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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사라진 왕국, 선선국(敾善國) 혹은 누란(樓蘭)
‘실크로드의 도시국가’라고 하면,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소멸되었다는 누란(樓蘭) 혹은 크로라이나(Kroraina)가 먼저 떠오른다. ‘방황하는 호수’ 로프누르(Lop Nor) 부근에 위치했다는, 고대 인도유럽어계 토하라인(Tocharians)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국가는 오랫동안 환상 속의 국가로 알려져 왔다. 왜냐하면 다른 실크로드 도시국가와는 달리 아예 흔적자체가 소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시국가 ‘누란’의 이야기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곳을 방문하도록 유혹하고, 여러 이야기꾼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의 검> 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혜린(1962~ )의 단편 만화 ‘로프누르: 잃어버린 호수’(1996)나 ‘꽃’, “꽃을 위한 序詩’,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 등으로 유명한 김춘수(金春洙, 1922~2004)의 시 ‘누란(樓蘭)’(1980)도 이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이 지역이 1990년대 말까지 핵실험장소로 45차례 사용되면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탓에 상주하는 사람도 없고 로프누르 호수도 말라버렸다고 한다.
천산 남북로의 교차점, 고창국(高昌國) 혹은 투르판[吐魯蕃]
투르판[Turfan, 吐魯蕃]은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갈라지는 길목에 위치해 위치해서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오아시스 도시로 꼽혀왔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빛나는 장대한 도시 유적지인 교하고성과 고창고성, 비록 제국주의 탐험가들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베제클리크 석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많은 유물을 전하는 아스타나 고분군, <서유기>에 나오는 전설 속의 화염산, 근대 이슬람 유적인 소공탑(蘇公塔, 에민 미너렛), 거기에다 삶의 슬기가 낳은 인공수로인 카레즈” [p. 56] 등이 남아 있어 실크로드 답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아리안계의 차사인(車師人)이 세운 차사국(車師國, ~460), 한족(漢族)인 국(麴)씨가 지배하던 고창국(高昌國, 502~640), 위구르족의 천산위구르[高昌回鶻, 843~1209] 왕국 등 지배자와 주민이 바뀌면서 계속 새로운 문화가 들어와서 ‘문명의 용광로’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 만큼 실크로드의 변천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지인들은 교하고성(交河古城)을 ‘아르호토’라고 부르는데, ‘언덕 위의 성’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흙을 쌓아 세운 것이 아니라 지하로 파 내려가면서 공간을 분할하는 방식으로 조성된 천연의 성채로, 서역 36국 중 하나인 차사국(車師國)의 왕성이었다
고창고성(高昌古城)은 교하고성의 4배나 되는 규모의 도시로 고창국(高昌國)의 왕성이었다. 교하고성과 달리 흙벽돌을 쌓아 조성되었는데, 20세기 초 독일 탐험대에 의해 철저하게 마니교의 벽화, 네스토리우스교[景敎]의 벽화, 조로아스터교의 벽화 등이 도굴되고 약탈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2km 정도 가면 국씨 고창국과 당(唐)나라의 서주(西州) 지방[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지배층의 공동묘지인 아스타나[阿斯塔那] 고분이 나온다.
투르판 불교 유적을 대표하는 베제클리크 석굴[Bezeklik Caves, 柏孜剋里 千佛洞]은 약 800년간 83개의 석굴이 조성되었는데, 일반에게는 6개만 공개되고 있다. 이곳의 벽화들은 14세기부터 이 지역이 이슬람화하면서 1차 훼손되었고, 20세기 초 독일 탐험대에 의해 흙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벽화가 떼어져서 약탈당했다. 게다가 유물보존능력을 핑계로 약탈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탐험가들의 변명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공습으로 베제클리크 석굴의 대형 벽화 28폭은 영원히 사라졌다.
인도 페르시아 문화와 중국 문화의 교차로, 구자국(龜玆國) 혹은 쿠차 [庫車]
투르판에서 천산남로를 따라 좀 더 들어가면 위구르어로 ‘십자로’라는 뜻을 가진 쿠차 [Kucha, 庫車]가 나온다. 구자국(龜玆國)의 도읍이기도 한 이 곳에는 키질 석굴, 쿰투라 석굴, 수바시 사원 등 불교 유적지가 몰려 있다.
백양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걸으면, 최초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쿠마라지바[鳩摩羅什, 344~413]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을 지나 도착한 “키질 석굴은 용도와 구조에 따라 승방굴(僧房窟) 중심주굴(中心柱窟), 대상굴(大像窟), 방형굴(方形窟)로 나뉜다. 승방굴을 스님이 거주하며 생활하는 공간이고 일반적으로 거실, 통로, 작은방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중심주굴은 예배, 공양 등 종교 활동을 위한 곳으로 석굴 중앙에 방형의 중심기둥이 있어 탑을 상징하며, 기둥 양옆과 뒤로 난 통로를 통해 탑돌이를 할 수 있는 구조다. 대상굴은 중심주굴과 구조가 비슷하나 중심주 정면에 커다란 불상을 모신 구조다. 방형굴은 주실 평면이 네모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승려들이 불경을 강독하던 공간” [pp. 206~207]이라고 한다.
쿰투라[庫木吐拉] 석굴도 다른 석굴처럼 이슬람화에 따라 파괴되고, 20세기 초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의 탐험대에 의해 벽화가 약탈되어 성한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처럼 제작 연대와 승려 이름, 불상의 이름, 도상의 내용을 적어놓은 제기가 많이 남아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13세기에 폐사(廢寺)되어 절터만 남아 있는 수바시[蘇巴什] 사원은 “서역 불교의 총본산이었을 뿐 아니라 인도의 불교와 중국불교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 [p. 257]을 한 중요한 유적지다.
불교 문화에서 이슬람 문화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은 신강성의 양대 청진사(淸眞寺, 이슬람교도들의 예배당) 가운데 하나인 쿠차대사[庫車大寺]와 1759년 청(淸)나라 건륭제로부터 쿠차왕의 작위를 받은 아오떼이[鄂對, ~1778 ]의 후손들이 살아왔던 쿠차왕부[庫車王府]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우전국(于闐國) 혹은 호탄[和田]
‘황량한 사막 산’이라고도,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고도 해석되는 타클라마칸 사막은 끝없는 모래언덕과 사나운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땅이다. 이곳을 건너면 옥과 불교의 도시 호탄[Khotan, 和田]이 있다. 호탄은 서역 불교가 성립한 곳으로 평가 받고, 쿠차와 함께 서역 불교의 양대 종가로 불리기도 했지만 1006년 이슬람 국가인 카라한 왕조에 점령된 이후 불교건축물이 단 한 곳도 남지 않을 정도로 이슬람의 색채가 강한 곳이 되었다. 호탄옥은 중국 4대 명옥(名玉)의 하나이면서 ‘옥 중의 옥’으로 알려져 있다.
실크로드의 진주, 소륵국(疎勒國) 혹은 카슈가르[喀什]
호탄에서 곤륜산맥을 왼쪽에 두고 서역남로를 따라 이동하면 카슈가르[Kashgar, 喀什, 카스]가 보인다.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이 맞닿고, 천산남로와 서역남로가 만나는 교차점이다. 하지만 “막상 카슈가르에서 답사할 곳은 많지 않다. 이슬람 사원인 아이티가르 청진사, 향비묘(香妃墓)로 알려진 ‘아바 호자 능묘’, 그리고 카슈가르 고성(古城) 정도다” [p. 391]라고 한다.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에 놓치지 않아야 할 곳은 야르칸드 한국[葉爾羌 汗國, 1514~1680]의 수도였던 야르칸드다. 이곳에는 ‘열두 무카무[十二 木卡姆]’라는 이름으로 위구르 민족의 춤과 음악을 체계 있게 정리해서 민족의 동질성을 지킬 수 있게 한 아마니사한(Amanisahan, 1526~1560) 왕비의 영묘(靈廟)가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이번에 마무리 된 실크로드 답사기 이후 전공인 한국미술사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한다. 언젠가 서안과 낙양에서 시작하는 본격적인 중국 답사기가 이어질 것을 기대하며, 아쉬움 남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