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에나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이 선명한 정의의 끈을 붙들었다.

가난한 사람을 존중하고, 이방인을 환영하고, 핍박당하는 사람을 놓아주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자유를 위해 분투하는 그들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받침목이 되었다.

성경의 구원 이야기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유구한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새삼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탄생시킨 특수한 상황과 초기 독자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오래된 성경 이야기를 현대의 문맥에 맞게 다시 해석하는 시도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오래되고 중요한 전통이다.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는가(히브리서 4:12). 곧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서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의미이다.

성경 말씀도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조율해가며 다양한 신앙 공동체를 위로하고 도전하고 깨우쳤다.

결론적으로, 성경 이야기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해석될 필요가 없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이 목사님의 설교와 교회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그저 도덕적인 관점으로만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라고 격려한다.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고 기득권자들에게는 도전이 되었다.

유월절 만찬상에 오른 음식과 흑인 영가의 가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성경은 결코 멈추지 않고 새로운 진리를 말할 것이며, 모두의 해방을 추구할 때 그저 그런 이야기란 절대 있을 수 없음을.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특별히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어떤 기간을 정확하게 표시하는 것이라기보다 오랜 고난과 기다림과 방랑의 시간을 상징한다.

무언가 시작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걸리는 최소한의 기간. 이 기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종종 광야를 헤맨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광야를.

명심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성경 속 이야기에서도 그리고 실제 우리의 삶에서도, 구원의 길은 언제나 우회한다.

광야를 지나지 않고 약속의 땅에 다다른 하나님의 백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해방, 광야의 시간, 황소와 효모와 피에 관한 율법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노예주뿐 아니라 노예에게도 자유를 선사하는 계명이다. 사랑은 구원 이야기의 최종편이다.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저자가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왕정을 바라보고 있다면, 역대기의 저자는 역사의 치유와 민족의 단합을 위해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왕정 시대를 향수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역사적 사건을 전혀 다르게 풀어내는 두 가지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