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에는 두 편의 중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표제작인 <달에 울다>는 평론가 신형철이 극찬을 해서 유명, '시소설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한다. 통속적인 스토리를 마루야마 겐지만의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 독특한 형식으로 서늘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여준 소품같은 작품이다.


남자 주인공 방에는 병풍이 있다. 주인공의 상상 속에서 계절 마다 변하는 병풍 속의  풍경과 달의 모습, 눈 먼 법사가 부는 비파 소리의 묘사는 이 소설의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다. 춘하추동(春夏秋冬) 각 계절의 풍경에 맞추어 주인공의 열살부터 마흔까지의 삶이 그려지는 구성이 매우 인상적이다.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를 부수어 만든 이불 속 아이는 바로 30년 전, 이제 막 열 살이 된 나다.(p.9)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와 사과 농사를 지으면서 한번도 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작고 외진 마을이지만 이곳에도 세상의 폭력과 잔인함, 그 뒤엔 권력이 숨어 있다.

 

마을의 권력인 촌장의 곳간이 털릴 뻔하고 한 남자가 도망친다. 그 남자는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 선두에는 화자인 '나'의 아버지가 있다. 도둑을 잡은 기념으로 마을엔 시끌벅적한 잔치가 열리고 죽은 남자의 아내와 딸은 마을을 떠난다. 떠난 지 얼마 안되 다시 돌아온 모녀, '나'는 죽은 남자의 딸인 야에코를 사랑한다.

 

주인공이 20살, 30살, 40살...나이 듦에 따라 병풍 속 계절도 바뀌고 세상도 변한다.

야에코와 사랑을 나누는 '나'는 20대 여름의 '뜨거운 영혼'.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야에코를 보내고 홀로 남아 뻔한 앞 날만을 마주한 30대의 '나'는 가을의 마비된 영혼이며, 삭막하게 변한 세상 속에서 모두가 떠나고 홀로 사과 농사를 짓는 40대의 '나'는 '패기 한 조각 없는 회색빛 영혼'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 하얀 눈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야에코를 발견한 '나'는 그녀의 삶은 그래도 '시시한' 나의 삶보다는 '농익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슴 속에는 야에코가 아버지를 잃은 그 날의 죄책감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봄이 와 땅이 부드러워져 그녀를 묻어 주고 나면 그 '긴 꼬리'는 끊어질 것임을 '나'는 안다.

 

마음을 적시는 문장들 속에 도시화로 인해 황페해져가는 자연과 사라져가는 인간성을 향한 작가의 싸늘한 시선도 눈에 띈다.

야에코의 아버지를 집단으로 죽여 놓고도 전혀 죄책감을 못 느끼는 마을 사람들, '온갖 짓을 다 저지르고도' 잘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며 '나'는 세상에 환멸을 느낀다.
소독약은 진드기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반디도 죽이며, 오염된 지하수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마을 주민 전원이 살아가는 방식을 고쳐야 한다’(p.82) 고 작가는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말한다.
또한 사람들은 점점 나쁘게 변하고 ‘그저 애매한 상태로 질질 후퇴’(p.96)만 할 뿐이며, 심지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들까지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p.96)고 나날이 변하는 세상의 모습에 회의적이다.

"앞으로도 좋은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아."(p.105)라고 말하는 버스 운전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현대 인간들, 그 속에서 ‘사과나무와 함께 언제까지나 이 땅에서 움직이지 않’(p.38)겠다는 주인공의 모습이 애달프고 귀하게 느껴진다.
야에코와 ‘영리한 개’ 백구, 화자가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병풍 속에서 사과나무는 셀 수 없이 많아짐을 ‘나’는 본다.

'봄이 오면 하얀 강아지를 키우자'는 '나'에게 남은 건 이제 사과 나무뿐이다. 야에코네 사과와 자신의 사과를 접목기켜 어린 나무를 심겠다고 한 꿈, 남자는 그 꿈을 이루었을까...

다음은 야에코에게 생명이 되어주고 싶은 '나'의 사랑이 아름답고도 강렬하게 나타난,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이다.

 

 

마을 지하수는 뜨겁다.
그렇다고 온천수는 아니다. 백구나 야에코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항상 그 물을 감지하고 사과나무처럼 끊임없이 빨아들이며 살고 있다. 내 몸에서 여과되고 농축된 물은 야에코 몸으로 옮겨 가 그녀의 나날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p.48)

 

 

두 번째 소설인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는 직장과 가족에게 버림받고 제2의 인생을 위해 고향을 찾아간 한 40대 남자의 이야기이다.

맨정신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 떠나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기로 한 주인공과 그가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이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그려진다.

 

주인공은 속세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이곳에서 또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피리새. 피리새만이 자신을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소리를 쫓아 간 곳에서 노인을 발견하는데, 노인의 딸은 인근 도시에서 몸을 팔아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매일 온천욕을 즐기며 피리새를 키우고 있는 노인에게 죽이고 싶을 정도의 증오심을 느끼지만 결국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 떠나기로 한 날 아침 피리새 소리를 듣고 잠을 깬 '나'는 피리새를 돌려주기 위해 노인을 찾아가는 도중 생각한다.

 

'누구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면 된다. 나는 나대로 내 멋대로 살아가겠다. 단순한 이치였다.'(p.261)

 

그러나 노인은 온천에서 죽어 있었고 '나'는 조롱을 언덕 위 나무에 매달아 놓고 피리새가 날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다. 피리새가 자유를 찾아 날아가기를 바라며 '나'또한 마을을 떠나고 물 흐르듯이 삶을 이어나간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찾아온 곳에서 피리새를 얻기만 하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주인공. 그러나 작가는 그것은 착각이며 외부에 의존하는 삶은 결코 그 답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진정한 삶을 살고 싶다면 오직 스스로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달에 울다>가 시소설로서 문장이 아름답고 계절마다 변하는 이미지가 인상깊었다면, 두 번째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상처받은 영혼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한 인간의 고독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러나 <달에 울다>에 비해서 재미가 없었고, 정신이 불안한 주인공의 심리가  많이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아 잘 읽히지 않았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은 처음 읽어 봤는데, 글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달에 울다>를 만난 건 기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0-12-28 14: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이 아주 오래 전에 <납장미>를 쓴 이로군요.
깡패 총 쏘는 얘기 하다가 어떻게 ˝시소설˝을 쓰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0-12-28 17:29   좋아요 0 | URL
네~맞아요ㅎ 납장미. 예전에 폴스타프님 리뷰 중 성윤석 시인의 <밤의 화학식> 읽었는데, 거기 첫번째 시가 ‘납‘(Pb)인거에요. 그래서 마루야마의 납장미에 대해 써놓으신걸 읽고, 굉장히 서정적이다 생각했어요. 납장미가 총알이 무쇠종에 부딪혀서 표면에 퍼진 자국이라고. 저는 납으로 만든 장미인줄 알았거든요.

페크pek0501 2020-12-28 14: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는 1인입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추천하는 걸 책에서 보고서 샀는데 읽지는 못했어요.
새해엔 꼭 읽으려고요.
아, 새해엔 구매한 책이 많은 해가 아니고 책을 많이 읽은 해로 기억되길 소망합니다.

coolcat329 2020-12-28 17:30   좋아요 0 | URL
이 책 갖고 계시군요. 네 저도 책 그만 사들이고 있는 책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새해엔 페크님 책도 꼭 읽을게요. 😀

잠자냥 2020-12-28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새로나온 버전으로 <달에 울다> 살까말까 고민중이었는데 쿨캣 님 포스팅 참조할게요! ㅎㅎ

coolcat329 2020-12-28 17:3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이 안 읽으신 책이 있다니, 살짝 기분이 좋으네요 ㅎ 이번에 새로 나왔군요. 😊

scott 2020-12-31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켓님
2021년산 복주머니 하나 놓고 가여 ㅋㅋ

\-----/
/~~~~~\ 2021년
| 福마뉘ㅣ
\______/


coolcat329 2020-12-31 10:24   좋아요 1 | URL
만나면 기분좋은 스콧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