍...이라 표현해왔던 걸 진심으로 반성했습니다. 위대한 충청도 사투리여!

미미 2021-01-21 14:23   좋아요 2 | URL
앗ㅋㅋㅋㅋㅋㅋ저도 예전에 어디선가 그런 번역을 본 기억이 나요!

scott 2021-01-21 14:54   좋아요 1 | URL
팔스타프님 ㅋㅋㅋ
저도 그 충정도 사투리 나오는 ‘테스‘읽고 충격에 배꼽을 ㅋㅋㅋ

박선주가 번역한 챈들러에도 충정도 사투리 비속어가 나와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1-21 14: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시골 사람들이라 촌스럽고 러시아 사투리가 너무 구수해서 역자도 번역이 어려웠다고 하는데, <왼손잡이>에서 충청 사투리로 했나보군요. 아 넘 웃깁니다. 이번에 어린왕자가 경상도 사투리 버전 <애린 왕자>로 나왔던데요. 작가는 갱상도구요. 이거 미리보기 읽고 넘 웃겼는데 충청도 ㅋㅋ 넘 좋죠. 저는 개인적으로 충청도 사람들이 웃기더라구요. ㅋㅋ

미미 2021-01-21 14:54   좋아요 2 | URL
농담하신 줄 알았는데 정말 있네요ㅋㅋㅋㅋ

scott 2021-01-21 14:56   좋아요 1 | URL
애린 왕자가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된거였군요 ㅋㅋㅋ

하루키 단편에서 샐린저에 프래니 주이를 쿄토 사투리로 번역해 보면 어떻겠냐고 대화 나누던 주인공이 떠오르네요 ^ㅎ^

scott 2021-01-21 14: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트 모모 하우스에서 저책 표지 여주인공이 나오는‘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봤어요 영화속 풍경이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회화그림 같은 색감과 조명이였는데 스산한 저택 내 밀실 공간과 야생의 거친 풍경 인물들을 너무나도 표현을 잘한 수작이였네요

미미 2021-01-21 14:59   좋아요 2 | URL
<미드소마>에서 그 여배우 넘 인상적이었어요! 레이디 맥베스 너무궁금!ㅋ.ㅋ

Falstaff 2021-01-21 15:05   좋아요 3 | URL
<....레이디 맥베스>는 CD로 듣는 것이 제일 좋더라고요. 영상물은 눈 앞의 장면이 음악의 디테일에 몰입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더군요.
카챠와 세료자가 처음으로 불륜을 맺는 장면, 절묘하게 변용되는 금관의 몸부림을 상상해가면서 감상자 나름대로 장면을 연출해보는 것이, 제 생각엔 대빵이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감상은 개개인이 다 다른지라.....^^;;;

scott 2021-02-10 15: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명품 리뷰 이달의 당선작으로!
추카~*추카~*
설연휴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coolcat329 2021-02-10 16:41   좋아요 1 | URL
어머,어떻게 아셨나요? 참, 부끄럽습니다.🤤이렇게 축하글도 남겨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