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창비세계문학 6
딩링 지음, 김미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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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은 빈티지한 스타일이 좋아서 중고서점에서 보이는 족족 다 사들이고 있는데, 처음 듣는 작가의 이 책도 그렇게 나에게 오게 되었다.

 

딩링(丁玲 1904~1986)은 중국 5.4 신문화운동이 길러낸 여성 작가로서 본명은 장웨이인데 5.4 신문학 사상을 접한 뒤 딩링으로 개명을 한다. 여기서 링,'玲'은 '옥소리 령'으로 내 이름의 '영'자와 같은 한자라 반가웠다.

 

딩링은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와 그 삶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녀의 글쓰기도 그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초기엔 여성 지식인의 시각으로 창작활동을 하다가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으로 와서는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민중 위에서 군림하는 공산당 특권층과 여전히 일과 가정의 고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들을 보면서 그 실상을 폭로하는 작품을 쓰게 된다.

이러한 활동으로 딩링은 중국공산당에게 '자유주의적 작가'로 낙인찍혀 변방으로 발령, 농촌생활을 한다. 이 후 딩링은 비판적인 글쓰기 보다는 '사회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는' 당이 장려하는 글을 쓰고 1952년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스탈린 문학상'을 수상, 중국혁명의 과정을 세계에 알리는 작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급진적인 좌경노선을 추진하면서 그녀의 삶은 다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학생들에게 '무릇 작가라면 자신만의 대표작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던 발언이 '출세주의'로 고발, 부르주아 사상을 지닌 우파 작가로 분류된 것이다.

그녀는 당으로부터 숙청 당하고 작가로서 글을 쓸 권리도 박탈 당한 채, 감옥에 수감, 추운 동북지방에서 육체노동을 하게 된다. 이후 문화대혁명(1966~76)이 끝나고 그녀가 다시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어떤 생활을 했는지 거의 알려진게 없지만 심한 고초를 겪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소설집은 이러한 딩링의 시대에 따라 그 성향이 다른 소설이 4편 실려있다.

이 책의 표제작인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는 1941년에 쓴 작품으로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다가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에게 더럽혀진 '부도덕한 여자'로 취급받는 전전의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잔혹한 역사에 희생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성노예 여성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멸시는 워낙 알려진 사실이기에 놀랍지 않았지만, 그렇게 돌아온 여성들을 중국공산당이 다시 스파이로 '파견', '애국이란 명목으로' 그들을 이용한 사실에 나는 매우 놀랐다. 힘없는 어린 여성들이 탐욕스러운 전쟁에 이용되고 나중에는  '다 헤어진 신발'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았으니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러나 전전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 마을에 잠깐 머물고 있는 화자인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너무나 많은 일본 놈들한테 당해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기억이 잘 나질 않고 결국엔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나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바쁘게 사는 게 집에서 지내거나 친지들이 있는 곳에서 사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에 그들이 xx로 데려가서 치료해주기로 했으니까 나는 그곳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요."(p.40)

 

딩링은 전시에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고발하고,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모습을 전전이라는 의지의 여성을 통해 보여준다.

 

두 번째 단편<병원에서>도 같은 해인 1941년 쓴 작품으로 도시에서 시골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로 오게 된 루핑이라는 씩씩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루핑은 공산당원으로서 미래의 정치 공작원을 꿈꾸지만 당에서는 그녀를 시골의 병원으로 보낸다.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시골로 오지만 하룻밤을 자고 난 그녀는 '새로운 생활을 멋지게 시작하는 거야' 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병원의 상황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구부러진 주사바늘, 사용한 종이를 소독도 하지 않고 다시 쓰고, 청소는 커녕 구석구석 버린 솜과 거즈가 널려 있다. 루핑이 아무리 청결을 강조해도 듣지 않자 의사인 루핑이 직접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지만 그 누구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루핑은 '자신이 목도한 불합리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시정을 요청하지만 고루한 관료주의와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녀는 당으로부터 '자유주의자','영웅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비판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감에 젖기도 하며 의기소침해지지만 우연히 두 다리가 다 잘린, 산전수전 다 겪은 환자와 대화를 나눈 후 다음과 같이 마음을 다잡는다.

 

무릇 사람은 온갖 시련을 겪고도 꺾이지 않아야 비로소 쓸모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난 속에서 성장하니까.(p.77)

 

이 작품은 '간부를 비판함으로써 이들과 대중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고 이후 그녀는 사회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글로 마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녀의 이러한 행보는 작가로서의 신념이 꺾인 것일텐데, 1957년 '반우파투쟁'에서 또 우파작가로 몰려 숙청을 당하니 그녀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주의를 고취하고자 발표한 작품으로 홍군 소년병의 이야기이다. 이동 중 대오에서 낙오한 어린 홍군이 마을에 숨어 있다가 국민당 군대에 발각되고 총살 당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대장! 총알 하나를 남겨두는 게 좋겠소. 남겨두었다가 일본 놈과 싸우시오! 나를 칼로 죽이고!" (p.97)

 

이념을 떠나 일본을 상대로 하나의 중국인으로 단결하자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작품이다.

 

마지막 이야기 <두완샹> 은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딩링이 1955년 우파작가로 비판받고 1978년까지 어떠한 활동도 없다가 그 해에 발표한 작품으로 작가가 20년간 육체노동을 했던 베이다황(北大荒)에서 만난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두완샹이라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가 13살에 조혼하고 며느리로 부지런히 대가족을 위해 일한다. 17살에 남편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가운데서도 열심히 생활하던 그녀는 토지개혁 조사로 마을로 온 여성 동지의 눈에 띄어 교육을 받고 마을의 부녀 주임이 된다. 전쟁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고 1958년 남편이 동북의 베이다황으로 발령이 나는데, 이곳은 6월에도 눈이 내리고 겨울엔 사람이 동사하는 험난한 곳이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완샹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제가 왜 살지 못하겠어요? 변방을 건설하러 가는 거잖아요."(p.112)라며 남편과 떠난다. 두완샹은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일하며 모범 노동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1964년 노조의 여성간사가 되지만 거거에 만족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변방을 개척한다는 사명감과 책임을 잊지 않는다. 이 소설은 두완샹이 청중들 앞에서 강연하는 것으로 끝난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며 누구나 다 하는 평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가지 이치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로지 영원히 당의 지도하에, 있는 그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성실하게 당의 요구에 따라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죽는 날까지 분투하기를 희망합니다." (p.145)

 

'모래바람을 견디고 자란 한그루 살구나무'같은 공산주의 노동 영웅 두완샹. 중국 공산당의 이념에 충실한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적지않게 당황했고 많이 불편했다.

인간적인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시종일관 강인하고 열정적인 모습의 두완샹이 인조인간 같았다.

 

그러나 뒤에 작품해설에서 작가가 겪은 삶의 풍파와 그녀 자신만이 갖고 있던 신념이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예술성보다는 정치성을 띈 이 소설은 그녀가 얼마나 사상적으로 부담을 갖고 글을 썼는지 알게 해준다.

 

다시는 딩링의 소설을 읽을 일은 없을 듯 싶지만 중국 문학에 딩링이라는 여성 작가가 있었고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와 그 궤를 같이한 그녀의 문학 인생이 인상깊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고난을 겪은 작가가 비단 그녀 뿐만은 아니었을테니 그중에는 당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세상에 진실을 알린 작가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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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북로드 세계문학 컬렉션
루쉰 지음, 북트랜스 옮김 / 북로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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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은 루쉰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정신 승리법’으로 유명하다.
올 가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중국의 ‘혁명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에 주목하며 읽었다.

아Q는 집도 가족도 없는 날품팔이 하층민이다. 그러나 자존심 하나는 강해서 그 누구에게도 지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다혈질에 현실인식도 부족, 시비가 붙을 때마다 얻어 터지지만 ‘자식 놈에게 맞은 셈’이라며 정신적으로 늘 승리한다. 이런 아Q는 신해혁명(1911) 당시 노예근성에 젖어있던 중국 민중을 대표한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는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대국 의식에만 사로잡혀 나라가 망해가는 줄도 모르고, 방관자적인 민중들은 이런 위기를 인식조차 못했으니 루쉰이 자신의 첫 작품집을 <납함(呐喊)>-외침-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알만하다.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평생을 혁명에 투신한 쑨원이 겨우 혁명을 일으키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 책 속에서도 혁명당이 성내로 진입했지만 ‘관직 이름만 달라졌을 뿐 그대로’이고, 기득권자였던 거인 영감은 또 무슨 벼슬자리를 얻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민중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혁명이고 기득권 층 내에서만 변화가 있을 뿐이다.

아Q가 생각하는 혁명은 또 어떤가? 평소 혁명을 반란으로 여기며 혐오하던 그가 혁명은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원하는 여자를 마음껏 취할 수 있는 길임을 안 순간 그는 돌변한다. 혁명이 뭔지도,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채.

자오영감과 자오수재, 가짜 양놈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은 또 어떤가? 혁명군의 바람이 마을에까지 밀려오자 얼마나 발빠르게 움직이는지 모른다. 변발을 자를 용기도 없어서 틀어올리는 자들이 혁명의 의미를 알까? 변발이 잘릴까 두려워 성내에도 못 들어간 자오수재는 평소 친하지도 않은 가짜 양놈에게 돈을 주고 혁명당을 상징하는 은 복숭아 뱃지를 달고 다닌다. 이를 본 아버지 자오영감은 ‘과거 급제했을 때보다 훨씬 더 거들먹거렸다‘ 고 하니 이들이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은 최고다.
청나라 시대에는 민중 위에 군림하다가 상황이 변하자 혁명군 측에 붙어 또 민중을 억압하니 루쉰이 봤을 때 이런 민중이 얼마나 안타깝고 절망스러웠을까...

루쉰의 첫 소설집 제목인 <납함>, 외침! 루쉰이 살아있는 동안 속으로 얼마나 외쳤을지...나는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노예근성에 젖어 나라가 존망의 위기 앞에 있는 줄도 모르는 중국인들에게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고, 제발 우리의 패배를 자각하고 다시는 같은 패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깨어나야 한다는 루쉰의 외침이 소설 속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고상한 뜻이나 대의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양심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지배층과 그들을 뒷받침해 주는 뜻을 같이 하는 다수의 민중이 있어야만 세상은 조금이나마 변함을 새삼 다시 느꼈다.

이 책에는 아Q정전, 광인일기, 고향 세 단편이 실려있는데,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루쉰의 작품 <고향>의 마지막 구절과 함께 글을 마칠까 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또한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없었는데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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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루쉰작품ㅇㄴ 을유에서 나온걸로 읽었는데 고전중에 고전인것 같아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쿨캣님 서재에 트리 한그루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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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rry ☆ Christma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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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메리 크리스 마스 ^.~

coolcat329 2020-12-24 10:34   좋아요 1 | URL
와~~눈이 너무 즐겁습니다. 스콧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되셔요. ☺

레삭매냐 2020-12-27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때 전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청나라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영국의 부도덕한 아편전쟁으로
대변되는 외세의 침탈과 태평천국
의 난이라는 내부의 모순으로 결국
망하게 되지 않았나 싶네요.

중국 민중의 대부분이 아큐처럼
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혁명
에 나섰다가 낭패를 당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을 해보는 아침이었습니다.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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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후 미군 주둔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그곳에서 태어나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개인들의 이야기가 역시 어릴 때 프랑스로 입양되어 자신의 근원을 찾고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나나‘의 삶과 함께 그려진다. 내 삶이라는 무대에 등장한 배우인 타인을 그녀가 어떻게 끌어안는지 조해진 작가는 차분하면서도 따뜻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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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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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했던, 책을 사랑한 저자가 쓴 유일한 소설.

안타깝게도 저자는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조카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저자는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을 쓰는 것이 꿈이었는데, 출판 뿐만 아니라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으니 큰 성공이라 하겠다.

 

프랑스와 영국사이의 채널제도에 위치한 건지 섬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포기하면서 독일군이 점령하게 된다. 영국 영토 중 유일하게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땅으로, 독일군의 감시 속에서 건지 섬 사람들은 가축도 몰수당하고 감자와 순무로 연명을 하며 힘든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주민이 독일 군 몰래 빼돌린 돼지로 파티를 열게 되고 너무나 오랜만에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마을 사람들은 통금 시간이 지나 몰래 집으로 가다가 그만 독일군에게 발각된다. 꼼짝없이  잡히게 된 상황에서 엘리자베스가 기지를 발휘, 문학모임이 있었고 '독일식 정원'에 관한 토론이 너무나 즐거워서 늦었다며 위기를 모면한다. 근데 마침 독일 사령관이 문학애호가라 이 모임에 언젠가 참여하겠다고 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 언제 사령관이 나타날지 모르기에 문학모임이 바로 만들지고 주민들은 책을 사들이고  각자 책을 하나씩 골라 읽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시작이다

 

영국 작가 줄리엣 애슈턴은 바로 이 건지 북클럽의 멤버인 도시 애덤스로부터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찰스 램의 열렬한 팬인 도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엘리아 수필 선집> 표지 안쪽에서 줄리엣의 주소를 발견했고, 그녀에게 찰스 램의 책을 구하고 싶다며 런던 서점의 주소를 부탁하고 이를 계기로 줄리엣과 건지 섬 사람들은 편지를 주고 받게 된다.

 

이 책은 전체가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다. 건지 섬의 북클럽 회원들은 줄리엣에게 각자 자신들의 사연을 편지로 보내고 이렇게 오고가는 편지 속에서 그들이 전쟁 상황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우연히 만들어진 책모임이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가운데 줄리엣은 건지 섬 사람들에게 점점 애정을 갖게 되고 급기야 그들을 만나러 건지 섬으로 가게 된다. 건지 섬 주민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 그 가운데서도 따뜻하게 피어난 인간애, 무엇보다 그 중심에 엘리자베스라는 당당하고 용감한 여성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줄리엣은 그녀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로 한다.

책을 사랑하고 책의 힘을 믿었던 작가가 선사하는 책과 사람에 관한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좋은 책은 사람을 모이게 만들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게 만들며, 그 마음은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그것이 책의 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p.22 )

 

순수한 즐거움...아마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깊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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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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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p.104)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죽음이라는 모험의 초보적이고도 결정적인 측면이 부조리의 감정의 내용을 이룬다'(p.33 민음사)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죽음은 체험할 수 없고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죽음을 주제로 한 톨스토이의 두께는 얇지만 그 안의 내용은 묵직한 이 소설을 올 가을에 읽었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으로 흘러가는 과정을 아주 밀도있게 그린 작품으로 나처럼 톨스토이를 처음 읽는 사람이 시작하기에 좋을 듯 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서 시대에 민감하고 출세를 지향하나 사람들에게 욕 먹을 정도로 속세에 찌든 인간도 아닌 사회적으로 성공할 만큼 적당한 허영심과 속물성을 가진 평범한 관료이다. 그는 일하는 데에 있어서도 공사를 혼동하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며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대외적으로 고상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반 일리치는 몸의 이상함을 느끼고 통증이 심해지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그 죽어가는 과정에서 이반 일리치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노하고 체념도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 간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인간의 심리와 그 주변 인물들의 반응과 행동의 묘사가 매우 인상적인 이 작품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알리는 데서 시작, 그 죽음을 둘러싼 동료 판사들과 가족들의 반응부터 매우 흥미롭다.

동료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p.8)을 계산한다. 또한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p.10)도 느낀다.

미망인이 된 이반 일리치의 부인 역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남편이 사망한 경우에 국고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가'(p.20)에 더 관심이 많다.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언뜻 나의 모습이 보이는것도 같아 가슴이 뜨끔거리기도 했다. 이렇듯 첫 장면부터 톨스토의 묘사는 날카롭고 섬세하다.

 

2장부터는 과거 이반 일리치의 삶과 어느 날 병에 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반 일리치는 알 수 없는 통증에 괴로워하고 가족의 무심함에 증오심이 커져간다. 의사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의학적인 지식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다.그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죽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지 '나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p.72)인 것이다.

 

특히나 그를 힘들게 하는건 치료만 잘 하면 곧 나아질거라는 사람들의 거짓말이다. 또한 누군가 자신을 가엾게 보살펴 주기를, '사람들과 하느님의 냉혹함'에 '도대체 왜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시나요? 왜 저를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겁니까?'(p.100) 라며 울며 절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기뻤던 일들보다 덧없고 의심스러운 일들이 많았음을 알게 된다. '언제나 똑같은 생활',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 삶의 무의미함에 치를 떨며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p.103)

 

'왜?!'에서 시작한 원망섞인 질문이 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반 일리치는 생각하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게 없다. 내가 정말 죽는가, 왜 이런 고통을 내가 겪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할 수 없다.

 

죽음의 절망과 치유의 희망 사이에서 외로운 방황을 하던 이반 일리치는 과거를 회상하며 거짓과 위선 앞에서 자신의 양심이 고개를 들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자신의 일과 삶의 방식, 사교계 이 모든 것들 속에 얽혀 있는 이해관계가 다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가족과 의사를 보면서 그들의 모습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p.112)을 보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삶과 죽음도 가려버리는 '거대한 기만'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인생이 정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주변을 살펴보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있던 자신을 알게 되고 그 순간 힘들어하는 가족과 미워하던 아내도 이해하게 된다.

 

'그래,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p.117)

 

죽기 전 그는 가족을 진심으로 불쌍하게 여기고 비록 제대로 전달되지는 못하나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통증도 사라지고 평온함을 느낀다.

죽음 대신 그가 본 것은 빛이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다음과 같다.

 

"아, 이렇게 기쁠 수가!"(p.119)

 

죽음의 순간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받아들이고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고 떠나는 이반 일리치를 보며 모든 독자는 앞으로 다가올 각자의 죽음을 머리 속에 그려볼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이반 일리치처럼 평안하게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인사하며 떠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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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18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오래 전에 사두고,
또 올해 창비 리뷰대회 선물로도
받아 두었는데...

왜 읽지 않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내년에나 도전해 볼까 합니다...

coolcat329 2020-12-18 13:32   좋아요 2 | URL
어머나! 레삭매냐님이 이 책을 안 읽으셨나니, 정말 의외네요 ㅎㅎ 요즘 워낙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그러실거에요.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0-12-18 14:23   좋아요 1 | URL
이 작품 정말 좋아요. 꼭 읽어 보세요. 두께도 얇잖아요? ㅎㅎㅎㅎ

scott 2020-12-22 19:29   좋아요 0 | URL
ㅋㅋㅋ 레삭매냐님이 깜빡하시고 묵혀둔 책
요기!
(=ⁿ-ⁿ=)ノ

페크pek0501 2020-12-19 1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독한 작품입니다. 주인공도 그렇지만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주목하게 되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이기적일 수 있는지 놀랍더군요. 대단한 작품 같아요.

scott 2020-12-22 19:30   좋아요 1 | URL
전 개인적으로 톨스토이 작품중 안나 카레니나 다음으로 이책이 명작중에 명작이라고 생각해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