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 - 독서법 전통을 통해서 본 성경 읽기와 묵상
강영안 지음 / IVP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고수에게만 느낄 수 있는. 자유롭지만 절제되어 있고, 쉽지만 깊다. 현재 미국 칼빈신학교 철학신학교수로 재직중인 강영안(1951~)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오가며 '읽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 책에서 호명된 철학자와 신학자만으로도 이 책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장자(莊子, 기원전 369년?-기원전 286년)와 주희(朱熹, 1130~ 1200),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바르트(Karl Barth, 1886~ 1968) 등. 다 언급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단순한 언급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사상을 명확하게 분석하여 설명하고 우리에게 적용한다. 


저자는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과의 대화를 통해 경험했던 충격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한다. 그 질문으로부터 "참된 읽기"가 무엇인지, 어떠한 과정으로 읽어야하는지, 읽는 행위는 어떻게 삶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그 과정은 더디지만 세밀하다. 빨리 결론에 도달하고자한다면 여유를 가지고 이 책을 읽으시라. 단숨에 읽기에는 벅차다. 하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곧 흥미롭게 책에 빠져든다.


텍스트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하는지를 폭넓게 살펴보았다면 이제 성경에 집중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성경이 어떤 성격의 책이며, 그렇기에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주장한다. 모든 텍스트가 그렇지만 특히나 성경은 전인적 읽기가 필수다. 더불어 저자가 강조하듯 읽기의 행위는 삶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삶과 동떨어진 읽기는 제대로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앎과 삶을 연결할 수 있는가?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성경을 읽는 행위와 다른 텍스트를 읽는 행위의 분명한 차이점을 강조함한다. 즉 그 명백한 차이로 인해 우리의 읽는 행위는 삶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세심한 편집을 통해 완성도를 높였다. 각 챕터의 끝에 있는 '다리 놓기'는 질문과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책을 읽으면서 느낄만한 질문들이 어느정도 해소된다. 또한 '토론과 적용을 위한 질문'을 매챕터마다 구성하여 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읽고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추천 도서'를 통해 더욱 깊은 연구를 위해 도움을 주고 있다. 각 주제에 대해 더욱 풍성한 배움이 가능하도록 한 듯하다. 


​가장 큰 아쉬움은 6장의 내용이다. 우리들교회에서 열린 세미나가 이 책의 초안이기에 선택된 챕터인듯하다. 하지만 단행본으로 엮어서 나올 때 굳이 포함되어야 할 내용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약간의 언급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그럼에도 이 책은 '읽음'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기에 '읽기'를 즐겨하는 모두에게 유익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능동적으로 다가서고 능동적으로 문장을 읽고 이해하고 파악하려 할지라도,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성경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말씀 앞에 발가벗겨, 그야말로 방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로 인해 심지어 상처를 입을 가능성(vulnerability)이 있는 지점에까지 우리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 P113

우리가 능동적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숨결로 쓰신 성경이 능동적으로 우리를 읽어 내고 말씀 앞에 우리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 P113

우리는 이 때 완전한 수동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우리를 읽을 때의 읽기 방식은 ‘수동적 읽기’이고 ‘상처 입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읽기’입니다. - P113

읽기의 목적은 결국 자기를 비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이를 통하여 자기를 보존함에 있습니다. - P110

읽을 때는, 더구나 성경을 읽을 때는, 몸과 마음이 나뉘지 않고 하나가 되어 개입합니다. - P98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단지 눈으로만 읽을 수 없고, 단지 마음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 P98

몸과 마음이 읽는 대상과 읽는 내용에 개입하여 읽는 내용이 보여 주는 현실(실재, 문제, 주제, 물음)을 상상력을 통하여 내 머릿속에 그리는 행위가 일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P98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말하고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고, 입술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일상의 삶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신학자입니다. - P137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알고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며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옳고, 얼마나 참되며, 얼마나 달콤하고,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를 우리에게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시금석이 된다고 루터는 말합니다. - P141

성경 읽기의 목적은 내가 하나님 말씀을 정복하고 거머쥐고 좌지우지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오히려 나를 읽어내고 나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 말씀 자체가 성령 안에서 나에게 역사하도록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내어 주는 데 있습니다. - P161

기호는 언제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물이나 사태를 가리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사물이지만 언제나 다른 무엇을 표시하거나 드러내거나 보여 주는 사물이 기호입니다. - P185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는 언제나 텍스트 바깥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텍스트 자체가 곧 현실은 아닙니다. - P185

텍스트는 언제나 바깥의 현실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 바깥의 현실이 무엇인지 찾고 묻고 발견하지 않는다면 문자에 매이거나 문자의 집합인 텍스트 자체에만 매이기 십상입니다. - P185

기호로 사용되는 문자가 그렇듯이 문자들의 집합인 성경도 문자 바깥의 현실, 문자보다는 훨씬 더 큰 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P186

역사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역사 현실을 보아야 하고, 편지를 읽을 때는 편지를 쓴 사람과 수신자가 다 같이 관여하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상상해야 하며, 시를 읽을 때는 시를 쓴 사람의 정황과 그가 노래하는 현실에 함께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 P186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성경이 가리키는 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P186

성경의 텍스트는 텍스트 바깥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앞선 텍스트들과의 연관 속에서 읽고 이해해야 된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 P188

읽지 않으면 세상을 내다보는 창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의 테두리, 우리들의 좁은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책이라는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 P239

사람이 종교심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Religion)와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그분께 삶을 맡기는 ‘신앙’(Glaube)을 구별하는 바르트는 여기서도 성경에 대해, 우리를 찾아오시고 말씀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P241

고통과 슬픔과 한탄, 원망과 두려움의 감정에 머물 뿐, 그 자체는 아직 물음이 아닙니다. 고통의 경험이 물음으로, 문제로 등장하는 경로는 책이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습니다. - P243

책은 고통의 경험에 생각할거리를 제공합니다. 읽지 않는다면 고통의 경험은 말 없이 침묵으로 단지 몸 속에 체험으로 각인될 뿐, 사유의 단계로 옮아갈 수 없습니다. - P243

책은 타자가 남긴 흔적이며, 이 흔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윤리적 삶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P244

이렇게 보면 책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책은, 한편으로는 향유하는 존재로서 세계 안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와 만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 P244

우리는 성경을 읽되, 제대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간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 P252

왜냐하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유를 회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P252

삼위 한 분 하나님이 백성들을 불러 모은 까닭은 창조세계가 다시 회복되기 전까지 그들이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일상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 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벧전 2:9). - P252

성경은 우리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우리 민족뿐 아니라 타민족, 우리 영혼뿐 아니라 신체, 우리의 종교 생활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예술, 학문, 교육, 환경, 문화, 사회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기 때문에 성경의 관심을 우리 한 개인과 우리 한 가정의 테두리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 P252

말씀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삶과 문화와 모든 것들을 말씀의 빛에 노출시켜 말씀이 이 모든 것을 읽게 하고, 이 모든 것들을 말씀의 빛에 비추어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생각하고, 살아야 할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 P2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모두 ‘말하는 사람’(homo loquens)이면서 동시에 ‘읽는 사람’(homo legens)입니다. - P13

우리의 일상에는 듣고 말하고 쓰는 것 못지않게 읽기가 중요합니다. - P13

우리는 태어나는 것으로나 먹고사는 것으로만 우리 자신이 되지 않습니다. - P13

무엇을 읽고 무엇을 듣는가에 따라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갑니다. - P13

어떤 이야기를 읽고 어떤 이야기를 듣는가, 무슨 책에 감동되고 누구를 닮아 가고자 하는가가 나의 정체성(identity)을 형성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가 중요합니다. - P13

칸트는 남의 글을 단지 수동적으로 읽고 따르기만 하는 공부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쓰기와 마찬가지로 읽기도 능동적이고 비판적이며 반성적이어야 한다고 칸트는 생각하였습니다. - P23

칸트는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욕구보다 ‘더 높은 욕구’가 우리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 P25

‘더 높은 욕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넘어선, 삶과 존재의 근원으로 초월하기를 원하는 욕구입니다. - P25

칸트는 이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현상들은 아직 문자로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사물들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형식처럼 우리의 개념을 통하여 일정한 텍스트로 ‘쓰여야’ 한다고 칸트는 보았습니다. - P29

그가 말한 이른바 ‘범주’는 주어진 현상들을 텍스트로 옮기는 규칙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현실 경험은 언제나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과 의미 부여, 그리고 읽기 방식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고 칸트는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읽는 사람, 곧 읽는 주체(主體)가 중요합니다. - P29

이해의 과정은 지평을 소유하고 동시에 지평을 넓혀 가는 과정입니다. - P33

지평을 소유하고 지평을 넓혀 가는 과정에는, 조금 어려운 개념을 사용하면, 언제나 ‘동일성’과 ‘타자성’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 P33

지평을 가질 때는, 또는 주어진 지평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동일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지평을 넓혀 갈 때는 타자와 관계하고 타자를 거부하거나 수용하게 됩니다. - P33

그런데 텍스트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에는 나에게 생소한 것, 나와 다른 것, 지금까지 내가 모르던 것이 개입합니다. - P33

그러므로 이해는 언제나 내가 지금까지 가진 지평과 나에게 생소하고 나와 다른 지평의 만남으로 발생하는 융합입니다. - P33

적용은 언제나 실천과 연관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세우고 자양분을 공급하는 일에 기여할 뿐 아니라 추상적인 언어에 특정한 개별적인 세부 의미를 부여함으로 의미를 구체화합니다. 그러므로 적용은 읽음의 과정에서 이해와 해석과 더불어 해석학적 경험을 통합하는 요소입니다. - P34

변혁적인 지식, 사람을 바꾸어 내는 지식(transforming knowledge)이 참된 지식입니다. - P41

참된 읽기와 참된 학습은 단지 글을 읽는 것으로, 몇 가지 규칙을 배우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언제나 삶의 현실과 삶에서 부딪히는 대상들 속에 오랫동안 머물고 그 가운데 거주하며(indwelling) 몸으로, 마음으로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윤편과 폴라니를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 P63

텍스트의 의미(intentio textualis)를 알아듣는 과정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독자의 이해와 의도(intentio lectoris), 다른한편으로는 저자의 의도(intentio autoris)의 만남으로 지평 융합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P67

중요한 것은 문자와 텍스트를 통하여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와 가리키는 현실에 독자가 함께 참여하여 자신의 삶과 현실을 그를 통해 읽고 이해하고 삶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 P67

텍스트의 의미, 저자가 부여한 의미, 독자가 읽어 이해한 의미, 이 셋이 읽는 과정에 모두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 P67

이 문자는 그 자체로는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의 영으로 다시 살아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성경은 문자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영이 그 가운데 활동하기 때문에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이 됩니다(히 4:12). - P79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지만 성경을 통해 얻은 지식은 ‘정보’(information) 지식에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변혁’(transformation)의 지식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의 성품을 빚어내고 읽는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 냅니다. - 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부의 고전 -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익히기 위하여 상냥한 지성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외 지음, 정지인 옮김 / 유유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희소식. 스스로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과정으로 독학을 해야 하는지, 배움의 목적과 방향은 무엇인지 등. 공부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한정식 느낌. 배고픈 자 와서 먹으라! 목마른 자 와서 마시라!


이 책은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공부에 관한 고전들을 추렸다. 저자들의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이 상당한데, 그 내용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과거의 글이 현재에 유의미할까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글은 시대를 꿰뚫고 현재 우리에게 답하고 질문한다. 무엇 때문에 배우는가? 그 배움의 목적과 방향은 무엇인가?라고.


한 명의 저자가 목적과 개요를 가지고 쓴 책. 어떠한 흐름을 가진 책을 선호한다. 저자가 여러 명이거나 더군다나 살아온 시대까지 다른 저자들이 쓴 글을 모은 책이라면. 그러한 책을 읽고 실패한 경험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은 매우 세심하게 편집했다. 물론 짧은 글 하나에 담긴 깊이도 남다르지만. 


즉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온 공부에 대한 여러 저자의 글을 수집하고 편집한 책이니만큼 출판사와 편집자의 역량이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만 매우 탁월하다. 세심하고 꼼꼼하다. 예를 들어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칼럼 첫 문장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글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그 인용문이 포함된 베이컨의「공부와 독서」가 존슨의 글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다. 즉 독자들은 베이컨의 글을 읽고 여운이 가시기 전에 바로 존슨의 글을 대할 수 있다. 


그 외에 신경을 쓴 흔적이 곳곳에 담겨 있다. 각각의 글 앞에 저자에 대한 소개와 그 글의 간략한 내용, 어떤 맥락 가운데 쓰였는지 등. 좋은 글을 이리저리 흩어 놓은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느낌. 그래서 저자들의 통찰력과 안목에 놀라고, 독자를 배려한 역자와 출판사, 편집자의 세심함에 가슴 따뜻해지는 책이다.

누구에게나 지식을 키워 가는 수단으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곧 읽기와 명상이다. 물론 교육에서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읽기이며,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그 규칙들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역시 읽기에 관해서이다. 읽기를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둘째,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지, 다시 말해 무엇을 처음에 읽고 무엇을 나중에 읽을지 알아야 하며, 셋째,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 P19

모든 학문에서 그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학문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인정된 것이다. 나중에 그대가 그 학문들을 다 공부하고 또 논쟁과 비교를 통해 각 학문 고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된 연후에야, 각각의 원리를 다른 나머지 원리에 적용해 보거나 각 학문을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더 깊이 탐구해 보는 것이 적절하다. 중심이 되는 큰길을 알기도 전에 여러 샛길로 들어가지 말라.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을 때라야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다 - P28

미처 지혜로워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지혜로워 보이고 싶은 욕망에 현혹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갑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한껏 부풀리면서, 자신이 아닌 것을 흉내 내고 자신의 본모습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만큼, 즉 지혜로운 정도가 아니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비례해 그만큼 더 지혜에서 멀어진다 - P38

탐구하고자 하는 열의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공부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지만, 꼼꼼한 탐구는 진지한 숙고를 뜻한다. 공들이는 노력과 사랑은 그대가 과제를 끝까지 해내게 만들고, 염려와 경계는 그대를 신중하게 만든다. 그대는 공들이는 노력으로써 공부를 지속하고, 사랑으로써 공부를 완벽한 경지로 이끌어 간다. 또한 염려로써 미리 조심하고, 기민한 경계로써 면밀히 주의를 기울인다 - P49

나는 그가 그 지혜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기억하고, 일단 지혜를 받았으면 자신이 소유하게 된 그 지혜를 마치 빌린 물건인 것처럼 오직 신의 것으로 여기기를 바란다. 만약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있음을 알았다면, 자기만족이라는 위험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으려 눈을 내리깔지도 말아야 하며, 오직 자신의 훌륭함만으로 업적을 이룬 듯 자화자찬해서도 안 된다. - P115

군주를 칭송하는 것이 정당한 상황에서도 찬사는 다소 인색하게 해야 하고, 마치 그들의 삶이 이미 끝난 것처럼 찬가를 불러 주기보다는 행동에 자극을 주는 훈계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경우라면 악덕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비판해야 하는데 단, 적개심이나 분노를 초래하지는 않을 정도로만 해야 한다. 만약 그대의 말이 증오만 불러일으키고 있다면 그런 소용없는 일은 삼가는 편이 낫다 - P1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은 지식 자체의 목적이 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정말 제대로 된 것이기만 한다면 지식 자체가 그 지식의 보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 정신이 지닌 특질이지요. - P212

지식이 선善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모호하거나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처럼 엄밀하고 탁월하여 더욱 높은 수준이어야 합니다. - P226

그러므로 나는 지식이 철학적일 때, 그리고 철학적인 한에서만 자유롭고, 모든 외부와 이면의 대상과 분리된 그 자체로 충분한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 P226

나는 다만 지식이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에 비례하여 점점 더 지식 자체에서는 멀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P228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사용함으로써 천국에 도달하고, 우리의 본성을 원래대로 되돌림으로써가 아니라, 본성 이상의 것을 본성에 추가함으로써, 그리고 본성을 그 자신의 목적보다 더 높은 목적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본성을 완성합니다. - P247

내가 앞에서 언급한 각종 심란한 징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 결함은, 우리가 학생에게 ‘과목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대체로 성공하지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에서는 전반적으로 통탄스러울 정도로 실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생들은 온갖걸 다 배우지만, 배움의 기술만은 배우지 못하지요. - P2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