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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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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는 '멋진 장면'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상황들의 정수'에 도달하고자 했다. 상황들의 정수, 모든 인간사의 정수에.

-밀란 쿤데라, <커튼>

 

꼭 읽고 싶었던 플로베르의 이 책을 지난 달에 정말 감탄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거의 두 번을 읽었는데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한 거의 5년 간의 피나는 노력이 이 책 한 권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마담 보바리>는 1857년에 프랑스에서 출간이 됐는데, 마침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도 같은 해에 발표되어 프랑스 문학사에 중요한 해라고 한다. 둘다 풍기문란이라는 이유로 기소가 됐는데,부유했던 플로베르는 무죄판결을 받으나 가난한 보들레르는 벌금형과 6편의 작품을 삭제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한 모습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현실과 몽상을 구분하지 못한 한 시골여자의 바람난 이야기이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야기는 주인공 엠마가 아닌 엠마의 남편이 될 샤를르 보바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학교 동기의 시점으로 묘사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난한 시골뜨기의 모습으로 동기들의 조롱을 받는데, 특히 그의 무릎 위에 얹어 놓은 모자를 묘사한 장면에서 나는 약간의 충격이랄까, 어떤 잔임함을 느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자는 '어떤 멍청한 사람의 얼굴처럼 그 말없는 추악함이 표현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는 그런 한심한 물건의 하나였다'(p.12) 라고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자의 묘사가 8줄에 걸쳐 나오는데, 대여섯 번을 읽어도 그 모양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상관없다. 이 우스꽝스럽고 볼품 없는 모자의 묘사가 샤를르 보바리라는 인물의 성격과 분위기, 앞으로 그가 겪게 될 인생의 굴곡을 전달하는데 얼마나 멋진 역할을 하는지 나는 첫 장부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샤를르는 엄마가 짝지어 준 돈푼이나 있어보이는 과부와 결혼했다가(나중에 거짓임이 드러남) 그 부인이 죽게 되자 엠마 루오라는 치료하러 갔던 농가의 딸과 재혼하게 된다. 샤를르는 '사랑해 마지않는 그 예쁜 여자를 일생동안 갖게 된 것'에 대해 행복해 하지만, 엠마는 그렇지 않다. 엠마는 '장식해 놓은 꽃들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고, 연애를 이야기하는 가사 때문에 음악을 사랑하고, 정념을 자극하는 맛 때문에 문학을 사랑'하는 그런 여자다. 이런 엠마는 사랑해서 한 결혼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랑에서 응당 생겨나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음에 당황한다. 책을 통해 자신의 결혼에 대한 꿈을 키워온 엠마는 단조로운 시골 생활과 그저 성실하고 무던한 남편으로는 만족이 안 되는 것이다.

 

"맙소사, 내가 어쩌자고 결혼을 했던가?"(p.70)

 

그녀의 내부에서는 '소리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엠마의 삶을 바꿔놓는 단초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어느 후작의 무도회에 초대받은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이 그동안 책 속에서만 봐왔던 것들-부자들 특유의 안색, 부드러운 거동, 그들사이의 대화들 등-을 직접 보고 왈츠도 추는 등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이런 사교계의 화려함을 맛 본 엠마는 자신의 평범하고 무료한 삶을 더이상 견딜 수가 없다. 재미도 없고 직업적으로 야심도 없는 남편은 점점 더 싫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어떤 돌발 사건'이 일어나길 기대하며 집안일도 전혀 돌보지 않고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고 급기야 신경병까지 얻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녀의 저속함이 드러나는데 자신의 불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일부러 식초를 마셔 야위어 보이게 한 술수를 부린 것. 착한 샤를르는 이런 사실도 모르고 엠마를 위해 이사를 가기로 하고 1부는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토트를 떠나며 끝난다. 떠날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루앙에서 80리 떨어져 있는 용빌 라베이. 엠마의 본격적인 욕망이 분출되는 공간이다.

2부 처음에 펼쳐지는 마을의 묘사는 마치 카메라 렌즈를 따라가면서 보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연이어서 나오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앞으로 엠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 기대를 하게 한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또 위에서 '바람난 여자의 이야기'라고 언급했기에 굳이 세세하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그야말로 온갖 추잡하고 진부한 일들이 일어나는 뻔한 통속소설이지만 그것이 플로베르 스타일로 '어떻게' 쓰여졌는지가 중요하며 직접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가 훨씬 큰 작품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여러 상황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프랑스어로 느끼는 그 깊이에는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김화영 님의 번역으로도 나는 그 섬세함과 플로베르 문장의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단조로운 종소리, 멀리서 짖어대는 개, 바람이 일으키는 가는 먼지, 병든 구렁이처럼 누워 있는 포도 줄기, 무수한 발을 가진 쥐며느리와 같은 주변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엠마의 권태는 직접 엠마를 통하지 않고서도 그 무료함이 충분히 전달된다. 남자들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엠마의 자태와 행동, 엠마와 로돌프가 도망치기로 한 전날 밤의 달빛 묘사(빛나는 비늘로 덮인 머리 없는 뱀)는 그 자체로 참 아름다우면서도 엠마의 욕망을 담고 있다.

또한 로돌프와의 사랑에 빠져 도망치기로 한,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엠마의 다음과 같은 묘사는 에로틱하면서도 플로베르 특유의 냉정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름답지만 그녀의 사랑은 아름답게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이 문장만으로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목덜미를 덮은 머리칼은 마치 음탕한 분위기의 표현에 능란한 화가가 손질해 놓은 것 같았다. 그 머리털은 간통의 몸부림으로 매일같이 풀어졌다가 묵직한 다발을 이룬 채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려 있는 것이었다.' (p.281)

 

외부묘사로 시작하여 인물의 내면 묘사로 넘어가 자연스럽게 현실로 돌아오는 흐름도 자연스럽고 이는 두번 째 읽을 때 더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대위법의 선율처럼 흐르는 두 사람의 대화가 여러 상황에서 연출이 되는데,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재미있게 감탄하며 읽은 부분이었다. 두 명 이상의 화자가 서로 딴소리를 하고 있지만 상황 속에서 그 대화는 교묘하게 어우러진다.

 

썸을 타던 서기 레옹이 혼자만의 사랑에 지쳐 떠나고 농사공진회가 열리는데 이 날 엠마는 바람둥이 로돌프의 유혹에 걸려들어 밀회를 갖게 된다. 밀회의 장소는 웃기게도 엠마가 꿈꾸는 낭만적인 장소와는 정반대인 '면사무소 2층'이다. 바깥은 농사공진회 준비로 분주하고 소,돼지 울음소리와 뒤섞여 떠들썩하다. 이곳에서 로돌프가 엠마에게 수작을 걸려는 찰나 공진회의 참사관 연설이 동시에 시작된다. 공진회의 계몽적이면서도 촌스런 미사여구로 가득한 연설과 로돌프와 엠마의 역시 촌스러우면서 진부한 불륜 연애질이 간간이 들리는 소,양들의 울음소리와 뒤섞여 번갈아 가며 나온다.

서로 상관 없는 두 장면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양쪽의 어리석음을 풍자, 마치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이 두 집단의 교차 대화는 다음과 같이 더욱 긴박하게 전개된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자기의 손을 빼지 않았다.

<전체 경작 우수상!> 하고 회장이 외쳤다.

「가령, 아까 댁에 갔을 때......」

<수상자, 캥캉프와의 비제 씨.>

「이렇게 같이 있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상금 칠십 프랑!>

「저는 백 번도 더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뒤를 따라와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퇴비 상>

「그리고 이대로 오늘밤도, 내일도, 그리고 또다른 날에도, 아니 한평생 여기에 있고만 싶습니다!」

<아르괴이유의 카롱 씨에게 금메달!>

(중략)

「아아, 고맙습니다! 저를 뿌리치시지 않는군요! 마음이 너그러우십니다. 제가 당신 것임을 알아주시는군요! 당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세요. 가만히 응시할 수 있도록요!」(p.216,,217)

 

이렇게 긴박하게 한줄씩 교차되는 대화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플로베르는 다음과 같이 기가막히게 표현하면서 한 템포 쉬어간다.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테이블 커버에 주름이 일었다. 그리고 저 아래 광장에서는 농촌 아낙네들의 큰 머릿수건이 파닥거리는 흰 나비의 날개처럼 쳐들렸다.(p.218)

 

불륜 현장과 떠들석한 농촌공진회라는 우스꽝스럽지만 나름 진지한 두 세상이 이 한줄기 바람으로 인해 잠시 한 점에서 만나는 듯한 이 묘사에 나는 책읽기를 잠시 멈추었고 이 음악 선율같은 플로베르의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다시 시작하는 다음 말!

 

<깻묵 활용 부문 상> 하고 회장은 계속했다.(p.218)

 

난 이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했고, '비료상','장기 임대차 부문 상' 등 계속 나열되는 상들의 호명 속에서 엠마와 로돌프는 서로의 손을 잡은채 마주보고 있으니 얼마나 웃긴가!

 

이 작품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데 엠마의 욕망을 둘러싸고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사실주의 소설답게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인물들인데, 특히 약사 오메가 두드러진다. 오메는 과거 의사 행세를 하다가 감옥에 갈 뻔한 인물로 자신의 이런 약점을 보호하기 위해 의사인 샤를르에게 굉장히 호의적이며 친절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전형적인 비겁한 인물이다. 또한 여기저기서 얻은 잡다한 지식들로 어딜가나 잘난척이고 오지랖이 넓다. 스스로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나 그의 지식은 방대할 뿐 얕고 정확하지도 않다. 계몽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답게 종교에 반대, 사사건건 신부와 대립하나 속물 부루주아일 뿐이다. 이 작품은 오메의 이야기로 끝나는데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며 끝난다. 이는 결국에 살아남는 자들은 오메와 같은 부류임을 플로베르는 꿰뚫어 보고 있던 것이다.

 

또 다른 눈에 띄는 인물은 유행품가게 주인이자 고리대금업자인 뢰르가 있다. 엠마는 사랑의 아픔으로 자살한게 아니라 무절제한 소비로 많은 빚을 지고 요즘 식으로 그걸 돌려막다가 갚을 방법이 없자 자살한 것이다. 이런 엠마를 파멸에 이르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뢰르이다. 조금씩 엠마의 허영심을 부추겨 물건을 사게했던 그는 레옹과 그녀의 불륜을 목격한 뒤로 노골적인 협박을 하면서 그녀를 점점 빚의 수렁으로 빠지게 하는 냉혹한 인간이다.

이런 인물들의 성공은 보바리 부부의 몰락과 대비되어 더욱 냉정하게 보여진다.

 

결국 엠마는 비소를 입에 털어 넣고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녀가 죽는 장면, 비소가 온몸에 퍼지며 고통에 몸부림 치는 엠마의 모습은 참으로 끔찍하다. 고통에 신음하다 그녀는 죽기 전 추악한 장님이 부르는 불륜을 조롱하는 노래를 듣는다. 그녀는 시체처럼 벌떡 일어나 웃다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고 죽는다.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p.470) 이 문장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질퍽했던 삶은 끝난다.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극적인 낭만을 온몸으로 갈망한 그녀이지만 그 죽음은 이토록 추하고 어떠한 종교적 위안도 안 느껴진다.

 

이런 플로베르의 소설 속 인물을 향한 냉정함은 엠마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죽은 뒤 남편 샤를르도 벤치에 앉아 슬픔에 잠겨 죽는데,  이런 샤를르를 플로베르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그를 해부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p.503) 

샤를르는 소설 전반에 걸쳐서 그 존재감이 희미한 사람이다. 무도회에 가서도 마차안에서도 밥 먹고 나서도 바로 잠이 들고 어떤 장소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이다. 살아있을 때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죽어서도 아무것도 아니라니...거기다 죽은 장소도 엠마가 로돌프와 밀회를 즐기던 '덩굴시렁 밑의 벤치'라니...

 

어디 이뿐인가...아무 죄 없는 딸 베르트는 또 어떠한가.

2부 12장에는 일 끝나고 돌아온 샤를르가 자고 있는 딸을 보며 딸의 미래를 상상하는 장면이 있다. (엠마는 옆 침대에서 로돌프와의 야반도주를 상상하며 자는 척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딸을 훌륭하게 키울 수 있을지, 좋은 학교에 보내 교육도 시키고 확고한 직업을 가진 착실한 청년을 배우자로 맞아들이는 딸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한다. 그러나 샤를르의 죽음 후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니까 십이 프랑 칠십오 상팀이 남아 어린 보바리 양이 할머니한테로 가는 여비로 쓰였다. 노부인도 그 해에 죽었다. 루오 노인은 중풍에 걸렸기 때문에 어떤 친척 아주머니가 아이를 맡았다. 그녀는 가난해서 생활비를 벌도록 베르트를 방직공장에 보내서 일을 시키고 있다. (p.503)

 

그 어린 것을 방직공장이라니...플로베르의 펜은 참으로 가차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고 사기치며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인간들 속에서 엠마같은 사람은 그 자체로 봤을 때 얼마나 어리석은가. 엠마는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욕망한 것이 아니라 책 속에 나오는 여자들의 삶을 욕망했고 현실이 얼마나 치열하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여자였다. 현실의 나를 인정하지 않고 더 멋진 다른 세상 속의 나를 꿈꾸면서 그것이 실현되지 못할 때는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에 대한 헛된 환상을 꿈꾼다. 더 나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은 절대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끌 뿐이다.

 

'보바리즘' 1892년 프랑스 철학자 쥘 드 고티에가 <보바리즘, 플로베르 작품 속의 심리학>에서 한 말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성향'을 뜻한다.

나 또한 한 때 이 보바리즘의 노예였던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잡지 속의 멋진 집, 명품가방, 고급화장품 그런 곳에 살고 명품으로 치장한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며 나의 모습을 거기에 대입시키고 그런 삶을 살게 해줄 배우자를 꿈꿨던 어리석고 부끄러운 20~30대가 있었다.

나는 <마담 보바리>를 읽으며 나의 지워버리고 싶은 불평불만으로 점철된 그 시절을 많이 떠올렸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추긴다. 명품을 갖게 된 순간의 그 기쁨은 정말 한 달도 안간다. 또 다시 내 안에서 다른 욕망이 솟아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속물 중 하나가 되어갈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정말 위대한 것은 이런 깨달음 보다는 작품 자체가 가지는 예술성에 있을 것이다.

플로베르는 내용보다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하는가에 집중한 작가였고, 하나의 완벽한 스타일을 갖추기 위해 단어 하나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집요하게 전체와의 조화를 생각한 작가였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음악의 다양한 선율을 많이 떠올렸다. 자잘한 여러개의 선율이 각자 재잘되다가 다시 합쳐지고 또 다시 굵은 두개의 선율로 나뉘어 큰소리를 내다가 다시 만나는 그런 느낌, 이 느낌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앞으로도 꼭 다시 한 번 더 읽어 볼 생각이다. 불독같은 외모에 사창가를 수없이 드나들었다지만 나는 플로베르에게 이 책으로 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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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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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괴테의 낭만적인 작품을 중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읽었다. 사담이지만 20~30대에 세계문학을 열심히 읽지 않은걸 거의 매일 후회하고 슬퍼한다. 

창비세계문학 시리즈가 디자인이 구리다고 혹평을 많이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갖고 싶을 정도로 끌려서 중고 서적에서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산다. 이 책도 그렇게 나에게 오게 되었다.

 

이 작품은 괴테가 25살에 자신의 실연의 아픔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인 소설이다. 샤를로테 부프라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괴테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남자의 아내를 사랑한 친구가 결국엔 괴로움을 못 이기고 권총으로 자살을 한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은 친구의 자살이라니...괴테가 그 사연을 작품으로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 더 충격적인 것은 친구가 자살에 사용한 권총이 괴테 자신이 사랑했던 샤를로테의 약혼자 것이라니...현실이 더 소설같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베르터는 첫 눈에 로테에게 반한다. 그의 사랑은 우연이 아닌 운명이다. 어린 동생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로테의 소박하며 자애로운 모습, '보슬비가 대지를 적시는 장관'을 보다가 시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베르터는 서로의 영혼이 통함을 느낀다. 이 영혼의 교감이 매우 중요하다.

처음 그녀를 만나고 나서 그의 마음은 낮인지 밤인지 분간도 안되고, '내 주위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표현한다. 30분만 가면 로테가 있는 이 곳이 천국이며 '진정으로 나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베르터는 로테와의 사랑을 키워나갈 수 없다. 그녀는 이미 약혼한 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약혼자 알베르트는 훌륭한 인격에 능력도 있는 사람이기에 베르터의 상실감은 더 커진다. 자신이 그보다 많이 꿀린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느 날 베르터는 알베르트와 자살 문제를 두고 다툼을 벌인다. 알베르트는 어떻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쏘아 죽일 수 있냐며 그건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쉬운 나약한 사람이 하는 짓이라며 비난한다. 베르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그 절절한 심정을 공감할 때만 우리가 그런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다며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변호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가 있어. 기쁨과 괴로움과 고통을 어느 한도까지는 견딜 수 있지만, 그 한도를 넘어가면 곧바로 쓰러지고 말지. (...)그래서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p.79)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에 힘든 베르터는 이 세상의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이해한다. 인간은 '미로에 갇혀서 출구를 찾지 못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 누구도 그들의 결정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괴테가 이런 자살에 동조하는 글을 썼으니 당시 성직자들이 이 책을 두고 '저주할 만한 글'이라고 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괴테는 자살을 선동하거나 미화시키기 위해 쓴 글이 아니며, 이를 문학적으로 받아들여야지 현실로 착각하면 안된다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변론했다고 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알베르트가 돌아온 이후로 베르터의 괴로움은 날이 갈수록 커지며 급기야는 조울증으로 발전한다. 그토록 좋아했던 아름다운 자연, 책을 봐도 감흥이 없고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로테로부터 선물을 받고는 흥분해서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해하다가 다시 끓어오르는 격정에 자신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기까지 한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베르터는 떠나기로 결심, 어느 공사를 모시는 말단 관리로 취직하고 나름 분주하게 일하면서 회복되는 듯 보인다.

 

어느 날 평소 자신을 신임하던 백작의 만찬에 초대받아 간 베르터는 낮은 신분의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B양 마저도 자신을 모른체 하자 베르터는 도망치듯 그곳을 나온다. 나중에 B양을 만나 그녀에게 속상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베르터 씨, 저는 어젯밤 한숨도 못 자고 오늘 아침까지 제가 선생님과 교제하는 문제로 아주머니의 설교를 들어야만 했어요. 그리고 선생님을 깍아내리고 모욕하는 말도 그저 묵묵히 듣는 수밖에 없었어요. 제 마음의 절반만큼도 선생님을 변호해드리지 못했고, 그런 변호가 용납되지도 않았어요."(p.119)

 

베르터는 이 말을 듣고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상처를 받는다.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 헤아리지도 않고 이런 말을 자신의 면전에 대고 하는 그녀가 야속하다.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누구보다 예민한 감정을 지닌 베르터에게 이 말은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평소 출세 지향적인 관리들과 거들먹대는 귀족들에게 깊은 반감을 갖고 있던 베르터는 신분차별로 직접적인 모욕을 당하자 사직하고 다시 떠나기로 결심한다.

 

유난히 순수하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이지만 현실을 꿰뚫어보는 그의 시선은 꽤나 날카롭고 진보적이다.

 

'나는 우리가 평등하지 않으며 평등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이른바 천민들에게는 거리를 두어야 존경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패배가 두려워서 적 앞에서 자신을 숨기는 비겁한 자와 마찬가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된다.'(p.17)

 

'그런 얼간이들은 본래 지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며 맨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좀처럼 드물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왕들이 대신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또 얼마나 많은 대신들이 그 비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그렇다면 대체 누가 최고 일인자란 말인가? 내 생각에는 다른 사람들을 굽어살피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그들의 힘과 정열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나 지략을 갖춘 사람이 곧 최고 일인자일 것이다.'(p.108)

 

이곳저곳을 방랑하던 베르터는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다시 로테 곁으로 돌아온다.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그는 더욱 그녀에게 집착한다.

 

"그녀는 알베르트와 사는 것보다는 나와 함께 살면 더 행복할 텐데! (...)로테와 내가 함께 좋아하는 책의 어떤 구절을 읽으면 그녀의 가슴과 나의 가슴이 함께 뛰지만, 그런 경우에도 알베르트의 가슴은 공감하며 뛰지 않는다" (p.128)

 

"나는 이따금 어떻게 다른 남자가 로테를 사랑할 수 있고 감히 사랑할 자격이 있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내가 마음을 다 바쳐 오로지 그녀만을 애절하게 사랑하고 있는데, 오로지 그녀밖에 모르고, 그녀만이 내가 가진 전부인데.!"(p.131)

 

그의 로테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고 베르터는 죽음을 생각한다.

죽기 전 로테를 찾아간 베르터는 그녀에게 비극적인 이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시안(Ossian)노래를 로테에게 낭송해주고 두 사람은 감정에 북받쳐 처음이자 마지막인 입맞춤을 나눈다.

그리고 돌아온 베르터는 권총-로테가 심부름 하는 소년에게 직접 건네준-으로 자살한다. 그 유명한 파란색 연미복에 노란 조끼, 장화를 신은 채...

 

그가 죽기 전 남긴 편지는 자신의 죽음을 절절하게 표현, 로테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하다.

로테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 너무 도취되어 로테에게 큰 상처를 줄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이 권총은 당신의 손을 거쳐 왔습니다.(...) 로테, 당신은 결심을 실행에 옮길 도구를 제게 건네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손으로 죽음을 맞기를 고대했는데, 아, 이제 그렇게 되는구요." (p204)

 

"로테! 저는 겁내지 않고 저 차갑고 끔찍한 술잔을 들어 죽음의 도취를 마시겠습니다! 저 술잔을 저에게 건네준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제가 다름 아닌 당신을 위해 죽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니요!" (p.208)

 

"탄환은 장전되어 있습니다. 시계가 자정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로테! 로테, 잘 있어요! 잘 있어요!" (p209)

 

로테는 이 편지를 읽고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을까. 평생을 가슴 한구석에 슬픔을 안고 살 로테를 생각하면 베르터가 철없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반면에 이토록 순수하고 깨지기 쉬운 영혼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발 붙이지 못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죽음으로써 끝낼 수밖에 없는 이 비극은 그가 그냥 베르터가 아니라 '젊은'베르터이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베르터는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죽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책을 읽다 보면 당시 신분차별에서 오는 경멸과 모욕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제목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 에서 Leiden은 고뇌란 뜻으로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 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이는 베르터의 죽음이 단 한 가지가 아닌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이뤄진걸 뜻한다.

 

'베르터 이펙트'라는 말이 있다. 유명인의 자살 이후 그것을 모방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나는 그 현상을 이해하기 힘드나, 베르터가 알베르트에게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며 그 불쌍한 사람들을 대변했을 때, 이 소설은 그런 이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적 사랑에 몸부림치고 세상의 약자들에게 깊은 연민을 가졌던 베르터, 반면에 속물적인 관료와 거만한 귀족들에겐 예리한 비판을 가한 베르터.

난 이런 사랑을 잘 모르지만, 그가 사랑에 빠져 세상과 자기 사이에서 고뇌한 모습은 매우 강렬했고, 여전히 세상의 많은 아파하는 영혼들의 편에 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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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0-05-10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상하게 창비책 모으게 되더라구요. 저랑 취향이 비슷하신 듯 해요 ㅎㅎ 베르테르 넘나 섬세하고 예민하죠. 어릴 때는 이해 못했는데 오히려 30대 중반에 읽으니 공감이 가더라구요. 햄릿만큼이나 다양한 평가가 내려지는 인물 같아요.

coolcat329 2020-05-10 22:51   좋아요 0 | URL
창비세계문학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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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이국적인 맥주 이름이기도 한 이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의 일상은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 되어 버렸다. 설마설마하던 것이 2월 말 대구에서 절정을 찍고 나 또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답답하던 차에 이 책을 무작정 사서 지난 달에 읽었다.

 

이 소설은 페스트에 감염되어 봉쇄된 도시 오랑의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한 르포르타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설 처음에 서술자는 이 작품을 194x년 오랑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을 다룬 연대기라 말한다.

프랑스 식민지 영토인 알제리의 해안도시 오랑에서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한 두 마리만 발견되던 것이 불과 이틀 사이에 '공장과 창고에서 죽은 쥐가 수백 마리나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쥐들은 떼를 지어 밖으로 나와 죽기 시작'하고, 그것은 마치 '땅이 쌓여 있던 분비물을 배출하고, 지금까지 안에서 곪고 있던 종기와 피고름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라고 묘사된다. 땅에서 피고름이 올라온다니...잊을 수 없는 끔찍한 묘사이다. 반면에 방역당국은 아무 대책이 없고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재앙이 자기에게 닦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인 것, 곧 지나가버릴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p.51)

 

결국 1부는 이렇게 끝난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도시가 폐쇄되면서 폐스트는 드디어 '모두의 문제'가 된다. 시민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졸지에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죄수와 다름 없는 '현재는 견딜 수 없고, 과거는 혐오스럽고, 미래마저 박탈당한 처지'가 된다.

 

카뮈는 이런 감옥과도 같은 도시에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폐쇄된 도시에서 요양원에 간 아내와 생이별한 채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보는 의사 리외. 아랍인들의 생활상을 취재하기 위해 오랑에 잠시 들렀으나 도시가 폐쇄되어 연인이 기다리는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탈출을 시도하는 기자 랑베르. 페스트는 악한 사람을 벌하기 위해 신이 내린 벌이라며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신의 뜻대로 살것을 강조하는 파늘루 신부. 타지인이지만 보건대를 조직하여 실질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는 타루. 시청의 하급 직원으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건대에서 통계 업무를 맡은 그랑. 열악한 현장에서 혈청 제조에 온 열정을 쏟아붓는 늙은 의사 카스텔. 그리고 이들과는 다르게 페스트를 반가워 하는 인물 코타루. 그는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으로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아수라장이 되자 오히려 살 맛이 나고 한 술 더 떠서 배급물자를 암거래하여 경제적인 이득까지 얻는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이다.

 

의사 리외와 타루는 보건대를 조직하여 페스트와의 싸움에 앞장선다.

그저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많은 도덕가들과는 반대로 이들이 내린 결론은 단 한가지, '바로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싸워야 하며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 앞에서 타루는 보건대를 조직하고 리외는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한다.

 

반면에 도시에 갇히게 되어 탈출을 시도하는 랑베르는 리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아요. 내가 아는 한 영웅주의는 어렵지도 않고, 또 영웅주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내가 관심있는 건, 사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것이에요. (...) 정말 그럴 수 없다면, 영웅놀이는 그만 두고 모든 사람들이 해방되기를 기다리자고요. 나는 그 이상은 하지 않겠어요." (p.194)

 

하지만 리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내 생각에 리외의 이 말은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신 말이 옳아요, 랑베르. (...)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주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p.194)

 

성실성, 그건 바로 '내 직분을 완수하는 것' 이다.

 

교회 또한 나름대로 페스트와 싸우는 의미로 기도주간을 기획, 파늘루 신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오늘 여러분에게 페스트가 닥친 것은 반성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성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페스트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하느님의 자비'임을 알고, 고통 속에서도 '영생의 불빛'을 봐야한다는 교회의 전형적인 희망 메세지를 전하며 설교는 끝난다.

전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관념적인 종교관에 매몰된 파늘루 신부의 설교를 리외는 받아들일 수 없다.

 

타루는 이런 리외에게 질문이 많다.

 

"선생님도 파늘루 신부처럼 페스트에도 나름의 이점이 있어서 사람을 각성하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고 여기시나요?", " 선생님은 신도 믿지 않으면서 그렇게 헌신적인 이유가 뭔가요?", "무엇에 대해 보호하는 거죠?"

 

"신이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일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p.153)

 

리외에게 페스트는 '끝없는 패배'일 뿐이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그가 깨달은 것은 사람은 '죽음에 익숙해질 수는 없다' 는 사실이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죽음과 싸우는 것'이다. 랑베르처럼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파늘루 신부처럼 하늘만 쳐다보며 영생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에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파늘루 신부도 오통 검사의 어린 아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페스트는 죄많은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신이 내린 벌이라던 신부에게 리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적어도 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죠!"

 

"사랑에 대해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아이들이 고통받아야 한다면, 그런 세상은 죽을 때까지 사랑하지 않고 거부하겠습니다." (p.255)

 

페스트가 악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내려진 재앙이라면 이 죄없는 어린 아이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느냐는 리외의 외침에 파눌루 신부는 손을 내민다. 리외도 손을 맞잡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겪어내고 그것들과 싸우기 위해 함께 있는 겁니다. 보다시피 하느님도 이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난 이 장면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자기 일에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의사와 겸손하고 말 길을 알아듣는(!) 성직자의 맞잡은 손이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파늘루 신부는 두 번째 설교에서 어린 아이가 겪는 고통은 이해할 수 없으며, 그 고통을 하늘나라의 영생이 보상해 준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 뛰어들어야' 하며 '오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며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하고,'페스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섬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신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에, 그 죽음이 필연적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신을 사랑해야 하고 이것이 진정한 신앙심이라고 설교한다.

 

또한 리외를 향해 영웅주의라며 자신을 합리화했던 랑베르도 그토록 바라던 탈출을 앞에 두고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수치스러울 수 있어요. (...) 나는 이 도시에서 이방인이니까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 내 경험에 비추어, 원하든 원치 않든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p.244)

 

이 소설에서 서술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시청의 하급직원인 조제프 그랑이다. 서술자는 2부에서 전염병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보건대를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어떤 행동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다 보면 결국은 간접적으로나마 악에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되기 때문이다.

타루의 보건대가 아무리 훌륭해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그것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것은 인간에게 그런 행위를 좀처럼 보기 힘들기 때문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스트와 싸우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상황에서 보건대를 조직하고 혈청을 제조하는데 온 열정을 쏟아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서술자는 '영웅적인 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랑'을 -영웅이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영웅이라고 칭한다.

 

위에서 말한대로 리외는 페스트와 싸우는 방법으로 '성실성'을 강조한다. 내가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랑은 바로 이런 '성실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시청에서의 업무 외에도 퇴근 후 집에서 글을 쓴다. 비록 한 문장을 가지고 끙끙대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완벽한 하나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는다. 보건대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나서는 업무는 아니지만 모든 일을 등록하고 통계를 내는 중요한 일을 한다. 그랑은 이 모든 업무를 해내기에 피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만 성실하게 해내려고 노력' 한다.

서술자는 이런 그랑을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언뜻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이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타루와 리외같이 앞에서 행동하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과하게 영웅시 하다보면 그랑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을 간과하기 쉽다. 서술자는 그것이 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재앙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버티고 투쟁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우러러 봐야 할 영웅은 없다. 그저 모두가 다 영웅이자 보통 사람들이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일 뿐이다.

 

이런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코로나 최전선에서 싸운 의료진들과 방역 당국 관계자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성금과 응원의 목소리들, 자가 방역에 철저하게 임한 국민들 모두가 다 카뮈가 말하는 성실한 사람들이다.

 

사망률이 감소하면서 도시가 페스트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할 때 아이러니 하게도 타루가 쓰러진다. 가장 좋은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그것이 인생이라는 노인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페스트가 사라지는 와중에 덮치는 죽음...인간의 삶은 죽음 앞에서 늘 어색하다.

 

리외는 다시 찾은 삶에 기뻐하는 군중들과 하늘의 불꽃을 보며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지금의 이 기쁨은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 '페스트 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수십 년 동안 가구나 내복에 잠복해 있고,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 손수건, 낡은 서류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안다.

 

페스트는 짧은 우리의 인생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타루의 죽음 같은 '삶의 알수없음' 이란 생각이 든다.

타루가 리외에게 한 말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페스트 앞에서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에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거든요."(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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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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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브론테 자매 중 한 명으로 30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작품 <워더링 하이츠>를 지난 달에 읽었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는 저택 이름인 고유명사이므로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명숙 번역의 을유문화사 작품 해설 참조)

 

1818년 영국의 황량한 요크셔에서 태어난 에밀리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언니, 동생과 함께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며 지냈다. 잠깐 기숙학교에 다닌 것을 제외하면 목사인 아버지의 사제관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보낸 것이 전부인 그녀가 이런 폭발할 듯한 사랑의 광기와 그로인한 복수의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읽는 내내 놀라웠다. 거의 고립되다시피 살던 병약한 그녀의 내부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참으로 미스터리이다.

 

황량한 요크셔 지방에 워더링 하이츠 저택의 주인 언쇼에겐 두 자녀가 있다. 힌들리와 캐서린. 어느날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더러운 고아 소년을 데리고 온다. 언쇼는 그 아이에게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편애한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하게 되지만, 딸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서로 의지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언쇼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주인이 힌들리로 바뀌면서 히스클리프는 온갖 학대와 모멸을 받으며 하인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캐서린과 히스클리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지고 둘은 우정 이상의 감정을 키워나가게 된다.

 

반면 근처엔 드러시크로스 저택이 있는데 여기엔 린트 가의 남매인 에드거와 이자벨라가 산다. 어느 날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우연히 이 근처에 갔다가 캐서린이 개에게 물려 그 집에서 몇 주간 치료를 받게되고 둘은 처음으로 떨어져 있게 된다. 워더링 하이츠에서 '들짐승처럼 거칠게' 자라던 캐서린은 세련되고 우아한 린튼 가를 접하고는 '매우 정숙한 아가씨'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늘 하나였던 둘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하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으로서 집안의 유산도 못받고 오로지 남편의 재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에드거의 청혼을 받고 갈등한다. 다음은 청혼을 받은 날 캐서린이 가정부 넬리에게 고백하는 장면이다.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 만약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우리가 거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내가 린튼과 결혼한다면 히스클리프가 오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어."

 

캐서린이 자신과 결혼하면 격이 떨어질거라는 얘기를 듣고 (끝까지 듣지 않고!)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다. 히스클리프가 갑자기 사라지자 캐서린은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다가 3년 후 에드거와 결혼하고 드디어 안온한 날을 보내게 된다. 히스클리프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 악명높은 히스클리프의 잔인하고도 비열한 복수가 막장스럽게 전개되는 가운데 나는 히스클리프의 이런 복수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 꽤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악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한 힌들리를 시작으로 자신을 천하게 여겨 에드거와 결혼한 캐서린, 캐서린을 자신으로부터 빼앗아 갔다는 이유로 에드거를 , 또 에드거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이자벨라에게 접근, 그녀와 결혼하여 죽게 만들고 한 마디로 주변을 생지옥으로 만든다.

 

복수를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히스클리프를 보며 사랑이 변질됐을 때 얼마나 파괴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사랑이란 것이 아름다운 면만 있는게 아님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을 떠난 캐서린을 향한 분노는 평범한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다.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 그러면서도 무슨 권리로 나를 버리고 간 거지? 무슨 권리로.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건강한 만큼 나는 불리하지.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아, 당신 같으면 마음 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나를 가만히 둬. 가만히 좀. 내가 잘못했다면 나는 그 때문에 죽는 거야. 그것으로 족하지! 당신도 나를 버리고 가지 않았어? 그러나 당신을 책망하지는 않겠어. 나는 당신을 용서해. 당신도 나를 용서해 줘."

 

자신 때문에 괴로워 하는 캐서린 보다는 캐서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고통에 몸부림쳤는지 좀 알아달라는 히스클리프의 절규, 그에 맞서 지지 않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소리지르는 캐서린의 외침. 불과 불이 만나 활활 타올라 주변을 다 불바다로 만드는 이미지가 그려진다.

 

보통 사랑이라 하면 아름다운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 작품은 사랑의 어두운 면, 가지지 못한 사랑이 집착으로 변질되어 그 폭력성을 강렬한 인물들을 통하여 막장스럽게 보여준, 막장 소설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 그 상처를 고스란히 상대방에게 주고 싶은 마음 누구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선과 악은 늘 가까이 있듯이 이런 사랑의 마음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사랑 그 속성이 가진 이런 아이러니함을 휘몰아치듯이 써 낸 에밀리 브론테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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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시다모 난세보_2020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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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에티오피아 커피답게 가벼우면서도 향이 풍부합니다. 어제받아 오늘 아침 처음 마시는데 상쾌해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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