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크레우사
트로이아의 여인 크레우사 편 -- 트로이아 사람들은 그리스군이 온 이유가 부유한 도시 트로이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다. 헬레네를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라고. 도망쳐 온 여자
하나 때문에 ˝천척의 배˝를 띄워 대양을 건너올 리는 없다고. 스파르타의 왕이 의도적으로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딸려 보냈을 것이라고.
그리스군이 물러난 그 밤, 그들이 머물렀던 해안에는 나무로 만든 거대한 조상彫像 같은 것만 하나 남아 있었다. 그냥 두지 말고 침략군의 유물이니 즉시 불태워 버렸다면 재앙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날, 도시 전체에 물든 축제 분위기에 크레우사도 들떴었다. 10년만에 처음으로 트로이아 성문이 활짝 열렸다. 마지막으로 도시 밖에있는 스카만드로스평원에 나왔을 때 크레우사는 겨우 열두 살짜리어린아이였다. 부모님은 크레우사에게 그리스군은 해적이자 용병이며 쉬운 먹잇감을 찾아 반짝이는 바다 위를 휩쓸고 다닌다고 말했다.
프리기아에 오래 머물지는 않을 거라고, 다들 말했다. 뭐하러 그러겠나? 그들이 내세운 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리아모스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을 따라 도망 온 여자를 되찾으러 왔다는 말을•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저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배가, "천척에 달하는 배"가 여자 하나 때문에 대양을 건너와서 도시를 포위한다고? - P26

크레우사도 그 여자를,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옷단 가장자리마다 금실 자수를 놓은 붉은 드레스를 입고 목과 팔에 금장식을 두른 "헬레네"라는 여자를 보았지만, 그래도 이 여자를 데리러 대군이 그 먼 길을 왔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스군이 바다로 나선 꿍꿍이는 빤했다. 약탈한 물건으로 금고를 채우고, 잡아 온 노예로 집안을 채우려는 거였다. 그렇지만 트로이아로 온 것은 도를 넘은 행동이었다. 트로이아는 부유할 뿐 아니라 방비가 잘 갖춰진 도시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늘 그런 식이야, 크레우사의 부모가 말했다. 저들은 그리스인이 아니면 다 똑같다고, 다 야만인이라고 생각해. 트로이아가 미케나이, 스파르타, 이타케 등등 자기들이 고향이라 부르는 도시보다 발달한 도시일 수 있다고는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거야. - P27

트로이아는 그리스군에게 성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크레우사는아버지가 어두운 눈빛으로 어머니에게 프리아모스왕의 결정을 전하는 모습을 보았다. 트로이아는 싸울 것이다. 그 여자도, 여자의 황금이나 옷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기회주의자, 아버지는 말했다. 겨울에 비바람이 몰아쳐 배를 강타하기 전에 떠날 거라고. 트로이아는 유복하기로 이름난 도시였다. 프리아모스왕의 쉰명의 아들과 쉰 명의 딸, 무한한 부, 드높은 성벽과 충성스러운 동맹국들. 그리스인들은 그런 도시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무너뜨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게 그들의 본성이다. 트로이아인은 그리스군이 온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헬레네를 되찾아가겠다는 건 명분일뿐이라고. 트로이아 여인들은 물가에 모여 빨래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파르타 왕이 의도적으로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딸려 보냈을 거라고. 원정에 필요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 P27

정찰병들이 그리스군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해안에는 사람도 배도 없었다. 제물로 바쳐진 무언가, "나무로 만든 거대한 조상彫像" 같은 것만 하나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스인들이 그걸 누구에게, 왜 바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까지 무사히 항해하게 해 달라고 포세이돈에게 바쳤겠지, 크레우사는 남편에게 말했다. -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아... 이 짧은 글들이 대체 뭐라고 이리 눈물이 날까! 담담하게 풀어낸 소설 같은 이야기들, 정말 소설일까 싶은 ‘그녀들의 이야기‘,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라서 더 공감이 된다. 어딘가의 시간 속에서 더 행복하게,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미는 학교를 계속 다니기로 했단다.
"이 놈의 학교 다 싫고 배신감 들고 무섭고 지긋지긋해. 근데 못 그만두겠어. 떠날 수가 없어."
소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 함께 불렀던 노래, 아무렇게나 엉켜서 잠들었던밤들, 만여 명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휴대전화 조명을 켜고 밤의 캠퍼스를 행진했던 일. 선배가 앞서고 후배가 뒤따라 정문부터 중앙도서관, 본관, 대강당을 통해 다시 정문까지 학교를크게 한 바퀴 돌아왔다. 그때 나는 행렬의 거의 끝부분에 있었는데 길게 늘어선 불빛들이 하얗게 반짝여 은하수 같다고 생각했다. - P231

그 여름의 일들이, 성과가 더 많이 언급되면 좋겠다. 인정받으면 좋겠다. 취업의 관문으로 전락한 대학이 여전히 지성과 정의의 장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여성들의 성취가 평가절하되는 관행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작은 승리의 경험이 더 큰 질문과 도전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새로운 문구를 적어넣었다. 
‘나는 강하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더 강하다.‘ - P232

나의 아버지는 능력 있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랬나보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하는 모습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보았다. 후배에게 커피 심부름 한 번 시킨 적 없다거나 친한 사이에도 항상 직함을 붙여 부르고 경어를 사용했다거나 부하직원이라도 늘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는 에피소드들을 흘려들으며 저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가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 P238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평범한 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첫째인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체벌도 서슴지 않았다. 시험 때마다 성적이 떨어진 만큼 매를 맞았고 종아리가 보라색으로 멍들어 이른 가을부터 까만 스타킹을 신고 다녀야 했다. 쓸모없는 인간이라거나 쓰레기라거나 밥도 아깝다는 말들을 예사로 듣고 자랐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내내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 P239

폭력이 때로 얼마나 은밀한지 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잘 알면서도 나는 그런 기사를 썼다.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다정하고 신기하고 안쓰럽고 눈물겨운 이야기들, 그 뒤에 또 누가 몸을 웅크리고  있을까. 나의 부주의와 무심함이 혐오스럽다.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기사를 쓰지 않고 여전히 그 밤의 택시기사를 찾고 있다. - P239

누구에게나 열린 광장, 스스로 모인 사람들, 같은 생각과 목적, 같은 목소리, 광장에 서니 약간 벅찬 기분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굳이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죄책감"일 것이다. 
살면서 잠시라도 치열했던 적이 있었나. 
고민하고 의심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나. 
그나마 평화로운 시절이었다고, 경기가 어려워
먹고살기도 바빴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보았지만 J씨는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묵직했다. - P2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벽 안에서 -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벽 안에서》 조르조 바사니
조르조 바사니의 페라라는 그의 이야기의 원천이자 기억의 원형과 같은 곳이다. 상상의 공간이면서 실제하는 장소들이고 끊임없이 창조되는 동시에 유대인들의 집단적 기억이 깃든 장소이다. 그의 작품에서 ‘유대인‘과 ‘페라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유대인 인종법이 발효된 후 이탈리아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이 공식화 된 5 년 동안의 페라라 유대인 사람들과 거리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그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지만 그의 이야기들은 그 시기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각 작품은 독립적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 책에는 5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리다 만토바니‘, ‘저녁 먹기 전의 산책‘,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 ‘1943년의 어느 날 밤‘ 등이다. 그가 말해주는 페라라 사람들과 거리와 추억들, 사랑,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실들은 이미 지나가버려서 세피아빛, 혹은 흑백사진의 이미지처럼 색바랜 과거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 애잔한 그 이름과 거리들을 하나하나 불러보게 만든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버린 페라라의 거리 이름들, 조베카 대로, 살린궤라 거리, 포 강, 리다 만토바니와 오레스테 베네티, 마레 성문, 반파시시트, 젬마 브론디, 엘리아 코르코스, 델리 기아라 거리와 성벽 위 오솔길 지나 코르코스 박사의 저택, 마치니 거리, 에르베 광장, 그리고 ˝사백명 중 백팔십삼 명˝... 백팔심삼명의 추모명판과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제오 요즈, 파르티잔들, 델라보르사 카페, 유대교 회당과 게토, 회유와 협박 당하고 감금당한 사람들, 클렐리아 트로티와 로비가티, 브루노, 로마 대로와 피노 바릴라리, 마침내 1943년 12월 15일의 학살, 데스테성의 해자와 미칠 듯한 폭력과 공포의 시간들, 시아구라, 금발의 안나 레페토의 삶...이 모든 거리와 역사와 이름들은 실제 역사와 사실 속에서 이야기로 형상화 되었다. 지금도 페라라에 간다면 이들의 흔적을 찾아 헤매게 될 지도 모른다. 어느 거리 어느 성문 앞이나 성벽 안에서 이들을 만나게 되는건 아닐지 기대하게 될 지도!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무엇이 사실이고 허구인지 구분이 잘 안되지만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단걸 곧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중 두번째 이야기인
‘저녁 먹기 전의 산책‘이다. 페라라에는 페라라 역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카보우르 대로, 조베카 대로가 길게 뻗어있고 그것과 교차하여 로마 대로, 그리고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의 주무대였던
에르콜레프리스모데스테 대로가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조베카 대로에서 시작된다. 페라라 지도가 책의 뒷표지 바로 앞, 두 쪽에 걸쳐 실려있어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다. 이 거리의 이름들이 너무 익숙해졌다.




그들은 결혼을 했다. 맨 처음에는 그의 아버지인 나이든 곡물상 살로모네 코르코스 집에서 살았다. 얼마 전까지 게토 심장부였던 비토리아 거리에 자리한 그 집에서 야코포를 낳았고 그런 뒤 루벤을 낳았다. 그리고 육 년이 지나 델라기아라 거리에 "크지만, 내게 안성맞춤이고 누구에게도 묶이지 않고내 힘으로 산 집"에서 살 수 있었다(그사이 엘리아는 콧수염과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졌고 진담과 농담을 섞어 말하길 좋아하게 됐다). - P86

브론디 씨네 집에서 그곳에 가려면, 시내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다 피할 경우 당연히 성벽 위 오솔길을 따라가야 했고, 최소 반 시간은 걸어야 했다. 커다란 산조르조 성당과 갈색 종탑 둘레에 있는 산조르조 구역을 등지고 출발한다. 계속해서정신병원의 단조롭고 꽉 막힌 담장을 끝까지 길게 따라간다.
마지막으로 왼쪽으로 무한한 들판의 아득한 끝에서 볼로냐언덕들의 푸르게 물결치는 능선이 보일 때쯤 고개를 시내로 돌리면 눈길은 곧장 저 아래에 있는, 온통 미국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저택의 회색빛 정면으로, 따가운 햇볕으로부터 실내를 보호하기 위해 반쯤 열어둔 여러 개의 녹색 덧창문으로이끌린다. 
집 정면은 남향으로 햇살의 온갖 미세한 변화들, 눈부심과 어슴푸레함, 순간의 붉어짐과 떨림까지 받도록 노출되어 있어 정말로 무엇인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인간적인 것을느끼게 했다. - P87

반대편에선 집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빨간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위엄 있는 작은 궁전 같았다.
사실 한적하고 외졌지만 분명 시내에 속한 모습과 더불어, 델라기아라 거리가 거의 그 존재를 잊게 만드는 들판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코르코스 박사의 저택을 포함한 주로 부르주아적이고 더러는 귀족적인 분위기의 저택들 경계에서 몇 십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펼쳐진다는 것이 방문차 놀러오는 엘리아 친척에게는 매번 믿을 수 없는 일 같아 보였다. - P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