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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시선 404
이정록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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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의 시들을 읽고 있자니 세상 일로 착잡하고 어두워 있던 마음이 오랜만에 활짝 갠다. 마치 첫 햇살에 말리려고 대문 옆 담장 위에 올려놓은 어린 신발들을 보는 것도 같고 또 "어둔 저승길 미리 넘어보"려고 "달빛에 엎어놓"은 할머니의 신발들(「젖은 신발」)을 보는 것도 같다. 잘난 체하지 않는 점도 너무 좋다. 오래 헤어져 있던 친구나 형제가 옆에서 소곤소곤 들려주는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듣는 것도 같다. 시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라고 말하지만, 이 시집 속의 시들이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슬프고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시들이다.

책 뒷표지를 보면 신경림 시인이 이런 글을 남겼는데, 시집을 채 읽기전엔 그렇고 그런 헌사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시 한편한편에 무한위로가 되어,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한다.

 

기실 요즘의 나는 '멘탈 붕괴' 멘.붕.이었다.

정작 정치를 한다는 넘들이 국민은 아웃 오브 안중이고 자기네들 밥그릇 싸움에 연연하는게 눈꼴시어,

맨날 찡그리고 눈 흘기고 살았었다.

그러다가 이 시집을 읽게 됐는데 '웬걸~!'

시집 속 시들이 무한위로가 되는 것은 물론, 세상에 맘 붙이고 살 수 있도록 붙들어 준다고나 할까.

해설을 한 '김상천'은 그의 시들 속에 '사회시'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결손을 얘기했지만,

그의 시들이 그러한게 아니라,

시를 읽는 사람의 마음에, 시를 읽는 사람의 관점에 관한 문제라고 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그동안 그의 동화나 동시, 산문들이 별로였던 것은 아니지만,

난 이런 시집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세상 일로 착잡하고 어두워 있던 마음이 오랜만에 활짝 개이는 그런 풍류같고 유머같은 시들을 기다려 왔던 것 같다.

요번 시집은 '제1부 가슴우리, 제2부 내가 좋다, 제3부 시의 쓸모, 제4부 우주의 놀이'로 나뉘었는데,

이런 경계나 나눔 따위가 무색할 정도로 모든 시들이 다 좋았다.

그의 시들은 일상에서 건져올린 것들인데,

그렇게 일상이 적절한 비유를 만나면 유머가 되나 보다.

 

개인적으로 '표제시'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도 좋지만,

'해 지는 쪽으로'가 더 좋았다.

 

해 지는 쪽으로

 

햇살동냥 하지 말라고

밭둑을 따라 한줄만 심었지.

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

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

 

나는 꼭,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벗 그림자로

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눈동자,

속눈썹이 젖어 있네.

 

머리통 여물 때면 어김없아

또다시 고개 돌려 발끝 내려다보는 놈이 생겨나지.

그늘 막대가 가리키는 쪽을

나도 매일 바라본다네.

 

해마다 나는

석양으로 눈길 다진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돌아보는 놈이 되자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

 

그의 시는 종종 문장 끝나는 곳에 온점(.)이 마침표로 박혀있다.

'시에 무슨 마침표?' 하다가도 그것이 다짐이나 결기로 읽혀,

나도 마음을 다잡게 된다.

 

해를 좇는 것은 식물들의 속성이지 동냥을 구하는 것은 아닐진대,

해 지는 쪽으로 고개를 수그린다는 것으로 미루어,

키가 크지도 않고 키 큰 녀석들의 해 그림자에 갖힌 연약한 녀석이었나 보다.

그 연약한 녀석을 소외시키지 않고,

마음 한번 더 주고,

눈길 한번 더 준다고 하니,

그 마음을 알겠다.

나도 그 마음을 닮아 돌아보는 놈이 되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어야지.

오래 오래 여물려 종자가 되어야지.

 

늘 그렇듯 그의 시들은 내게 이중적이어서,

무한위로가 되고 숨통이 트이기도 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백두'라는 시에선 모처럼 어머니의 등장이 반갑다.

 

'사람의 영혼도 머리나 심장에 있는게 아니다 / 허벅지에 있다 위엄있게 죽는 게 소원이지만'이라고 노래하는 '영혼의 거처'같은 경우는 비유가 유머를 만난것도 아닌데 깊어서 서럽다.

 

'고정과 회전' 같은 경우는 온 지구를 아우르는 듯, 아니 온 우주를 아우르는 듯 심오하다.

 

고정과 회전

 

  들어올 때는 국밥집하고 순댓국집이 같은 식당인 줄 몰

랐지? 자네 내외처럼 식당 앞에서 옥신각신하다가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많어. 이 문으로는 소머리국밥 먹

겠다고 씩씩거리며 들어오고 저쪽 문으로는 순대가 땡긴

다고 돼지 꼬랑지처럼 꼬부라져서 들어오지. 처음엔 병천

순대집이었지. 국밥집에 세를 줬는데 파리만 날리다가 나

가버렸어. 머리 잘 돌아가는 내가 벽을 터버렸지. 지 먹을

것 따라서 따로 들어왔다가 멋쩍게 한 탁자에 앉는 사람들

많어.

 

  그만 좀 웃어. 에어컨 한대 갖고 당최 시원해야지. 쓰레

기장에서 벽걸이 선풍기를 주워왔는데 회전이 안되는 거

여. 며칠 뒤 한대를 또 주워왔는데 요번엔 고정이 안돼. 그

래 메뉴판 옆에 나란히 걸어놓고 명찰을 붙여줬지. 왼쪽

놈은 "회전이 안돼요." 오른쪽 것은 "고정이 안돼요." 생각

해봐. 인생도 회전과 고정, 아니겄어. 또 잔머리만 굴리다

가 순대 속같이 잡스러워지는 거 아니겄어. 저 선풍기 때

문에 손님이 늘었어. 하나만 걸려 있으면 고장난 선풍기지

만, 둘이 붙어 있으니께 친구 같고 부부 같잖어. 동서니 남

북이니 하는 것도 서로 끄덕끄덕,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

을 한통속으로 섞으면서 살아야지. 우리 부부도 녀석들 때

문에 별명이 생겼어. 내가 회전댁이고 우리 집 양반이 정

지아저씨여. 아저씨가 오토바이광(狂)이거든. 그저 돌진이

여. 나야 얼굴 예쁘고 몸매 좋아서 쟁반 이고 나가면 사내

들 눈알이 팽팽 돌아가지. 귀가 밝아서 눈알 돌아가는 소

리까지 다 들려.

 

  선풍기 밑에 나란히 서봐. 기념사진 하나 박아줄게. 고

장난 선풍기도 저렇게 짝이 있는 거여. 둘이 끄덕끄덕 잘

살어. 메뉴 하나 양보 못하고 다른 문짝으로 들락거리지

말고. 고정과 회전이 연애고, 정치 경제고, 세상 모든 책이

여. 근데 안식구가 쎅시하게 생긴 게 고정이 잘 안되겄네.

국밥 좀 많이 잡숴야겄어. 나갈 때 갈비하고 등뼈 좀 끊어

가. 정지버튼이 안 먹히는 바가 있어야 사내답지. 그만 좀

웃으라니께.

 

심오함도 극에 이르면 유머러스해 지거나 단순해 지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시 '실소'에서 '웃기는 시를 쓰고 싶었다.'며,

'감동이 아니라면 재미라도 있어야지,'라고 하고 있지만,

시라던가 삶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회적 현실을 직접 내지르지 않는 법이고 내지를 필요도 없는 법이다.

그냥 내지르기만 하는건 '배설'이라고 불러야지, '카타르시스'라는 시적 용어로는 무색하니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라고 쓰고 '따뜻하고 웃음을 머금게 하여 위로가 되는' 것으로 읽는다.

그리고 목록 제일 위에 이 시집 속 시 한편을 올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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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9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11-10 16:08   좋아요 2 | URL
오늘도 추워요.
그리고 지금 비가 좀 내리구요.
덕분에 전 지금 좀 한가한데,
쌀쌀한것 같기도 하고 쓸쓸한 것 같기도 한, 그런 오후입니다.

괜히 센치해지려 하네,
마음을 추스르고,,,
우리 힘내자구요~, 불끈~!

yureka01 2016-11-09 17:10   좋아요 2 | URL
돌아보는 놈이 되자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

캬~~~그러게 말입니다..ㅎㅎㅎㅎ

양철나무꾼 2016-11-10 16:15   좋아요 1 | URL
이 구절의 대구도 좋죠?^^

캬~~하는데, 목넘김이 좋은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해 지는 것이,
오늘은 ‘비오는 날 술마시는‘ 雨酒클럽을 소집해 보아야겠습니다여~^^

나와같다면 2016-11-10 00:49   좋아요 1 | URL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거..` 사랑할때 경험해 봤어요..

양철나무꾼 2016-11-10 16:19   좋아요 1 | URL
사랑할때 경험해 봤다는 님의 댓글은 왠지 슬픈걸요.

현재진행형으로 바꾸면 안될까 싶기도 하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대‘도 생각나는 것이,
제가 노인네 티를 팍팍 내면서 한 말씀 드리자면,
한살이라고 덜 먹었을때 누리고 즐기세요~^^

2016-11-1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6-11-14 14:54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양철나무꾼님 좋은 하루되세요.

양철나무꾼 2016-11-16 09:57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을 지금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하루를 경쾌하게 시작하게 되네요.
알파벳 님도 좀 쌀쌀하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하루 되시길~^^
 
마사지사
비페이위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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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인가 보다.

책을 조금만 봐도 눈이 쉬이 피로해져서,

예전처럼 책을 들었다하면 놓지 않고 끝을 보는 그런 끝장 독서를 할 수가 없다.

 

책을 좀 읽다가,

군데 군데 멈춰서서 곱씹으며 음미하는게 요즘의 독서법이다.

 

한편으론 '쭈욱~' 몰아 읽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긴 하지만,

그동안 혹사시켰으니,

이제는 잠깐씩이라도 쉴 수 있게 해 주어야 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직접 겪거나 두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책을 읽는 것과 맞물려,

(그동안 내가 읽은 소설중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았지 싶은데...)

보지 않더라도 믿을 수 있게 되었달까, 아니 보지 않더라도 믿고 싶게 되었다는 것이 적절하겠다.

 

내용은 맹인들에 관한 내용이지만,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범주를 내 마음대로 확장시켜 해석한들 크게 비껴갈게 없겠다.

블랙홀, 화이트홀, 웜홀로 이어지는 우주나,

고아 소년 해리포터가 마법학교에 입문하게 되는 킹스크로스역 정거장까지 두루 가능성을 가지고 마음을 열었다.

 

사실 이 책의 제목 '마사지사'는 대충 아우르긴 했지만, 명확한 용어는 아니다.

이 책의 원제는 '추나推拿'라고 되어 있는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중국이 되었건 우리나라가 되었건 맹인이 아닌 일반인의 의료 행위는 불법이고,

그렇다고 마사지라고 하자니 살짝 퇴폐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지만,

이 책을 읽고 그게 치열한 삶의 기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숙연한 것이 숭고한 느낌마저 든다.

 

 

이 책은 섬세하다.

책 띠지 뒷면에,

"생동하는 디테일, 선명한 캐릭터. 작은 부분에서 전체를 통찰하는 힘. 예리한 시적 언어로 쓰인 문장들에서 기민한 창작력이 엿보인다."

2011년 제8회 마오둔문학상 심사평이라며 적혀 있는데, 책 전체를 아우르는 찬사임에도 불구하고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디테일을 너무 잘 살려냈을 뿐더러, 캐릭터들을 살아 움직이게 묘사하여,

책을 읽는내내 소설을 쓴 '비 페이 위'가 맹인이 아닌가 표지 뒷면이며 속지를 탈탈 뒤집어 보았다.

 

책을 찬찬히 읽다가 깨닫게 된 것인데,

맹인들만 사는 세상이고 맹인들만의 얘기였다면, 이 책은 그리 절실하지도 애절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맹인이 아닌 사람과 맹인을 구별하려 하고,

맹인만 하더라도 선천적인 맹인과 후천적인 맹인으로 경계를 나누려 하는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경계를 가르고 편을 나눈다는건 바꾸어 말하면 구멍을 만드는 것인데,

맹인들에겐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나,

낭떠러지나 구멍에 발을 헛딛는거나 목숨을 담보로 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홍은 맹인이었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로 치부할 수 없었다.ㆍㆍㆍㆍㆍㆍ이제보니 맹인의 가장 큰 장애는 시력이 아니라 용기인 듯 했다.(114~115쪽)

 

이런 구절은 중의적이지 싶은데, 맹인과 맹인이 아닌 사람, 양쪽의 입장을 대변한다.

추상적으로 생각하기에 따라선 맹인의 장애는 시력인 것처럼 보이지만,

맹인들 세계에서 보게 되면, 시력은 다 똑같이 맹인이니 문제 될게 없다.

용기가 있고 없고, 에 따라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하기도 하고 퍼질러 앉아 버리게도 되는 것이다.

 

그녀는 말에도 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푸밍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혈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었다'.(116쪽)

 

같은 凹를 가지고도 정확히 짚었을땐 '혈'이지만, 간과하고 비껴 헛딛게 되거나 넘어져 굴러 떨어지면 '구멍'이다.

 

중의학의 근거와 해법은 모두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무슨 현상이든 인체와 우주, 천지 만물을 연관시키는 음양오행 사상으로 해석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하지만 깊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학문이 더욱 오묘하고 아리송해진다. 양의학은 그렇지 않다. 모든 단계가 깊이 들어가도 쉽게 이해된다. 양의학에서는 신체를 다룰 때 그 자체의 물질성과 실증성만 따질 뿐 무슨 신비하고 오묘한 사상이나 명상 따위를 엮지 않는다. (55쪽)

 

이 부분은 추나를 하는 맹인 마사지사들의 관점이라기 보다는 저자 비페이위의 관점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중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된다면,

양의학을 우위에 놓고,

양의 위주의 사고를 정당화하긴 힘들것이다.

 

또 하나, 엄지손가락이 부러진 마사지사의 경우,

세상이 끝난 것처럼 묘사되고 끝내 낙향하게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추나라고 하는 맹인 마사지의 경우,

이론이나 경험도 중요하지만 손끝의 감각을 키우는게 중요할 것 같은데,

이 손끝의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손끝에 감각의 눈을 갖게 되는 것쯤으로 얘기하고 싶다.

맹인 마사지사들의 지난한 삶을 짐작컨대,

엄지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하여 퍼질러 앉거나 일을 작파할 사람은 없다.

뼈는 부러지면 더 두껍고 탄탄하게 붙게 마련이고, 재활치료만 제대로 해준다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설혹 신경을 다쳐서 엄지 손가락을 쓸 수 없게 되었다면,

다른 손가락이나 보조근 따위를 활용하는 법을 개발할테니까 말이다.

내용의 전개를 위해서 였겠지만, 너무 피상적으로 접근하려고 한 것 같아 아쉬웠던 부분이다.

 

맹인들의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세상에서고 경계를 나누고 편을 가르는 순간 차별은 발생한다.

 

맹인들의 감각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려 하지만,

그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도 이렇게 이분법적이기만 한 것인지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책 속엔 이런 구절들도 나온다

연애하는 사람은 이런 식이다. 이들의 입술은 언제나 뜨겁게 달아올라 있어서 입맞춤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그런데 입맞춤을 할 수 없다면? 입씨름을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연애의 기본 패턴이다.(124쪽)

연인 사이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말투다. 말투는 말 속에 숨은 뜻을 보여준다. (127쪽)

 

 

샤오쿵의 부모님이 샤오쿵에게 한 이 말을 두고 한참을 생각했는데,

세상은 뜬 눈으로 살지라도,

손끝, 발끝은 물론이거니와 온 감관을 열어 총동원하여 더듬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싶어서 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더듬으면서 살아가도, 우리는 온갖 시행착오를 겪게 마련이고,

그것을 통틀어 우리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니까 말이다.

멀리 선전으로 떠나기 전날 밤, 부모님은 샤오쿵에게 분명히 말했다. 네 연애와 결혼에 대해 우리는 전혀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삶이 라는 것은 '살아가는'것이지, '더듬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네가 전혀 앞을 보지 못하니, 우리는 너를 '더듬어'가며 '살아가는' 남자한테는 절대로 시집보낼 수 없다!(137쪽)

잠깐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둘 다 더듬어 가는 사람끼리라면 공감하고 소통에 이를 수 있는 부분이라도,

한명은 맹인이고 다른 한명은 맹인이 아닐 경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매워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은 떨어질 수도 있으며,

한 명은 안 보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안 들리는 다른 종류의 장애여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때문에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선 맹인들의 일상을 그려낸 얘기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타성에 저항하고 사랑을 쟁취하려는 이땅 모든 젊은이들의 치열한 사랑 얘기로도 읽힌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맺는다. 

간호사는 문득 그녀가 자신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상을 바라보는 분명한 시선, 지극히 일반적이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며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그런 시선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간호사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버린 것 같았다. 무서워서,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484~485쪽)

소설을 읽고 폭풍 감동하는 것은 기본, 이런 교훈을 얻은 건 덤이다.

이렇게 맹인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선 맹인이 일반이고 맹인이 아닌 사람이 이반이 되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맹인이 아니어서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일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본위의 지독한 이기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맹인이 아닌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인데,

인간 중심의 시각과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지극히 편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 하루 눈 멀고 귀 어두워지는,

하루 하루 죽음에 가까워지는 거다.

이리 생각하면 지극히 겸손하고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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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09 01:02   좋아요 1 | URL
맹인에게 길 가르쳐 줄 때 덥썩 잡아서 안내하면 안 되고 상대가 나를 붙잡도록 조심히 다가가야 한다는 이야길 듣고 고개를 끄덕였던 생각이 납니다. 시각이 안 보이니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할 수밖에 없는데, 우린 평소 자기 습관대로 상대를 대하니 그런 섬세함을 놓치죠. 왼손잡이들이 어려운 세상 시스템처럼 사람에 대해서도, 만물에 대해서도 섬세할 일이 많고 많아 참 어려워요.

양철나무꾼 2016-11-09 15:21   좋아요 1 | URL
며칠전 저녁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데,
지하철에 올라타다가 맹인안내견을 보고 깜놀했어요.
그 개는 착해서 말이지 주인의 손에 붙들려있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눈물 흘리고 있더라구요.
맹인 주인은 한참동안을 큰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다가,
내릴 곳에 이르러 헐레벌떡 뛰어내리는데,
그 개가 어찌나 힘들게 몸을 일으키던지...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했어요~ㅠ.ㅠ

겨울호랑이 2016-11-09 06:57   좋아요 1 | URL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종착역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의미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그래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6-11-09 15:26   좋아요 2 | URL
전 한때 참 기고만장했달까요?
거슬리는게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려온 느낌이예요.

그러다가 요즘 들어서 내 몸들이 내 의욕을 뒷받침해주지 못해서 자제하게 되면서,
세상이 달리 보이기도 합니다.
겸허해지고 겸손해지지 않고서는 다른 도리가 없답니다.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사는건...모든 이들의 소망이겠죠.
그러니 우리 몸을 이뻐해주고,
몸이 하는 소리에, 몸이 내지르는 비명에 귀를 기울이자구요~^^
 

그렇지 않아도 멘.붕.인데,

이런 넘은 시선집중에 왜 나오는건가 모르겠다.

어차피 중앙일보 따윈 읽지도 않지만서도,

논설위원이란 존칭이 무색하다.

 

11월 4일 신동호의 시선집중. (==>링크)

11/4 (금) "'최순실 정국'의 해법과 전망"
-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
-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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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4 11:26   좋아요 1 | URL
세월호에서 집단 트라우마, 메르스에서 집단 안전 위기감, 지금 순실사태에서는 정치 공황상태...ㄷㄷㄷㄷ

양철나무꾼 2016-11-04 11:39   좋아요 2 | URL
모든 사태에서 핵심은 박근혜인데,
핵심은 빠지고 논란만 가중시키는 꼴이네요.

어찌되었건,
`멀쩡한 농민이 죽어도 된다`는 넘을, 참~(,.)

AgalmA 2016-11-04 12:27   좋아요 1 | URL
저 패널로 해법 전망? 말세 해법으로 풀어가실랑가.....

양철나무꾼 2016-11-04 12:34   좋아요 1 | URL
완전 막장 토론이었어요. 끝부분에 `멀쩡한 농민이 죽어도 된다`에서 신동호가 급마무리 마이크를 내리더라구요.
내내 마음이 심란하고 정신이 어수선해 죽겠습니다.

AgalmA 2016-11-04 12:34   좋아요 1 | URL
전 김진 위원 나오면 안봐요. 너무 혈압이 올라서.

양철나무꾼 2016-11-04 12:39   좋아요 1 | URL
며칠전 진중권이랑도 완전 난리 아니었더라구요. 그래야 재밌으리라 생각해서 여기 저기 등장하는건지 모르지만...정신건강에 안 좋을테니 저도 이제 안 보고 안들을래요.
옛날엔 시집 살이 3년 귀막고 눈감으랬는데, 이젠 정치판을 향하여 그리하여야 하려나 봅니다~ㅠㅠ

AgalmA 2016-11-04 13:15   좋아요 1 | URL
요즘은 김어준의 뉴스공장(tbs 아침 7~9)이 대세 아님까. 특종 팡팡~ 조국 교수, 박원순 시장 나와서 박근혜 하야를 얘기하는 속시원함! 왜 영양가없는 신동호를 듣고 피폐해지세요~ 적진 동태 파악도 좋지만 시간이 넘 아까움.

양철나무꾼 2016-11-08 22:21   좋아요 2 | URL
전 그런 의미에서 악마기자 정의사제를 장만했습니다, 음화화화~^^

cyrus 2016-11-04 16:51   좋아요 1 | URL
권석천 논설위원과 그 외의 몇몇 논설위원들은 한쪽 방향에만 치우치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중앙일보에 출입한 일이 여러 차례 있어서 그분들의 진짜 생각들을 들어볼 수 있었어요. 김진 논설위원이 중앙일보 대표 논설위원으로 많이 거론되긴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김진 논설위원 때문에 중앙일보 좋은 이미지 다 깎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6-11-08 22:24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전 아무래도 cyrus님보다는 올드하니까 조중동을 묶어서 생각하곤 했는데,
님의 이 댓글을 읽고보니 그냥 뭉뚱그리면 안 되겠네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신 댓글, 감사합니다~(__)
 
그럴 때 있으시죠? - 김제동과 나, 우리들의 이야기
김제동 지음 / 나무의마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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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뒷표지를 보면, 마이크로는 다 나누지 못했던 '김제동과 나, 우리들의 첫번째 공감 에세이'라는 문구가 눈에 띤다.

'첫번째'라는 단어에 아무래도 집작하게 되는데,

이 책을 다 읽은 후의 느낌은 어디선가 봤었던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봤었다고 하면 '다른 책에서 봤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텐데, 책에서 본건 아니다.

종편에서 하는 '김제동의 톡 투 유'나,

'어록'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그의 트위터 글들이나,

인터넷에 나도는 각종 강연 내용을 갈무리한 동영상 내용을 접했다는 얘기다.

 

그럼 '책이 별로라는 거냐?' 라고 묻는다면,

'그런건 아니다, 아주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디선가 봤던 내용들로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길때마다, 얼싸안고 넓적한 손바닥으로 상대방의 등을 가만히 다독여주는 느낌이 든다.

수줍어서 앞에 나서서 설레발을 치면서 호응 할 수는 없지만,

혼자 결의를 다지며 불끈 쥐었던 주먹에서 슬그머니 엄지손가락을 빼 하늘을 향하여 추켜 세울 수 있겠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과장하여 크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지만,

공감을 표시하는 작은 손짓 하나, 미소 한번 짓는 데도 아주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보통 한번 접했던 내용들을 리바이벌할 경우 감동이 반감하게 마련인데,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와 같이 울고 웃고 하여, 여러 편의 강연을 그와 함께한 느낌이다.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림도 예쁘고 따뜻해서 충분히 위로가 된다.

 

내가 이 책에 이토록 감동을 받은 이유가 뭔가 생각해보니, 그의 공감 능력때문인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는 사회를 보는 사회자나, 강연을 하는 강연자라기보다는,

눈을 맞추고 마음을 맞춰가며...공감을 하려는 우리의 이웃이나 친구 같다.

높아만 있어 아우를 수도 없을뿐더러 범접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그는 누나들을 독수리 오누나에 비유했지만,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쏜살같이 나타나는,

짜짜짜짜짜장가~♬ 같은 존재이다.

(부디 일본 에니메이션을 가지고 비유를 한다느니 따위의 딴지를 걸지는 말기 바란다.)

그렇게 다섯 누나들이 그의 비빌 언덕이 되어준다.

그는 그런 다섯 누나를 든든한 빽(?)을 삼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뭘까?'를 늘 고민한단다.

'내가 이등병이라면, 내가 대대장이라면, 내가 간호사라면?'

예를 들어 병원에서 행사가 있으면 예정 시간보다 일찍 가서 그곳 분위기를 살펴봅니다. 그러면 간호사 선생님들끼리 "니 오늘 오프가?"하는 소리가 들여요. 그런식으로 그들만의 용어를 듣고 머릿속에 넣어뒀다가 행사가 시작되면 써먹습니다.

 

"오늘 오프였으면 좋겠죠?"

그 한마디로 공감을 얻습니다.

 

어느 무대에 서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그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거나 제가 대신 하려고 한 게 통했던 것 같아요. 물론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도 있죠. 제 외모가 다행히도 너무 부담스럽게 잘생기진 않았달까요?(물론 조금 잘생기긴 했지만~)(24~25쪽)

 

김제동은 공인이니까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그들이 하고 싶어할만한 얘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러 사람의 입장을 대신할만한 깜냥이 아니어 주시기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공감을 얻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별난 생각을 하고 별난 행동을 할때,

어느 누군가 한 사람 정도는 나의 별난 생각이나 별난 행동에 대해,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니 많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때,

세상에 한명 정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야 하고 내버려두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었다.

 

그럴 때 있으시죠? 뭔가 말하고 싶은데, '에잇, 됐어. 나만 그렇겠어.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싶을 때. "너만 그러냐, 다 그렇게 사는거지" 이런 소리 들을까봐 '그냥 아무 말 말자' 싶을 때. 어디 가서 혼자 실컷 울면 좀 나을까 싶은데 막상 울려면 눈물도 잘 안 나올 때. "매일 그렇진 않다"고 쓱 변명도 해볼 때. 여기 그런 사람 한 명 추가합니다. 그냥 추가합니다.

                                                                                       - 2016. 6. 23. 페이스 북(31쪽)

사람들은 모든 삶이나 삶의 모든 행위에 대해, 원인에 따른 결과가 도래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세상의 그런 모든 삶과 관련하여, 원인에 따른 결과와 상관없는 '그냥'도 존재한다는 말이 하고 싶다.

원인에 따른 결과를 얘기할때 획일적이든 다양하든 시간의 추이를 무시할 수 없는데,

그 '시간의 추이'말고 또 한가지 나로 비롯함이냐 말미암음이냐 하는 '관점'도 필요하다.

그럴땐 시간의 추이나 관점을 다 차치하고 '그냥'이라고하며 툴툴 털어버리고 싶을 테니까 말이다.

 

그럴 때 있으시죠? 가끔 골목길을 걸으며 누가 보든말든 펑펑 울고 싶을 때. 아니면 내가 우는지도 모르고 길을 걸을 때. 그런 아이를 며칠 전에 만났거든요. "무슨 일이냐"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방금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거예요.

어깨 드드리면서 "괜찮다, 너만할 때 한번씩 겪는일"이라고 말하려다가 입 꾹 다물고 오래 같이 울었어요. 울 만하다고 그랬어요. 울 만한 날이잖아요. 울 만한 날 울어줘야 사람이 사는 듯해요.

울 만한 사람들이 모두 맘껏 울 수 있기를, 웃으라고 강요받지 않기를, 그래서 진짜 싱긋 웃을 수 있기를. 오늘 비 올만한 날이네요. -2016.6.15. 페이스북(66쪽)

 

그런 의미에서, 때로 때때로 나는 내자신이 너무 사랑스러운데,

울 만한 일에도 맘껏 울지 못하고 감정을 아끼는 사람,

자기 자신에겐 모질게 대해야 감정적으로 성숙한 사람인줄 착각하고 쿨내 진동하는 연기를 하는 사람,

김제동도 혼자 살면서 샤워부스에서 물을 틀어놓고 운다는데,

나는 웃고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울고, 내 자신의 감정엔 충실하기 때문이다.

 

때론 사랑스러운 것과는 또 별개로 이런 내가 창피하기도 한데,

바닥을 치고 울어본 사람만이 환하게 웃을 수 있다며 자위한다~(,.)

 

언젠가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너무 행복한 순간 눈물이 난다던 사람이 있었다.

너무 행복한 순간이면,

'세상의 행복 총량은 일정하다'는 법칙에 따라,

자신이 누군가 다른 사람 몫의 행복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제동은 주변과 공감하는 능력은 뛰어난지 모르지만,

전에 '미.우.새'에서 소개팅 할때도 느낀건데,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뻐할 줄 모르는 것 같다.

정신 분석학적으로 짐작되는 부분은 있는데 개인적인 내용이고, 나의 분석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차치하기로 하자.

본인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는 하고 있는 듯,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지금껏 만났던 친구들에게 말은 늘 통이 큰 사람처럼 해놓고 바라는 것도 많고 고집도 셌던 것 같아요. 말은 안 했지만 내심 엄마 같은 사람, 힘들 때는 옆에 있어주는 사람, 그러다 제가 혼자 있고 싶을 때는 기꺼이 떨어져 있어주는 사람을 원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세상에 어떤 사람이 그런 걸 해주겠어요? 제가 못된 거죠. 오히려 제가 상대방이 힘들 때 곁에 있어주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떨어져주고 그래야 하는데, 제가 그걸 못했던 거죠.(96쪽)

 

라고 얘기하는데,

철옹성이라고 해야 할까 러시아의 크렘린 궁이 연상됐을 뿐이고~(,.)

탄탄하게 높이 쌓아올릴수록 엿보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이렷다, ㅋ~.

 

난 트위터나 페이스북 따위를 하지 않아 관심 같지 않았었는데,

지금 보니영어로 적힌 그의 트위터 계정은 '금강경'이다.

그럴듯 하다.

 

김제동을 개그맨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게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방송사 걔그맨 시험 따위를 통해 데뷔한게 아니라,

지역 축제 사회자를 하다가 방송인이 된 경우이다.

우리가 흔히 개그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전철을 밟았다.

 

개인적으론 개그맨보다는 광대가 적절한 표현 같은데,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약자가 강자를 조롱하는 것은 풍자이고 강자가 약자를 조롱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말과 근원을 같이 한다.

 

법이라는 글자와 관련하여, 물이 흘러가듯 그대로 두는 것이 법(法)이라고 한단다.(148쪽)

또 바다를 바다라고 하는 이유는 다 '받아들인다'는 의미라고 한다.(15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건

그러지 않으면 죽을 때 쪽팔릴 것 같아서예요.

 

'마이크 잡은 사람 중에 힘없는 사람들 편 들어주는 사람이 한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제가 정치적이어서가 아니에요. 쫄리고 주저하게 될 때마다 사람에 대한 도리를 생각하게 하는 분들이 세상에 많아서 입니다.(222쪽)

자기 자신과 화해할 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이뻐할 줄 모른다고 하여, 신념이 없는 것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꾸준히 밀고 나갈 만큼의 신념은 있으니 그것으로 된거다, 그만하면 충분한 거다.

세상에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그리하여 신념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다.

어떤 이웃도, 어떤 사람도 "저 소 새끼 왜 우냐"고 타박하지 않았습니다. 하다못해 소에게도, 짐승에게도 그래습니다. 적어도 그 소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어요. 기한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유가족의 슬픔이 멈추는 날, 그때까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해라"라는 얘기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ㆍㆍㆍㆍㆍㆍ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모아주는 것이고, 함께 아파하고, 절대로 그분들에게서 멀어지지 않겠다는 걸 기도와 서명으로써 표시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그분들과 이땅에서 함께 살아가며 할 수 있는 가장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정말 힘들면 그때는 반드시 누군가가 와서 나를 도우리라는 믿음, 저는 그것을 심리적 복지라고 말하는데요. 슬플 때 혼자 있지 않다, 내가 힘들 때 혼자 있지 않다. 내가 그런 사람이면 내 옆에도 반드시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게 저는 진짜 복지라고 생각합니다.(315쪽)

함께 사는 사회가 무엇일까?

사람 사는 세상 어딘가에 불을  밝히면 환할 뿐만 아니라, 따뜻해진다는 걸 깨닫는게 아닐까?

심리적 복지라는 말, 어찌보면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 같지만,

그러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환하고 따뜻하면 그만 아닌가?

혼자면 환히 불 밝힐 필요가 없다.

혼자보단 둘이 더 따뜻하다.

밝다던가 따뜻함 따위의 말 따위가 어차피 심리적 속성을 지녔으니까 말이다.

 

환하거나 따뜻함 따위는 자신의 것을 덜어 나눠줄수록 손해보지 않고 넉넉해지는 것 같다.

김제동의 이 책 덕분에 나도 환하고 따뜻함을 나눠 가졌으니,

부디 그도 몸과 마음이 환하고 따뜻해지길, 건강하고 행복하길...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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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1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11-08 22:25   좋아요 0 | URL
날이 많이 추춰졌어요.
감기 따위 안 드시고 잘 지내시는지요?

오늘은 국물 뜨뜻한 걸로다가 맛나게 드시고,
낼은 꽁꽁 싸매고 굴러다니자구요~^^

CREBBP 2016-10-31 20:20   좋아요 0 | URL
저도 체험판으로 약 50쪽 정도 보고 나서 (엊그제 양쪽에서 쿠폰 막 뿌린 것도 쓸 참) 구매하려고 들어왔는데 양철님 리뷰 반가와요

양철나무꾼 2016-11-08 22:30   좋아요 0 | URL
톡 투유 에서 다 본 내용들이고 새로울 게 없지만서도,
님도 체험판 미리보셨다면 알고서도 구매~?
이런 책은 좀 구매해 줘야죠~, 헤에~^____^

매너나린 2016-10-31 22:41   좋아요 0 | URL
김제동씨도 늘 무탈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간절히..

양철나무꾼 2016-11-08 22:31   좋아요 1 | URL
제가 김제동씨가 늘 무탈하고 행복하길 바랄려고...
이 리뷰를 쓴 것 맞습니다~^^

님의 간절한 염원이 가 닿을 겁니다여~!

꿈꾸는섬 2016-11-01 04:20   좋아요 0 | URL
톡투유 가끔 시간날때 봤었는데... 이 책이 어떤 느낌일지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해요.^^

양철나무꾼 2016-11-08 22:33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 현수 어때요?
낼 날씨 추운데,
그래도 활동 둔하게 너무 동여매주지는 마세요~^^

경황이 없으실텐데 이런 댓글도 주시고, 제가 더 감사하죠~^^

꿈꾸는섬 2016-11-09 14:48   좋아요 0 | URL
어제 깁스 풀고 물리치료 들어갔어요.^^

단발머리 2016-11-01 09:44   좋아요 1 | URL
김제동씨 항상 응원합니다.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정신 분석학적으로 짐작되는 부분이... 궁금하기는 해요^*

양철나무꾼 2016-11-08 22:37   좋아요 1 | URL
저 말이죠~,
허지웅 좋다고 했더니...정유라 관련 이상한 입장 밝혀서 완전히 빈정상했어요.
김제동은 절.때...그런 입장 표명은 없을테니,
맘껏 응원해 보려구요~^^



2016-11-01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2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3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혼
고은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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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날개에 적힌 고은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고 은

高 銀

 

시인생활 58년.

시집 여럿.

 

 

이런 간결한 문장에 마침표가 필요할까 싶은데, 온점(.)이 마침표로 들어가 앉았다.

당신의 프로필을 단 두줄로 정리해 놓을 수 있다니 참 멋지다.

단 두줄이지만 중량감은 엄청나다.

 

아무리 떨어내고 비워버리고 극도로 응축시킨다 한들 내 삶은 아직 두줄로는 어림도 없지만,

또 알겠는가, 그리다보면 닮아 있을지.

 

내 조상

 

한낱 입자도 파동일진대

나의 명사는

동사의 쓰레기

나는 그리운 동사에게 가야 한다

 

나는 파동

 

나의 자동사는

먼 타동사의 쓰레기

나는 그리운 그리운

선사(先史) 타동사로 가야 한다

 

오늘밤 미래가 미래뿐이라면 그것을 거부한다

나는 입자이자 파동

 

이시를 읽다가 언젠가 고은 시인이하셨던 말씀이 기억났다.

 

 

시 한편을 가지고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시 자체로 운명을 개척하기도 한다.

시는 나의 내부에서도 오지만, 우주의 저끝에서 달려오기도 한다.

시를 쓰기위해서 깨는게 아니라, 시심 자체가 잠을 깨우게도 한다.

당신의 시들은 때론 정치적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정치적인 것을 넘어서는 범 우주적인 시들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만약 시가 우주 저끝에서부터 나에게로 달려오는 상황이란게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진다.

 

고은 시인의 시를 이러쿵 저러쿵 할 깜냥은 아니기 때문에 귀하게 아껴 읽었고,

읽다가 뒷표지에서 문득 김사인을 만나다니 반가웠다.

한생을 치르는 필사의 형식으로서 시는 과연 그럴 만한 것인가.

이제 어디에 기대지 않는다. 무엇을 목표하지도 않는다. 작위도 무위도 여의고, 쥘 것도 놓을 것도 그친 자리에서 그는 다만 '시간도 공간도 없이 단도직입'(「소원」)의 꿈을 추어갈 따름.

 

아무렴, 시집 뒷쪽에 자리한 '시인의 말'을 옮겨보는 것으로 느낌을 대신하여야 겠다.

 

이것은 『무제시편』이후

내 마음의 소요(騷搖) 가운데에서 생겨났다.

 

지난날로 충분하다는 감회는 어이없다.

이백여년 전의 사나이가 시시한 듯이

노래한 적이 있다.

발로 글을 쓴다고.

그래서인가 나도 가끔은 들판, 가끔은 종이 위를 돌아다니고는 했다.

내 손도 이제 허랑한 구름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시에서 떼어놓지 못한 나와

시에서 떠난 지 오래여서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어쩌다가 만나는 날에

이 세상의 (無事奔走)를 놓을 것이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다. 그토록 숨찰 것도 없지 않은가.

 

시인의 나이에 이르면 괴발개발 발로 시를 써도 지극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나 보다.

 

아무려면 시인은 온우주를 아우르는, 파동이면서 입자인 그런 공감각적인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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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0-27 15:40   좋아요 1 | URL
고은 시인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발표가 다가오는 시기만 되면 고생을 많이 합니다. ^^;;

양철나무꾼 2016-10-27 15:44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노벨문학상 발표시기만 되면 고은 시인 자택앞에서 취재진이 장사진을 이뤘었다죠.
지금은 좀 덜 하다고 하지만서도~--;

정작 시인은 그런 것에서 자유로우신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6-10-27 15:50   좋아요 1 | URL
고은 시인의 어느 인터뷰를 봤는데 신신 당부를 하더군요. 제발 노벨상 으로 자신을 엮지말아 주십사 부탁하던 말씀이 더 올라요..그만한 연륜의 시인이 뭐가 더 아쉬워서 미련가지겠습니까..그정도의 시심의 발로라면 다 내려놨을텐데 말이죠..

2016-10-28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10-28 03:55   좋아요 1 | URL
#문단_내_성폭력에 고은 시인도 예외 없이.... 요즘 참 뉴스보기 겁납니다. 가치 전도의 연속.
여러 루트를 통해 많은 한국 문단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작품과 시인, 예술가, 비평가 비롯 예술인들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려고 노력해 왔었죠. 이젠 임계점을 넘은 거 같아요. 나라 곳곳이 쓰레기 하치장 같은. 해외 작가도 우리가 세세히 모를 뿐이지 수두룩.
이 글에 이런 댓글 달아서 죄송ㅜㅜ.

양철나무꾼 2016-10-28 11:17   좋아요 1 | URL
`#문단_내_성폭력에 고은 시인도 예외 없이`<==저 이 말뜻 해석 못 했어요~--;

그리고 님, 지난번에도 `먼댓글 썼는데요. 혼내기 없기요`라고 하시더니, 요번에도 `이런 댓글 달아서 죄송`이라고 하시는데...
너무 조심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제가 agalma님을 잡아먹기야 하겠습니까?
저 쉬운 녀자랍니다, 편하게 막 대해주세요, ㅋㅋㅋ~.

AgalmA 2016-10-29 02:21   좋아요 1 | URL
트위터에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로 관련 글들이 계속 쏟아지는데, 고은 시인도 거기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양철나무꾼님 글에 제 글이 딴지를 거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마음이 좀 불편해서 표현이 그리 된 것;
친하다고 막 하는 거 싫어요ㅎ; 거리감이 좀 느껴질 수 있지만 아끼는 사람이라면 표현 속에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농담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ㅎ;;

양철나무꾼 2016-10-29 09:44   좋아요 3 | URL
어~, 혹시나 했는데 그렇군요.
저랑 아주 친한 풀판사 사장님이 서정주 시인, 법정스님, 고은시인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라서 전혀 연결 시켜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님의 얘길 들으니 맥락은 이해되는데,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젠 님이 `이런 댓글 달아서 죄송`하신 의미가 이해가 가는 군요.

님, 제가 편하게 막 대하라고 한 것은...
제가 님한테 그러라고 한들 막 그러하시지 않을 인물 됨됨을 알고 있다는 전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님이 어떤 댓글을 단다고 하여, 막 딴지를 거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으니까,
어떤 댓글이든 먼 댓글로든 님의 뜻을 펼쳐도 좋다는 말씀이기도 하구요.

님의 글이 딴지를 거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지만,
그렇다 생각하셔서 마음이 좀 불편하시다 한들,
그렇다고 거리감을 가지고 대한다 한들...
이때의 거리는 실제적인 거리도 아니고 심정적인 것일 뿐인데,
님의 불편한 마음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입장을 바꾸어,
그렇다면 저는 매번 님의 공들인 진지한 페이퍼에 감히 범접할 수 없어,
가벼운 댓글이나 남기곤 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님이 저를 가볍게 생각하시진 않으실것 아닙니까?

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님의 아끼는 사람으로 남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아 눈물흘리고 넘어졌을때,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눈물 닦아줄 수 있는 쉬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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