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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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눈, 일상을 묻어버리다.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에서 멀어진 삶이 시작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조예은의 <스노볼 드라이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녹지 않는 방부제, 즉 실리카 겔(Silica gel)과 유사한 성분의 가짜 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으면서 일상에서 멀어진 삶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 평균 강설량 20센티미터. 총합 150센티미터. 일반 눈과 다른 점은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짜 눈은 성인 남성의 가슴팍까지 잠길 정도로 쌓였다. 거리의 온갖 쓰레기들, 테이크아웃 컵과 깨진 유리 조각, 담배꽁초, 죽은 시궁쥐, 제대로 닦이지 않은 일회용기 따위도 전부 눈 아래에 묻혔다. 더러운 것은 눈송이가 다 감춰 버렸으므로, 거리는 언뜻 평화로워 보였다. 태우지 않는 한 영원히 녹지 않는 눈 결정체는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일렁이는 물비늘처럼 이쪽저쪽으로 반짝였다.” [p. 34]

 

사람의 온기에도 녹는 진짜 눈과 달리 이 가짜 눈은 발열, 구토, 가려움, 발진, 호홉곤란 등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수분을 빨아들였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눈처럼 반짝이며 지저분한 것들을 덮어 순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속으로는 흡혈귀처럼 수분을 빨아들여 세상을 하얗게 황폐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재앙이 일상이 된 삶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단순히 소설 속의 일이라고 지나가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 현상 등을 보면 언젠가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재앙 속의 일상

 

가짜 눈이 내린 이후 간혹 진짜 눈이 내려도 과거의 삶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평범했던 일상은 이제 오지 않을 꿈 속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눈송이가 스며들 일이 없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우주복 같은 옷을 입고 눈을 퍼냈다. 일주일이 꼬박 걸려서야 포크레인과 수거 차량이 지나갈 길을 텄다. 방역 회사와 정비원 등 선발대, 자원봉사자가 아닌 주민들도 전신을 단단히 봉하고 나와 눈 더미 치우는 것을 도왔다. 피해는 더디게 복구되었다. 그사이에 돌이킬 수 없도록 무너지는 것들이 더 많았다.

굶어 죽는 사람들, 외로워서 죽는 사람들, 망하는 사람들, 망해서 죽는 사람들, 답답함을 참지 못해 눈 위로 뛰어들었다가 그대로 발작을 일으킨 사람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외출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다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람들.  느릿한 복구 과정 중 그들의 시신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는데 몸집이 바싹 말라 줄어들기는 했지만 꼭 잠이라도 든 것처럼 하나도 부패하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p. 35]

 

이런 상황에서 녹지 않는 가짜 눈을 태우고 묻기 위한 장소, 그러니까 쓰레기 소각 및 매립지로 백영시가 지정되었다. 그리고 타의에 의해 사실상 격리된 이 곳에서 사람들은 녹지 않는 눈을 처리하기 위해 ‘센터’라고 부르는 눈 소각장에서 일하게 된다. 일상이 파괴되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주인공 백모루(이하 ‘모루’)도 이모인 유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센터’에서 일한다. 왜냐하면 모루의 엄마가 ‘센터’에서 일하다가 폐렴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을 지키고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을 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처음 가짜 눈이 왔던 중2 진로 상담 때에는 관심 있는 척하며, 되고 싶은 것이 없는 모루에게 장래희망을 계속 캐묻는 담임을 혐오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그때 담임이나 다른 어른들이 바랬던 기업의 성실한 부품이 되었으니까.

 

눈 소각장은 하루 24시간 내내 돌아갔다. 일은 단순하지만 힘들었고, 녹초가 되어 퇴근 이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센터에서 궂은일을 하는 데 나이 제한을 둔 이유가 있었다. 어린애들은 겁이 많고 잘 속으며 체력이 좋지만 뭘 모르니까. 시키는 대로 잘 움직이니까. 처음에는 생기 있던 이들도 점차 피곤에 찌들어 갔다. 생각이라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주어지는 식사와 침대에 만족하며 성실한 부품이 되었다.” [p. 93]

 

또 다른 주인공 이이월(이하 ‘이월’)은 계모신화의 변형된 형태를 경험해야 했다. 강아지 하루의 환영을 믿어주고 함께 산책해 주면서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어주는 친엄마 같은 계모(繼母) 정지수와 아이를 이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차가운 의부아빠 같은 친부(親父) 사이에서 그녀가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는 명확해 보인다.

그렇기에 이월이 계모의 마지막 부탁인 눈 속에의 매장을 위해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이월은 유진을 만나고, 유진은 이월을 구하기 위해 강도를 유인한다. 마음의 빛을 진 이월은 모루를 만나기 위해 센터로 갔지만, 이모를 기다리는 모루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지 고민한다. 고민하는 동안에도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그녀도 기계의 부품이 되었다.

 

센터에서는 늘 거대한 기계의 부품이 되어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아닌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아도 일거리가 주어졌고, 정해진 일정을 끝내고 나면 진이 빠져 잡생각을 할 힘이 나지 않았다. 눈을 퍼내면 내 머릿속도 비워지는 것 같았다.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내 선택으로 후회할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루한 수업을 듣는 것처럼 무료하면서 또 안락했다. 구매 식당의 흠집 난 식판이나 주말이면 사람이 바글바글한 매점 같은 걸 볼 때면 내가 제대로 누리지 못한 시간들을 다시 사는 기분도 들었다.” [p. 198]

 

솔직히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고민하고 준비해 둔 길을 그대로 걷는 것은 편하다. 어쩌면 모루나 이월에게 미래를 강요하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그런 삶을 안정된 삶이라 여기고 걷기를 원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는 ‘나의 삶’이 없다.

 

하선호라는 래퍼는 [고등래퍼 2]라는 프로그램에서

꿈을 강요하면서

꿈꿀 시간을 주지 않아

모두의 꿈이

책 속에 있다 믿는 거야

괜히 또 남 사는

얘기에 힐끗힐끗해

나 자신을 괴롭히기

이젠 지긋지긋해

철이 없대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매년 적어 내래

장래 희망 oh ah yeah

없어서 없다 썼는데

그게 왜 의지 부족이고

생각 없는 거야

라고 미래를 강요하는 어른에 대해 비판을 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 정해준,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매트릭스> 시리즈에서의 주인공 네오가 선택한 빨간 약(red pill)처럼 진실을 깨닫게 되면 또 다른 삶이 주어질까?  이 소설에서는 모루가 무심코 본 한 뉴스에서 변화 혹은 각성이 시작되었다. 강도들의 아지트에서 발견된 이월의 계모 시신과 유품들을 본 모루는 ‘센터’로 달려가 근무하고 있는 이월을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월이 망설이던 진실을 듣고 가짜 눈으로 인한 눈사태에 휘말린다. 이 사고는 이들에게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에 와서 마치 로드무비의 시작점처럼, 그들은 이월의 아빠 차를 빼앗아 유진을 찾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잃어버린 일상이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짜 눈을 헤집다가 진물이 나고 화끈거리는 아픔을 겪더라도 내 의지로 선택한 일을 시도하는 모습은 새로운 삶을 위한 작은 첫 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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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 - 유럽 산업유산 재생 프로젝트 탐구
김정후 지음 / 돌베개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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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치거리가 된 산업유산

 

만약 경복궁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고층빌딩을 세운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얘기를 꺼낸 이를 미친 놈 취급할 것이다. 그렇다면 경복궁 같은 문화재가 아닌 산업시설은 어떨까? 그때도 미친 놈 취급을 할까? 오히려 토지의 효율성을 따져 앞다투어 철거 후 재개발을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할을 잃어버린 산업시설은 모두 철거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일에 대한 고민은 우리보다 유럽에서 먼저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영국을 산업혁명의 발상지라고 한다. 그리고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을 거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문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당시에 도시의 규모가 크지 않고, 운송수단도 마땅치 않아 도심에 주요한 산업시설들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 있다. 이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운송수단은 발달했으며, 산업의 변화도 시작되자, 도심에 있던 산업시설이 도시 외곽으로 옮겨갔다. 이렇게 되자 역할을 상실했지만, 여전히 도심에 남아있는 시설들이 문제가 됐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그냥 철거를 해버리면 된다. 그러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된 것일까?

 

 

산업유산 재활용 프로젝트의 사례들

 

유럽에서는 도시의 산업유산들을 재활용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런던의 테이트모던 현대미술관(Tate Modern Art Gallery)은 이러한 산업유산 재활용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사례다. 왜냐하면 테이트모던 현대미술관은 런던의 산업유산 중 하나인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를 개조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옛날 건물들을 무조건 오래된 것이라고 허물지 않고 그 모양을 존중하고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재활용하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인 셈이다. 단순히 물리적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오래된 도시가 아니다. 그 긴 시간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서려 있어야 진짜 오래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되고 낡았다고 다 때려부수고 새로 짓는다면 그 도시는 오래된 도시가 아니라 새로운 도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그 장소에 쌓인 무형의 시간과 역사를 훼손시켜버린 것이니까.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소개된 프롬나드 플랑테(프랑스, 1993)는 파리의 바스티유 역과 벵센(Vincennes)을 연결하는 4.5km의 철길을 재활용, 시민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머무르거나 산책할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뉴욕의 하이라인 공원(High Line Park, 2009)의 선례가 된 ‘공중 산책로’로도 유명하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개조한 한국의 ‘서울로 7017’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섯 번째로 소개된 헬싱키의 베스트 웨스턴 프리미어 카타야노카 호텔(핀란드, 2007)은 감옥을 최고급 호텔로 변신시킨 특이한 재활용의 사례다. 기능적으로 유사하다고 하지만 감옥을 호텔로 변신시키겠다는 아이디어는 대담한 발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의 성공으로 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산업유산 재활용의 폭도 넓어졌다.

 

와핑 프로젝트

출처: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 pp. 152~153

 

와핑 푸드

출처: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 pp. 162~163

 

일곱 번째로 소개된 런던의 와핑 프로젝트(영국, 2000)은 테이트모던 현대미술관(Tate Modern Museum)처럼 방치된 발전소를 재활용 사례이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 비슷한 장소에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와핑 프로젝트를 흔히 ‘베이비 테이트’ 혹은 ‘시스터 테이트’라는 부를 정도다. 하지만 와핑 프로젝트는 테이트모던 현대미술관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능이 다하고 버려진 산업유산을 재활용하는 경우에 기존 건물의 원형은 상징적 맥락에서 유지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이는 변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와핑 프로젝트는 이 같은 전형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라이트는 무모하리만큼 건물의 외형은 물론이고 내부의 설비 시설까지 있는 그대로 새로운 공간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즉 과거 수력 발전에 사용되었던 녹슨 기계들을 건물의 일부 혹은 인테리어와 같이 간주했다.” [pp. 157`~158]

덕분에 1층에서 운영하는 ‘와핑 푸드’ 레스토랑은 낡은 벽돌과 녹슨 기계로 가득 찬 공간에서 식사를 하는 특별함을 경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결과 독특한 메뉴나 탁월한 맛을 가진 요리가 없으면서도 런던을 대표하는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발전소는 아니지만, 폐공장을 리모델링한 카페는 한국에도 많이 있다. 한국 최초의 방직회사인 조양방직의 공장을 리모델링한 강화도 ‘조양방직 카페’, 인천에 있던 코스모 화학 공장이 울산으로 이전한 후 40번째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한 ‘코스모40’, 맛있는 빵과 음료보다도 과거 공장을 개조한 독특한 외형과 실내로 유명한 서울 성수동의 카페 어니언(Onion) 등

 

낙후된 공장지대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하나 둘 모여 예술가촌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트루먼 브루어리

출처: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 pp. 48~49

 

두 번째로 소개된 런던의 트루먼 브루어리(영국)은 이스트 엔드(East end) 지역의 맥주 양조장이었다. 이 건물이 폐쇄된 후, 가난하고 자유분방한, 젊고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그 결과 트루먼 브루어리와 주변의 크고 작은 버려진 공장들이 이들의 캔버스와 전시실이 되었다. 일종의 자연발생적 도시재생이었고, 기계 시설을 위한 충분한 높이와 채광 및 환기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양조장 건물이라는 특징이 얽혀 트루먼 브루어리 지역은 ‘있는 그대로’ 양조장 건물과 주변 시설들을 재활용하고 있다. 그런 특징 때문일까? 이곳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가이자 ‘현대미술의 악동’이라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 ‘고백의 여왕’이라 불리는 표현주의 작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 ) 같은 스타들을 배출했다.

가장 마지막에 소개된 취리히의 취리히 웨스트(스위스)도 슬럼가 공장 지대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변화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점도 있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단지인 베이징[北京]의 다샨즈[大山子] 지역에 형성된 ‘798예술구’에서 빠른 상업화로 높아진 임대료를 부담할 수 없게 된 예술가들이 점차 떠난다고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문화예술단지로의 도시재생 혹은 산업유산 재활용에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버릴 수 없다.

 

이렇게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는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 독일 카를스루에, 핀란드 헬싱키 등 유럽 전역에 고르게 퍼져 있는 산업유산의 재활용 사례 14건을 소개하고 있다.

 

 

산업유산 재활용 프로젝트의 미래

 

앞에서 소개된 14건의 사례들은 단순히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유산의 성공적인 재활용을 위해 다양한 입장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인내하며 합의한 결과다. 다시 말해 산업유산 재활용 프로젝트는 단순히 관광지로서의 명성이나 경제적 이익을 가져주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오히려 한 사회가 더욱 성숙한 논의와 협의 과정을 이루어가는 훈련의 장이다. 즉, 민주주의를 익히는 시간이자 공간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압축성장을 하느라 제대로 민주주의를 체현(體現)해보지 못한 우리에게 산업유산 재활용 프로젝트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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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위대한 도시, 파리 - 파리를 사랑한 작가 로제 그르니에의 파리 산책
로제 그르니에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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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쳐왔던 주소로 삶을 정리하기

 

1950년 이전에 태어난 부모 세대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 외에도 이사를 많이 다녔다. 어떤 이는 재산 형성을 위해 자발적으로 이사하기도 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전세값 상승이나 아파트 단지 조성 등을 위한 토지 수용 등에 의해 강제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물론 한 자리에서 계속 거주한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10년 이상 이사를 하지 않고 거주했다면 원주민(原住民)’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곳에서만 산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여러 차례 주소를 바꾸는 일이 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그 동안 거쳤던 주소들을 정리하고, 그 주소들에 자신의 기억을 더해 회고록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사실 <나의 위대한 도시, 파리>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그런 방식으로 멋진 회고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디 사람인가

 

낯선 이들과 만나면 서로간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소위 ‘호구조사’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연결고리를 찾게 되면 갑자기 호감을 느끼고 친근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출신지 혹은 **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한국 사람만이 가진 저열한 특징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세계 어디라도 그러한 지방색이 없는 곳은 자기 지역만의 문화가 없는 곳을 제외하고는 찾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국 시대의 장비(張飛)가 ‘연인(燕人)’임을 강조했던 것처럼, 자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의 첫머리는 의미심장하다.

 

내가 시골 사람인지 파리 사람인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나는 노르망디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포(Pau)와 베아른(Bearn)이 내 책 대부분에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나의 도시는 파리다. 내가 느끼기에 진짜 파리지엥들은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그들에게는 파리에서 사는 것이 일종의 정복이다. 나는 센 강의 다리 위를 지나기만 해도 감탄한다. 한쪽에는 시테 섬과 노트르담 성당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랑 팔레와 샤이요 언덕이 있다. 그리고 비할 데 없는 하늘이 있다! 꿈이 아닌데, 내가 파리에 있다니!” [p. 6]

 

파리’를 ‘서울’로, 프랑스의 지명을 한국의 지명으로 바꾸면, 지방에서 올라온 수많은 서울사람들의 얘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해외교포나 화교(華僑) 등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다.

 

 

파리의 거리들

 

런던, 파리, 교토(京都) 등 고도(古都)들은 그들이 품고 있는 오랜 역사처럼 옛 모습을 가능하면 많이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가 파리의 거리들을 지나며, 마주치는 거리, 건물, 공원 등을 바라보며 어떤 사건이나 만남을 회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좁은 문>으로 유명한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1951)의 집인 [바노 길 1-2번지]에서는 그의 작품 낭송 녹음에 얽힌 기억을

지드의 아파트인 그 유명한 바노에 들어가는 특혜를 누렸다. 1947년 10월, <지상의 양식> 출간 5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지드의 오랜 친구인 마르크 베르나르와 함께 우리는 라디오 방송을 위해 지드에게 <지상의 양식> 도입부를 읽게 했다. 그렇게 나는 실내화 차림으로 조금 긴장한 지드의 모습을 보았다. 지드가 자신의 녹음 목소리를 듣고서 이런 놀라운 말을 했다.

“치음 발음을 연습해야겠군.” “ [p. 98]

 

소설가 겸 극작가인 앙리 드 몽테를랑(Henry de Montherlant, 1895~1972)의 집인 [볼테르 강변길 25번지]에서는 그의 증정본과 관련된 추억을

몽테를랑은 자기 책의 성공을 위한 모든 것에 세심히 마음을 썼다. 오랫동안 그는 언론용 증정본에 헌사를 쓸 때조차 초고를 작성했다. 생애 말엽에는 그런 습관이 피곤하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갈리마르 출판사 건물에는 도서관이라 불리는 방이 하나 있는데, 저자들이 그곳에서 증정본에 사인을 한다. 한 번은 몽테를랑이 점심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 장 쥬네가 그곳에 들렀다. 그는 몽테를랑이 서명해놓은 책 더미를 발견하고는 헌사에 음란한 말을 덧붙였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책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 책들은 틀림없이 오늘날 값나가는 희귀본이 되었을 것이다.” [p. 119]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편집자로 있던 <콩바>가 위치한 [레오뮈르 길 100번지]에서는 그의 죽음과 얽힌 에피소드를

“1960년 1월 4일 월요일 오후, 내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한 여비서가 나를 멈춰 세웠다.

-어디 계셨어요? 사방으로 찾아다녔어요!

왜요?

피아의 주소를 알고 싶어서요.

피아의 주소는 왜요?

뭐라고요? 모르세요? 카뮈가 죽었어요.

그때 나는 기이한 반응을 보였다. 인쇄소로 간 것이다. 마치 그곳으로 피신하려는 듯이. 그곳에 가면 15년 전에 카뮈와 함께 조판대에서 숱한 밤을 보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그곳에는 모두가 베베르라고 불렀던 우리의 고참 식자실장 루아가 있었고, 카뮈와 <프랑스-수아르>에서 일했고 1940년 피난 때 클레르몽페랑에서 그와 방을 함께 썼던 늙은 편집자 다니엘 르니에프(Daniel Lenief)도 있었다.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작업실 한쪽 구석에 모여 있었다. 나는 문 가까이에 있는 선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카뮈는 자주 페이지 레이아웃을 검열하고, 마지막 교정쇄를 수정했다. 누군가 결국 내게 말했다.

“카뮈에 대해 기사를 쓰게 되면 우리가 그의 친구였다고 말해주게….”

얼마 지나지 않아 식자공들과 교정자들이 “책 친구들이 알베르 카뮈에게”라는 제목으로 공동저작을 펴냈다. 그들은 내게 그 책의 서문을 청하면서 함께할 영광을 누리게 해주었다.” [pp. 128~129]

 

이런 방식으로 <나의 위대한 도시, 파리> 내내 저자는 파리의 거리들을 거닐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저자가 꼼꼼한 기억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파리지엥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알았고 사랑했으나 사라져버린 것을 찾는 데 일평생을 보낼 수 있다.” [p. 36]고 말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저자가 평생 글과 책과 더불어 살아왔기에, 그 기억들의 대부분이 문학과 연관되고, 덕분에 파리는 문학적 자취가 가득한 도시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들을 번역한 백선희도 “이 글은 로제 그르니에라는 한 작가의 개인사이자 부침 많았던 한 세기에 대한 증언이며 문학적 자취를 가득 품은 파리에 대한 애정과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기행”[p. 166]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파리의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파리 전도가 첨부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옆에 지도를 펼쳐 저자가 이야기 하는 골목을 살피면서 읽으면 좀 더 실감나지 않을까?

 

만약 다시 파리를 가게 된다면, 저자의 기억을 좇아 파리의 골목을 한 번 걸어보고 싶다. 단순히 저자의 기억을 되새김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골목골목마다 배낭여행 때의 기억에 더해 나만의 기억을 새로 덧씌워보고 싶다는 얘기다. 언제 그 날이 올지 모르지만, 그런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힘들거나 지칠 때 잠시 숨 돌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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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장소들 - 기억과 풍경의 도시미학 정수복의 파리 연작 2
정수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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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非장소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그런 의미와 고유한 느낌이 있는 도시의 공간들을 ‘장소(lieu)’라고 정의했다. 장소라고 다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주유소, 맥도날드, 24시간 편의점 등 획일적으로 디자인된 유용하지만 무의미한 공간을 장소’가 아닌 장소를 뜻하는 ()장소(non-lieu)’라고 이름 붙였다. 장소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비장소는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존과 일상의 공간이다. 오래된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장소’들이 많은 기억의 도시일수록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도시의 장소들은 감동, 기쁨, 안식, 평안을 제공한다. 장소에서는 공간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비장소에서 공간은 그저 상투성과 단절감만 느끼게 한다. ‘장소’는 없고 오로지 필요에 의해 생긴 기능적 비장소’들만 즐비한 공간에서 살다 보면, 삶이 삭막해지고 각박해지고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며 쫓기게 된다. 그러니까 어느 도시를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 속에는 세렌디퍼티’1)장소’의 화학적 결합이 쉽게 일어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도시의 공적인 장소’가 기억과 상상의 연금술을 통해 나만의 장소, 나의 삶에 의미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pp. 12~13]


이처럼 <파리의 장소들>24시간 편의점, 마트, 주유소, 스타벅스, 맥도날드 등을 기능성만 갖춘, ‘장소(place)’ 아닌 장소, ()장소’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한 것일까? ‘장소는 오래된 기억과 스토리(story)가 있는 공간인 반면 ()장소는 획일적으로 생산된, 생존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 <파리에 장소들>에서 파리의 장소들을 얘기하고 있다. 잘 알고 있듯이 파리는 오래된 도시이고, 이에 따라 나름의 사연이 서려있는 수많은 장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파리의 장소들을 걷다 보면 지금 여기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일상과 각각의 장소에 서려 있는 기억들이 서로 엮여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어떤 곳에 가면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고, 거꾸로 어떤 것을 기억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특정 장소와 결부된다.

~ 중략 ~

장소는 이런 의미에서 기억이 사는 집이다.” [p. 16]

따라서 장소에 얽힌 기억은 꼭 공적(公的)인 것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나에게만 의미 있는 사적(私的)인 것일지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같은 공간 다른 기억


에펠탑은 바라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바라보는 주체 또는 바라보는 장소 된다. 에펠탑은 주체와 객체, 능동태와 수동태 양쪽 모두가 될 수 있는 기이한 물체다. 에펠탑은 노트르담 사원,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센터와 함께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장소의 하나다. 그러나 다른 장소들과 달리 에펠탑은 비어 있는 박물관이다. 루브르나 퐁피두센터에는 엄청나게 많은 볼거리들이 전시되어 있다. 노트르담 사원도 미술관은 아니지만 꽤 많은 볼거리를 담고 있다. 철로 만든 에펠탑은 그 안에 보여줄 것이 거의 없으면서도, 다른 어떤 장소보다도 많은 것을 보여준다.” [p. 49]


오랫동안 에펠탑은 파리 시민들의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1부 잘 알려진 장소다르게 보기]의 첫 번째 글 에펠탑 다르게 보고 오르기 30페이지 이상의 지면을 에펠탑에 할애하면서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이라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쓸모 없음과 쓸모 있음은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모든 존재는 각자의 존재이유가 있을 테니까. 혹시 에펠탑과 이를 둘러싼 논란에 더 관심이 있다면 이 문제를 전적으로 다룬 정대인의 <논란의 건축 낭만의 건축>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던 건물에서 라스파이 대로를 건너면 캉파뉴 프르미에르 거리가 시작된다. 처음에 ‘캉파뉴 프르미에르(campagne première)’ 거리의 이름을 듣고서 나는 ‘첫 번째 시골’이라는, 다소 낭만적 방식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파리 길 이름 사전을 찾아보니까 ‘첫 번째 전투’라는 다소 공격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캉파뉴(campagne)는 ‘시골’과 ‘전투’라는 두 가지 뜻을 다 담고 있다). 이 골목은 그냥 지나가면 특별한 것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파리의 골목길이다.

~ 중략 ~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면 화려한 상점 하나 없고 어떻게 보면 건물들의 높이가 들쑥날쑥하고 형태와 소재에도 일관성이 없으며 가로수가 없어 메마른 느낌을 준다. 나에게도 이 골목길은 그저 뤽상부르 공원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골목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자주 이 길을 오가게 되면서 이 길과 친해지게 되었고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기호들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기호들과 들리는 소리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보잘것없는 평범한 골목길이 수많은 기호들로 가득 차 있는 의미의 창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일은 숨은 기호를 찾아내 해석하는 기호학적 산책의 기회를 제공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새로울 것이 없는 평범해 보이는 거리가 두터운 의미의 지층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pp. 237~238]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3장소에 숨은 뜻 자세히 찾아 읽기]의 첫 번째 글 캉파뉴 프르미에르 거리의 기호학에서 그저 평범한 거리로 여겼던 캉파뉴 프르미에르 거리가 친숙해지면서 그 곳에 수많은 기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그 후 그 길을 걷는 일은 숨어 있는 기호들을 해석하는 일이 되었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가 일상 속에 걷는 길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기에 그저 에 불과했지만,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부여하면 단순한 이상이 되지 않을까? 문득 김춘수의 <>이 떠올랐다.


[2부 피하고 싶은 장소일부러 찾아다니기]의 첫 번째 글 파리 동북부의 ‘위험한’ 동네를 찾아서에서 언급한, 메닐몽탕 거리는 또 다른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

메닐몽탕 거리는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라는 점에서 벨빌 거리와 같다. 그러나 벨빌 거리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상점들이 계속 이어지는 데 비해서 메닐몽탕 거리는 문을 닫은 상점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고 비교적 차분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그런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쓴 장-자크 루소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에 메닐몽탕 언덕길을 즐겨 걸었다. 그 책의 두 번째 산책 편을 보면 1776 10 24일 목요일 루소는 벨빌과 메닐몽탕을 연결하는 오트-보른 부근을 걷고 있었다. 그날 루소는 엄청나게 큰 덴마크 개를 만나 봉변을 당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그때 정신이 희미했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순간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었나를 생각해보았다. 누군가가 내가 오트-보른에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나에게는 아틀라스 산에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루소가 메닐몽탕 언덕길을 산책한 일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몽테뉴도 메닐몽탕 언덕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두 사람 다 메닐몽탕 언덕길을 걷다가 개에게 물리는 봉변을 당했다. 이런 일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지역을 ‘위험한 지역’으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는지도 모른다.” [pp. 154~155]


이 얘기대로라면 메닐몽탕 거리는 진짜 위험한 지역이었을까, 아니면 위험한 지역이라고 인식된 지역이었을까? 한국으로 치면, 달동네에 해당되기에 선입견에 사로잡혀 위험한 지역이라고 여기고 싶은 상태였기에, 몽테뉴나 루소의 일화를 핑계로 그런 낙인을 찍은 것이 아닐까? 왠지 우리가 우범지대라고 여기는 곳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울은 어떤 기억의 도시가 될까

                   

가볍게 여기는 산책길을 저자를 따라 걷다 보면, 공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 보다는 그 주변, 그리고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 따라서 이 책, <파리의 장소들>파리라는 공간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파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책은 장소에 관한 책이지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그 장소와 얽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기 위해 만든 도시의 장소들에 어찌 사람 사는 이야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파리 연작은 파리라는 공간의 이야기이면서 그와 동시에 파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학자이지만 이 책에서 문학적 글쓰기를 모색했다. 시인의 혼이 되어보기도 했고 소설가의 마음이 되어보기도 했다. 이 책은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시적인 순간도 있고 소설적인 이야기들도 군데군데 박혀 있다. 시가 어느 순간에 밀려오는 영감의 응축된 언어적 표현이라면, 이 책에는 파리의 특정 장소들에서 느낀 고양된 감정과 미적 체험의 순간들이 군데군데 숨을 쉬고 있다. 소설은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사람들이 서로 얽혀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가 쓴 파리 이야기들이 소설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p. 387]


(세계화의 영향으로) “캉파뉴 프로미에르 길에도 웰빙을 내세우며 마사지를 하는 미용실과 중국 발마사지 시술소가 생겼고 빨래방도 하나 생겼다. 막다른 골목 안에는 살을 빼고 날씬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둥근 회전판 위에서 운동하는 기계를 설치한 스포츠세터가 생겼다. ‘두 명의 앙드레라는 이름으로 실내장식 사무실도 생겼다. 마르크 오제가 말하는 이른바 비장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미용사가 머리 조각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하는 전통적 미용실이 건재하고, 19세기 말에 쓰던 철제 다리미를 전시하고 있는 오래된 세탁소도 건재하며, 몽파르나스 대로 쪽 길이 끝나는 곳에 문방구를 겸한 오래된 잡화상도 그대로 있다.” [pp. 250~251]


그러면서 풍납토성(風納土城)의 해자(垓子)에 건축 폐기물 수천 톤을 매립하라고 지시했던 구청 직원2), 아파트 재건축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풍납토성 발굴 현장을 파괴하고 흙으로 덮어버린 재건축조합 관계자3)들을 떠올리며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과거를, 우리의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를 정당화해야 할까? 물론 파리라고 해서 과거와 꼭 같은 모습을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그들의 뿌리를 남겨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파리를 기억의 도시라고도 하는 것이 아닐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한다. 아파트 숲에 둘러 쌓인 회색 도시가 우리 자손들이 기억하는 서울의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서울의 기억’을 관찰하고 남겨두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1) 세렌디퍼티(serendipity): 완전하게 우연히, 예상치 않게, 기분 좋은 발견을 하는 재능

2)송파구청 직원 풍납토성에 쓰레기 불법 매립”, <YTN> 2013.02.02

3)풍납토성 발굴현장 무단파괴”, <국민일보>, 200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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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 한 닢 동전의 제국 여행기 알베르토 안젤라의 고대 로마 3부작
알베르토 안젤라 지음, 김정하 옮김 / 까치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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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흔히 5 현제(賢帝) 시기를 로마제국의 전성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해 로마 제국의 화폐 가운데 하나인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을 통해 대답하고 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고려시대의 <공방전(孔方傳)>처럼 가전체 소설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던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을 매개로 로마 제국인의 삶을 스케치하듯이 살펴보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은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현대의 주화처럼 이 동전도 로마의 조폐창에서 주조되어 30인으로 이루어진 기마대들에 의해 제국 각지로 수송된다.

 

매번 새로운 통화들이 주조될 때마다 제국의 동서남북 국경지대로 가능한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다. 당시는 통화가 경제적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보 전달과 홍보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pp. 323~33]

 

이 책에 소개된 동전의 경우, 로마의 조폐창에서 알프스를 넘고 갈리아를 거쳐 배를 타고 영국해협을 건너 제국의 서쪽, ‘론디니움(Londinium, 런던)’ 요새로 향했다. ‘룬디니움’은 지금의 런던을 생각하면 초라할지 모르지만 이 시기에도 이미 런던의 ‘City’에 해당하는 지역이 개발되어 있고 런던브리지의 원형이 되는 다리가 형성되었다니 흥미롭다.

 

이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의 본격적인 여행은 ‘론디니옴’ 요새에서 총독 마르쿠스 아피우스 브라두아(Marcus Appius Bradua)1)가 동전 한 닢을 동전을 수송한 기마대의 십부장에게 건네주면서 시작한다. 그 십부장이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빈돌란다(Vindolanda) 요새의 공중목욕탕에서 동전을 분실하고, 그 동전은 누군가의 손을 거쳐 포도주 상인의 돈주머니에 들어간다. 그리고 파리시(Parisii)족의 거주지에 세워진 ‘루테티아(Lutetia, 파리)’를 거쳐 신들의 음료라는 포도주를 만드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에 도착한다. 지금의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도시는 독일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로 ‘모젤 와인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이다.

 

오랫동안 포도 재배를 허가받은 유일한 주체는 군단의 군인들이었다. 이들이 길게 펼쳐져 있는 국경선을 따라 주둔한 상황은 포도주 생산의 지역화에 기여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가장 큰 소비자였기 때문이다. 포도 재배는 종종 이 국경지역의 경작지를 정착의 대가로 제공받은 퇴역군인들에게 위임되었다.” [p. 86]

이로 인해 유럽 와인의 주산지와 고대 로마제국의 군대 주둔지가 겹치는 일이 많다.

 

모곤디아쿰[Mogontiacum, 마인츠]에서 호박(琥珀) 보석 상인은 안전을 위해 노예 상인과 동행하면서 고객이 있는 메디올라눔[Mediolanum, 밀라노]로 향한다. 여기서는 조선의 여성과 달리 로마의 여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좀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명품을 두르고 거리를 거니는 메디올라눔의 여성들


출처: <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p. 162

 

공화정 당시 로마의 결혼은 항상 남편에게만 유리했을 뿐, 부인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결혼에서 여성에 대한 보호권은 마치 물건처럼, 그리고 집안의 애완동물처럼 부친에게서 남편에게로 넘겨진다” [p. 165]

공화정 시대가 끝나면서, 여성은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재산에서도 남편과 동일한 권리를 획득했다. 이혼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중 한 명이 증인들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면 그만이었으며, 그 순간 당사자들의 이혼이 결정되었다. ~ 중략 ~

이처럼 트라야누스 황제의 시대에 부유한 여성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독립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유일한 주체였다. 또한 특히 돈 때문에 결혼한 자신의 남편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pp. 166~167]

어떻게 보면 고대 로마의 여성들이 중세나 근대 초기의 여성보다 더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뇌수종 수술을 하는 아리미늄의 외과의사


출처: <고대 로마 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p. 229

 

다른 도시의 경우, 예를 들면 이탈리아 북부의 아리미늄[Arriminum, 리미니]에서는 외과 의사에게 충치 치료, 백내장 치료, 뇌수종(腦水腫) 치료 등을 받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스티아[Ostia]는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온갖 사람과 물건들이 유입된다.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언어의 바벨탑’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언어가 혼재(混在)한다. 이런 식으로 여러 도시들에서 살아가는 로마인의 삶을 그려낸다.

 

이렇게 소개되는 에피소드는 그냥 짧은 역사소설을 엮은 것처럼 보이지만, 세스테르티우스 동전의 여정(旅程)에서 묘사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실제로 그 시대에 그리고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실존 인물이고 실제로도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p. 10]고 한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로마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도 그 대부분이 ‘진짜’이다. 왜냐하면, 마르티알리스, 오비디우스2), 유베날리스와 같은 고대의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p. 11]

아마도 그래서 에피소드들이 생생하게 그려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실된 삼국시대 이전의 기록들을 생각하면, 수많은 전쟁과 자연재해 등을 거치면서도 이런 기록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부럽다. 동시에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신분의 사람으로 고대 로마제국을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이 책을 쓴 저자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것을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덧붙이자면 책 중간중간에 삽입된 삽화는 여행 에세이의 사진이나 삽화처럼 상상하던 것을 형상화해서 한 눈에 들어오게 해서 좋았다.

 

1) 마르쿠스 아피우스 브라두아는 적어도 111년부터 118년까지 브리튼 총독으로 재직했었다고 알려졌다.

2)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B.C. 43~A.D. 17)은  <사랑도 가지가지[Amores]>, <변신이야기(Metamorphoses)> 등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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