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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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조숙한 천재


저자는 <추사 김정희>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하 추사’)의 일생을 각 시기별로 나눠, 당대(當代)의 시류(時流)와 추사의 학문 및 예술세계를 하나하나 들려준다.


먼저, 추사는 명문가인 경주(慶州) 김씨(金氏) 출신으로, 영조의 사위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의 양자인 김이주(, 1730~1797)의 손자다. 동시에 아들이 없는 백부(伯父) 김노영(金魯永, 1747~1797)의 양자(養子)이기에, 왕가와 이어지는 종손(宗孫)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여섯 살 때 쓴 <입춘첩>을 보고 북학파의 거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15)가 제자로 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추사는 거만하고 고집스러운”[p. 174]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젊어서부터 청()나라를 오가면 그곳의 명사(名士)들과 교류를 하다 보니 좋게 보면 국제적인 감각을, 나쁘게 보면 청()나라 문화에 기울어진 모습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첫 연경행(燕京行)에서 돌아오기 전, 그가 읊었다는 이별시가

나는 변방에서 태어나 참으로 비루해서[我生九夷眞可鄙]

중원 선비 사귐 맺음 너무도 부끄럽다[多媿結交中原士]” [p. 78]라고 시작되는 것은 그 일면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물론 추사만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 갔단 온 지식인들이 말끝마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며 남을 면박 주며 잘난 체하곤 했는데, 그런 오만과 치기가 추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추사는 그런 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움도 받았다”[p. 73]. 어쩌면 향토색이 짙은 예술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도 선진국의 물을 먹은 젊은 천재였기에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에게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그들의 화첩에 전하는 것은 한갓 안목만 혼란하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지 않도록 하게”[p. 230]라고 언급하면서 비친, 18세기의 진경 산수화[정선]와 남종 문인화[심사정]에 대한 평가도 그런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가 제주로 귀양가는 길에 남긴, 향토색이 짙고 독자적인 서체를 추구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의 글씨에 대한 일화도 그렇다.



연경행(燕京行), 국제적인 안목(眼目)을 갖추다


추사가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게 된 계기는 연경행이었다. 1809년 친부(親父)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에 가게 되자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서 청()나라의 대학자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 등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추사는 옹방강과의 만남으로 보담재(寶覃齋)라는 당호를, 완원과의 만남으로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갖게” [pp. 67~68] 될 만큼, 그 두 사람은 추사의 평생 스승이 되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추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는데, 여기는 그는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나라, ()나라로 나눌 필요 없이,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p. 107]고 단언했다. , “한나라 유학은 훈고학이고 송나라 유학은 성리학이라 하여 그 정신과 방법이 다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다를 것이 없다는” [p. 107]는 내용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주장했다.

이를 보면, 훗날 청()나라 경학(經學)과 고증학(考證學)을 연구하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隣, 1879~1948] 추사를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p. 45]라고 평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제주 유배,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시련


1830년 생부인 김노경이 모함으로 유배되고, 이어 1840년에는 추사 본인도 모함을 받아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다. 이 제주 유배는 추사의 인생과 글에서 매우 큰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먼저,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7) 완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 1555~1636)에 뜻을 두었고, 중세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아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 1037~1101)와 미불(, 1051~1107)을 따르면서 더욱 굳세고 힘차지더니 (…) 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면에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구속 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p. 346]라고 말했듯이 추사는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치 정()-() –()의 과정을 밟는 것처럼, 추사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추구한 예술의 경지인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가 가려지지 않는다)’을 이룬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동시에 이 세한도는 고졸한 풍경의 집 한 채와 그 좌우에서 대칭을 이루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그림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의 글씨까지 하나로 봐야 하는, 학문과 예술의 일치를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 더하자면, 제주 귀양이라는 시련은 추사를 한층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8 3개월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에서 자신이 쓴 현판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대웅보전현판을 다시 달라고 했다는 일화나 이삼만의 묘비문을 써주었다는 전설은 이를 보여주는 얘기들이다.


추사의 삶에는 제주도 해배(解配)이후 8년의 시간이 더 있다. 그 기간 중에는 북청으로의 유배도 있었지만, 그의 학문과 예술에 영향을 주는 큰 굴곡은 더 이상 없었다고 느꼈다. 아마도 추사가 <논어>에서 말하는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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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 어슬렁어슬렁 누비고 다닌 미술 여행기
류동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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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행을 가는가

 

과거 많은 이들이 이용했던 패키지 여행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여행을 낯선 곳에서 사진 몇 장 찍고, 이국적인 음식을 먹고, 낯선 상품을 사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도 생겨났다. 그래서 “여행이라는 것이 어느 지역에 대한 ‘눈도장’, ‘발도장’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역사, 영화,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한 간접 체험도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꼭 그곳까지 고생하며 갈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그곳에 가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곳에 찾아가는 시간과 공간의 세세한 과정 속에서 얻는 무엇인가가, 도착해서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발로 그 땅을 디디면서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p. 428]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여행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간다고 해도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할 지가 중요하다. 물론 발길 닿는 데로 돌아다니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는 이도 있겠지만, 시간과 비용의 제한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발길 닿는 데로 떠나는 방랑이 아닌 다음에야 여행의 장소를 정할 때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 다양한 경험 등이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책, 영화, 음악 등이 여행의 행선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영화를 본 후 여행지에 대한 동경이 생기곤 했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보고 사막의 별을 보겠다고 이틀간 벤을 타고 가는 고생을 하고 <인디아나 존스>를 보고 요르단의 페트라를 찾은 것은 모두 영화가 나에게 준 여행의 ‘동인(動因)’이었다.” [p. 218]

 

 

왜 이탈리아인가?

 

그렇다면 수많은 나라 중에 왜 이탈리아일까?

저자에 따르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아마 어렸을 때 본 영화 <시네마 천국>과 고등학교 시절에 본 <인디아나 존스>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것이다. ~ 중략 ~ 결정타는 고등학교 때 본 <인디아나 존스>였다. 베네치아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모험을 시작으로 성배를 찾아 나선 여정에 홀딱 빠져버린 나는 아예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고자 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볼 때마다 ‘그곳에 가고 싶다’는 바람이 더욱 커졌다. <투스카니의 태양>, <잉글리시 페이션트>, <스타 만들기>, <레터스 투 줄리엣> 등 수많은 이탈리아 배경의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그곳의 깊은 역사 속 찬란한 예술과 문화를 배우면서 그 바람을 조금씩 현실로 끌어내게 되었다.” [p. 12]

즉,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가 계기가 되어 저자는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이탈리아의 깊은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 어쩌다 보니 이탈리아를 기회가 될 때마다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로 정한 것이 아닐까?

 

 

예술 작품과 함께 여행하다

 

이 책은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여섯 도시, 6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의 작은 도시들로 작은 목차를 이루고 있다. 예들 들면, 1부에서는 베네치아와 그 주변의 파도바, 베로나, 라벤나와 같은 도시를 소개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탈리아의 35개 도시의 삶과 역사, 예술, 문화, 자연을 얘기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저자의 여행기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  구체적으로는  이 영화에 도서관으로 등장한 베네치아의 산바르나바 성당이 첫 방문지로 등장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산바르나바 성당

출처: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 31

 

이어지는 장소는 리알토 다리로 다리 자체에 얽힌 사연과 더불어 이를 배경으로 그린 비토레 카르파초(Vittore Carpaccio, 1460~1527)의 <성십자가의 기적>이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비토레 카르파초의 <성십자가의 기적>

출처: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 20

 

리알토 다리

출처: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 p. 21

 

 

나만의 스토리를 꿈꾸며

 

<어쩌다 이탈리아, 미술과 걷다>라는 이탈리아 여행기는 절반은 해당 지역과 관련된 영화나 그림, 건축물 등의 소개와 함께 직접 그 장소를 둘러본 감상으로, 나머지 절반은 풍경과 예술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이렇게 꾸몄을까?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을 처음 구상할 때는 이탈리아의 예술과 풍경 사진이 어우러진, 이미지 중심의 책으로 꾸미고자 했으나, 결국 다양한 그림과 깊고 넓은 이탈리아의 예술신(scene)은 이미지뿐 아니라 에세이로도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를 둘러본다는 것은 그림과 풍경과 글이 제 나름의 역할을 발휘해야 하는 ‘광활한’ 인문학적 세계였다” [p. 13]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저자도 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같은 곳을 여러 번 갔는데도 항상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릇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 다른 풍경 속에서도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의 풍경 속에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 [p. 13]라고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야만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도 저자처럼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싶다. 지금은 여행을 떠날 수 없지만,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아니 종식되지 않더라도 잠잠해지면, 나도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저자처럼 여행지의 역사, 예술 등을 아울러서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히 또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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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깊이 - 공간탐구자와 함께 걷는 세계 건축 기행
정태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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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매력

 

진료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치과 의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상과는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게 되었고 사람들과 함께 관광지, 유적지, 맛집을 다니다가 혼자서 떠날 용기가 생기자 도시의 뒷골목을 다니면서 도시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주어진 삶을 따라 살며 박사 학위를 받고 개원의로 자리 잡은 후 처음 혼자서 무언가를 결정한 것이 건축 공부였다처음에는 건축에 관한 책을 읽다가 점차 빠져들어 건축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pp. 5~6]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의 직업의 하나로 간주되는 치과의사가 건축가라는 길을 걷게 된 이유다.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를 공부하는 것은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취미’라면 몰라도 ‘직업’, 즉 인생의 진로를 변경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건축’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저자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건축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탄생시키는 것” [p. 9]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저자는 무주의 종합운동장에 있는 그늘막을 예로 든다. “무주의 종합운동장은 건축가 정기용의 애정이 담긴 프로젝트이다. 종합운동장의 햇빛 아래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관람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등나무를 심어 그늘막을 만드는 것은 간단하고 단순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무주 종합운동장 같은 그늘막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건축가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고 고민하고 애정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는 프로젝트이다.” [p. 163]

이처럼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보려는 건축가의 고민 자체가 건축설계 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다. 미술관을 설계할 때는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을 찾고, 공동주택을 설계할 때는 주거에 관해 연구하면서 현재 사회의 상황과 문제점들을 찾게 된다. 바로 그것이 건축가라는 직업의 장점이다.” [p. 9]

아마도 이것이 저자가 의사에서 건축가로 인생의 길을 바꾼 이유가 아닐까?

 

 

건축 공간을 읽는 다섯 가지 인문학 키워드

 

건축은 유홍준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대표적인 분야다. 그렇기에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랜드마크나 명소가 아닌 곳은 여행을 가더라도 몰라서 지나치기 쉽다. 예를 들면, 바르셀로나에 간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La Sagrada Familia, 이하 ‘성가족 성당’)처럼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Cornet; 1852~1926)의 작품들을 보기에 바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에 아는 자의 도리를 지켜 몇 마디 덧붙여준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바르셀로나에 간다고 하면 나는 무얼 보러 갈 건지 물어볼 것이다. 당신이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를 보러 간다고 하면 나는 거기엔 엔릭 미라예스(Enric Miralles)가 있다고, 그리고 바르셀로나 외곽 히로나(Girona)로 가면 RCR 건축사무소(RCR Arquitectes)가 설계한 레 콜스 레스토랑(Les Cols Restaurant)을 즐길 수 있다고 알려줄 것이다.” [p. 10]

 

하지만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그저 사진 몇 장만 늘릴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친절하게 가이드를 제시한다. 즉, 이 책에서 나는 내가 관심을 둔 건축물과 도시 공간을  현대 건축에서  주요한 다섯 가지 논점으로 구분했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건축, 현상학(Phenomenology)으로 대표되는 지각과 체험의  공간, 새로운 유형의 구조주의적(structuralism) 네트워크로서의 건축 공간, 자연을 모방한  바이오미미크리(Biomiomicry)와 복잡계 이론에 기초한 건축, 스케일(Scale)에 따라 건축에서 부터 시작해 도시와 사람의 삶으로 확장되면서 다른 곳과 차이가 나는  독특한 도시  여행이  그것이다.” [p. 7]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 키워드는 도시 속에서 묘지나 성당, 도서관, 문화시설 같은 ‘비일상’을 만들어내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 미셸 푸코가 사용한 개념인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일상의 장소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새롭게 환기시키는 장소, 즉 실제로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 [p. 16]다.

예를 들면,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종묘는 “순간의 현재가 거대한 과거가 되는 서울 종묘는 엄숙한 공간을 위해 중앙을 비워내고 바닥을 돌로 채웠다” [p. 18]고 한다. 또 다른 묘역인 베를린 시내에 있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의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은 “노출 콘크리트라는 재료 자체로 엄숙함과 두려움이 깃들게 했고, 관의 형상을 반복함과 함께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듦으로써 역사의 엄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p. 18]

 

피터 아이젠만의 홀로코스트 추모기념관

출처: <도시의 깊이>, p. 25

 

이렇게 “우리는 상상의 유토피아가 각종 사회 공간의 한계를 위반하는 헤테로토피아로 현실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균열을 통해 바깥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되며, 이곳들을 보며 새로운 현실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현대사회의 도시와 건축은 나무와 돌과 벽돌과 유리를 가지고 바닥과 기둥과 지붕을 만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새로운 사회와 자연현상을 면밀하고 섬세하게 관찰하여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서 새로운 인공의 대지와 건축물을 만들고 그 결과로 자연인지 건축물인지 알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결국 현대 건축물은 지금까지 없었던 다양한 헤테로토피아를 만들고 사회에 드러내어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사회 문제를 환기하고 고민하게 하는 작업일 것이다.” [p. 17]

 

두 번째 키워드는 현상학(Phenomenology)이다. “현상학은 우리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현상 자체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철학” [p. 80]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관련된 매개체(로) 주로 빛이나 색 같은 시각적인 정보를 이용” [p. 81]하기에 현상학을 건축에 적용시킨 결과 빛, 색과 향기, 물과 유리 등으로 오감(五感)을 극대화하는 공간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일본 서쪽의 작은 도시 가나자와[金澤]의 오래된 전통 찻집 거리인 히가시 차야 거리(ひがし 茶屋 街, Higashi Chaya District)를 다니다 보면 황금의 거리라 불릴 만한 곳을 경험할 수 있다. 일본 금박 장식 산업을 독점했던 탓에 아직도 그 명성이 남아 있다. 그 중 하쿠자 히카리구라(箔座 ひかり藏, Hakuza Hikarigura)는 가게 내부에 있는 작은 아트리움 한쪽 벽 전체가 금박으로 마감되어 있다. 처음에는 금색 칠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체가 다 금박이란다. 그래서인지 금빛이 햇빛을 받아 은은하면서도 화려하게 뿜어져 나온다. 금은 보통 장식품이나 장신구같이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지므로 금이라는 재료 자체보다는 형태로 인지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건축물 외벽, 즉 외부의 벽체라는 특정한 형태가 없는 면 전체를 덮은 금을 보는 것이다. 빛이 없어도 빛날 것 같은 재료가 금인데 햇빛을 직접 받아서 반사하는 금빛을 보는 경험은 세상 어디에서도 해볼 수 없을 경험이다이곳의 금빛은 과할 정도로 농축된 금빛이 아니라 우아하고 기품 있는 금빛이다” [pp. 99~100]

 

하쿠자 히카리구라(箔座 ひかり藏)

출처: <도시의 깊이>, p. 101

 

또 다른 예로는 “스위스 대표 건축가인 피터 줌터(Peter Zumthor)가 설계한 쾰른의 콜룸바 박물관(이 있다)오래된 폐허 위에 설계된 박물관은 그 지층 아래에 있는 역사를 오롯이 떠안고 있어야 하는 숙명인데 내부 공간을 벽돌로 막고 한쪽 벽에 벽돌을 느슨하게 쌓아 햇빛과 바람과 그림자를 끌어들여서 상상하기 어려운 공간을 만들었다.

오래된 역사의 한 부분인 로마 시대 유적지 위에 현대 건축 양식의 박물관을 지으면서 내부 바닥은 유적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그 위에 지그재그 형태의 동선을 넣고 외부에서 벽돌 벽의 틈새로 빛을 비춰서 마치 유적지를 탐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극대화하여 도시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컴퓨터나 가상 현실을 이용하여 지식을 전달하려는 최첨단 문화 공간임을 자랑하는 여타 박물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 [pp. 101~102]

 

피터 줌터의 콜룸바 박물관

출처: <도시의 깊이>, p. 102

 

이처럼, “건축에서 현상학적 공간을 만드는 매체로는 단연코 빛이 최고다. 밝음과 어두움을 이용하여 극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현상학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이용되는 것이 현대 건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축 재료인 유리 그리고 자연에서 가져온 수(水)공간이다. 유리와 물의 특징을 이용해 공간을 투명하게 만들고 주변 환경을 비추고  굴절시키고 반사시켜서 기존의 관념을 깨는 뒤집힌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들의 작품을  대하면 저절로 그들이 창조한 공간에 빠져들게 된다” [p. 06]

 

세 번째 키워드는 현대 건축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구조주의(Structuralism)로, “기존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나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 같이 공간의 관계를 찾는 위상기하학은 현대 건축의 새로운 유형이다. (이렇게 위상기하학이 건축에 적용된 결과) 건축적 관통, 보이드, 폴딩, 대지건축 등 기존 건축에서 나타나지 않은 디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p. 153]

 

건축적 관통의 예로는 램 콜하스의 카사 다 뮤지카

출처: <도시의 깊이>, p. 156

 

보이드의 예로는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아모레퍼시픽 본사

출처: <도시의 깊이>, p. 158

21.06.20 추가

제대로 된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진을 보려면 <월간 스페이스> 18년 8월호에 실린 임성훈의 "아모레퍼시픽 사옥 -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https://vmspace.com/project/project_view.html?base_seq=MjM0)을 참조.

 

대지건축의 예로는 오사카의 넥스트 21

출처: <도시의 깊이>, p. 164

 

네 번째 키워드는 자연을 모방한 건축설계인 바이오미미크리(Biomiomicry)로, 구조주의와 현상학적 공간을 구현하려던 현대 건축의 한계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 생물학적 특징 등을 연구 및 모방을 통해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재닌 베뉴스(Janine Benyus, 1957)에 의해 이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으며, 일본 건축의 메타볼리즘도 여기에 해당한다. 즉, “1960년대 일본 건축은 메타볼리즘으로 대표되는데 생물의 신진대사를 변화와 성장을 계속하는 건축과 사회라는 의미로 차용했다.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정적인 건축이 아니라 변화에 대응하는 동적인 활동을 통해 부분을 새롭게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p. 193]

 

다섯 번째 키워드는 건축물로부터 시작해 도시와 사람의 삶으로 확장되는 스케일(Scale)로, 랜드마크, 즉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란 건축물의 스케일을 도시의 스케일로까지 확장하여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의 확장은 스케일을 동반한다” [p. 232]고 한다.

 

 

어떤 건축이 좋은 공간을 만드는가, 도시를 바라보는 건축가의 고민

 

현대 사회의 건축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먼저, 저자는 ‘장소성’과 ‘맥락’을 고려하는 건축 공간으로서 포르투갈 포르투에 있는 일명 ‘바닷가 수영장’인 레싸 수영장(Leca Swimming Pools)을 소개하며 “한국에 있는 국제 규격의 실내수영장이나 리조트의 워터파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p. 138]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레싸 수영장은 바닷가의 일부 공간을 적절하게 막고 최소한만 손을 대 자연스럽게 물을 가두어 만든 천연이자 인공 수영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축 건물에 방해된다고 오래된 나무를 자르거나 옮기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공간이 어색하거나 이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연에 순응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는, 즉 주변의 맥락을 고려하는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대체되기 어렵다. 이러한 건축물의 대표적인 것이 한국 전통 건축이다. 그래서 저자도 “내가 아는 한 한국 전통 건축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까래도 완벽한 직선이 아니고 구부러져 있는 상태 그대로 사용한다. 그 결과 고졸미가 나타난다. 한국에서 온 나에게 포르투의 천연 수영장은 마치 조선 시대 전통 주택을 먼발치에서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p. 138]고 말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텐마크 국립 아쿠아리움 전철역 인근의 지하도도 떠올릴 수 있다. “덴마크 국립 아쿠아리움 전철역에서 내려 길을 건너려고 지하도로 들어갔다. 상쾌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단순한 지하 통로인데 반대쪽 입구에서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빛은 천창에서 내려온 것처럼 콘크리트 바닥과 주변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벽에 경쾌한 디자인의 파란색 의자가 놓여 있다. 한눈에 봐도 디자인을 신경 쓴 것이 티가 났다. 이런 곳까지 디자인한다는 것이 놀랍다. 이곳 지하도는 기능적인 공간으로만 치부해 파고 뚫고 어두우면 조명 넣고 보기 싫다고 하면 벽화 그려 넣고 위험하다고 하면 CCTV를 달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연과 공간과 디자인과 기능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도록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서 조화롭게 만들었다. 이런 체계적인 문제의식과 고민을 통해 종합적인 결정을 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능력일 것이리라.” [p. 167]

 

다음으로는 건축 재료와 디자인을 편견 없이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예들 들면,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사용하는 코르텐강(Cor-ten Steel)을 들 수 있다. 코르텐강의 갈색은 새로운 재료임에도 오래된 듯한 인상을 주며 산화되면서 재료가 갖는 시간성이 짙어진다. 그러나 관리가 불편해 우리나라에서는 선호하지 않는데, 톨레도에서는 화단의 경계 등에 코르텐강을 사용해 오래된 도시를 해치지 않으면서 세련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저자는 공공디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엘 크레꼬 박물관(Museo El Creco) 근처에 삼각형 형태의 작은 외부 광장이 있다. 마을의 작은 자투리 공공 공간에 나무 데크를 이용하여 낮은 계단을 만들어놓은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 경계와 재료로 인하여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편하게 주저앉아 쉬거나 심지어 누워서 해바라기를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보낸다. 공공 디자인은 항상 결과가 명확히 나오고 티가 나야 실적으로 인정되는데 그런 부담 갖지 않고 진정 사람들이 원하는 작은 관심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공공 디자인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p. 235]

 

인증샷을 날리기 위한 관광의 대상, 나아가 건축물이나 도시 공간을 보이는 즐기는 것도 여행의 방법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건축이 아닌 그런 공간을 삶과 사회와 연결시켜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도시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분명히  “건축을 배우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안도 다다오(安藤 忠雄, Ando Tadao, 1941~ )가 했던 것처럼 실제 건축 작품을 살펴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 [p. 6]이다. 하지만 강요된 언텍트 시대에 이런 책을 통해 도시와 공간의 깊이를 볼 수 있는 혹은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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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로망, 로마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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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우리는 로마를 마음대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로마는 우리가 만든 상상의 도시일지도 모른다” [p. 22]라고 말한다. 그런데 로마만 상상의 도시일까? 아마도 유럽의 파리도, 아메리카의 뉴욕도, 아시아의 교토도 그런 도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곳을 방문하고 싶어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곳들을 방문하면 그저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고, 특산품을 사기 일수라는 것이다. 그런 여행이 잘못되었거나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보여주기 위한 여행만 한다면 그 여행은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이 책, <나의 로망, 로마>를 고른 것은 로마를 배낭여행으로 한 번 방문한 적이 있기에,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로마를 바라보고, 걷고, 느낀 기록은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테르미르 역의 지하의 맥도날드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24

 

나는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기차로 로마를 향했기에 저자처럼 테르미르 역을 거치지 않아 그 지하에 있는 맥도날드에서의 느낌을 알지 못한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그러나 그 위대한 로마의 출발은 맥도날드에서 한 끼 배고픔을 달래는 이방인들에 의한 것이었다니, 기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은 사실이다. 위대한 제국의 출발이 이렇게 초라했다니! 우리는 로마 여행의 첫 번째 장소 (테르미르 역의) 맥도날드에서 로마 탄생의 첫 번째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p. 26]

그렇기에 한국의 서울 역에 해당하는 테르미르 역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로마 탄생의 순간을 떠올리는 저자의 감성은 독특하고 신선했다. 하지만 ‘로마의 출발은 맥도날드에서 한 끼 배고픔을 달래는 이방인들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차라리 <로마사>를 쓴 “역사가 리비우스가 밝힌 대로 로마는 원래 외국인들이 만든 나라다. 가난에 찌들다가, 심지어 죄를 짓고 도망 다니다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도피해 온 사람들이 모여 세운 나라다.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사람들의 희망이 모여 로마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수도에 성벽이 쌓이기 시작했을 때, 다른 것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계의 빗장이 그들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을 때, 로마는 존재의 이유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pp. 42~43]처럼 풀어 쓰거나 ‘~ 배고픔을 달래는 [이들과 같은] 이방인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충하는 편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다 본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75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언뜻 보면 유채꽃이 피어있던 경주의 황룡사 터처럼 무너진 건물 잔해가 이리저리 흩어진 폐허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이곳에서 다른 것을 보고 있다. 포로 로마노, 즉 로마 광장은 바로 이 로마 공화정의 난제가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곳이다. 권력의 질주를 막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서 정교한 법률적 장치를 고민했고, 어떤 사람은 종교적 믿음을 이용하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제어할 수 없는 권력의 찬탈자에게 암살의 단검을 휘두르는 마지막 선택을 하기도 했다.” [p. 72]

그렇기에 저자는 이곳에서 로마 공화정 최후의 수호자’라는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를 떠올린 것이 아닐까? “포로 로마노의 한 건물 외벽에 키케로의 잘린 혀와 팔이 효수되었을 때, 역사가들은 그 잔혹했던 장면을 위대한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사건으로 간주한다. 로마 공화정은 키케로의 시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p. 73]는 추도의 말은 아마도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판테온 내부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오쿨루스를 올려다 보는 모습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162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이하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작품’이라고 극찬한 판테온은 유현준 교수가 TV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얘기했듯이 아치(Arch) 구조와 화산재 등을 이용한 저밀도 콘크리트 등이 특징인 건축물이다.

만신전(萬神殿)이라는 이름 그대로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출발한 이 건물은 “거대한 황실의 신전인 동시에 우주의 조화를 지상에 펼치고 있는 거대한 해시계이며, 황제들의 신격화를 위한 거대한 정치적 무대였단 것이다.” [p. 163] 한국으로 치면 역대 국왕 부부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사당(祠堂)인 종묘(宗廟)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지내는 환구단(?丘壇) 등이 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판테온을 세운 사람은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이자 절친한 친구이며 사위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B.C. 63(?)~ B.C. 12, 이하 ‘아그리파’)로 우리에게 친숙한 아그리파 석고상의 모델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판테온에서 아그리파가 묻힌 아우구스투스 영묘(靈廟)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며, 한 마디를 덧붙인다. “로마에서 무엇인가 큰 뜻을 품은 사람들은 두 사람[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우정에 주목해야 하리라. 캄푸스 마르티우스의 정중앙에 있는 판테온에서 출발해, 트레비 분수를 거쳐 아우구스투스 영묘까지 걸어가는 데 직선거리로 30분이면 충분하다. 서둘러 걷지 말고 두 사람의 우정을 생각하며 천천히 그 길을 걸어보자. 참된 우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꿈꾸는 큰 뜻을 이루려면 소중한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먼 길을 가려면 그 먼 길을 함께 갈 수 있는 소중한 길동무가 필요하다.” [p. 172]

 

콜로세움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210

 

콜로세움은 베스타시누스 황제의 놀라운 정치적 판단력을 보여준다. 그는 로마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공짜 빵을 바랐고, 원형 경기장에서 피를 튀기며 싸우는 격투사의 구경거리를 원했던 것이다. 콜로세움은 로마 제국 황제가 처했던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는 시민의 환호가 멈추는 순간 황제의 권력도 추풍낙엽처럼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진다는 사실 말이다.” [pp. 210~211]

로마 황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한국의 대통령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처럼 저자는 ‘1장 세르비우스의 성벽’에서 ‘11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까지 로마를 걸으며 로마 제국의 창건에서 멸망까지의 역사와 각각의 장소와 관련된 고전 등을 언급한다 예를 들면, 포로 로마나와 키케로의 <의무론>, 아우구스투스 영묘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콜로세움과 타키투스의 <역사>, 산탄젤로 성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 등이 있다.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의 <아폴론과 다프네>

출처: <나의 로망, 로마>, p. 383

 

물론 로마에는 고대 로마 제국의 흔적만 있지 않다. ‘12장 성베드로 대성당’부터 ‘15장 브르게세 미술관’까지는 로마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더듬어 보는 자리이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라파엘로 산지오(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아테네 학당>이 있는 바티칸 박물관과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시스티나 성당 등이 있고,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의 <다비드>와 <아폴론과 다프네> 조각상이 있는 보르게세 미술관 등이 그것이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낯설게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저자가 “우리는 로마에서 ‘재탄생’을 경험한다. 로마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다시 태어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로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인생에는 오직 의무밖에 없단 말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럼 로마가 그 질문에 답해줄 것이다.” [p. 404]

다만, 그런 질문을 가지고도 “로망만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수탉의 여행”[p. 406]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힐링의 여행보다 배움의 여행을 권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 한 마디로 보여주는 것이 독일의 르네상스 문학을 탄생시킨 세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 1459~1521)의 ‘바보 배(Das Narrenschiff)’라는 시다.

 

바보 배

"바보라네,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하고도

바른 행실과 이성을 깨치지 못한 사람은.

처음 날아갈 때는 거위였는데,

고향에 돌아온 걸 보니 수탉이로구나.

파비아, 로마, 예루살렘에 다녀왔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네.

이성과 이모저모 지혜의 덕목을

배워와야 진짜배기라네.

나는 그런 여행을 권하고 싶네” [p. 406]

 

나는 저자와 달리 여행을 떠나 로망만 안고 힐링하는 수탉의 여행[관광의 여행]이나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나와 우리를 돌아보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거위의 여행[사색의 여행] 모두 좋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것이 로마 여행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처해있는 상황이 다른데, 굳이 거위의 여행만 권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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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건축 - 패전과 고도성장, 버블과 재난에 일본 건축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현정 지음 / 마티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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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후(戰後) 일본 건축일까?


저자는 1945년 이후 일본 건축을 서술하기 위한 틀로 ‘현대’ 대신 ‘전후’(戰後)를 선택했다. 이는 시대구분으로서의 현대보다 전전(戰前)의 군국주의와 차별된 민주주의, 평화주의, 경제성장을 특징으로 한 일종의 가치 공간” [p. 10]을 말하는 ‘전후(戰後)’를 통해 건축을 살피겠다는 뜻이다. , <전후 일본 건축>이라는 제목을 통해 시대의 흐름이나 양식, 건축가 개인의 특징이 아닌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건축을 파악하고 서술하겠다는 저자의 의지를 선포하는 셈이다.



1950년대 전후 재건기_일본의 국가 건축가, 단게 겐조


1945년 패전과 함께, 일본은 천황제(天皇制)와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로의 변화가 강제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건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저자는 일본 건축의 아버지혹은 일본의 국가 건축가라고 불리면서 일본 현대 건축의 토대를 닦은 단게 겐조[丹下 健三, 1913~2005]의 변화를 통해 이를 얘기한다.


단게 겐조는 대학원 시절, 전시(戰時)의 대표적인 프로파간다에 일본 전통 건축의 모티브를 적극 도입한 대동아건설총령신역계획설계 공모(1942)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는 그가 전전(戰前)에 군국주의를 위해 봉사했다는,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상징한다. 이 꼬리표를 때기 위해 그는 사실상의 데뷔작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1949~1954)르 코르뷔지에 풍의 국제주의 모더니즘 양식을 전략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자신의 전쟁 시기 건축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후 일본의 공식 건축가로 새 출발을 도모할 수 있었다.” [p. 41]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전쟁 시기 건축과의 단절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천황제, 군국주의 등 일본 전통의 부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이를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먼저 1953국제성, 풍토성, 국민성: 현대건축의 조형에 관하여라는 심포지엄에서 모더니즘 건축을 일체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거부하는 국제주의 건축이자, 지배계급의 이해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기능하는 휴머니즘 건축으로 규정” [p. 42]한 저명한 건축 평론가 하마구치 류이치(浜口 隆 一, 1916~1995)와 달리 일본 건축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심지어 모더니즘, 국제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정신성을 결여한 백색의 위생도기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p. 43]

또한,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의 뿌리, 원시성으로서 조몬[繩文, B.C. 10세기~B.C. 3세기]적인 세계를 추구한 오카모토 다로[岡本 太郞, 1911~1996]의 주장을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즉 단게 겐조는 일본 건축의 성취가 민중적인 조몬과 귀족적인 야요이[弥生, B.C. 3세기~ 3세기]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예로 전통 건축의 대표작인 가쓰라 이궁[桂離宮]과 이세 신궁(伊勢神宮)을 제시했다. 물론 단게 겐조의 주장만으로 이들에게 일본 전통건축의 정통성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 고건축에서 모더니즘적 요소를 찾으려는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같은 영향력 있는 서구 모더니스트들의 ‘발견’과 관심이 강력하게 작용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일본 전통[특수성]과 모더니즘[보편성], 전통과 현대의 조화 내지는 화해를 모색했다.



1960년대 고도 성장기_메타볼리즘


1960년대 아사다 다카시(淺田 孝, 1921~1990)의 강력한 리더십이 이끈 메타볼리즘(Metabolism) 그룹은 건축의 유연성과 가변성, 성장가능성을 전면에 내세운 여러 프로젝트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성립은

첫째, 1950년 후반 근대건축국제회의(CIAM, 1928~1959)의 헤게모니 붕괴

둘째, 1950년대 일본 건축계의 일본전통논쟁

셋째, 패전과 폐허를 딛고 막 고도성장기에 들어선 전후 일본 사회의 특수한 맥락 덕분에 가능했다.


이들의 디자인 방법론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첫째, 메가스트럭처적 접근

도시의 여러 기능을 포괄한 초대형 구조물”[p. 110]인 메가스트럭처를 지향했다. 기쿠타케 기요노리[菊竹 淸訓, 1928~2011]해양도시’(1958)이나 구로카와 기쇼[黑川 紀章, 1934~2007]공중도시’(1960)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들은 위로부터의 전면적인 개발을 강조” [p. 113] 했다.


기쿠타케 기요노리의 해양도시, 구로카와 기쇼의 공중도시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111


둘째, 그룹 형태(group form)적 접근

주민의 필요와 도시의 맥락에 맞게 유연하고 점진적인 적응과 변화를 강조하는 아래로부터의 접근을 지향”[p. 113] 한다. 따라서 건축가의 권능보다 거주민의 요구와 지역적인 맥락에 방점을 둔 도시계획”[p. 115]을 선호한다. 마키 후미히고[ 文彦, 1928~ ]힐사이드 테라스’(1960~1992)는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마키 후미히고의 힐사이드 테라스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p. 116~117


메타볼리즘은 인공대지로 대표되는 도시적 규모의 디자인에서부터 캡슐로 불리는 개별 주거 단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선보였다. 1960년 초반 거대한 인공대지가 메타볼리즘 건축을 대표했다면, 1960년대 중반부터는 캡슐이 메타볼리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pp. 120~122]


이들의 시도는 비()서구권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며, 일본 건축이 동시대 국제 건축계의 보편적인 이슈를 공유하고, 때로는 선점하기까지 하는 국제적 동시대성을 획득하게 했다. 그러나 바다와 하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는 메타볼리즘의 대담한 구상은 기술과 진보에 대한 자신감만큼이나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태풍 등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있는) 섬나라 일본이 갖는 근원적인 불안에 의해 추종되었다” [p. 136]는 저자의 말처럼 일본사회의 생존에의 강박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70년대 오일 쇼크_ 포스트모더니즘, 이소자키 아라타


1970년대는 급진적인 전공투(全共鬪)의 몰락,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1925~1970]의 할복자살, 오일쇼크 등은 국가 재건과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된 한 시대의 종언을 알렸다. 건축분야에서는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그 역할을 했다. 건축사학자 야쓰카 하지메[八束 はじめ, 1948~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건축을 모더니즘 건축의 장송곡이자 포스트모던 건축의 서막을 알리는 일본 건축사의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규정” [p. 150]했던 것처럼, “1970년대 들어 과학기술 낙관론에 근거한 유토피아주의를 골자로 하는 모더니즘 건축은 냉소주의와 상업주의, 절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건축의 등장에 의해 도전” [p. 152]받은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 건축을 대표하는 것이 이소자키 아라타[磯崎 新, 1931~ ]를 리더로 해서 포스트 메타볼리즘을 표방한 일련의 젊은 건축가들이다. 이들의 등장에는 무엇보다도 1970년대 일본 사회라는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 , “(일본의) 1970년대는 전후 재건이나 정치 민주화, 경제성장 같은 강력한 사회적 합의가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 시기이다. 따라서 건축도 사회를 표현하는 공적 역할을 떠맡는 대신, 시적 감흥과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서 사적 성격이 강해졌다.” [p. 207] 이소자키 아라타의 쓰쿠바 센터 빌딩’ (1983)은 이런 경향을 대표한다.


이소자키 아라타의 쓰쿠바 센터 빌딩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217


전후 1세대에 속하는 3세대 건축가들은 단게처럼 대동아 공영권의 그늘에서 발버둥칠 필요도, 메타볼리즘이나 이소자키처럼 히로시마의 유령과 싸우거나 종말의 순간을 상상할 이유도 없었다. (이들은) 자신의 건축의 목표가 국가의 부흥과 동일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롯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pp. 227~228]


3세대 건축가를 대표하는 이토 도요[伊東 豊雄, 1941~ ]메타볼리즘의 영웅주의적 자의식과 위압적이고 값비싼 거대 스케일의 디자인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거주민의 삶과 밀착한 주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p. 237] 그의 라이벌인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1941~ ]도시를 으로 규정하고, 주택을 도시로부터의 피난처이자 개인을 지켜주는 저항의 요새로 접근했다. 이를 위해 공간의 개방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둥과 보로 하중을 받치는 근대건축 전략을 폐기하고, 대신 견고한 벽을 쌓아 내밀한 사적 영역을 만드는 영벽(領壁)”의 부활을 주장했다.” [p. 243]

이처럼 1970년대에 데뷔한, 이들 신세대 건축가들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외부와 단절된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닫힌 주택에 관심을 가졌다. 이토 도요의 ‘U HOUSE’(1976)나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파사드의 주택 스미요시 나가야’(1976)는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토 도요의 U HOUSE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p. 240~241


안도 다다오의 스미요시 나가야

출처: <전후 일본 건축>, p. 242



1990년대 이후 장기 불황_() 전후 건축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냉전 체제가 해체되고, 경제의 버블이 꺼지면서 일본은 장기 불황에 빠진다. 이로 인해 냉전 질서 아래에서 평화와 안정, 풍요를 누렸던 일본의 전후패러다임이 붕괴” [p. 271]했다. 건축분야에서도 호황기에 유행했던 과시적이고 거대한 포스트모던 건축이 비판되고, 대신 기능성, 경제성, 친환경성, 로테크(lowtech), 공동체성 등의 가치가 새롭게 모색()” [p. 272] 주택 설계만 활기를 유지했다.  국내에는 <와타나베의 건축 탐방>(1989~ )으로 알려진 주택 탐방 TV프로그램이나 <카사 브루투스>(1998~ )처럼 주택과 인테리어를 소개하는 잡지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p. 272]

언뜻 예술 소주택 붐이 일었던 1970년대와 비슷해 보이지만, “1990년대 이후 주택을 둘러싼 논의는 고령화와 인구감소, 소자녀화 등 당시 일본에 불어 닥친 급격한 사회적, 인구학적 변동” [p. 286]때문이었다.


2011 3.11 도후쿠 지방의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사고는 또 한 차례의 변곡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재난 이후 건축이 재난복구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시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택을 통해 위기에 처한 일본을 개조한다는 구상마저 나왔다.

그러나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인 신국립경기장과 관련된 논란은 그러한 변곡점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국제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의 설계안을 진행 중에 백지화시키고, ‘약한 건축’, ‘작은 건축을 지향하는 구마 겐고[隈硏, 1954~ ]의 설계안을 새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사회를 통해 건축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 사회, 한국 건축에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아가 일본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 한국 건축의 가까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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