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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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선선국(敾善國혹은 누란(樓蘭)

 

실크로드의 도시국가라고 하면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소멸되었다는 누란(樓蘭혹은 크로라이나(Kroraina)가 먼저 떠오른다. ‘방황하는 호수’ 로프누르(Lop Nor) 부근에 위치했다는고대 인도유럽어계 토하라인(Tocharians)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국가는 오랫동안 환상 속의 국가로 알려져 왔다왜냐하면 다른 실크로드 도시국가와는 달리 아예 흔적자체가 소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도시국가 누란의 이야기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곳을 방문하도록 유혹하고여러 이야기꾼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의 검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혜린(1962~ )의 단편 만화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1996)나 ’, “꽃을 위한 序詩’,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 등으로 유명한 김춘수(金春洙, 1922~2004)의 시 누란(樓蘭)’(1980)도 이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아쉽게도 이 지역이 1990년대 말까지 핵실험장소로 45차례 사용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탓에 상주하는 사람도 없고 로프누르 호수도 말라버렸다고 한다.

 

 

천산 남북로의 교차점고창국(高昌國혹은 투르판[吐魯蕃]

 

투르판[Turfan, 吐魯蕃]은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갈라지는 길목에 위치해 위치해서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오아시스 도시로 꼽혀왔다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빛나는 장대한 도시 유적지인 교하고성과 고창고성비록 제국주의 탐험가들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베제클리크 석굴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많은 유물을 전하는 아스타나 고분군, <서유기>에 나오는 전설 속의 화염산근대 이슬람 유적인 소공탑(蘇公塔에민 미너렛)거기에다 삶의 슬기가 낳은 인공수로인 카레즈” [p. 56] 등이 남아 있어 실크로드 답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게다가 이곳은 아리안계의 차사인(車師人)이 세운 차사국(車師國, ~460), 한족(漢族)인 국()씨가 지배하던 고창국(高昌國, 502~640), 위구르족의 천산위구르[高昌回, 843~1209] 왕국 등 지배자와 주민이 바뀌면서 계속 새로운 문화가 들어와서 문명의 용광로라고 불리기도 했다그런 만큼 실크로드의 변천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지인들은 교하고성(交河古城)을 아르호토라고 부르는데, ‘언덕 위의 성이라는 뜻이다이곳은 흙을 쌓아 세운 것이 아니라 지하로 파 내려가면서 공간을 분할하는 방식으로 조성된 천연의 성채로서역 36국 중 하나인 차사국(車師國)의 왕성이었다

고창고성(高昌古城)은 교하고성의 4배나 되는 규모의 도시로 고창국(高昌國)의 왕성이었다교하고성과 달리 흙벽돌을 쌓아 조성되었는데, 20세기 초 독일 탐험대에 의해 철저하게 마니교의 벽화네스토리우스교[景敎]의 벽화조로아스터교의 벽화 등이 도굴되고 약탈되었다여기서 북쪽으로 2km 정도 가면 국씨 고창국과 당()나라의 서주(西州지방[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지배층의 공동묘지인 아스타나[阿斯塔那고분이 나온다.

투르판 불교 유적을 대표하는 베제클리크 석굴[Bezeklik Caves, 柏孜剋里 千佛洞]은 약 800년간 83개의 석굴이 조성되었는데일반에게는 6개만 공개되고 있다이곳의 벽화들은 14세기부터 이 지역이 이슬람화하면서 1차 훼손되었고, 20세기 초 독일 탐험대에 의해 흙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벽화가 떼어져서 약탈당했다게다가 유물보존능력을 핑계로 약탈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탐험가들의 변명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공습으로 베제클리크 석굴의 대형 벽화 28폭은 영원히 사라졌다.

 

 

인도 페르시아 문화와 중국 문화의 교차로구자국(龜玆國혹은 쿠차 [庫車]

 

투르판에서 천산남로를 따라 좀 더 들어가면 위구르어로 십자로라는 뜻을 가진 쿠차 [Kucha, 庫車]가 나온다구자국(龜玆國)의 도읍이기도 한 이 곳에는 키질 석굴쿰투라 석굴수바시 사원 등 불교 유적지가 몰려 있다.

 

백양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걸으면최초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쿠마라지바[鳩摩羅什, 344~413]의 동상이 있다이 동상을 지나 도착한 키질 석굴은 용도와 구조에 따라 승방굴(僧房窟중심주굴(中心柱窟), 대상굴(大像窟), 방형굴(方形窟)로 나뉜다승방굴을 스님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공간이고 일반적으로 거실통로작은방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중심주굴은 예배공양 등 종교 활동을 위한 곳으로 석굴 중앙에 방형의 중심기둥이 있어 탑을 상징하며기둥 양옆과 뒤로 난 통로를 통해 탑돌이를 할 수 있는 구조다대상굴은 중심주굴과 구조가 비슷하나 중심주 정면에 커다란 불상을 모신 구조다방형굴은 주실 평면이 네모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승려들이 불경을 강독하던 공간” [pp. 206~207]이라고 한다.

쿰투라[庫木吐拉] 석굴도 다른 석굴처럼 이슬람화에 따라 파괴되고, 20세기 초 독일프랑스러시아일본의 탐험대에 의해 벽화가 약탈되어 성한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처럼 제작 연대와 승려 이름불상의 이름도상의 내용을 적어놓은 제기가 많이 남아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13세기에 폐사(廢寺)되어 절터만 남아 있는 수바시[蘇巴什] 사원은 서역 불교의 총본산이었을 뿐 아니라 인도의 불교와 중국불교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 [p. 257]을 한 중요한 유적지다.

불교 문화에서 이슬람 문화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은 신강성의 양대 청진사(淸眞寺이슬람교도들의 예배당가운데 하나인 쿠차대사[庫車大寺]와 1759년 청()나라 건륭제로부터 쿠차왕의 작위를 받은 아오떼이[鄂對, ~1778 ]의 후손들이 살아왔던 쿠차왕부[庫車王府].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우전국(혹은 호탄[和田]

 

‘황량한 사막 산’이라고도‘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고도 해석되는 타클라마칸 사막은 끝없는 모래언덕과 사나운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땅이다이곳을 건너면 옥과 불교의 도시 호탄[Khotan, 和田]이 있다호탄은 서역 불교가 성립한 곳으로 평가 받고쿠차와 함께 서역 불교의 양대 종가로 불리기도 했지만 1006년 이슬람 국가인 카라한 왕조에 점령된 이후 불교건축물이 단 한 곳도 남지 않을 정도로 이슬람의 색채가 강한 곳이 되었다호탄옥은 중국 4대 명옥(名玉)의 하나이면서 옥 중의 옥으로 알려져 있다.

 

실크로드의 진주소륵국(疎勒國혹은 카슈가르[喀什]

 

호탄에서 곤륜산맥을 왼쪽에 두고 서역남로를 따라 이동하면 카슈가르[Kashgar, 喀什카스]가 보인다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이 맞닿고천산남로와 서역남로가 만나는 교차점이다하지만 막상 카슈가르에서 답사할 곳은 많지 않다이슬람 사원인 아이티가르 청진사향비묘(香妃墓)로 알려진 아바 호자 능묘’, 그리고 카슈가르 고성(古城정도다” [p. 391]라고 한다.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에 놓치지 않아야 할 곳은 야르칸드 한국[葉爾羌 汗國, 1514~1680]의 수도였던 야르칸드다이곳에는 열두 무카무[十二 木]’라는 이름으로 위구르 민족의 춤과 음악을 체계 있게 정리해서 민족의 동질성을 지킬 수 있게 한 아마니사한(Amanisahan, 1526~1560) 왕비의 영묘(靈廟)가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이번에 마무리 된 실크로드 답사기 이후 전공인 한국미술사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한다언젠가 서안과 낙양에서 시작하는 본격적인 중국 답사기가 이어질 것을 기대하며아쉬움 남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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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 정신분석과 문학 무의식의 저널 Umbr(a)
알렌카 주판치치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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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Umbr(a)> 시리즈다. ‘정신분석과 문학’이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글쓰기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다루는 글들을 모았다.

이것은 “정신분석과 글쓰기 혹은 정신분석적 글쓰기라는 주제는 정신분석의 원초적 장면을 불러내어, 기원에서부터 작용한 문자의 기록행위를 전면화” [p. 10]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전집이 번역되어 있고, 자크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의 논문집 <에크리(Ecrits)>와 세미나 의사록도 번역되어 있다는 현실이 이 주제에 대해 학계에서 많이 다루고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책의 서문에서 “정신분석을 위시한 모든 담론들이 근본적으로 쓰기를 통한 기록에 기반하고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하지만 지식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사실을 상기시킨다” [p. 11]는 말이 당혹스러웠다. 마치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당연한 말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앞에서 글쓰기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다룬다고 했지만,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라이팅(writing)’과 정신분석의 관계라고 해야 한다. 학창시절의 교육 때문인지 ‘라이팅’이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글쓰기가 튀어나오는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라이팅은 “단순한 글쓰기만이 아니다. 일체의 문자적 ‘새김’과 그로 인해 구성되는 텍스트를 포괄” [p. 19]한다고 한다.

 

마이클 스탠쉬는 [서론: 글과 ‘말하기치료’]에서 “정신분석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임상적 경험을 글쓰기라는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기록매체를 통해서 번역하고 전송한 방식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물”[p. 14]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프로이트가 성공한 실험을 ‘글쓰기(writing)’라는 번역기를 통해 보고, 독자가 재현하는 것이 정신분석이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자가 (재현해서) 경험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경험한 것과 절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독자에게 동일한 경험의 효과를 제공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글을 써 갔다” [p. 15]는 것이다. 마치 선종(禪宗)에서 화두(話頭)를 통해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처럼.

 

알렌카 주판치치의 [바틀비의 자리]는 후크송(hook song)의 반복되는 훅(hook)처럼 귓가에 맴도는 <필경사(筆耕士) 바틀비>의 주인공인 바틀비의 ‘prefer[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에 대한 분석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는 “단순히 거부하거나 특정한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부정을 긍정한다. 그 결과 그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 차별을 손상시키는 제3의 영역을 열어주게 된다.” [pp. 28~29]

긍정도 부정도 아닌, 부정의 긍정이라는 제3의 영역은 물 위에 떨어진 잉크처럼 바틀비에게 일관성을 부여한 공허(空虛)를 강조, 그 자신과 그의 주변 현실을 파내어, 그를 ‘순수한 공간’을 만든다고 한다.

 

캐서린 말라부의 [신경문학]은 <모리스 블랑쇼: 바깥으로부터의 사유>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건은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다. 언어는 담론의 존재양식을 피해 가고, 문학적 발화(發話)는 그 자체로 발전하면서 각 부분은 가장 가까운 이웃들과도 구분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들을 유지하면서도 모두 개별화하는 공간에서 매 지점마다 관계 내 자리잡고 있다”[p. 35]고 선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깥으로부터의 사유는 해체의 사유만은 아니다. 푸코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에게 문학은 내가 간략히 설명했듯이 죽음과 트라우마의 언어” [p. 51]라고 하면서 문학을 환원주의적 신경생물학이 아닌 푸코주의와 접맥시켜 다루고 있다.

 

루씨 캔튼의 [문자의 실행: 글, 실재의 공간]은 문자의 실천으로서 행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글은 변화가 일어나는 장이 되어 목소리와 발화의 불확실성으로부터 텍스트의 고정성으로 이행하는 통로가 된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는 의미를 제약하고 규정한다.” [pp. 57~58]

그런데 이렇게 고정된 문자, 텍스트의 실천으로서 행위를 다루기에는 문학보다 연극과 같은 공연 예술이 적합하다. 왜냐하면, “행위와 몸짓, 목소리와 리듬, 공간에서의 몸의 움직임 등을 통해 무대상연은 텍스트가 제공하지 못하고 또 할 수 없는 어떤 것에 형태를 부여” [p. 83]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셸 라바테의 [문학해석에 저항하는 문자: 라깡의 문학 비평]에서 “라깡은 문자텍스트를 분석해서는 (즉 정신분석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분석이 아니라 비평해야 한다” [pp. 101~102]고 말한다.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1954~ )도 정신분석이 문학에 적용되어온 방식에 대해 비판하며, “정신분석독해의 정석들은 그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무의식적 환상, 원초적 장면, 어린 시절 기억의 중요한 역할 등에 대한 정신분석적 진리를 증명할 뿐이다. 이것은 그 결과가 오류라거나 방법론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단지 완전한 예상 가능성을 함축한다. 이런 반복성과 예측 가능성은 고작 지루함과 이론적 빈약만을 낳은 뿐” [pp. 111]이라고 했다. 따라서 문학에 정신분석을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을 문학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캐서린 밀로의 [왜 작가인가?]는 정신분석이론을 통해 문학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 “정신분석가에게는 본질적으로 문학작품을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하는 일의 정당성, 특히 작가를 관련된 당사자와의 연관성 없이 해석하는 일의 정당성 여부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 [p. 135]

둘째, “문학작품을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 경우 문학을 정신분석을 위해 사용한다.” [p. 135]

 

시기 요크칸트의 [기표와 문자, 라깡과 키에르케고르] 에서는 “어떻게 ‘집합체’로서 문자가 개념상 주체, 대타자와 소대상 - 대타자를 구성하는 것 - 의 원초적 관계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가” [p. 180]를 이야기한다.

 

트레이시 맥널티의 [제약의 작동: 상징적 삶의 미학을 향하여]는 독일 제3제국의 인종 학살프로그램을 기획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치이론의 맥락에서 성문법 - 그리고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쓰기를 포함한다 - 의 기능과 중요성을 재(再)사유” [p. 190]하려고 한다.

 

무의식의 저널 <엄브라 Umbr(a)> 시리즈는 여전히 쉽게 다가오지 않고 어렵다. 그리고 저자들의 텍스트를 오독(誤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걱정과 불안감을 떨치기 힘들다. 그러나 라깡 이론 혹은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이 시리즈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리뷰는 도서출판 인간사랑으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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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 낭만이 깃든 작고 오래된 가게 노포 탐방기
천구이팡 지음, 심혜경 외 옮김 / 페이퍼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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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은

 

타이난[臺南]은 타이완[臺灣]의 옛 수도이자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 일본으로 치면 교토[京都]에 해당하는 도시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숨어있는 듯 드러난 노포(老鋪)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왕하오이는 “최근에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와 화가들은 타이난에 머물며, 옛 도시들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색다르게 ‘감상’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고 있다”[p. 5]고 한다. 그런데, 구혜란의 <뉴욕 백년 식당>, 무라야마 도시오[村山俊夫]의 <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 이야기>, 이인우의 <서울 백년 가게>처럼 노포들을 다루는 글을 여럿 읽다 보니, 평범한 여행기를 거부하고 색다르게 감상하는 것은 타이완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하나의 트렌드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SNS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진에 지쳐서인지, ‘악어’라는 예명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그린 수채화 풍의 그림이 반가웠다. 마치 썬 베드에 몸을 뉘이고 빨대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촨루[民權路]와 신메이제[新美街]라는 두 거리의 지도가 먼저 나오고 각각의 거리에 있는 노포들이 소개된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옛 거리 느리게 걷기’라는 제목으로 관광명소가 소개되며, 책 마지막에 노포에서 만난 사장님들의 사진이 자리잡고 있다.

 

신메이제[新美街] 지도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76~77

 

웨이쥔방 댜오커옌주서[魏俊邦 彫刻硏究社]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90~91

 

옛 거리 느리게 걷기_쓰덴우먀오 다관디먀오[祀典武廟]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84~85

 

노포에서 만난 사장님들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172~173

 

타이난 노포의 매력

 

제일 먼저 소개된 곳은 신위진빙푸[新裕珍餠?]라는 옛날 과자를 파는 가게이다. 이곳은 가게 주인인 커빙장[柯炳章]은 6년 동안 손수레를 끌며 장사하다가 1963년 ‘신위진(빙푸)’를 창업해서 50여 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그는 “가게에서 파는 제품은 그 가게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적당히 만들면 안 되며, 과자에 ‘믿음’을 담아 ‘한결같은’ 가게 정신을 고객들에게 전달하고 싶기 때문(에)” [p. 20] 기력이 떨어지자 빵과 케이크는 포기하고 과자만 팔고 있다. 그의 아내인 커천몐[柯陳麵]도 “가게에서 항상 정장이나 양장을 갖춰 입고 깔끔하게 화장을 한 다음 립스틱을 꼭 바른다. 그리고 손님들 한 명 한 명을 예의를 갖춰 맞이한다.” [p. 20]

 

100년이 넘는 가게인 전파차항[振發茶行]은 타이난에서 최초로 공식 등록된 차 도매상으로 수작업으로 찻잎을 포장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불상 조각계의 성형미용센터를 자처하는 허취쉬안포쥐텐[和成軒佛具店]은 1971년부터 20년 간 불상 조각이 유행했던 때 창업을 했으나 지금은 고인의 모습을 불상처럼 만들어 신격화하던 유행도 사그라지고, 중국 본토에서 불상도 수입되면서 곤란을 겪고 있다. 현재는 다른 가게에서 만든 불상을 수선하고 교정하는 서비스도 한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음식남녀>,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등의 감독으로 유명한 리안[李安, 1954~ ]이 영화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라는 취안메이시위안[全美戱院], 백 년 전 방식으로 수제 향(香)을 만드는 우완춘상푸[吳萬春香?], 아연생활용품을 제작하는 룽싱야첸덴[隆興亞鉛店], 결혼 축하예물로 쓰이는 시장[喜?]을 만드는 진위안룽시장[錦源榮喜?], 3대째 내려오는 나막신 가게인 전싱세항[振行鞋行] 등 다양한 노포들의 모습에서 교토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타이난의 매력을 엿볼 수 있다.

 

 

시간과 함께 달리는 기록들

 

저자는 “오래된 가게들에 대한 생각을 글로 표현해 보려고 관찰한 사실에서 감동받은 내용을 단편적으로 묘사하거나, 그림으로는 전달할 수 없었던 감정을 글로 적어 보았다. 여행하면서 스케치하는 방식으로 고향의 오래된 가게를 그린 다음, 여행자의 눈길로, 여행지의 가게를 방문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다” [p. 6]고 한다.

 

저자가 오래된 가게를 기록하는 도구들

출처: <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pp. 14~15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면,

낯선 가게에 들어가게 되면 보통은 내가 미리 준비해 둔 말을 꺼낸다. 오래된 가게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그림을 그려 화첩에 소장하고 싶다고. 사연을 모르는 가게 주인들은 우선 내가 왜 자신의 가게를 그리는지 궁금해했고, 이어서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서 내게 앉으라고 권한다. 때로는 목을 축이라고 차를 한 잔 따라 주거나 하면, 그림을 그리면서 사장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들이 가게 업무를 보다가 내가 뭘 그리는지 잠깐씩 보러 오면 함께 잡담을 나누다 다시 서로의 일에 집중하곤 했다. 스케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사장님은 외부인인 내가 아직 가게에 있다는 걸 깜빡 잊고는 부인과 농담을 하거나 말다툼을 하는 진솔한 모습을 보게 될 때도 있었다. 이웃들과 수다를 떨고, 심지어는 온 가족들이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따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현장 경험들은 아주 재미있었다. 취재하면서 맞이하는 최고의 순간은 바로 가게의 역사나 오래된 물건들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을 때였다. 오래된 가게의 매력은 바로 세월이 흐르면서 층층이 쌓인 이야기들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리고 사장님들의 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 시대에 속했던 옛 맛을 그려 낼 수 있다.” [pp. 6~7]

 

저자가 이 책을 펴내는 데 3년 이상 걸렸다는데, 많은 사장님들이 연세가 많으셔서 그 사이에 전파차항[振發茶行]의 4대 사장인 옌찬청[嚴燦成]처럼 세상을 떠난 분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결국 노포의 지속 가능성은 ‘사람’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저자도 “오래된 가게들을 방문하는 건 정말 ‘시간’과 함께 달린 기록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p. 7]고 말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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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하는 제국 -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콜린 우다드 지음, 정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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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체성은

 

흔히 미국이라고 하면 김동섭의 <미국을 만든 50개 주 이야기>처럼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50개 주(State)의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 1968~ )는 이 책, <분열하는 제국>을 통해 미국을 11개의 지역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지역 국민은 주(州)의 경계는 물론 캐나다나 멕시코의 국경까지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니 황당무계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럴듯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수 세기 전에 형성된 미국의 지역 국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이주해 온 무리들에 의해 그들이 가졌던 문화, 인종, 종교적 신념 등이 퇴색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윌버 젤린스키(Wilbur Zelinsky, 1921~2013)는 “주인 없는 땅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 혹은 원주민을 쫓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사람들이 독자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 맨 처음 거주민의 특성은 이후 그 땅의 사회, 문화지리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설령 그 최초의 정착민들이 아무리 소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장기간 지속되는 영향력을 봤을 때, 수백 명 혹은 수십 명에 불과한 초기 정착민들이 몇 세대 후 이주해온 수만 명의 새로운 이주민보다 문화지리학적으로 훨씬 큰 의미를 지닌다.” [pp. 28~29]라고 대답한다.

 

 

미국을 구성하는 11개의 지역 국민(Regional Nations)

 

The 11 nations of North America

출처: 콜린 우다드, <분열하는 제국>, pp. 4~5

 

출처: https://www.businessinsider.com/the-11-nations-of-the-united-states-2015-7

 

 

1. 엘 노르테(El Norte)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유럽 문화의 전파는 스페인의 군인과 선교사에 의해 남쪽, 뉴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고원과 콜로라도 남부에서 시작됐다. 이들 스페인계 미국인들은 “17세기 스페인의 전통과 기술, 종교관습을 20세기까지 고스란히 보존”[p. 39]했다고 한다. 스페인인 여성이 부족했던 결과 1700년대 초가 되자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를 중심으로 하는 히스패닉이 멕시코와 엘 노르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가장 미국인답지 않는 국민이라고도 한다.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 남부, 텍사스 남부, 아리조나 남부, 뉴멕시코 등이 미국에 편입되었지만, 이들은 멕시코 북부의 주들과 함께 ‘노르테뇨(norteno)’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미국도, 멕시코도 아닌 자신들만의 제3국가를 염원한다. 참고로 미국의 카우보이 문화는 이들이 스페인 남부에서 이식한 문화로 미국 최초의 카우보이는 인디언이었다고 한다.

 

2. 뉴프랑스(New France)

톨레랑스(Tolerance, 관용)가 살아있는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해 신대륙으로 진출한 프랑스인의 후예다. 이들은 인디언을 정복하려는 스페인이나 쫓아내려는 영국과 달리 인디언을 포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이곳에는 프랑스 문화만큼 원주민 문화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인종적으로도 캐나다 프랑스인과 북미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 메티스(metis)가 형성될 정도로 거의 공생관계가 되었다.

 

3. 타이드워터(Tidewater)

영주들이 경제 사회 정치를 지배하는 반(半)봉건사회를 이식하고자 한 영국 남부 젠트리의 후손이다. 이들은 소수의 농장주와 다수의 계약 노예로 구성된 사회를 형성했지만, 훗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흑인 노예를 구입, 사유재산으로 삼기 시작했다. 스스로 ‘왕당파’로 규정한 이들에 의해 직접선거를 치르지 않고 의회가 임명하는 상원의원 제도와 선거인단 제도라는 귀족적 요소가 미국 헌법에 삽입되었다.

  

4. 양키덤(Yankeedom)

뉴잉글랜드 황야에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각 공동체가 자치 공화국으로 작동하는 종교적 유토피아를 세우겠다며 정착한 칼뱅주의자의 후예다. 따라서 종교가 다른 이들은 모두 추방할 만큼 종교적, 도덕적으로 불관용 정책을 펼쳤다. 이들은 젊은 비(非)숙련 남성 계약 노예 위주인 타이드워터 정착민과 달리 가족 단위로, 교육 수준과 경제 수준이 높은 중산층 가족 단위로 이주를 했기에 안정적이고 응집력이 높았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전파하는 ‘선교’를 위해 주변을 활발하게 정복했다.

 

5.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

1600년대 초반 지구상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세련된 국가였던 네덜란드에 의해 형성되었기에 이곳은 종교적 관용과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다만 이들의 관용은 무역과 사업을 위해 다양성을 참고 견딘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다양성과 관용, 계층 이동, 민간 기업 육성은 바로 이들이 남긴 유산이다.

 

6. 디프사우스(Deep South)

17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였던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에서 미국의 남부 지역으로 이동한 농장주의 후예다. 노예제를 기반으로 소수의 백인 농장주에 의한 과두제 사회를 형성하였으며 인종에 따른 엄격한 카스트 제도가 적용되었다.

 

7. 미들랜드(Midland)

미국의 여러 국민 중 가장 ‘미국인’다운 혹은 전형적인 미국인에 가까운 사회가 영국 퀘이커 교도에 의해 건설된 미들랜드다. 이후 기근과 종교적 박해, 전쟁을 피해 독일에서 온 농부와 수공업자들이 합류해서 다수가 되었다. 정치에는 무관심한 편이지만, 이들의 영향인지 톱-다운 방식의 정부 개입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다.

 

8. 그레이터 애팔라치아(Greater Appalachia)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마지막 국민인 그레이터 애팔라치아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려 온 영국 북부의 분쟁지대에서 계속 오르는 세금에 시달리다가 신대륙으로 이주한 스콧-아이리시인들의 자손이다. 거칠고 호전적이며 혈연에 집착하는 이들은 대중문화를 통해 ‘레드넥(redneck, 교육 수준이 낮고 보수적인 시골 사람을 일컫는 모욕적인 표현)’, ‘힐빌리(hillbillies, 두메산골 촌뜨기)’, ‘크래커(cracker, 남부의 가난한 시골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 ‘하얀 쓰레기(white trash, 가난한 백인을 뜻하는 은어)’라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배타적이나 개인의 자유와 주권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컨트리 음악, 스톡 카(일반 차를 개조한 경주용 차) 레이싱, 기독교 복음주의 등에 영향을 미쳤다. 특이하게도 자신들의 뿌리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까닭에 “이름 없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미국인’ 혹은 ‘미국 원주민’이라고 말한다.

 

9. 레프트 코스트(The Left Coast)

뉴잉글랜드에서 온 상인, 선교사, 벌목꾼 무리와 그레이터 애팔레치아 출신의 농부, 채굴업자, 가죽 무역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덕분에 뉴잉글랜드의 유토피아 이상주의적 성향과 그레이터 애팔레치아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결합되어 근대적 환경운동과 글로벌 지식혁명의 산실이 되었다.

 

10. 파웨스트(The Far West)

미국이 가장 마지막으로 정복한 땅으로 “민족적 지역 문화가 아니라 외부 수요에 따라 정체성이 형성된 독특한 지역” [p. 336]이다.”이다.  광활한 황야지역이기에 대규모 산업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나 영유권을 지닌 연방정부 주도로 (식민지 개척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이곳은) 해안지역 국민의 이익을 위해 착취되고 수탈당하는, 일종의 내부 식민지 취급을 받았다.” [p. 23].

때문에 이들은 개인의 자유에 극도로 민감한 자유지상주의자가 되었다.

 

11.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

새롭지만 가장 오래된 지역국민으로 북미 원주민들이 자리잡고 있다. 공동체 의식과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매우 강한 사회이다.

 

 

지역 국민으로 본 미국 역사

 

1. 미국 독립 전쟁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 전쟁은 양키덤,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 그리고 북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가 군사동맹을 맺어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적 관습, 제도를 위협하는 영국을 물리치고 이에 동조했던 미들랜드의 평화주의자와 뉴네덜란드의 왕당파를 정복한 전쟁이다.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첫째는 국가적 지위의 특성을 가진 느슨한 정치적 연대체가 생겨난 것이고, 둘째는 각 국민의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p. 198]

그 결과 식민지 연합을 이룬 6개의 지역 국민은 내부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타협하여 새로운 헌법과 연방을 만들었다. 타이드워터와 디스사우스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뉴네덜란드는 양심과 표현,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 장전을, 미들랜드는 각 주의 주권 보장을, 양키덤은 작은 주들도 상원에서 동등한 발언권 보장을 각각 반영시켰다.

 

2. 남북 전쟁

남북전쟁 시대는 오랫동안 ‘북부’와 ‘남부’ 사이의 투쟁으로 그려져 왔다. 하지만 이 두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남북전쟁이 과연 노예 해방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 게르만족 사이의 세력 다툼이었는지 여부를 놓고도 논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어떻게 분석해봐도 명확하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결론밖에 도출되지 않았다.” [p. 311]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남북전쟁은 노예제 사회였던 타이드워터를 포함하는 디프사우스 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양키덤 세력의 충돌이라고 한다.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일상 생활과 경제 활동의 범위는 확대되었지만, “국민들 사이의 차이점을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2008년 언론인 빌 비숍(Bill Bishop, 1953~ )과 사회학자 로버트 쿠싱(Robert Cushing)은 <대분류(The Big Sort: Why the Clustering of Like-Minded America is Tearing Us Apart)>라는 책에서 1976년 이후부터 미국인은 자신과 가치관 및 세계관이 비슷한 커뮤니티로 각자 헤쳐 모이고 있다고 주장”[p. 29] 했다. 즉, 현재의 미국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여러 개의 지역 국민들로 재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미국사를 11개 지역 국민의  각축으로 보는  이 책의 관점은 독특하다. 그리고, 다른

국가를 살펴볼 때  우리가 무심코 가지게 되는 선입견에 대한 경고와 발상의 전환에 대한  단

서로도 유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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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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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답사

 

돈황(敦煌) 명사산(鳴沙山) 자락에 자리잡은 막고굴(莫高窟)에는 4세기경부터 시작해서 14세기까지 약 1천 년간에 걸쳐 석굴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석굴은 492개인데, 이 중 수(隋)나라 때 97기, 당(唐)나라 때 225기가 만들어졌다니 전체 석굴의 4분의 3이 수당시대에 만들어진 셈이다.

막고굴 석굴의 관람은 보존을 위해 하루 6천 명으로 관람인원을 제한하고 예약된 관광객만 15분 단위로 입장시키는 등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막고굴 석굴을 관람하려면 먼저 막고굴 디지털 전시 센터로 가서 돈황과 막고굴에 대한 영상을 본 후 막고굴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 막고굴 부근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막고굴 입구의 솟슬대문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여기서 가이드를 만나 석굴을 구경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관람자 별로 2시간 동안 8개의 석굴을 볼 수 있으며, “막고굴 석굴 중 가장 큰 불상인 북대불(北大佛)이 있는 제96굴과 돈황문서가 발견된 장경동(제17굴)이 있는 제16굴은 공통으로 보여주고 나머지는 관람객들이 겹치지 않게 가이드가 조절하여 안내” [pp. 23~24]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 1부 ‘막고굴’에서 두 차례에 걸쳐 11개의 석굴을 관람하고 막고굴에 있는 불상과 벽화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5굴의 모형(돈황박물관)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13

 

박공식의 제254굴 천장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38

 

북두형 천장의 제285굴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39

 

제275굴 교각미륵상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93

 

돈황문서 수난기

 

막고굴은 한동안 잊혔다가 20세기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00년 도사(道士)를 자처한 왕원록(王圓?, 1851~1931)에 의해 제16실 안에 있는 감실, 지금은 제17굴로 불리는 장경동(藏經洞)에서 돈황문서 3만 점이 발견된 것이다. 이들 문서 가운데 연도를 알 수 있는 것을 보면 “가장 오래된 것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인 353년의 필사본이고,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것은 북송(北宋) 때인 1030년에 작성된 필사본이다.” [p. 112]

비록 이곳에서 발견된 불경의 “대부분이 잔권(殘卷) 단편들이고 가짜 경전으로 의심되는 위경(僞經)도 적지 않다. 심지어 잘못 베껴 버려진 두루마리와 먹을 덕지덕지 칠한 잡다한 글씨의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응당 있어야 할 <대장경>에 수록된 주요 경전이나 <대반야경> 등 고급 불경이 없다”[p. 113]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황문서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불행히도 이후 중국에서 ‘도보자(盜寶者)’라고 부르는 영국의 오렐 스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 미국의 랭던 워너(langdon Warner, 1881~1955) 등이 돈황문서와 유물을 가져가 전세계로 흩어졌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05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오브루체프(Vladimir A. Obruchev, 1863~1956)가 왕원록에게 승려의복용 직물, 향, 등잔용 기름, 구리 주발 등이 든 6꾸러미를 주고 고문서 2상자를 가져간 것을 시작으로, “1907년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어리숙한 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약1만 점을 유출하여 영국박물관에 가져갔고,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다시 5천 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가져갔는데 그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필사본도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청나라 정부가 북경으로 옮겨갔다. 뒤이어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가 흩어져 있던 (약 600종의) 문서와 불상을 유출해갔고, 미국의 랭덤 워너는 (돈황문서가 아니라) 불상과 벽화를 뜯어갔다.” [p. 49]

 

돈황문서는 이렇게 흩어졌지만 남아있는 돈황벽화라도 수호한 이들도 있었다. 제백석(齊白石)과 함께 현대 중국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대천(張大千, 1899~1983)은 1941년부터 막고굴 벽화를 모사하는 동시에 석굴마다 번호를 매기며 조사했다. 파리에서 활동한 전도유망한 화가였지만 귀국해 40여 년을 막고굴 보호와 연구에 헌신한 만주족 화가 상서홍(常書鴻, 1904~1994)도 있다. 조선족 화가 한락연(韓樂然, 1898~1947)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상해임시정부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려는 창조파에 속했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중국 국민당 고급장교를 상대로 하는 통일전선사업에 종사했고, 이로 인해 국공합작의 와해 이후 체포되었다. 다행히 각계의 구명활동으로 “활동 지역을 서북지역[감숙성과 신강성]으로 한정할 것과 작품에 노동 인민을 그리지 않을 것을 조건” [pp. 234~235]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돈황 벽화를 모사하며 발굴조사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막고굴이 훼손되지 않도록 수호하였다. 오늘날에는 돈황연구원이 그들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20세기에 일어난 막고굴 약탈, 즉 돈황문서의 수난사는 어떻게 보면 답사기와는 다소 핀트가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막고굴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기에 수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아 감정 이입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돈황에는 막고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돈황 인근에는 막고굴 외에도 가볼 만한 답사처가 많다. 과주(瓜州) 혹은 안서(安西)에 있는 유림굴(楡林窟)은 막고굴의 자매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제2굴과 제3굴에서 탕구트계의 나라 서하(西夏)가 남긴 불교예술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제2굴 서쪽 벽의 남측과 북측의 수월관음도는 고려의 불화인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떠올리게 한다.

 

제2굴의 수월관음도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p. 284~285

 

돈황 시내에서 각각 서남쪽, 서북쪽에 위치한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은 예부터 서역으로 열린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실크로드라고 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길은 아니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사막답게 타클라마칸 사막을 우회하는 길일 뿐이다. 그래서 실크로드의 두 관문인 양관과 옥문관을 따라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형성된 것이다. “양관을 통해 나아가는 서역남로는 곤륜산맥의 오아시스 도시인 누란(樓蘭)과 호탄[Khotan, 和田]을 거쳐 카스[喀什]에 이르는 길이다. 옥문관을 통해 나아가는 서역북로는 천산산맥을 따라가는 길로 투르판[Turfan, 吐魯蕃]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천산남로는 쿠얼러[Korla, 庫爾勒]와 쿠차([Kucha, 庫車]를 지나 카슈가르[Kashgar, 喀什, 카스]에 이르고, 북쪽으로 나아가는 천산북로는 우루무치[Urumqi, 烏魯木齊]를 지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로 나아가는 초원의 길이다. 강인욱 교수의 지적대로 실크로드는 선이 아니라 오아시스 도시를 잇는 점을 말한다.” [p. 304]

 

다음 권에서는 <서유기(西遊記)>의 모델이 된 현장법사(玄?法師)가 불경을 찾기 위해 떠났던 길을 따라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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