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는 1995년 발표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4번째 소설이다. 

그녀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로 탄압이 심해지자 남편과 어린 딸과 함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 뇌샤텔에 머물게 된다. 난민 신분으로 시계 공장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하면서도 헝가리어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녀는 당시를 <문맹>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이곳에 오면서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몰랐지만 틀림없이 이런 것, 활기 없는 작업의 나날들, 조용한 저녁들, 변화도 없고 놀랄 일도 없고, 희망도 없는 부동의 삶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문맹> (p.89,90)


<어제>의 주인공 토비아스도 시계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낯선 나라의 말로 글을 쓴다.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무거운 과거를 가슴에 묻은채, 그는 타국에서 상도르라는 이름의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는 도둑이며 거지이며 창녀였다.'(p.27)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장은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훅하고 내 가슴에 꽂힌다. 

이 소설은 150페이지쯤 되는 짧은 소설로 작가의 글이 늘 그렇듯이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작가가 낯선 타국에서 망명자 신분으로 공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살던 그 시기가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운 삶이었을지 이 소설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망명자들이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보고 술집의 종업원은 토비아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네 외국인들은 맨날 조의금을 걷고 맨날 장례식을 하는군요."(p.63)


또 이런 대화. 


"나, 안 죽었어?

"네가 왜 죽어?"

"가스를 열어놓았는데."

"일주일 전부터 가스가 끊겼어. 돈을 내지 않았거든. 전기료도 마찬가지야. 그것도 곧 끊기겠지."

(p.127)


이 세상은 이들에게 죽음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들은 '무게가 없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가야 하는 길은 '집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 '끝이 없는, 넓고 곧은 길'이다. 

낯선 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뿐. 어떤 때는 눈이 온다. 또다른 때는 비가 온다. 그리고 나서 해가 나고, 바람이 분다. 이 모든 것은 현재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었고, 미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내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다. (p.121)


이들의 삶에 다른 대안은 없다. 꿈과 희망은 '현재'의 걸림돌일 뿐이다. 

오히려 꿈을 내려놓는 순간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을 거야." (p.145)


사랑을 모르고,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기에 '자신만으로도 충분'한 삶, 그래도 신조차 필요없는 삶...이것이 그녀가 말하는 망명자, 이방인의 삶이다. 


역시나 내 눈앞에 예고없이 불쑥 나타난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쓸쓸하다.


'나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p.149) 


작가가 되고자 한 그의 꿈, 한 여인을 향한 애절한 사랑은 그저 '어제'일 뿐이다.

그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22 11: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건 다른 표지군요(구판절판~)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네요 ㅋ어제와 오늘 표현이 좋네요 (150페이지라니 바로 끌립니다^^)

coolcat329 2021-03-22 11:47   좋아요 3 | URL
네~저는 개정판 못 구해서 구판 겨우 구해 읽었습니다. 책은 얇은데 내용은 참...여운이 짙습니다~~

미미 2021-03-22 12: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체 이야기로 인해 마지막 문장이 너무 강하게 와닿았어요!
잘 정리해 주셔서 감동이 되살아납니다!🥲

scott 2021-03-23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물들은 내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다.]이문장속에 작가 아고타의 사상이 응축 되어 있네요 감동이 두배 살아남 !!

coolcat329 2021-03-23 11:55   좋아요 1 | URL
담담하지만 많은 것들이 응축된 문장...저도 같은 느낌입니다.
 
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맹>은 '자전적 이야기'로서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삶을 특유의 깔끔하고 절제된 언어로 보여준다. 

그녀는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4살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이야기를 지어내고 쓰기를 좋아했던 영특한 소녀였다. 어린 동생에게 넌 주어온 아이라며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 인생에서 찾아보기 힘든 행복한 모습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이 찾아온 시기는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과 헤어져 낯선 도시의 기숙사에 들어간 후부터라고 한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소녀 시절, 작가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삶의 버팀목이었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p.34)


<문맹>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이야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작가가 스위스로 망명하면서 자신의 모국어를 상실하고, 일 외에는 할 일도 어떤 희망도 없는 삶 속에서 오로지 다시 글을 쓰기 위해 '미지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는 그 험난한 여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스위스에, 그 중에서도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p.52)


스위스 난민 생활 5년 후 그녀는 학교에 나가 프랑스어를 배운다. 그동안은 말만 했을 뿐 읽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읽지 않고 5년을 살았는지 그녀는 이상하다. 

2년 후 우수한 성적으로 '프랑스어 교육 수료증'을 받은 그녀는 자신이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 프랑스어로 글은 못 쓰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p.112)이라고 다짐한다.  


낯선 타국에서의 삶은 '달리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막'과도 같은 삶이었지만, 그녀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 새로운 언어를 배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국말로 글쓰기도 힘든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끝까지 썼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작가는 이 짧은 '자전적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비장한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p.11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3-21 15: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무살이 넘어서 자유를 준 국가 언어를 배우면서 전쟁으로 인한 충격과 상실에서 멈춰버린 자아가 치열하게 쓰고 또 썼다는것 자체가 인간 승리인것 같아요. 5년동안 스위스에 준 공장에서 일만 했다고 학교는 그후 난민 공동체 도움으로 다녔다고 하네요.

coolcat329 2021-03-21 16:01   좋아요 3 | URL
아 난민공동체 도움으로 공부한거군요. 저는 5년 동안 공장에서 번 돈으로 드디어 학교 들어간 줄 알았어요.
네...정말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에요.

바람돌이 2021-03-21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언어로 읽는 것도 난감한데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책을 쓰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천재여야 하는걸까요? 가끔 사람들의 이런 능력은 너무 너무 신기합니다. ^^ 아고다 크리스토프는 저에게는 정말 강렬한 작가인데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겟네요. 오늘도 좋은 책을 한 권 보관함에 넣어가니 알라딘 서재 마실 성공입니다. ^^

coolcat329 2021-03-22 09:58   좋아요 0 | URL
저는 한국어로 글 쓰는 것도 힘듭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 쓰는 작가들 정말 천재입니다. 나보코프, 쿤데라, 콘라드...이 분들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p.430)


이 작품은 헝가리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1935~2011)의 3부작 소설이다. 

1부 <비밀노트>, 2부 <타인의 증거>, 3부 <50년간의 고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86, 1988,1991년, 2~3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각기 독립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 작품이 동시에 번역되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나오게 되었는데, 1부와 2, 3부는 문체나 분위기가 많이 다르나 세 작품이 내용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부 2차 세계대전부터 2부 구 소련 사회주의 체제를 거쳐 3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현재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부는 대도시에 살던 쌍둥이 소년이 전쟁을 피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 K라는 소도시(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쾨세그)의 외할머니 집에 맡겨지면서 시작한다. 

처음 보는 손자들을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는 포악한 할머니와 생활하며, 전쟁이 가져다 준 처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쌍둥이 형제는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단련한다. 

폭력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서로를 주먹으로 때리고 급기야 혁대로 서로의 알몸을 갈기며, 할머니가 소리 지르면 차라리 때려달라고 할 정도로 폭력에 익숙해진다. 또한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기 위해 서로를 향해 욕을 하고, 굶주림에 익숙해지기 위해 단식연습, 구걸, 장님과 귀머거리 연습 등, 더 나아가 생명을 죽이는 잔혹연습까지 하며 모진 세상을 살아나간다. 


"죽일 게 있으면 저희를 불러주세요. 이제부터 죽이는 일은 저희 몫이에요." 

할머니가 말했다. "그 짓이 그렇게 좋단 말이냐, 엉?"

"아니에요, 할머니, 그런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저희는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에요." (p.62)


소년들은 자신들이 정한 규칙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면 폭력으로 응징하기에 동네 아이들에게도 '미친놈들'로 통한다. 누군가가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한치 망설임없이 죽여주기까지 하는데, 쌍둥이에겐 그것이 살인이 아니라 누군가 원하는 일을 해줬을 뿐이다. 


1부는 쌍둥이들의 이런 여러 에피소드들로 구성, 전개되는데, 감정을 배제한 냉정한 문체와 충격적인 내용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다. 짧은 장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잔혹 동화를 연상케 하는데, 이런 과장되고 자극적인 우화는 참담한 전쟁 상황 속에서 이 어린 것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았을지를 알게 해주기에, 나는 이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에서 묘한 슬픔을 느꼈다. 


살인, 강간, 약탈, 폭력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인간성과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이런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작가는 1부에서 강렬하게 보여준다. 


1부 <비밀 노트>에서는 그 어떤 고유명사도 나오지 않는 반면, 2, 3부에서는 쌍둥이를 비롯해 모든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1부가 단순한 우화 형식인데 반해 2, 3부는 1부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감정은 묘사되지 않지만 내용은 보통 소설의 형식으로 훨씬 복잡한 구성을 갖는다.


이 책은 이야기가 서로 얽혀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고 말을 아껴야 할 듯 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5분도 안되서 몸 속으로 강렬하게 흡수되었던 1부의 이야기만 살짝 해 보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생각은 '삶은 결코 쉽지 않아.' 였다. 그렇다. 그 어떤 슬픈 소설도 인생이 간직하고 있는 본질적인 슬픔과 고통을 능가할 수는 없다. 다만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허구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 (p.430)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3-20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데..‘하다가 제목보고 ‘에그머니나!‘했습니다ㅋㅋㅋ잔혹동화며 그로테스크한 것도 더없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덕분에 정리가 잘되었어요!😊

coolcat329 2021-03-20 11:51   좋아요 3 | URL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ㅎ그냥 읽어보세요~~이 말만 맴돌았어요. 빈약한 글인데 쬐금이나마 정리가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3-20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는 이게 더 좋네요 (게다가 양장~!)
아직 읽기시작 안했는데 기대됩니다^^

coolcat329 2021-03-20 13:5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에곤 쉴레 표지로 사셨죠? 기대하셔도 좋을 작품입니다~😊

얄라알라 2021-03-20 14: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고유명사를 배제한 글쓰기의 이유는, 저런 고통과 폭력이 누구나의 이야기이자 경험일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까...coolcat님의 멋진 리뷰 읽으며 혼자 궁금해해봅니다

coolcat329 2021-03-20 16:39   좋아요 1 | URL
네~저도 얄라님 의견에 동감이에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히길 바라는 마음에 작가가 고유명사없이 우화 스타일로 쓴거같아요. 리뷰 읽어주시고 댓글까지~감사합니다.😊
 
야간비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텍쥐페리를 생각하면 두 가지가 생각난다.


'어린 왕자'와 '비행기'.


그는 21세에 공군에 입대해 조종사 훈련을 받으나 2년 후 사고를 당해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제대한다. 그래도 비행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과 갈등을 겪다 결국 항공우편회사에 취직해 우편기를 몰게 된다. 1931년에 발표해 큰 성공과 함께 '페미나 상'을 수상한 <야간비행>은 그의 이런 비행사였던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소설이다.  


<야간비행>의 배경은 193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밤에 우편기를 조종하는 비행사들과 그 뒤에서 항공우편 업무와 조종사들을 관리하는 책임자 리비에르의 이야기이다.

당시 밤에 비행을 한다는 것은 '시속 이백 킬로미터로 뇌우와 안개 그리고 밤이 감추고 있는 여러 물리적인 난관 속'에서 싸우는 것을 의미했다. 낮에는 비행기가 속도 경쟁에서 배나 기차를 월등히 앞섰지만 밤만 되면 기차나 선박에 뒤쳐졌기 때문에 항공산업은 위험한 야간비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야간비행>은 '전 항공 노선을 총관하는 책임자' 리비에르와 조종사 파비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파타고니아, 칠레, 파라과이를 출발한 세 대의 우편기가 각각 남쪽, 서쪽, 북쪽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돌아오고'(p.21) 있고, 책임자 리비에르는 이 우편기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 세 대의 비행기가 실어 온 우편물들을 모아 유럽행 우편기에 실어 자정에 유럽으로 출발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리비에르는 '사람이란 빚기 전의 밀랍덩이에 불과'하기에, '이 재료에 영혼을 불어 넣고 의지를 창출'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직원들을 엄격하게 다스려 자기 자신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책임이며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의지의 약화는 곧 실수를 유발'하기에 비행 정비사부터 감독관, 조종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엄격하게 통제하고 관리한다.


나는 정당한가 부당한가나는 알 수 없다내가 엄격하게 굴면 사고는 줄어든다책임이란 개인에게 있지 않다그것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못하는 막연한 힘과 같다내가 정말 정당하게 군다면야간비행은 매번 죽음의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p.57)


그러나 리비에르도 인간이기에 20년간 비행 정비에 몸담아 온 로블레의 실수 앞에서 갈등한다. 자식들을 생각해서 한 번만 봐달라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한 번더 기회를 준다면 그가 얼마나 기뻐할지를 그려보기도 한다. 자신의 혹독함에 지쳐가기는 리비에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은 일반적인 회사가 아니다. 작은 실수는 생명을 위협하고 비행 산업을 쇠퇴시킬수도 있다. 그는 '우연이라 할지라도 잘못의 매개자를 발견했을 때 눈감아주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로블레를 정비 업무에서 해고시키고 잡역부로 보낸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를 달랜다.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한다. 내가 맞서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로 인해 생겨난 것들과 맞서는 것이다......' (p.61)


한편 파타고니아에서 우편물을 싣고 오는 조종사 파비앵은 뇌우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소용돌이, 격렬한 요동, '시커먼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어둠 속에 포위된 파비앵은 "여기가 어디죠?"라는 무선사의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딘지 어떻게 알겠는가...

한 시간 사십 분 후면 기름도 떨어지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이 짙은 어둠 속에서 모든 게 해결될'거라는 사실 뿐이다. 죽거나 살거나...


나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확고한 신념의 리비에르도 인상적이었지만, 남아메리카 대륙 상공의 어둠 속에 갇혀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파비앵의 모습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읽었던거 같다. 

통신도 두절된 상태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사방이 다 막혀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가 육지 위를 날고 있는지, 바다 위를 날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 막막한 상황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암흑과 돌풍을 오직 홀로 상대해야 하는 파비앵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얼마나 두렵고 외로울까...땅 위에서 앞이 안보여도 두려운데, 태풍이 집어삼키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하늘과 땅이 분간이 안가는 상황이라니...너무나 끔찍했다.

파비앵은 사력을 다 하지만 핸들을 잡은 손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생각은 점점 어둠 속으로 자신을 놓아버리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고 싶다. 


'외적인 숙명이란 없다. 그러나 내적인 숙명은 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여러 실수들이 현기증처럼 우리를 엄습한다.' (p.93)


외적인 것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파비앵의 이 비장한 다짐은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빛...빛에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그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빛을 향해 올라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남편의 연착이 걱정된 파비앵 부인도 왔다가고, 기다리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동요가 일어난다. 

리비에르는 파비앵 부인이 다녀간 후 생각한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그토록 가슴 아파하는건 죽음 그 자체보다는 그들이 남기고 간 사소한 물건들과 그들의 일상 행동들이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행위나 사물들이 소용없어지면서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게 떠나가는 것임을...리비에르는 파비앵 부인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는 파비앵의 실종으로 일처리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직원들을 보며 '산 자의 업무가 지연'되는 이런 현실이야 말로 '죽음, 이런 게 바로 죽음이다!' 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고장난 돛배'와 같으며, 사람이 죽으면 그와 관련된 행동과 물건들도 그 의미를 잃듯이 우리 삶의 죽음이란 아무 것도 안함으로써 의미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섬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배를 만들었던 옛날 소도시들을 생각했다. 거기에 희망을 싣기 위해, 자신들의 희망이 바다 위에서 돛을 활짝 펼치는 것을 보기 위해, 그들은 배를 만들었을 것이다. (...) 어쩌면 목적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동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배를 통해 계속 살아가게 되리라.' (p.107,108)


리비에르는 평상시처럼 전보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여기저기 지시를 내린다. 야간비행은 중단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일을 다시 해야하고, 이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의 신념에 대한 복수이자 증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에 자신이 겪은 패배가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한발 다가서는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리비에르는 우리의 삶을 나아가게 하는 것은 어떤 목표가 아니라 '행동'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보게, 로비노,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 (p.103)


그는 인간은 목숨보다 값진 무언가를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개인의 희생은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목적이 모든 것에 우선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규칙을 지킬 것을 조종사와 정비사들에게 강조하며, 그 규칙을 지키지 못했을 시에는 가차없이 책임을 묻는다.


뇌우가 심할 듯 하니 기항지에서 자고 가는게 어떻겠냐는 무선사의 제안에 파비앵은 "계속 갑시다."라며 일축한다. 시간엄수는 리비에르의 원칙 중 하나이다. '어떤 이유로든 출발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무조건 벌을' 받는 시스템은 모든 기항지에서 비행기들이 정시 출발을 하도록 긴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 성공하기도 한다. 

파비앵은 리비에르 입장에서 보면 매우 모범적인 조종사로 원칙을 지켰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땠는가...

만약 리비에르가 시간엄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종사의 안전이라고, 인간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조종사들을 가르쳤다면, 파비앵도 무선사의 제안을 한번 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또한 리비에르는 날씨가 좋았는데도 되돌아온 조종사를 추궁한다. 조종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엔진도 심하게 진동, 설상가상으로 소용돌이를 만나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리비에르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그를 단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비에르의 생각대로라면 그 조종사는 앞이 안보이고 소용돌이를 만나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비행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리비에르가 추구하는 자기초월이며 인간은 그런 극복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리비에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내 안에서 여러가지 의문과 생각들이 떠올랐다.

규칙은 어느 한 집단을 통제하고 잘 유지되게 할 수도 있지만 그 규칙이 인간의 목숨까지 걸고 지켜져야 하는 상황에 나는 동감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어느 정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 책임감이 절대적으로 강요되어 개인이 전체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비극일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파비앵의 마지막은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려졌지만 그것은 작가의 생각일 것이다. 파비앵은 살고 싶어했다. 파비앵 부인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리비에르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비행 우편산업이 이런 개인들의 삶에 고통을 주면서까지 유지되어야 하는지...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런 수많은 희생을 통해 지금 비행산업은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이런 희생이 비행산업 뿐이겠는가...다수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어디 쯤이 모두를 위해 좋은 지점일까...

이런 생각은 늘 답이 없이 머리만 복잡한 상태에서 끝난다. 


비록 리비에르라는 인물에 내가 깊이 공감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이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자로서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갈등하며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습 속에는 자신의 일과 동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그는 외로운 인간이다. 오직 밤하늘만이 그의 친구이며, 그는 죽어서도 밤하늘에서 계속 살아가게 되리라...


생텍쥐페리는 '야간비행'이라는 낯설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를 서정적인 문장으로 아름답게 묘사했다. 특히 섬뜩한 신비를 품고 있는 밤하늘과 그 까마득한 밤하늘을 홀로 비행하는 조종사의 모습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 순간도 내 머리 속을 떠나질 않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17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도까지 그리시다니 ㅋ 저는 읽어본게 어린왕자랑 야간비행 밖에 없는데~ 글보니까 야간비행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기억이 가물가물^^

coolcat329 2021-03-18 10:44   좋아요 2 | URL
이 책 읽어보셨군요. 저도 어린 왕자랑 이 책만 읽어봤는데, 내용보다도 밤하늘 비행 묘사가 참 아름답고 신비로워 인상깊었어요. 마치 제가 비행하는 것처럼요~
오늘도 책 읽는 좋은 하루 되셔요~

scott 2021-03-18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어린 왕자보다 이책 야간 비행 정말 정말 좋아해요 프랑스에 생텍쥐베리 에게 편지나 엽서 보내는 그런것도 있어요 마치 산타 할배에게 편지 쓰듯 ㅋㅋㅋ 지금은 유로화 되어 사라졌지만 프랑스 종이돈50프랑에 생텍쥐베리가 탔던 비행기와 지도 그려진 돈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 ^.^

coolcat329 2021-03-18 16:31   좋아요 2 | URL
우와~ 50프랑 찾아보니 진짜 생텍쥐페리네요~또 하나 알게되었습니다.😊 정말 소중한 돈이네요.

레삭매냐 2021-03-19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살면서 파타고니아에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다 뭐 그런 생각
을 해봤습니다.

아옌데 대통령 묘를 찾아 헌화하
고 싶구요.

coolcat329 2021-03-21 09:33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저는 파타고니아 옷 상표만 알았지 어딘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

scott 2021-04-09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야간비행으로
이달의 당선작이 되심
축하 합니다. ^ㅎ^

coolcat329 2021-04-09 16:54   좋아요 1 | URL
아니 어떻게 이렇게 저보다 먼저 아시죠? 저는 알림이 왔는데 뭐가 당선된건지도 모르겠는데요.

감사합니다. 스콧님은 참 세심하셔요🤭
 
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위의 딸>은 푸시킨이 죽기 1년 전 발표한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러시아 산문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은 예까쩨리나 2세 통치 시절로 그녀는 남편 표뜨르 3세를 폐위시키고 1762년 스스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녀는 독일계의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유럽의 계몽사상을 러시아에 전파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제위에 오르지만, 실제로 그녀의 정치는 자신과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귀족들의 특권은 늘어나는 반면, 농노들은 귀족에 예속, 농노제는 나날이 확대되어 농노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따라서 예까쩨리나 2세 통시 기간 동안 농민들의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반란이 '뿌가쵸프의 반란'(1773~1775)이다.


뿌가쵸프란 인물은 무식한 농부 출신으로 '본의 아니게 탈옥범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중' 민중들의 봉기를 목격하고 스스로 봉기를 일으킨 인물로 자신을 표트르3세로 칭하며 수많은 추종자들을 끌어 모은다. 러시아 군의 요새를 점령, 위세를 떨치며 예까쩨리나 정부를 위협하나 1774년 수보로프 장군에게 크게 패하여 결국 1775년 처형된다. 


<대위의 딸>은 바로 이 '뿌가쵸프 반란'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그리뇨프는 지방 귀족의 아들로 변방 요새로 부임되어 가는 도중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는다. 그때 우연히 한 농부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길을 찾게 된다. 다음날 그리뇨프는 하인 사벨리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안내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토끼가죽 외투를 준다. 농부는 "나리의 은혜는 길이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는데, 이 우연한 만남과 농부의 이 말은 나중에 그리뇨프의 운명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요새에 도착한 그리뇨프는 사령관 미노로프 대위의 가족과 만나고 대위의 딸 마리야와 사랑하게 된다. 이들의 사랑을 질투하는 선임 장교 쉬바브린의 중상모략과 이어지는 결투로 인해 그리뇨프는 부상을 입게 되나 마리야와의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아버지의 결혼 반대, 부모가 축복하지 않는 결혼은 할 수 없다는 마리야, 쉬바브린의 적의 등으로 인해 그는 점점 의욕과 사기를 잃는다. 이런 음울한 시기에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뿌가쵸프의 난'이다.


사실 그리뇨프가 요새로 오기 전에도 근처 현에서 폭동이 일어나 소장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폭동의 무리는 나날이 그 세력이 커져,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고 몇몇 요새는 점령당하는 상황에서 그리뇨프가 있는 벨로고르스끄 요새도 뿌가쵸프의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장한 각오로 폭도들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던 수비군들은 막상 사령관의 "돌격, 나를 따르라!" 라는 외침이 들리자 겁에 질려 꿈쩍도 하지 못한다. 

폭도들에 의해 사령관 부부는 처형되고 영악한 쉬바브린은 반란군 편으로 넘어가고 그리뇨프는 생포되어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 긴박하면서도 중요한 전투 장면이 한 페이지도 안되서 끝나버리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 어떤 것도 기약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지만 푸시킨은 이 무시무시한 순간을 짧고 간결하게 묘사,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가벼운 어조를 유지한다.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뿌가쵸프의 반란은 실제로 매우 잔악하여 그 정당성에 흠집을 내지만 그래도 푸시킨은 러시아 정부의 폭압적인 정치에 반발한 뿌가쵸프를 나쁘게만 그리지 않는다.


이목구비가 번듯한 것이 꽤나 서글서글해 보였고 흉악한 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 모두들 전우처럼 격의 없이 어울렸고 대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공대하는 눈치는 없었다. (...)저마다 자기 자랑을 해대며 의견을 개진했고 또 자유롭게 뿌가쵸프를 반박했다. (p.107,108)


뿌가쵸프의 호감가는 외모와 반란군들이 서로 격의 없이 편하게 대하는 모습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그러나 안일한 러시아 군관료들과 비교되는 부분으로 푸시킨의 상상으로 새롭게 탄생한 뿌가쵸프의 모습이 흥미롭다. 그와 헤어지는 순간에는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가 지휘하는 폭도의 무리에서 그를 떼어 내어 더 늦기 전에 그의 목숨을 구해 주고 싶다는'(p.158) 생각을 하고, 나중에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는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과 함께 어떤 알 수 없는 분노도 느낀다.


예멜랴, 예멜랴! 당신은 어째서 칼 아래 쓰러지지 않았소? 왜 포탄 앞에 몸을 던지지 않았소? 차라리 그랬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p.169)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뿌가쵸프는 나라를 뒤흔든 포악한 폭도에 불과하지만 그리뇨프에게는 자신과 마리야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고, 고마움에 보답할 줄 아는 하나의 인간인 것이다. 역사 속에서는 한낱 폭도에 지나지 않는 뿌가쵸프가 푸시킨의 문학 속에서는 의리를 지키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점은 흥미롭다.


푸시킨은 러시아 정부에 반기를 든 뿌가쵸프를 칭송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쁜 악인으로 그릴 수도 없었던 듯 하다. 가혹한 전제정치에 고통받는 농노들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본인 또한 귀족 출신으로 직접 나서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그가 황실의 감시와 검열을 받는 작가였음을 상기시킨다. 


작품의 뒤로 가면 예까쩨리나 여제가 나오는데, 그녀의 등장은 마치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을 도와주는 동화 속 요정을 연상케 한다. 뿌가쵸프가 흉악함이라고는 없는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그려졌듯이 그녀 또한 '통통하고 혈색 좋은 얼굴'에 '푸른 눈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뿌가쵸프와 예까쩨리나 2세 두 사람 다 자신의 권력을 무섭게 휘두르지만 한편으로는 자비를 베푸는 인간적인 선함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푸시킨은 예까쩨리나 여제와 비천한 폭도 두목 뿌가쵸프에게 동등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시대가 감추고 있는 어떤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역자 석영중 교수의 설명대로 그것은 바로 권력이 지니는 어떤 '허망'함이 아닌가 싶다.  


푸시킨은 정부군과 반란군을 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폭력, 살인은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누가 됐든지 간에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 고문, 살인은 옳지 않음을 이 가벼운 어조의 소설에서 간간히 드러낸다. 


이것이 한때 우리 시대에 일어났음을 돌이켜볼 때,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알렉산드르 황제의 온화한 통치하에 있음을 상기해 볼 때 나는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박애주의적 법규의 확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청년들이여! 만일 나의 이 수기를 읽게 된다면 기억해 주기 바란다. 보다 훌륭하고 항구적인 개혁은 일체의 폭력적 강요를 배제한 풍속의 개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p.85)


강도의 무리가 도처에서 만행을 일삼았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사면해 주기도 했다. 전란의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저 광활한 지역의 상황은 처참했다......신이여 다시는 이렇게 무의미하고 무자비한 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소서! (p.168)


뿌가쵸프만이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압하는 러시아 군대도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한 점을 지적한다.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비천한 농부에게 건네 준 토끼가죽 코트가 그리뇨프의 목숨을 구했듯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억압과 폭력이 아닌 인간이 품고 있는 선량함이라는 것을 푸시킨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로써 푸시킨의 소설은 <벨킨 이야기>, <예브게니 오네긴>과 함께 총 3권을 읽었다. 푸시킨을 읽으며 한 가지 분명히 드는 생각은 그는 천재라는 것이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뿌쉬낀이 '러시아 산문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전통의 확립에는 실패'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산문은 너무도 시대를 앞서간 나머지 당대 및 후대 작가들의 모방을 불허했기 때문'(p.226)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늘 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14 20: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1권 읽어봤는데 리뷰 보니 너무 읽고 싶어지네요 ㅎ

coolcat329 2021-03-15 07:38   좋아요 1 | URL
책이 그렇게 두껍지 않아서 금방 읽으실 거에요. 부족한 글인데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03-19 1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오래 전에 푸시킨의 소설을
읽고도, 푸시킨이 소설도 썼나?
했다니 고저 무식의 소치입니다.

coolcat329 2021-03-19 15:00   좋아요 1 | URL
그쵸? 레삭님 대위의 딸 리뷰 2010년에 쓰셨더라고요. ㅎ 잊어버리실만도 한 세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