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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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끊이지 않는 이슈이다. 미국의 흑인들은 80년 넘게 시행된 짐 크로법(Jim Crow Law,1876~1965)에 의해 모든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분리되어 차별을 받았다. 버스를 타도 백인 전용좌석에는 앉을 수 없었고, 식당이나 극장, 화장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차별은 사회,경제적으로 흑인들이 뒤처질 수밖에 없는 극심한 불평등을 야기했다.

 

이 소설은 이런 차별과 그에 대한 저항이 극에 달하던 시기인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을 다룬 소설로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는 2017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이어 이 작품으로 2020년 두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연이어 발표한 작품이 퓰리처 수상작이라니 이번에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그 녀석들은 죽어서도 골칫덩이였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미국 플로리다 주 탤러해시의 폐쇄된 니클 캠퍼스에서 수 십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시체들이 고고학과 학생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다.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린 두개골, 대형 산탄이 잔뜩 박힌 갈비뼈 등' 심상치 않은 유해들이 언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고, 그곳에서 학대를 받은 피해자들의 아픈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 감화원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던 폭력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동안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들의 말에 이제야 세상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2014년 현재 뉴욕 시에 사는 엘우드 커티스도 당시 니클 감화원에 있던 피해자로서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는 자신도 나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과거 자신과 자신의 친구가 겪어야 했던 그 잊을 수 없고 잊혀져서도 안 되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향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엘우드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한다. 

우선 이 엘우드라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엘우드는 할머니가 청소부로 일하는 호텔 주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식당 문이 열릴 때마다 흑인 손님이 있을지를 두고 혼자만의 게임을 하는 소년은 1962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마틴 루터 킹의 연설 앨범을 들으며 자신의 가능성과 꿈을 키워나간다.


"반드시 우리의 영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매일 삶의 여로를 걸을 때 이런 품위와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p.39)


킹 목사의 말은 어린 엘우드에게 깊이 각인되어 그에게 하나의 신념으로 다가온다. 

나의 자존감을 빼앗고 나를 억누르는 크고 작은 힘 앞에서 나 자신을 잃으면 안된다는,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신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바로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는 것이기에 세상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사실을 원칙으로 삼는다.  


엘우드는 이런 믿음으로 할머니 몰래 극장 앞 시위에도 참가하고, 이런 경험은 그가 좀 더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게 만든다. 엘우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들어가 어떤 공부를 할지 고민하며, 한편으로는 '흑인의 지위 향상에 헌신' 을 하겠다는 꿈을 갖는다. 

엘우드는 이런 아이였다. 킹 목사의 연설을 마음 속에 새기며 바르게 생활하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다보면 이 세상은 좀 더 바른 길로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그런 선량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엘우드는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우수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대학에서 하는 강의를 들으러 가던 날, 너무나 어이 없게도 자동차 도둑으로 몰려 니클(Nickel)이라는 소년 감화원에 가게 된다. 재수 없게도 히치하이킹을 했던 차가 훔친 차량이었고,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이유로 차 도둑으로 몰린 것이다. 대학에 진학할 만큼 똑똑하고 성실하며 정직한 아이가 어떻게 한 순간에 소년원으로 갈 수 있는가...

1부 마지막 경찰의 말은 엘우드가 왜 아무 의심없이 소년원으로 가야하는지 보여준다. 

"그런 걸 훔치는 사람은 검둥이뿐이라고."


니클은 1899년, 어린 범법자들이 새로운 교육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훌륭한 시민의 품성과 목적의식을 지니고 사회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감화원' 이라는 취지로 문을 연 학교이다. 범죄를 저지른 소년은 물론, 갈 곳 없는 아이들도 온다. 

니클에는 백인 소년과 흑인 소년이 있지만, 그들의 공간은 피부색에 따라 완전히 분리, 인종차별이 그 어디보다 철저하게 이뤄진다. 제이미라는 소년은 어머니가 멕시코인이라 흑백의 구분이 모호하여 처음엔 백인 기숙사에 있었으나 라임밭에서 일하고 피부가 탄 뒤에는 유색인종 반으로 옮겨지는데, 나중에 피부가 다시 제 색깔로 돌아오자 다시 백인 진영으로 보내지고, 또 다시 그게 못 마땅한 선생에 의해 다시 흑인 쪽으로 보내지는 웃지 못할 상황도 일어난다. 

피부색에 따라 기숙사 환경과 음식, 대우도 당연히 다르다. 


엘우드는 킹 목사의 연설을 생각하며, '난 여기 붙잡혀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할 거야. 여기서 보내는 시간을 짧게 줄일 거야.' 라며 마음을 다잡지만 현실은 그의 이런 순진함을 뭉개버린다. 

어느 날 괴롭힘을 당하는 어린 소년을 도와주려다가 선생에게 걸려 잔혹한 체벌로 악명 높은 '화이트하우스'로 끌려 가게 되고 그곳에서 채찍질을 당해 기절을 하게 된다. 

열심히 하면 니클도 자신의 노력을 알아 줄 것이라는 엘우드의 믿음은 이런 폭력과 모욕으로 되돌아 오고 그는 자신이 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 실체를 알게 된다.


니클에는 폭력과 차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 관리자들은 주 정부가 지급한 물품을 빼돌려 시내 상점에 팔아 이익을 챙긴다. 엘우드는 친구 잭 터너의 추천으로 '지역봉사활동'을 나가게 되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시내에 나가 상점마다 다니며 빼돌린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다. 각종 통조림, 공책, 연필, 의약품 등이 이렇게 사라지고 그제서야 엘우드는 왜 학생들에게 치약이 공급되지 않았는지 알게된다. 또한 학생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얻은 수익금으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바쁜, 니클은 그야말로 부정부패의 온상이다. 

엘우드는 어떤 본능에 이끌려 이런 니클의 부정을 매일매일 적어둔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기록이 이런 일들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고.


현실에 체념, '침묵의 미덕'을 받아들이며 터너와 '지역봉사활동'을 하며 조용히 지내던 엘우드는 어느 날 자신의 실체를 보게된다.

'오랫동안 억압당한 끝에 그냥 현실에 안주하며 멍해져서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침대로 여기고 잠드는 법을 터득한 검둥이'에 불과한 자신을...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음에 안도하며 고개 숙이는 자신의 모습...그건 바로 니클이 원하는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생각한다. 니클을 나가는 방법은 탈출, 죽음 이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니클을 없애는 것'


주 정부에서 감사가 나오는 날, 엘우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동안 니클에서 일어난 비리와 폭력을 낱낱이 적은 편지를 감사관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를 말리는 터너에게 엘우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건 장애물 경주가 아니야. 장애물을 피해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반드시 장애물을 통과해서 가야 돼. 놈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가야 돼."(p.218)


엘우드는 킹 목사가 말한 '긍지와 자부심'을 생각한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궁극의 선의'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세상은 '버스에서 앉으면 안 되는 자리에 앉은 여자, 금지된 식당에 들어가 호밀빵에 햄을 얹은 샌드위치를 주문한 남자 덕분'에 조금이라도 바뀌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이 편지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작가는 플로리다 주에 실제로 있었던 도지어 남학교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의 일부 내용은 실제로 이 학교를 경험했던 사람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으며,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가했던 '화이트 하우스'도 실제로 있었음을 '작가의 말'에서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형제복지원'이 생각났다. 암매장, 폭력, 감금, 노동착취, 횡령 등 그 모습이 얼마나 닮았는지, 약자들을 상대로 잔인하게 가해지는 폭력과 인권유린은 너무나 많고 어디나 그 모습은 비슷하다. 

또한 작년 미국에서 일어났던 조지 플로이드 사건도 떠올랐다. 경찰의 무릎에 목이 깔려 "숨을 쉴 수 없어요. 온 몸이 아파요. 난 죽을거 같아요" 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찍힌 동영상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미국에서는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되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너무나 자주 이야기되는 이슈이고 미국의 뿌리깊은 사회 구조적 문제라 진부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 21세기에도 보란듯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는 4년 전 한국의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하버드대 출신에 유명 소설가인 당신도 인종차별을 겪나?"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차별을 겪었다. 성공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흑인이다. 이건 돈과 명예 여부와 관련이 없다."  


이 소설은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엘우드라는 소년을 통해, 지금도 여기저기서 자행되고 있는 차별과 폭력에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시위를 하고 백인들을 설득해서 법을 바꾸면 평등한 세상이 올거라고 믿는 순진한 엘우드에게 잭 터너는 세상의 민낯을 보여주고자 쇠고리가 박혀 있는 떡갈나무 두 그루를 보여준다. 흑인 아이를 데려와 쇠고리에 묶어놓고 채찍으로 후려쳐 걸레로 만드는 곳. 


아무리 법을 바꾼다해도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면 세상을 지배하는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작가는 터너를 통해 보여준다. 

'사악함의 뿌리는 단순히 피부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이런 곳에 오게 만든 그 모든 부모들, 사람들이 문제' 인 것이다.

차별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만이 아닌 인간 본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 소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구성과 문장, 메시지 모든 것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잘 짜여진 작품이다. '위대한 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천명관 작가의 말에 동감한다. 

특히 마지막 에필로그에서의 그 전율은...많은 사람들이 느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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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05 15: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잘못된 것을 바꾸려는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당장의 효과는 가져오지 않더라도 의미는 있을거라는~! 결말부분은 저도 놀랐었습니다. ㅎ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coolcat329 2021-03-05 15:44   좋아요 2 | URL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읽고 난 후에 뒤늦게 감동이 밀려오는게 작가가 치밀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파랑새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군요. 행동의 중요함~~댓글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1-03-05 15: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심이 담긴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전 작년에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이
그야말로 맨발로 달려가 사서 읽었
던 기억이 납니다.

하버드 출신도 인종주의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니... 슬프네요.

coolcat329 2021-03-05 15:46   좋아요 2 | URL
그쵸~~하버드출신에 유명작가인데 차별은 같으니까요.
레삭님 책 사러 달려 나가시는건 뭐~~이젠 놀라지 않습니다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

막시무스 2021-03-05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씀은 정말 공감하고 감동적입니다!ㅎ

coolcat329 2021-03-05 21:19   좋아요 1 | URL
네~아무리 법과 규칙이 바뀌어도 인본주의가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악의 뿌리는 그대로 남는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메모습관 2022-06-25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서야 읽어보았답니다. 리뷰에 너무 너무 공감하며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coolcat329 2022-06-25 21:44   좋아요 0 | URL
아~ 글을 잘 못쓰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브게니 오네긴 열린책들 세계문학 7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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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푸시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인들은 어릴 적엔 푸시킨의 동화를 듣고 청년기에는 그의 시를 읽고 자란다고 할 정도로 푸시킨은 러시아에서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국민작가이다. 또한 문학적으로 성취한 그의 업적은 방대하고 모든 장르에 걸쳐있어 훗날 많은 러시아의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시킨과 동시대를 살았던 평론가 벨린스끼가 "러시아 생활의 백과사전"이라고 칭송한 운문소설, 즉 시의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그냥 소설을 쓰기도 힘들텐데 소설의 서사를 시적 형식으로 표현한 점, 무엇보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거의 8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점을 볼 때 푸시킨은 이 작품에 많은 열정과 자부심을 가졌던 듯 싶다.

 

총 8장으로 구성, 각 장에는 40~60개의 연이 포함되어 있다. 또 각 연은 14행으로 이루어져 있어 책을 펼쳐 보면 소설이 아니라 긴 시처럼 보인다.  

이 운문 소설은 귀족 청년 오네긴과 러시아 시골 귀족의 딸 따찌야나의 엇갈린 사랑을 기본으로 한다. 사랑 이야기를 기본 골격으로 그 위에 푸시킨의 러시아 사회와 문화에 대한 생각, 문학에 대한 평, 그 외 사적인 이야기들이 덧붙여 전개 되는데, 나오는 작가, 예술가만도 수십여 명에 여러 책과 그와 관련된 인용문들 등, 기본 스토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런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나와 러시아의 정서와 문화에 낯선 나에게는 어렵고 지루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면 1장에서 화자인  '나'(푸시킨)는 무도회에 간 오네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방탕한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은 러시아 귀부인의 '앙증맞은 발을 사랑한다' 며 30연에서 34연까지 발에 대한 찬양을 한다. 또한 2장에서 따지야나의 부모가 나오는데, 러시아 전통문화를 지키며 소박하게 사는 노부부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그들은 평화로운 삶 속에

그리운 옛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름진 버터 주간에는

러시아 식 블린을 구웠고

일년에 두 차례씩 단식제를 지켰고

둥그런 그네 타기와

접시의 노래와 윤무를 즐겼다.

사람이 하품을 하며 기도문을 듣는

성 삼위일체 축일에는

땅두릅의 작은 다발에

자못 경건하게 세 방울쯤 눈물을 흘렸다.

끄바스는 공기 같은 필수품

손님을 대접할 때는

관등순으로 요리를 돌렸다.

 

-2장 35연(p.74)

 

버터 주간, 블린, 단식제, 접시의 노래, 세 방울 눈물, 끄바스같은 말들은 주석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다 러시아의 풍습과 관련이 있는 단어들이며 이 노부부가 러시아의 전통 속에서 소박하게 산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매번 주석을 읽어야 하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러시아 문화와 풍습을 공부하는 기분이 들었다.

'러시아 사람이 우리나라 판소리 소설을 읽으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오네긴은 페테르부르그 출신, 귀족 계습으로 유창한 프랑스어, '최신 유행의 모범적인 추종자', '댄디 같은 런던 식 의상'으로 사교계에서 멋진 청년으로 통한다. 여자들을 다루는 데도 능숙, '하루에 세 시간은 거울 앞에서' 보낼 정도로 멋쟁이, 그야말로 돈많고 시간 많은 전형적인 바람둥이이다. 그의 사고방식과 옷차림은 유럽 스타일로 그의 몸치장을 위한 내실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치스럽고 외모에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 들여온 호박 파이프,

탁자 위의 도자기와 청동상,

섬세한 감정에 기쁨을 더해 주기 위해

크리스털 병에 담겨진 향구,

머리빗과 손톱 다듬는 철제 줄칼,

쭉 뻗은 가위, 구부러진 가위,

손톱을 소제하거나 이를 닦는 데 쓰는

서른 가지나 되는 각종 솔들.

 

1장 24연 중 (p.26)

 

그는 매일같이 이렇게 몸치장을 하고 새벽까지 오페라 극장, 무도회를 옮겨 다니며 화려하지만 무의미한 삶을 산다. 그러다 이런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급기야 우울증에 걸리는데 푸시킨은 그것을 '영어식으로 말해 스플린, 혹은 간단히 러시아 식의 우울증' (1장 38연) 이라고 말한다.

이런 우울한 모습으로 살롱을 드나드는 오네긴을 푸시킨은 바이런의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에 등장하는 '차일드 해럴드'에 빗대서 묘사하는데, 차일드 해럴드는 세상에 대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오만하고 자유분방한 인물로 푸시킨은 이런 낭만주의 작품 속 인물을 오네긴으로 패러디 함으로써 당시 귀족 청년들을 풍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7장에서 동생 올가가 결혼해서 떠나고 홀로 남아 외로운 따찌야나는 떠나고 비어있는 오네긴의 집에 가게 된다. 바이런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그의 서재에서 오네긴의 책들을 보면서 따찌야나는 그가 '무슨 생각과 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는지' 느끼며, 오네긴의 실체를 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따찌야나는

다행스럽게도

차츰차츰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전능한 운명의 신이

탄식의 대상으로 정해 준 사내의 정체를.

슬프고 위대한 기인,

천국, 혹은 지옥의 피조물,

천사, 아니면 오만한 악마,

그는 과연 누구인가? 모조품,

보잘것 없는 유령, 아니면

해럴드의 망토를 걸친 모스끄바 인,

아니면 타인의 변덕이 만들어 낸 해석,

유행어로 가득 찬 사전.....?

결국 그는 하나의 패러디 아닌가?

 

-7장 24연 (p.212)

 

소설을 좋아한 따찌야나는 공상 속에서 소설 속 인물들과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시골의 순박한 귀족 처녀였다. 그런 그녀가 처음 오네긴을 보고 사랑을 느끼고 소설 속 주인공들과 그를 동일시하는 모습은 시골에서 공상 속에서만 사랑을 꿈꿨던 그녀에겐 어찌보면 당연한 모습이다. 그러나 실연의 아픔을 겪고 성숙해진 그녀는 자신을 그토록 잠 못 이루게 했던 이 청년이 사실은 '하나의 패러디'이자 '보잘 것 없는 유령', '모조품'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따찌야나도 당시 귀족의 자녀처럼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랐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녀의 부모는 러시아의 풍습과 전통을 지키는 소박한 귀족이다. 따찌야나라는 이름도 세련된 이름이 아니라 촌스러운 러시아식 이름이며 그녀의 모습도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모습이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녀의 내면은 '러시아적인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자신도 왜인지는 모르지만

러시아적인 정서로 가득 찬) 따찌야나는

러시아의 겨울을

그 차가운 아름다움을 사랑하였다.

 

-5장 4연 중

 

차가운 러시아의 겨울을 사랑하는 따찌야나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 전설이며 꿈이며 카드 점이며 달님의 예언 같은 것'을 믿는다. 그녀는 오네긴이 나오는 무서운 꿈을 꾸고 나서 마르틴 자데카가 쓴 해몽책을 보면서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본다. 이 책은 서적 행상인에게 산 책으로 '슬플 때는 언제나 위안을 주고 잠자리에 들 때는 동반자'가 되는 애독서일 정도로 그녀는 러시아의 전통을 의지하고 믿는다. 이러한 미신을 믿는 그녀의 모습은 세련된 프랑스 교육을 받은 귀족이 아닌 순박한 시골 여인의 모습이다.

 

이렇게 러시아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잡힌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따찌야나의 모습은 마지막 8장에 가서 올바르고 정숙한 귀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미숙한 '하나의 패러디'에 불과한 오네긴과 대조된다. 뒤늦게 사랑을 고백하는 오네긴에게 따찌야나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그의 허영심을 지적한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얻지 못했습니다......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저를 쫓아다니시나요?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에 들게 되었나요?

(중략)

당신은 사교계에서

유뷰녀를 정복했다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요?

 

-8장 44연 중

 

따찌야나는 위선으로 가득한 화려한 사교계를 벗어나 '책장과 황량한 정원이 있는 초라한 고향집'으로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성실과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언급하며 마지막으로 오네긴에게 말한다.

 

아, 행복은 손에 잡힐 듯

그토록 가까이 있었건만......! 그러나 제 운명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중략)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춰서 뭐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몸,

영원히 그이에게 성실할 겁니다.

 

-8장 47연 중

 

소설에 심취해 비현실적인 공상 속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시골 소녀에서 기품있고 도도한 사교계의 공작부인으로 거듭난 따찌야나. 이런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저버리지 않은 강인함과 고결함을 지닌 여인으로 성숙하는데, 이는 겉만 번지르르한 오네긴과 분명히 대조된다.

 

푸시킨의 소설은 <벨킨 이야기>만 읽어봤는데, 이번에 만난 <예브게니 오네긴>은 처음엔 이해하기도 힘들고 큰 재미도 없었지만, 중간중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어보니 푸시킨이 이 소설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쏙쏙 숨겨놓은 거 같아 작은 재미를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러시아 국민작가의 작품이니 그것만으로도 뜻깊은 독서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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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3-01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푸시킨의 시를 예전에 참으로
좋아했었는데...

소설도 쓴 줄은 몰랐네요.

coolcat329 2021-03-01 16:58   좋아요 2 | URL
레삭님이 푸시킨의 소설을 모르셨다니 정말 의외입니다. 분명 아실거 같은데요...🤔
근데 소설이 별로 많지가 않죠. ㅠ 장편은 이거랑 <대위의 딸>이 있고, 단편이 좀 있으니까요...
너무 예쁜 여자랑 결혼해서 ㅠㅠ 나탈리아 곤차로바! 이 여자만 안 만났어도...ㅠㅠ 여자 잘못 만나 천재의 인생이 허망하게 38살에 끝났으니 참 안타깝죠.

Falstaff 2021-03-01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가 더 좋던데요.
마지막에 따찌야나가 오네긴에게 뺀찌 놓는 장면도 노래로 들으면, 대개의 여성들이 속이 다 션~하다, 라고 반응하더라고요. ㅋㅋㅋㅋ
반면 저는 오네긴에게,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 네가 따찌야나라도 미쳤냐, 백만장자 늙은 상이군인 남편이 언제 숟가락 놓을지 모르는데 너 따라 가게, 하지 않았을까...했다고 얘기했다가 여성분들한테 멍석말이 함 당했습니다. ㅋㅋ

coolcat329 2021-03-01 17:2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역시 재밌으세요~~ 마지막 따찌야나 뺀찌 장면ㅋㅋ 오페라 찾아 들어봐야겠어요~
 
조제프 푸셰 -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전면 새번역 누구나 인간 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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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약아빠진 놈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걸세." 나폴레옹이 한 말이다.

 

저자가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점을 차치하고 이 책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로 표지에 있는 이 문구였다.

 

"나폴레옹도 두려워한 조제프 푸셰의 삶"

 

또한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이다,

'정치적'이라는 단어는 좋게 들리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처세에 능숙한 인물을 두고 '정치적'이라고 하지 않나.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나폴레옹도 두려워했다는것일까?

이 책은 이런 호기심이 크게 작용하여 읽게 되었고 무엇보다 저자가 츠바이크였기에 커다란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츠바이크는 들어가는 글에서 '우리는 왜 이 기회주의자의 삶을 알아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힌다.

프랑스 역사에서 푸셰는 '타고난 배신자, 보잘것없는 모사꾼, 미끌미끌한 파충류 같은 인간, 변절을 밥 먹듯 하는 놈, 경찰의 비열한 기질이 몸에 배인 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악당...'으로 묘사된다. 프랑스 혁명부터 왕정복고로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제프 푸셰를 역사는 그저 악한 기회주의자로 치부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런 푸셰를 꿰뚫어 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위대한 작가 발자크'이다.

 

"어떤 사람은 보이는 표면 아래에 항상 아주 깊은 심층을 지니고 있어서 그가 무슨 일을 하는 순간에 다른 사람들은 그 의중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푸셰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의 천재성의 본질은 걸출한 통치력에 있었다. 그는 앞일을 모두 예측할 만큼 대단한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권력으로 사람을 다루는 능력을 놓고 보면 푸셰가 나폴레옹보다 한 수 위였다."

 

발자크의 이런 찬사에 츠바이크는 이 푸셰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모두들 푸셰에게 욕을 쏟아내기만 할 뿐 '아무도 그의 성격을 밝혀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는' 점에 주목한다.  그 과정에서 '그에게는 아예 성격이 없다'는 사실과 만나게 되고 이 둘도 없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밝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몸에서 냄새가 안나는 사람은 봤어도 성격이 없는 사람이라니, 섬뜩하면서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1759년 프랑스 항구 도시 낭트에서 선원이자 장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푸셰. 허약한 체력과 예민한 성격으로 부모의 직업에 적합하지 않았던 그는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던 교회에 들어간다. 그는 수도원에서 교과 과정을 마치고 교사가 되는데, 이 때부터 그는 '침묵을 지키는 기술, 자신을 숨기는 기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탁월한 능력 등'을 배우게 된다. '자신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술과 함께 '인간 심리를 조종하는' 능력은 앞으로 그의 숱한 변신의 자양분이 된다.

 

1790년에는 오라투아르 수도원의 교사였던 사람이 1792년에는 국민공회 의원으로 당선, 지롱드파에서 과격 자코뱅파로 넘어가 1793년 리옹에서 일어난 반혁명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대학살을 자행, 그 과정에서 교회를 탄압한다. 좌파와 우파를 오가며 뒤에서 비밀리에 활약하다 결국엔 로베스피에르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한 때 자코뱅으로서 사유재산 철폐를 외쳤던 그가 총재정부와 보나파르트 정부에서 경찰장관직을 수행하며 막대한 부를 쌓고, 급기야 나폴레옹 치하에서 오트란트 공작이라는 칭호도 얻어 귀족이 된다. 또한 경찰장관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막대한 정보를 입수, 나폴레옹 조차도 불안하게 만들고 결국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그를 배신, 임시정부 수반이 되어 장관직을 보장 받는 대가로 루이 18세에게 정부를 팔아넘기니 정말 그의 변신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장관직을 보장받는 대가로 왕 앞에 무릎을 꿇은 푸셰. 츠바이크는 이런 그의 행동을 그가 범한 최고의 '바보짓'이며, 이로서 그는 '영원히 역사 앞에서 비굴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푸셰의 도움으로 새롭게 복귀한 루이 18세와 왕족들은 푸셰의 계산과는 다르게 서서히 등을 돌린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푸셰가 누구인가. 루이 18세의 형인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낸 인물들 중 한 명 아닌가.

그는 끝까지 자신이 다시 정계에 복귀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지만, 그는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간다. 오직 이 골수 자코뱅이었던 인간이 1793년 자행했던 리옹 대학살에 대한 기사만이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고 과거 경찰장관이었던 그 앞에서 덜덜 떨던 사람들도 이젠 그에게 대놓고 침을 뱉는다. 누구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이상 미움도 흥미의 대상도 아닌 그저 '기운 없고 짜증을 잘 내는 노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역사는 '언제나 순간만을 생각했던' 그에게 이렇게 '가장 잔인한 복수를 한다.'

결국 프랑스 왕가로부터 추방당하고 말년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여기 저기 떠돌다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급격한 몰락이라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한번 느끼게 한다.

 

여기저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옮겨 다녔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늘 끝까지 살아남았던 조제프 푸셰. 이런 그를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누군가를 일인자로 만들어 방패로 내세우고 그의 뒤에 서서 그를 앞으로 몰아가다가 그가 지나치게 앞으로 나갔다 싶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거침없이 등을 돌리고 마는 것, 바로 이것이 푸셰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다. (p.33)

 

영리하게 자제한 덕분에, 철저히 지조를 지니지 않는 용기를 대담하게 발휘한 덕분에, 어느 순간에든 신념을 지니지 않는 용기를 대담하게 발휘한 덕분에 푸셰는 살아남는다. (p.34)

 

작가는 오직 자신의 욕망에만 충성을 맹세했던 조제프 푸셰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런 유형의 인간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종족이지만 우리는 이 종족에 관한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의 시대는 영웅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만 실제로 세계의 운명을 바꾼 사람들은 그런 영웅의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들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런 인물의 대표로 조제프 푸셰를 이야기한다.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였던 한 인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판을 감독하고 조종했던 그래서 로베스피에르가 "음모의 괴수"라고 불렀던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든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님을, 결정적인 일은 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츠바이크의 전기 시리즈와 소설들이 이화북스에서 앞으로도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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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2-25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요즘 츠바이크에 푹 빠지셨군요. ㅎㅎㅎ

coolcat329 2021-02-25 17:13   좋아요 0 | URL
네~읽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레삭매냐 2021-02-25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의 판권이 풀렸는지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그의 책들이 출간되는 것으
로 보이네요.

저는 이 책을 구판으로 도서관에서 빌
려다 읽었답니다. 조지프 푸셰, 그야말로
혁명과 제정기를 거친 순수한 빌런이
아닐까 싶습니다.

coolcat329 2021-02-25 17:22   좋아요 1 | URL
아 구판으로 읽으셨군요. <위로하는 마음>도 레삭님 글 읽고 사뒀네요 ㅎㅎ 역자 정상원도 좋았고 앞으로 계속 번역되서 나오면 좋겠어요
 
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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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은 츠바이크가 나치를 피해 망명생활 중에 쓴 작품으로 1939년에 출판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이기에 아끼는 마음으로 모셔뒀다가 2021년 새해를 맞이하며 드디어 읽게 되었다.

 

1913년 11월, 오스트리아 기병대 장교인 안톤 호프밀러 소위는 헝가리 국경 작은 주둔지로 발령을 받는다. 적은 월급을 받는 군인으로 빠듯하면서도 늘 똑같은 지루한 생활을 하던 호프밀러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14년 5월, 우연히 그곳의 부유한 실업가 케케스팔바의 만찬에 초대를 받는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귀한 음식들, 궁정처럼 화려한 저택,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춤까지 그는 행복에 도취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자신이 이 집의 딸(에디트)에게 춤을 청하지 않은 실례를 범한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찾아가서 "아가씨, 저와 춤추시겠습니까?" 라며 춤을 청하는데...이것이 사건의 서막을 여는 말이 될줄이야!

이 책은 정말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내용을 말하고 싶지 않다. ^^

 

츠바이크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감정 중 하나인 연민이라는 감정이 어떤 다양한 얼굴을 감추고 있는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타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인 이 감정이 숨기고 있는 인간의 이기심, 자기위안, 우월감, 인정욕구, 나약함 등을 예리하고 깊이있게 (정말 소설로 이보다 더 깊이 있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묘사한 작가의 글에 탄복하며 얼마나 숨가쁘게 읽어 나갔는지 모른다.

호프밀러, 케케스팔바, 에디트 등 초조하고 결핍이 있는 인물들과 당시 오스트리아가 처해 있던 전쟁 전 불안한 상황이 묘하게 겹쳐지면서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 나 또한 초조함을 느꼈다.

 

나는 '연민'을 인간이 가진 몇 안되는 선한 감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독한 인간도 연민을 품을 수 있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연약하고 순수한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연민은 많을수록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츠바이크는 연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p.17)

 

 

아무리 못된 인간이라도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 인간은 누구나 연민의 주체이자 대상이 될 수 있다. 연민에는 책임이 따르니 '나 이제부터 연민 안해! '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이 뿌린 연민에 늘 책임을 져야 하는가? 희생할 각오 없이 연민이라는 감정을 품으면 안되는 것인가? 자연스럽게 연민과 책임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정말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연민의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만약 상대방이 내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원한다면 처음에 품은 연민의 마음은 부담으로 바뀔 것이다.

 

인간이기에 연민의 감정이 우러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비록 자기만족, 우월감에서 오는 것일지라도. 그러나 일단 내가 누군가에게 동정과 연민을 갖게 되어 상대방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싶다면 그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구세주가 될 수 없음을, 나 또한 마음이 수십 번 바뀌는 부족하고 약한 인간이며 지금부터 내가 하는 행위에 그 어떤 댓가나 주위의 칭찬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나의 작은 도움에 너무나 고마워하는 상대방을 보며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에 도취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황홀함에 도취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지키지 못할 약속과 거짓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연민의 마음은 그 어떤 것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저 나 또한 한계가 있는 인간임을 알고 넘쳐 흐르려는 그 연민의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한다. 어떤 감정이든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넘쳐 흐르면 화를 부르게 되어 있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츠바이크가 말한 '창조적 연민'은 나를 희생하고 타인의 아픔에 끝까지 함께하는 마음이다. 나는 이렇게 할 자신이 없다. 다만 자기 만족에서 오는 '감상적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고 나 자신을 자주 돌아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인 이 소설은 이렇게 인간의 약한 본성인 '연민'이라는 감정이 '양날'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콘도어 박사는 연민에 사로잡힌 호프밀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 감정은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됩니다. (…) 연민이라는 거, 아주 위험한 겁니다! (p.235)

 

이 책은 북플에서 애독하는 몇몇 님들의 리뷰를 통해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작년에 사 둔 책이다. 드디어 2021년 새해를  맞이하며 읽었는데, 작가의 이런 장편이 더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그가 쓴 여러 전기와 평전도 소설 못지 않게 재미있기에 아쉬움과 기쁜 마음이 함께 든다.

 

또한 대산세계문학총서를 처음 읽어 봤는데, 다른 세계문학전집보다 좀 더 전문적인 느낌을 주는 이런 전집에 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은근히 이 책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거 같다.

 

인간의 마음 속을 헤엄치고 싶으신 분들, 재미있는 책에 푹 빠져 끌려가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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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2-18 11: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거 읽으셨군요. 이거 읽고 나면 너무 재밌어서 막 수다떨고 싶어지지 않아요? ㅎㅎㅎ 츠바이크 장편이 드물기는 하지만 아쉬운대로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도 추천드립니다. 미완성이긴한데 꽤 긴 작품이에요. 이 책은 근데 현재 절판이고 불편해 보이는 미니북하고 전자책만 판매하네요;;

Falstaff 2021-02-18 11:25   좋아요 2 | URL
맞아요, 맞아요!
크리스티네도 읽으셔야 합니다. 뜻이 있으면 어디 가서 도둑질이라도 해 옵니다!!!

coolcat329 2021-02-18 11:28   좋아요 2 | URL
제가 이 책을 잠자냥님과 폴스타프님 글을 읽고 구입했습니다.🤭 네 정말 책을 막 껴안고 싶을 정도로 좋네요.
잠자냥님 그 난리났던! ㅋ 르 귄 리뷰 읽고 크리스티네 찾아보니 청바지 뒷주머니에 들어갈 사이즈의 미니북만 있더라구요ㅠㅠ 사이즈가 작아서 그런지 400페이지쯤 되더라구요. 그래서 혹시나 새로 나올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다 지치면 미니북이라도 구해야 겠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

잠자냥 2021-02-18 11: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참 그리고 아쉬운대로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도 추천드려요. 전기이긴한데, 워낙 사건이 사건인지라 거의 소설 같아요. 국내에는 현재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 <마리 앙투아네트/모르는 여인의 편지> 두 가지 판본이 나와 있어요. 저는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었는데 괜찮았습니다.

coolcat329 2021-02-18 11:32   좋아요 2 | URL
아! 제가 츠바이크를 바로 이 앙투아네트로 만나서 팬이 되었습니다. 청미래 출판사로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중간중간 다시 읽어봤는데 역시 재밌더군요. 네 맞아요. 거의 소설이에요 ㅋㅋ
 
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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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총 14편의 서양역사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이다.

원제는 <Sternstunden der Menschheit>로 독일어 사전을 찾아보니 '인류사 운명의 순간들' 정도 될 거 같다. 옮긴이의 해설에 따르면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이 원제라고 하는데, 서양 역사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이며 극적인 순간들이 마치 내가 그 역사의 순간에 들어가 있는 듯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진다.

 

키케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드로 윌슨까지 총 14편의 이야기 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세계사를 결정지은 워털루 전투'이다.

1815년 일어난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는 영국과 프로이센 군대를 상대로 싸우다 패배하는데, 여기에 부하 그루쉬의 판단 실수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나폴레옹 군대가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 군과 엎치락 뒤치락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가운데 그루쉬 군대는 퇴각하는 프로이센 군을 쫓는 임무를  맡는다. 영국과 프랑스 둘 다 먼저 지원군이 오는 쪽이 승리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루쉬 군대의 지휘관들은 황제를 도우러 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루쉬는 황제의 명령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부하들의 간청에 그루쉬는 '1초 동안 골똘히 생각'하는데, 그 결정적인 장면을 츠바이크는 이렇게 묘사한다.

 

1초 동안 그루쉬는 생각에 잠긴다. 이 1초는 그루쉬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나폴레옹과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발하임 농가에서의 이 1초가 19세기를 결정하는 셈이다. 이 역사적 순간은 정직하기는 하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p.171)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융통성있게 나폴레옹 군대를 도우러 가야하는 순간, 그루쉬는 "내 임무는 프로이센 군을 추격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부하의 간청을 묵살한다.

츠바이크는 유럽의 운명이 한 '소심하고 평범한 인물이 머뭇거린 덕분에' 바뀌었음을, 어쩌다 별볼일 없는 사람에게 거대한 운명이 찾아왔을 때 그것이 어떻게 안타깝게 비껴가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아문센과 남극 정복을 두고 경쟁을 벌였던 영국 해군 지휘관 로버트 스콧(1868~1912)의 이야기도 인상깊었다. '남극 정복'이라는 인류의 위대한 업적을 두고 벌이는 죽음의 행군, 그러나 스콧과 그의 대원들이 남극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경쟁자 아문센이 꽂아 둔 노르웨이 국기였다. 스콧에게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달 차이로 2등이지만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하기에...스콧은 서글프게 남극점을 바라본다. 그리고 단 한 줄의 남극 묘사.

 

"여기에 볼 것이라곤 전혀 없다. 지난 며칠간 보았던 끔찍하리만치 단조로운 풍경과 차이 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p.314)

 

노르웨이 국기 옆에 유니언 잭을 꽂아 놓고 떠나는 스콧은 일기장에 "돌아갈 길이 두렵다."라고 쓴다.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리라는, 영국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희망으로 도착한 남극, 그러나  먼저 왔다간 사람이 있음을 알고 돌아가는, 무사히 귀환한다 해도 세계 최초라는 명예는 얻지 못하는 그 길을 이들은 헤쳐나간다. 그러나 자연은 이들을 '수천 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한 명 씩 무너뜨린다. 동이 난 식량, 연료는 다 떨어졌는데 기온은 영하 40도, 굶어 죽느냐, 얼어 죽느냐의 문제만이 남은 극한 상황에 나 또한 한기가 느껴진다.

마지막 각자의 침낭으로 들어가 당당히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을 츠바이크는 이렇게 칭송한다.

 

한 인간이 막강한 운명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다가 몰락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가장 위대한 비극이다. 시인은 몇 차례 그런 비극을 만들어 내지만 삶은 수도 없이 만들어낸다. (p.324)

 

이 외에도 혁명을 대변하는 노래이자 프랑스 국가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되는 <라 마르세예즈>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뇌졸중으로 오른쪽이 마비되어 죽음 직전까지 갔던 헨델과 그런 그가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나 쓴 불멸의 곡 메시아의 탄생, 어린 소녀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괴테, 미국과 유럽을 잇는 해저 케이블을 바닷 속에 설치한다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듯한 일을 기어코 실현해 낸 사이러스 필드 등 각각의 이야기가 다 재미있다.

 

츠바이크는 '들어가는 글'에서 역사의 '진실성을 나의 창작을 통해 왜곡하거나 강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E.H 카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듯이 그가 들려주는 역사와 인물의 생생한 이야기가 조금은 진실에서 멀어졌다 하더라도 늘 재미있고 좋다.

 

특히 이 책은 중고등학생들에게 추천, 역자의 말대로 14편 중 어느 것이나 골라 읽어도 좋은 쉽고 재미있는 입문 교양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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