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창비시선 404
이정록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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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의 시들을 읽고 있자니 세상 일로 착잡하고 어두워 있던 마음이 오랜만에 활짝 갠다. 마치 첫 햇살에 말리려고 대문 옆 담장 위에 올려놓은 어린 신발들을 보는 것도 같고 또 "어둔 저승길 미리 넘어보"려고 "달빛에 엎어놓"은 할머니의 신발들(「젖은 신발」)을 보는 것도 같다. 잘난 체하지 않는 점도 너무 좋다. 오래 헤어져 있던 친구나 형제가 옆에서 소곤소곤 들려주는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듣는 것도 같다. 시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라고 말하지만, 이 시집 속의 시들이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슬프고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시들이다.

책 뒷표지를 보면 신경림 시인이 이런 글을 남겼는데, 시집을 채 읽기전엔 그렇고 그런 헌사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시 한편한편에 무한위로가 되어,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한다.

 

기실 요즘의 나는 '멘탈 붕괴' 멘.붕.이었다.

정작 정치를 한다는 넘들이 국민은 아웃 오브 안중이고 자기네들 밥그릇 싸움에 연연하는게 눈꼴시어,

맨날 찡그리고 눈 흘기고 살았었다.

그러다가 이 시집을 읽게 됐는데 '웬걸~!'

시집 속 시들이 무한위로가 되는 것은 물론, 세상에 맘 붙이고 살 수 있도록 붙들어 준다고나 할까.

해설을 한 '김상천'은 그의 시들 속에 '사회시'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결손을 얘기했지만,

그의 시들이 그러한게 아니라,

시를 읽는 사람의 마음에, 시를 읽는 사람의 관점에 관한 문제라고 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그동안 그의 동화나 동시, 산문들이 별로였던 것은 아니지만,

난 이런 시집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세상 일로 착잡하고 어두워 있던 마음이 오랜만에 활짝 개이는 그런 풍류같고 유머같은 시들을 기다려 왔던 것 같다.

요번 시집은 '제1부 가슴우리, 제2부 내가 좋다, 제3부 시의 쓸모, 제4부 우주의 놀이'로 나뉘었는데,

이런 경계나 나눔 따위가 무색할 정도로 모든 시들이 다 좋았다.

그의 시들은 일상에서 건져올린 것들인데,

그렇게 일상이 적절한 비유를 만나면 유머가 되나 보다.

 

개인적으로 '표제시'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도 좋지만,

'해 지는 쪽으로'가 더 좋았다.

 

해 지는 쪽으로

 

햇살동냥 하지 말라고

밭둑을 따라 한줄만 심었지.

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

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

 

나는 꼭,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벗 그림자로

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눈동자,

속눈썹이 젖어 있네.

 

머리통 여물 때면 어김없아

또다시 고개 돌려 발끝 내려다보는 놈이 생겨나지.

그늘 막대가 가리키는 쪽을

나도 매일 바라본다네.

 

해마다 나는

석양으로 눈길 다진 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

 

돌아보는 놈이 되자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

 

그의 시는 종종 문장 끝나는 곳에 온점(.)이 마침표로 박혀있다.

'시에 무슨 마침표?' 하다가도 그것이 다짐이나 결기로 읽혀,

나도 마음을 다잡게 된다.

 

해를 좇는 것은 식물들의 속성이지 동냥을 구하는 것은 아닐진대,

해 지는 쪽으로 고개를 수그린다는 것으로 미루어,

키가 크지도 않고 키 큰 녀석들의 해 그림자에 갖힌 연약한 녀석이었나 보다.

그 연약한 녀석을 소외시키지 않고,

마음 한번 더 주고,

눈길 한번 더 준다고 하니,

그 마음을 알겠다.

나도 그 마음을 닮아 돌아보는 놈이 되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어야지.

오래 오래 여물려 종자가 되어야지.

 

늘 그렇듯 그의 시들은 내게 이중적이어서,

무한위로가 되고 숨통이 트이기도 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백두'라는 시에선 모처럼 어머니의 등장이 반갑다.

 

'사람의 영혼도 머리나 심장에 있는게 아니다 / 허벅지에 있다 위엄있게 죽는 게 소원이지만'이라고 노래하는 '영혼의 거처'같은 경우는 비유가 유머를 만난것도 아닌데 깊어서 서럽다.

 

'고정과 회전' 같은 경우는 온 지구를 아우르는 듯, 아니 온 우주를 아우르는 듯 심오하다.

 

고정과 회전

 

  들어올 때는 국밥집하고 순댓국집이 같은 식당인 줄 몰

랐지? 자네 내외처럼 식당 앞에서 옥신각신하다가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많어. 이 문으로는 소머리국밥 먹

겠다고 씩씩거리며 들어오고 저쪽 문으로는 순대가 땡긴

다고 돼지 꼬랑지처럼 꼬부라져서 들어오지. 처음엔 병천

순대집이었지. 국밥집에 세를 줬는데 파리만 날리다가 나

가버렸어. 머리 잘 돌아가는 내가 벽을 터버렸지. 지 먹을

것 따라서 따로 들어왔다가 멋쩍게 한 탁자에 앉는 사람들

많어.

 

  그만 좀 웃어. 에어컨 한대 갖고 당최 시원해야지. 쓰레

기장에서 벽걸이 선풍기를 주워왔는데 회전이 안되는 거

여. 며칠 뒤 한대를 또 주워왔는데 요번엔 고정이 안돼. 그

래 메뉴판 옆에 나란히 걸어놓고 명찰을 붙여줬지. 왼쪽

놈은 "회전이 안돼요." 오른쪽 것은 "고정이 안돼요." 생각

해봐. 인생도 회전과 고정, 아니겄어. 또 잔머리만 굴리다

가 순대 속같이 잡스러워지는 거 아니겄어. 저 선풍기 때

문에 손님이 늘었어. 하나만 걸려 있으면 고장난 선풍기지

만, 둘이 붙어 있으니께 친구 같고 부부 같잖어. 동서니 남

북이니 하는 것도 서로 끄덕끄덕,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

을 한통속으로 섞으면서 살아야지. 우리 부부도 녀석들 때

문에 별명이 생겼어. 내가 회전댁이고 우리 집 양반이 정

지아저씨여. 아저씨가 오토바이광(狂)이거든. 그저 돌진이

여. 나야 얼굴 예쁘고 몸매 좋아서 쟁반 이고 나가면 사내

들 눈알이 팽팽 돌아가지. 귀가 밝아서 눈알 돌아가는 소

리까지 다 들려.

 

  선풍기 밑에 나란히 서봐. 기념사진 하나 박아줄게. 고

장난 선풍기도 저렇게 짝이 있는 거여. 둘이 끄덕끄덕 잘

살어. 메뉴 하나 양보 못하고 다른 문짝으로 들락거리지

말고. 고정과 회전이 연애고, 정치 경제고, 세상 모든 책이

여. 근데 안식구가 쎅시하게 생긴 게 고정이 잘 안되겄네.

국밥 좀 많이 잡숴야겄어. 나갈 때 갈비하고 등뼈 좀 끊어

가. 정지버튼이 안 먹히는 바가 있어야 사내답지. 그만 좀

웃으라니께.

 

심오함도 극에 이르면 유머러스해 지거나 단순해 지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시 '실소'에서 '웃기는 시를 쓰고 싶었다.'며,

'감동이 아니라면 재미라도 있어야지,'라고 하고 있지만,

시라던가 삶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회적 현실을 직접 내지르지 않는 법이고 내지를 필요도 없는 법이다.

그냥 내지르기만 하는건 '배설'이라고 불러야지, '카타르시스'라는 시적 용어로는 무색하니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라고 쓰고 '따뜻하고 웃음을 머금게 하여 위로가 되는' 것으로 읽는다.

그리고 목록 제일 위에 이 시집 속 시 한편을 올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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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9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11-10 16:08   좋아요 2 | URL
오늘도 추워요.
그리고 지금 비가 좀 내리구요.
덕분에 전 지금 좀 한가한데,
쌀쌀한것 같기도 하고 쓸쓸한 것 같기도 한, 그런 오후입니다.

괜히 센치해지려 하네,
마음을 추스르고,,,
우리 힘내자구요~, 불끈~!

yureka01 2016-11-09 1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돌아보는 놈이 되자고.

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

캬~~~그러게 말입니다..ㅎㅎㅎㅎ

양철나무꾼 2016-11-10 16:15   좋아요 1 | URL
이 구절의 대구도 좋죠?^^

캬~~하는데, 목넘김이 좋은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해 지는 것이,
오늘은 ‘비오는 날 술마시는‘ 雨酒클럽을 소집해 보아야겠습니다여~^^

나와같다면 2016-11-10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거..` 사랑할때 경험해 봤어요..

양철나무꾼 2016-11-10 16:19   좋아요 1 | URL
사랑할때 경험해 봤다는 님의 댓글은 왠지 슬픈걸요.

현재진행형으로 바꾸면 안될까 싶기도 하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대‘도 생각나는 것이,
제가 노인네 티를 팍팍 내면서 한 말씀 드리자면,
한살이라고 덜 먹었을때 누리고 즐기세요~^^

2016-11-10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6-11-14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양철나무꾼님 좋은 하루되세요.

양철나무꾼 2016-11-16 09:57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을 지금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하루를 경쾌하게 시작하게 되네요.
알파벳 님도 좀 쌀쌀하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